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필연 속에서 우연의 몫을 실험하다
이선영(미술평론가)
김도경의 [가위·바위·보]전은 아이들 놀이같은 소소한 전시부제와 달리, 손이 가능한 많은 것들이 제시된 문화사적인 스케일을 가진다. 우연과 그 통계학적 함의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에서도 유의미하다고 볼 때 매우 보편적인 주제다. 이러한 보편성은 그 놀이가 세계 곳곳에 있다는 점도 한 몫 했다. 김도경에 의하면 다른 나라에서는 ‘보자기’ 대신에 ‘종이’라고 한다. 얼마 전에는 손바닥 쌓기 놀이가 전세계적인 유행을 일으켜 K-pop의 힘을 보여주기도 했다. 사소한 듯한 행위나 단어가 금방 전염될 수 있는 것은 보편성의 힘이고, 시대의 양식과 절연하면서 진화해 온 현대예술이 되찾아할 할 가치도 바로 보편성이다. [가위바위보]의 특성상, 형태적으로는 손이 주로 나타난다. 인간에 있어서의 손의 위상은 물론, 작가, 특히 조각가에게 손은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작가는 그가 작품으로 창조한 만큼 바로 그 자신이 된다. 작품으로 완전히 구현되지는 않은 의도나 구상이라는 것도 있지만, 세상에 나온 작품은 그 순간부터 작가와 떨어져나와 그만의 삶을 살게 된다.
가위·바위·보 전시전경, 고마아트센터
어떻게 보면 매우 가혹한 기준인데, 작가는 가위바위보로 대변되는 결정의 순간과 그 결정에 이르지 못한 나머지 부분을 같이 다룬다. 심지어 작품으로 선택되지 않은 나머지들도 제 2의 기회를 얻는다. 가위바위보가 우연에 방점을 찍은 게임이기에 지금 잉여인 것이 다른 맥락에서 필수일 수 있으며, 그 반대도 성립된다. 손이 할 수 있는 수많은 행위 중 ‘가위바위보’에 주목하는 것은 그자체가 독특한 선택이다. 일하는 손, 싸우는 손, 어루만지는 손...실로 수많은 손이 있다. 가위바위보는 우연적 요소가 큰 역할을 하는 게임 원칙이다. 놀이부터 축제에 이르는 광폭의 주제를 연구한 인류학자 로제 카유와가 분류 기준에 의하면, 우연놀이(Alea)는 경쟁(Agon), 가장(Mimicry). 현기증(Ilinx)과도 다르며, 현대과학과 관련돼서는 통계학과도 닿아있다. 카유와는 [인간과 성(聖)]에서 네가지 범주로 나눈 놀이는 상호조합되거나 교차될 수 있다고 말한다.
카유와에 의하면 알레아란 라틴어로 주사위 놀이를 의미하는데, 우연의 자의성 자체가 놀이의 원동력이 된다. [인간과 성]에 의하면 놀이에서는 현기증의 추구조차도 현실 생활의 정상적인 상태인 혼란을 완벽한 상황으로 대체하려는 시도로, 놀이의 매력은 시작할 때마다 제로 상태에서 출발한다는 것이며, 이때 규칙의 준수는 필수적이다. 카유와는 속임수를 쓰는 자보다 더 나쁜 자는 규칙을 거부하고 게임에 참석하는 것 자체를 멸시하는 자라고 한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 파괴자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성]은 어떤 면에서 게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균등을 향해 인류사는 진보해 왔다고 말한다. 자연의 무질서 상태를 규칙이 따르는 세계로 바꿀 필요가 있을 때 놀이가 제공하는 모델은 그러한 세계를 앞질러 보여준다. 요컨대 놀이라는 수단을 통해 인간은 자연의 단조로움, 결정론, 맹목성과 난폭함에 저항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가위‧바위‧보 45x65x8cm 프린트된 종이, 합지, 나무, 아크릴 2022년
가위바위보 각 22x15cm 장지에 바느질 2023
가위바위보가 아니더라도, 아래로 쭉 미끄러지는 듯한 실루엣을 가진 빗자루나 위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김도경의 설치작품에서 발견했을 때, 어릴 때 놀던 ‘뱀 주사위’ 놀이가 문득 생각났다. 변변한 장난감이 없던 1970년대에 주사위를 던져서 나오는 수대로 칸을 옮기는 게임으로, 어느 지점에서는 비약이 어느 지점에서는 추락이 예견되어 있다. 가위바위보 놀이에 내재된 우연은 예술에서도 중요하다. 초창기에는 열심히 하면 예술이 가능하다고 믿지만, 시간이 흘러갈수록 운도 중요하다는 깨닫게 된다. 사회적 조건에서의 운 이외에 영감과 그 해법이라는 점에서 운의 역할은 지대하다. 작가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하는 자세로 최선을 다하는 자라면 더욱 그렇다. 하지만 운이 진정한 운이 되려면 필연이라는 맥락이 필요하다. 손은 놀고 꿈만 꾸는 이에게 운은 운인지도 모르게 지나간다. 특히 손을 움직이지 않는 개념화 된(정확히는 관념적인) 예술은 그자체가 명확한 한계를 가진다.
