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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조은정, 연구로부터 현실로 확장하는 큐레이터

김준기


조은정 큐레이터 ⓒ 제공 조은정


큐레이터 정체성을 전시기획자와 등치하는 경향이 있다. ‘학예연구사’라는 말을 쓰는 한국과 일본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큐레이터를 ‘책전인(策展人)’이라고 부른다. 말그대로 전시를 꾸리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단순히 번역 상의 오류를 넘어서는 착오이다. 용어는 기본 개념은 물론 그 지위와 역할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학예연구’라는 말에는 엄연히 ‘연구’라는 뜻이 들어있다. 큐레이터의 출발 지점은 연구에 있다. 그것은 ‘연구를 통하여 수집과 보존, 전시, 교육에 이르는’ 박물관학의 근본이다. 이 근본 문제를 흐트러트리는 것이 전시기획자나 책전인이라는 용어로 큐레이터를 한정하는 일이다.

‘학예연구사’라는 멋진 번역어는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제 구실을 못하고 있다. 그것은 ‘(미술)박물관 소속으로서 예술을 학술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을 뜻하는 용어이지만, 기실 기관 종사자로서 학예연구사가 연구를 제대로 하기는 여간 어렵지 않다. 만성적인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는 기관들은 학예연구사에게 기관의 목표에 맞는 행정을 요구하기도 바쁘고, 학예연구사 또한 연구자로서의 소명보다는 당면한 사업에 초점을 맞출 수밖에 없으니, 연구자로서 큐레이터 정체성은 설 자리가 없다.

조은정은 뚜렷하게 연구자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큐레이터이다. 미술관에 소속되어 있지도 않고, 스스로 독립큐레이터라는 직함을 내세우지도 않지만, 그는 해마다 굵직한 전시를 선보이며 큐레이터 정체성을 형성했다. 《2020 여수국제미술제》에서 ‘해제, 금기어’라는 의제를 제시한다거나, 2024년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의 전시로 《차이의 미학》의 미학을 다룬다거나, 세종대왕과 음악 3부 시리즈 《황종》, 《치화평》, 《여민락》 등의 전시를 기획하면서 그의 연구자 정체성은 크게 빛을 발했다. 초상미술 3부 시리즈로 《이상과 허상에 꽃피다》, 《역사 속에 살다》, 《기억을 넘어서》도 사회, 정치, 역사적 반성을 담은 미술사 전시로 높이 평가 받았다. 팬데믹이 한창인 상황에서 자발적으로 기획한 《여권통문전 세 번째》 전시는 여성도 배워야 한다는 100년 전의 문건 『여권통문』을 소환하여 배움의 의미를 기억하고 경의를 표하는 일이었다.

그는 자신의 명함에 큐레이터라는 이름을 새겨 넣으면서 첫 직장생활을 했다. 1986년에 당시로서는 낯선 직업을 가진 탓에 『월간객석』에 「큐레이터란 무엇인가」라는 글을 청탁받아 기고하기도 했다. 이후 그의 직업은 출판기획자였다. 저 유명한 전설의 기획출판 대원사의 『빛깔있는 책들』 연작 200권을 만들어내면서, 그는 학술과 예술, 역사와 현실, 사건과 일상을 꿰뚫는 전문가로 발돋음할 수 있었다. 수백 가지의 주제를 다룬 책들을 기획하면서 수만 가지의 논문과 책을 탐독한 그는 지식과 삶의 관계를 제대로 읽어내는 법을 배웠다. 청년 조은정이 지식인으로 가치와 방향을 정립한 이 시기를 거치면서 그는 미술이라는 좁은 창에 갇히지 않고 인류의 보편가치를 내다볼 줄 아는 광폭 시야의 지식인으로 거듭났다.

그는 인물미술사학회,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등의 학회장을 맡아 연구자들의 학술활동을 조직하고 확장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는 ‘인간 역사에서 미술가와 미술계의 활동과 인간 삶의 관계 즉 사회와 미술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미술이 사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미술의 실천성에 대한 관심으로 『미술과 권력』, 『동상』, 『근대기 한 화가의 자화상, 고희동』 같은 저서를 펴냈다. 이처럼 연구 중심의 미술사학자, 비평가, 교수로 살아오면서 수많은 전시기획을 의뢰 받았다. 연구자로서의 성취를 미술현장에 전시로서 풀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전시를 꾸리는 일은 지식인으로서 역사를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그것은 진리를 탐구하는 연구자로서 현실 속에서 유의미한 사건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이자 결과이다.



- 조은정(1962- ) 이화여대 서양화과, 동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박사.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 회장, 인물미술사학회 회장 역임. 서울벤처정보대학원대 문화산업경영학과 교수 역임. 고려대 디자인조형학부 초빙교수. 2020여수국제미술제, 2023서울국제조각페스타, 세종대왕과 음악 국제전시 등 전시감독 역임. 국립현대미술관·서울시립미술관·성북구립미술관·솔거미술관 등 운영위원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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