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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렬 전 / 현실에 이르는 환영의 세계

이선영

현실에 이르는 환영의 세계

김창열 전 (4.24 – 6.9, 갤러리현대)

  

이선영(미술평론가)


김창열 화백의 개인전 《영롱함을 넘어서》는 1976년 국내에 그를 처음 소개한 이후, 마지막 전시가 된 《The Path》(2020)까지, 근 반세기에 걸쳐 14번의 전시를 함께한 갤러리와의 동행이 반영되어 있다. 3주기 회고전이기도 한 이 전시는 영롱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작품의 다양한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여러 소장가들의 작품을 한곳에 모았다는 점에서 미술사적 의미도 가진다. 1929년 평안남도 생으로 1957년 한국에서 앵포르멜 운동에 참여한 이후, 파리에서 그가 처음 물방울 회화를 전시한 때가 1972년이다. 1969년 작업의 무대를 뉴욕에서 파리로 이동한 그는 파리 근교의 마구간에서 생활하던 중 1971년 어느 날 아침 재활용하기 위해 물을 뿌려둔 캔버스에서 물방울을 발견했다고 한다. 거꾸로 세워진 그림에서 추상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칸딘스키가 추상화의 선구자가 되었다는 신화적 에피소드도 있지만, 김창열 화백의 발견 또한 미학적 각성의 순간과 관련되며, 이는 그에 대한 평생에 걸친 탐구로 이어졌다. 1976년 공간 지(誌)에 발표된 대담에서 그는 ‘꺼칠꺼칠한 마대(麻袋)에 매달린 크고 작은 물방울의 무리들’에서 생명력과 새로움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대중들에게는 ‘물방울 화가’로 잘 알려진 작품들은 ‘영롱함’을 떠올리지만,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면 정작 영롱한 물방울이 사라지고 물감 자국만 보이며, 그의 작품은 그 흔적들의 다양함 또한 주목된다. 특히 그가 잘 사용하던 마대 천이 드러나지 않는 여러 형상이 깔린 바탕 면과의 상호관계에서 생성되는 여러 회화적인 표현은 그의 대표 이미지인 물방울이 그저 현실로부터 예술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한 입구이자,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하는 또 다른 차원으로 보이게 한다.  



김창열, 물방울 ENS79002, 1979, 캔버스에 유채, 182 x 227 cm(사진출전; 갤러리현대)


 

물방울, 그림으로 들어가는 입구


전시는 마대 위에 그려진 물방울 이미지가 처음 등장하는 1970년대 초반 작품부터 2010년대 제작된 근작까지 주요 작품 38점으로 이루어진다. 작품 제목은 물방울, 회귀, 의식(ceremony) 등으로 붙여져 있는데, 그것들은 개념적으로 연결망을 이룬다. 1971년 캔버스 위에 물방울을 발견한 김창열은 “예술의 본질은 결국 일루전(Illusion)일 텐데, 이것을 재검토해 보려는 게 나의 예술”(1976)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가 중시한 환영의 문제는 단지 시각적 착각을 일으키는 눈속임 기법에 한정되지 않는다. 피터 풀러는 [모더니즘 이후의 미학]에서 유기체에게 중요한 가상(illusion)의 순간을 어머니의 젖가슴에 매달린 아이의 상황까지 추적한다. 아기는 다른 짐승의 새끼들이 기능적으로 관련을 맺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세계를 상상력 풍부하게 창조한다는 것이다. 피터 풀러는 이러한 과정은 진화론적인 차원까지 소급된다. 그렇게 인간은 현실과 직접적인 관련 없이 잠재적 공간을 창조하고 이는 예술과도 밀접하다. 하지만 현대미술에서 매개적 단계를 생략하려는 시도는 ‘물질에의 충실성’이라고 말해지기도 하는 사물화로 귀결되곤 했다. 이러한 경향이 색다른 미학이론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외에, 미술을 얼마큼 더 풍부하게 해주었는지는 생각해 볼 만하다. 피터 풀러는 현대예술의 사물화에 반대하여 ‘현존하는 현실 내의 다른 현실’(마르쿠제)인 가상을 창조하는 것이 예술가의 과제라고 주장한다. 이때 환영은 현실의 기계적 반복이 아니라 현실을 변형시키기 위한 또다른 차원이다.


