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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주혜 / 아는 것 사이에 있는 미지의 것

이선영

아는 것 사이에 있는 미지의 것 

    

이선영(미술평론가)

 

 

허주혜의 [바람결]은 가로 길이가 560cm가 넘는 대작으로, 사각형이 아니라 아래의 양 끝을 굴린 독특한 화면이다. 마치 배처럼, 또는 거대한 그릇처럼 무엇인가 가득 담은 듯한 모습이다. 예전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화면은 빽빽하다. 전통적인 화론에서는 ‘먹을 금쪽처럼 아껴쓰라’는 말도 있다는데, 이를 완전히 무시한다. 허주혜의 작품 한편이 뿌리내리는 현실에 빈 공간이 그만큼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동양화에 내재 된 다시점을 충분히 활용한 화면은 이것저것을 규모와 차원에 상관없이 쓸어 담는다. 위아래의 방향은 있지만 화면에 둥 떠 있는 듯 배치된 형태들도 있다. 개별적으로는 자세한데 전체적으로는 재현으로부터 자유롭다. 손가락이 붓과 다름없을 정도로 지필묵이 체화된 이에게는 그림은 관심사를 담아낼 수 있는 전능의 영역이다. 둥글린 화면은 일종의 생략 기호인 셈이다. 더할 수 있지만 여기까지.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되는 줄타기같은 먹 작업이지만 뚜렷한 구상이 없이 시작된다. 큰 구역들은 대개 정해지지만 그 사이에 작은 것들에 대한 구상을 다하지는 않는다. ‘저걸 어떻게 채울까 상상하는 것이 재미’있다고 말한다. 




바람결,560.5x145.5cm,한지에수묵,2024(이하 모든 자료사진의 출전은 대구예술발전소에 있음)



전시전경



변형된 화면은 그것이 저편으로 뚫린 창이 아니라, 그림이라는 형식에 의해 수집된 현실임을 알려준다. 꼴라주적인 방식은 매체 운용도 마찬가지여서, 작가는 수묵만이 아니라 유화나 아크릴도 활용하기도 한다. 화면에 던져 놓고 다시 보는 과정이 수없이 이루어진다. 허주혜 작업실에 여러 번 갔지만, 이 작품은 방의 가장 큰 구역에 벽화처럼 자리잡고서 몇 달째 작가와 상호작용하고 있었다. 오려내면 각각이 한 작품이 될 수 있는 여러 장면들이 동양화의 여백이라는 완충장치를 통해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산이면 산, 빌딩이면 빌딩 매우 촘촘하고 꼼꼼하게 그려졌지만, 여백은 그사이에 난 바람길처럼 밀도를 조절한다. 그 자리에서 무엇인가 또 생겨나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생성의 자리다. 하지만 수묵화라서 지울 수는 없다. 서양화와 달리 불가역적인 과정이다. 화면의 아래 곡선은 담아낸 것들을 둥 띄워주는 효과를 준다. 컨테이너를 가득 실은 배도 부력에 의해 순항하지 않는가. 


밀집된 건물을 품고 있는 산, 문화재급 건물 등이 여기저기 풍경처럼 배열되어 있고 오래된 물건들이 간간이 둥 떠 있다. 사물이든 자연이든 세필로 자세히 그린 작품은 동양화가 기본적으로는 선의 예술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여백이라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를 종횡무진 누비는 섬세한 선들은 그만큼 밀집되어 살아가는 지금 여기의 생태와 어울린다. 전후의 폐허에서 다시 시작된 한국의 풍경은 빠르게 변한다. 작가는 논밭이었던 고향의 풍경이 대규모 아파트 촌으로 변하는 과정을 직접 봤다. 시골에서 메뚜기 잡아 튀겨 먹던 아이가 예고를 다니는 동안 풍경은 급속하게 변했다. 그 과정은 집과 학교 오가는 길을 그렸던 경험으로 남아있고, 이후 작업의 기본자세를 잡아줬을 것이다. 할머니 댁이 있었던 감나무골의 재개발이 시작되자 작가는 산 안에 도시를 넣는 식으로 반갑지만은 않은 변화를 기록했다. 거의 길이 안보이는 밀집된 건물들은 그림으로만 가능한 풍경이 아니다. 