하지만 화룡점정(畵龍點睛) 같은 순간을 기다리며 준비된 이에게 운은 마지막 퍼즐처럼 다가오게 된다. ‘+알파’의 부분이 포함되기에 전시장은 다소간 느슨해 보인다. 누군가의 서재에 들어온 것처럼, 작가와 관련된 이런저런 것들, 새로 한 작업과 이전의 작업이 한데 모여 자유롭게--도서관이나 미술관, 박물관이라면 엄격한 배치의 원칙이 있겠지만--배열되어 있다. ‘올해의 작가’라는 전시 맥락은 개인전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을 넘어서 작가, 작품, 작업하는 삶에 대한 자의식을 다시 일깨웠을 것이다. 고풍스러운 나무 탁자 같은 좌대 위에 놓인 비망록 닮은 수제 드로잉 북을 비롯해서, 작업에 힘을 주기도 하고 방해도 했을 아들의 두상, 의자나 사다리같은 작업의 도구들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유난히 작가에게 바라는 것이 많은 한국 미술계에서 작업 외에 학업까지 수행하느라 닳아버린 몽당연필들, 스승이 그려 준 오래된 초상을 고이 간직했다가 자기 버전으로 다시 만든 작품 등이다.
숲손 35x25cm 테라코타, 철파이프, 미송좌대 2024
움직임 100x30x22cm 철파이프, 테라코타 2024
어떤점에서 30x45cm 철판용접 2022
무엇보다도 그 모든 것을 행해왔던 자신의 손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그 예이다. 작품 속 손들의 모델이 대부분 작가이다. 사진 꼴라주 위에 연필 드로잉을 한 [가위바위보]는 나머지들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작업을 하기 위해 찍은 본인의 여러 손 자세들은 어떤 것은 작품으로 쓰이고 어떤 것은 나머지가 되었을 것인데 작가는 그 또한 또다른 작품으로 제시했다. 몽당연필이 주재료인 작품 [계단]은 작품을 계획하기도 하고 작품을 그리기도 하는 도구 그자체를 작품화한다. 손수 만든 두툼한 아티스트 북은 물론, 입체 작품 여기저기에 있는 연필 드로잉은 몽당연필들을 무수히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려진 만큼 자신은 짧아지는 연필은 계단이 되어 작가를 미지의 영역으로 데려갈 것이다. 작품 [어떤점에서]는 철판 용접으로 만든 의자들 더미로 다리 길이가 다른 의자들을 쌓은 작품은 그만큼 다양한 높이에서 작업했을 상황을 말한다.
작업 도구는 예술과 노동의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도미니크 르스텔은 [동물성]에서 동물에서 인간임을 식별할 수 있는 기준으로, 고대 이래로 제시된 항목으로, 손, 직립보행, 탁월한 지능, 도구 제작 등을 든다. 인간은 ‘도구를 만드 동물’(벤저민 프랭클린)로까지 정의된다. 손으로 가능한 도구 제작은 노동의 조건이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에로스의 눈물]에서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성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한 것은 노동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동물이 인간이 된 것을 바로 노동에 의해서이고, 인식과 이성의 바탕이 된 것도 노동이다. 하지만 바타이유가 말하듯이 노동이 인간성의 기원이요 열쇄라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인간이 동물성으로부터 크게 벗어나기 위한 출발점일 뿐이다. 예술에서 ‘이성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이 아니다. 이성의 총아인 과학 분야에서도 우연이나 통계의 역할이 중시되는 것을 보면, 놀이나 예술의 원칙은 사회 일부분의 문제가 아니다.
손Hand 각 25x15cm 백토 테라코타 2024
필립 볼은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임계질량에서 이어지는 사건들]에서 물리학과 사회학에 공통으로 관철되는 법칙으로 통계학의 예를 든다. 물리학에서 동시에 상호작용하는 많은 부분들로 이루어진 계를 어떻게 취급하고, 겉보기에는 혼돈스럽게 보이는 것에서 규칙적이고 예측할 수 있는 거동이 어떻게 통계적인 형식으로 창발되는가. 그는 맥스웰이 정립한 기체 운동론의 예를 들면서, 움직이고 있는 엄청난 수의 거의 똑같은 대상을 이해하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의 움직임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아니라, 평균 움직임과 평균으로부터 벗어나는 정도라고 본다. 자연계에서조차 통계와 확률이 중요하다. 이전의 결정론을 거부하는 괄목할만한 분야는 양자역학이다. 필립 볼은 양자 역학이 확률을 문제의 핵심으로 끌어들임으로서, 뉴턴 역학의 결정론적 세계를 무너뜨렸다고 평가한다. 불확정성. 양자역학에는 우리가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알 수가 없는 것이 있다고 한다.