1층에 전시된 1970년대에 나타나는 초기의 물방울들은 캔버스 위에 실제 물방울이 맺힌 듯한 환영을 보여준다. 하지만 2층 전시장의 작품들에서 물방울은 아래로 흐르고 화폭으로 흡수되는 등 동적이다. 작품마다 물방울의 밀도와 점도가 다르고 배경도 다르다. 마(麻) 천외에 모래, 신문, 나뭇잎, 그리고 한자 등이 물방울의 배경을 이루곤 했다. 지하 전시장에는 1980년대 이후 제작된 [회귀(Recurrence)] 시리즈가 주로 전시되었으며, 작품 속 한자는 천자문, 도덕경 등, 우주 만물의 원리를 담은 동양의 고전이 선택되었다. 천자문 연습을 하듯이 반복적으로 쓰기도 했다. 그의 작품에서 글자와 물방울의 결합을 처음 나타난 것이 1975년의 신문부터라고 한다. 오랜 외국 생활을 하고 있던 작가의 정체성을 확인하려는 의지는 이후 동양적 텍스트로 선회하게 했다. 다양한 회화적 효과와 함께하는 글자는 읽기보다는 보기에 방점이 찍혀있다. 관객이 처음 접하는 1층 전시장 작품들 7개 중 6개의 제목은 모두 [물방울]이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말과 사물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물음을 던진 현대미술가도 있지만, 김창열은 자신의 물방울 그림을 물방울이라고 지칭한다. 재현적인 그림 앞에서 관객들은 대개 ‘이것은 물방울이야’라고 말한다. 이러한 지시적 상황을 거부하려는 현대미술의 방향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영롱함을 넘어서] 전은 그의 작품이 단순히 물방울을 정교하게 재현한 것이 아님을 말한다. 


또 다른 제목 [회귀]는 물방울이 자리한 평면에 대한 회화적 자의식을 떠올린다. 모더니즘이 (조형언어로의)환원을 향한 것과 결이 다르다. 환원은 뭔가 유사(類似) 과학적인 엄밀함을 가지지만, 회귀는 보다 융통성이 있다. 또 하나의 제목이자 키워드인 [의식]은 형식과도 차이가 있다. 김창열은 누구보다도 회화에서 평면이라는 조건을 의식한 현대미술가지만 손쉽게 형식으로 환원하지 않았다. 그가 평생 천착해 온 물방울은 단순한 소재이기에는 많은 의미를 가진다. 생명 자체가 물에서 태어났고, 원시 생태계를 축소판으로 재현한 모체에서 10개월을 보내는 인간의 무의식에 물은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다. 작가의 태도라는 점에서 본다면,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하는 듯한 의식이 없다면 그 오랜 세월 동안 물방울을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작가에게 물방울은 제한을 통해서 확장을 꾀하는 역설적 위상을 가진다. 이번 전시는 그가 물방울을 매개로 많은 실험을 해왔고, 평면은 그 실험들이 온전히 펼쳐질 수 있는 장이었을 보여준다. [물방울]로 붙여진 작품은 물방울의 배치가 곧 화면의 구성이 된다. 캔버스의 크기는 다양하지만 모두 사각형 유지하는데, 그것은 그의 작품이 회화라는 평면의 조건에 충실함을 알려준다. 재현적 이미지의 중성적 틀인 사각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현대미술의 움직임이 있었지만, 마그리트가 말했듯 추상이 구상보다 더 심오한 것은 아니며 실제로 양자는 연속성 상에 있다. 