[바람결] 부분



[바람결] 부분



인간은 살면서 기록하지만, 어떤 이는 삶과 기록의 비중이 같거나 기록이 앞서기도 한다. 한 작품에 몇개월씩 걸리는 작업 방식에서 탈출하고자 그동안 여러 시도를 했다. 고향을 떠나 다른 도시로 가서 그림체도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붓을 잡고 있지 않아도 드로잉과 사진으로 기록하는 과정은 쉬지 않아 크게 달라질 수는 없었다. 현실에서 길어왔지만 현실은 아닌 아카이브가 무의식 속에 쌓여 작품으로 등장한다. 물론 채움과 비움의 비율은 조금씩 달라졌다. 여러 도시에서 살고 작업하면서 작가의 관찰한 바로는 ‘건물은 사람이 살아가는 방향’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쉬지 않는 눈과 바로 연결된 손이라는 이상적인 상태는 소위 말하는 ‘전통과 현대’라는 관계의 난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조건이다. 사회학자 에드워드 쉴즈는 [전통]에서 ‘전통은 그 재연을 이끄는 모형’이라고 정의한다. 그에 의하면 전통은 목적과 방법까지도 정의를 하는 과정을 통해 의미 있는 행위를 구성하지만, 인간은 태어나면서 지니고 나온 유전학적이고 생물학적인 과거를 제외하고 어떠한 것도 과거의 것을 지니고 태어나지 않는다. 


허주혜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옛 건물과 새 건물들이 뒤섞인 도시 풍경은 전통과 현대에 대한 적절한 이미지다. 무 자르는 듯한 전적인 새로움도 불가능하며, 전통 또한 단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쉴즈에 의하면, 개인이 과거와 구별하여 현시점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즉각적으로 존재하는 시간이 아니다. 현실은 최소한 약간의 과거를 항상 포함한다. 물론 현재는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 디지털 모드를 기준으로 한다면 더욱 그러해서, 전통이 현재는 물론 미래의 창작의 모형으로 간주되기는 힘들다. 어떤 형식에 맞는 어떤 내용이 있다는 사고는 형식주의다. 한지에 수묵이라는 매체는 실경이든 관념이든 산수든 풍경이든 작가가 원하는 것을 담는데 모자라지 않다. 동양화에 유독 강하게 가해지는 전통과 현대, 실험과 당대성 같은 문제는 작가 개인의 역량 문제일 따름이다. 수묵은 허주혜에게 가장 편한 재료로, 먹 냄새는 차분해지고 일필의 느낌이 좋다고 한다. 이번 전시는 젊은 작가는 다 실험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벗어나 ‘수묵의 느낌을 더 보여주자’는 선택의 결과다. 




남긴자리,330x300cm,한지에수묵,2024



[남긴 자리] 부분



이번 전시에서 번짐과 수묵의 농담을 잘 살린 드로잉 작품이 그 예다. [바람결] 맞은 편에 걸린 [남긴 자리]에서 발묵으로 자유롭게 그려진 것은 두 스타일의 극명한 대조를 보여준다. [남긴 자리]는 다소간 느슨한 필치로 그려져 종이 채 벽에 붙여졌다. 종이 색마저 각기 달라서 여럿이면서 하나인 관계를 드러낸다. 배치를 통한 메시지는 작품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남긴 자리]에 그려진 소재들은 외곽선이 분명치 않아서 정확히 무엇인지 분별되지 않지만, [바람결]에도 나오는 소재들이다. 몇번의 획이나 얼룩으로도 무엇인가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수묵은 마법과도 같다. 낱장 사이에 보이는 전시장의 하얀 벽이 여백 역할을 한다. 여러 장면을 꼴라주 하는 식은 [바람결]과 마찬가지지만, 서로 마주한 두 작품은 조임과 풀어짐, 노동과 여가의 관계같다. 허주혜의 작품은 여러가지가 공존하고 때로 뜻밖의 관계를 맺어 의미가 생성되는 유연함이 있다. 유연함과 성실함의 결합은 전통에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줄 것이라 기대된다.

 

출전; 대구예술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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