가령 2층 전시장에 문고리와 경첩이 달린 나무틀에 종이가 발린 오래된 문을 오브제로 활용한 화면도 기본은 사각형이다. 2층과 지하의 작품들 바탕은 문자들이 포함된 이미지다. 작가는 물방울의 투명한 그림자 묘사에 집중한다. 물방울의 실재감은 대상 그자체 보다 그 조건을 더 중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영롱함의 조건은 보석처럼 닫힌 소우주일 터인데, 그가 물방울을 묘사하는 방식은 열려있다. 물방울의 ‘몸통’을 차지하는 것은 바탕천이다. 그의 물방울은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환영적 조건의 제시로 이루어진다. 현대미술은 재현주의, 즉 동일한 것을 재현하는 표상의 세계로부터 멀어지려 했다. 하지만 김창열의 작품에서 보이는 반복은 ‘동일자의 귀환이나 동일한 것의 되풀이’가 아니라 ‘차이의 생산’(벵상 데콩브)이다. 철학자 벵상 데콩브는 [동일자와 타자]에서 재현의 철학이 동일성의 원리의 권위에 종속된다는 질 들뢰즈를 인용하면서, 모든 현재가 동일자로 재발견되기 위해서는 그것은 재현되어야 함을 지적한다. 하지만 자족적인 소우주와 거리가 있는 김창열의 물방울은 그러한 재현적 반복이 아니라, ‘회화의 야생적 바탕’(질 들리즈)을 열어젖히는 매개로, 그의 1950-60년대의 앙포르멜 작품처럼 추상적인 물감의 흔적을 드러내는 작가의 몸짓과 비교된다. 그의 물방울은 어느 하나도 반복적이지 않다. 바탕의 올들이 다 보이는 물방울은 빛과 그림자의 표현에 더 집중하고 정작 물방울의 ‘몸통’은 거의 칠해지지 않았다. 


아래로 길게 떨어지는 그림자는 마치 로켓 추진체처럼 물방울의 실재감을 위한 필수요소이다. 그림자의 환영을 이루는 직선적 요소는 둥근 대상과 비교된다. 자연에 존재하는 유일한 직선적 요소인 빛은 흐트러져 보이는 물감 자국들에 가상적 표면장력을 부여한다. 바탕에 물이 스민듯이 얼룩덜룩하게 연출한 작품은 화면 위의 물도 곧 스며 사라질 것임을 말한다. 물방울과 함께 스민 얼룩이 함께 있는 가상적 촉감은 물방울임을 알리기 위해 필수적인 빛의 편재와 함께 촉각과 시각, 음과 양의 균형을 이루게 한다. 바탕에 무수히 겹쳐 쓴 글자들이 있는 작품들은 어떤 내용인지 읽기는 힘들다. 외국어가 인쇄된 화면에 그려진 물방울의 경우 페이지가 거꾸로다. 문자는 화면의 평면성을 인증하는 소재로, 미술사적으로 입체파의 파피에 꼴레같은 역할을 한다. 김창열 또한 신문으로부터 시작했다. 훼손된 페이지 같은 문자열 위에 물방울들이나 명도를 달리해 배치한 문자들, 문자들이 흐릿한 부분에 물방울 배치한 작품 등, 작가는 바탕과 대상과의 관계에 대해 할 수 있는 조합은 다 해본 듯하다. 작가는 문자와 물방울을 공존시키면서 문화와 자연 사이의 어딘가에 있는 예술을 암시한다. 지하에 전시된 작품 [회귀]는 200x500cm 크기의 대작으로, 어느 작품보다 공기를 많이 품고 있다. 물방울의 황금빛 그림자들은 빛의 원소같다. 다가가면 물방울은 사라지고 그 영롱한 환영을 위한 조형적 요소들이 펼쳐진다.  


출전; 아트인컬쳐, 2024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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