과학자들은 확률이 현대 물리학의 핵심이 되었으며, 정확한 법칙들까지도 통계적 규칙성으로 대체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사회현상 자체가 근본적으로 통계적 현상이라는 사실이라면 무수히 주사위를 던져보는 것은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러한 장이 별로 없다. 실험은 무한한 시공간의 자원이 필요한 정치경제학의 영역이기도 하다. 막대한 자본의 투자나 치명적인 위험 없이 실험이 가능한 남은 영역이 놀이와 예술이다. 우연을 이용한 게임인 가위바위보는 여러 가능성을 암시한다. 전시 부제와 같은 작품 [가위‧바위‧보]는 작가의 여러 손동작을 찍은 사진이 붙은 평평한 조각들은 장기두듯이 여러 자리로 옮길 수 있다. 놀이와 관련된 제목이다 보니 작품의 작동 원리도 놀이적이다. 가위바위보 뿐 아니라 그 중간의 손 자세도 포함되어 있다. 뒷면은 낙서처럼 자유롭게 그어진 선들이 있다. 다른 작품에서도 조금의 여백이 있으면 드로잉을 한다.
colorful Hand 4분 36초, 2024
손의 이미지에는 손의 결과물이 함께 하는 것이다. 빽빽히 꽂힌 손들은 인파를 떠오르게도 한다. 사진에 펜드로잉으로 제작된 최근 작품 [가위바위보]는 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배치되어 있다. 같은 단위의 구성을 통한 작품은 코드화를 향하는 세계에서 손/가락의 역할을 상기하게 한다. 노동을 통한 생산보다는 코드의 선택을 통한 재생산의 시대에서 손가락은 상징적 역할을 수행한다. 하지만 다른 작품에서 촉각적 느낌을 물씬 살린 두 손의 재현을 통해 작가는 손의 역할을 강조한다. 장지에 바느질로 만든 같은 제목의 작품은 초상같은 느낌이다. 가위바위보 자세의 손을 수놓은 작품은 다른 손 이미지들에 비해서 선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 손가락 마디나 손금들은 한 사람의 운명을 점치는 요소이기도 하지 않는가. 손으로 하는 이 많은 인간에게 손만큼 그 기준이 정직한 것도 없을 것이다. 종이에 선이라는 요소는 그것이 더욱 초상처럼 보이게 한다.
대개 얼굴 크기는 자기 손의 크기와 비슷하다. 우리는 대개 상대의 얼굴을 주목하고 얼굴 또한 그가 살아온 이력을 반영하지만, 손은 더하다. 손은 실행으로서의 삶을 말하기 때문이다. 같은 크기의 액자 한가운데 하나씩 자리한 손들은 얼굴만큼은 아니어도 당사자의 정체성을 실제적으로 규정하는 손의 위상이다. 손은 얼굴을 넘어서 그 안쪽에 있는 보다 중요한 기관인 뇌와 관련된다고 주장된다. 동물학자 데이먼드 모리스는 [바디 워칭]에서 손을 ‘눈에 보이는 뇌의 일부’(칸트), ‘손은 정신의 칼날’(브로노우스키)에 이르는, 18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광범위하게 주장된 손의 위상을 강조한다. 아르멜 르 브라 쇼파르는 [철학자들의 동물원]에서 직립을 통해 땅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손은 인간을 인간이게 했다고 평가한다. 가위바위보라는 게임 규칙을 표현하는 자세는 언어처럼 차이적 관계를 가지는데, 그 차이가 극대화한 자세임이 새삼스럽게 드러난다.
가위바위보 35x20cm 사진꼴라주,연필드로잉 2024
한땀 한땀 손바느질로 완성한 작품은 붓으로 붓을 연필로 연필을 그리는 것 같은 자기 지시성이 있다. 작품 [숲손]은 흙, 쇠, 나무 등 다양한 재료가 형태와 좌대를 만들고 있다. 앞과 뒤만 볼록한 손은 손을 3차원적으로 재현한 것이 아니다. 철 파이프로 손수 만든 거치대는 손들을 넣고 빼고 할 수 있게 한다. 아랫부분은 둥글게 굴려 있어서 그러한 유연성을 가시화한다. 작가는 여러 작품에서 가변성을 중시했다. 놀이는 무엇보다도 과정이기 때문이다. 한정된 장과 그 안에서의 규칙이 작동한다는 점에서 놀이와 예술이 공유하는 지점을 말한다. [숲손] 시리즈는 어떤 좌대에 몇 개를 꽂는가에 따라 각기 다른 이야기를 한다. 조형적 언어의 표현이기에 작가는 굳이 손의 언어인 수화(手話)를 참고하지는 않았다. 다소간 어둑한 전시장은 형태에서 떨어지는 그림자도 작품에 포함한다. 손으로 하는 그림자 놀이도 보편적으로 존재한다. 백토 테라코타로 만든 [손Hand]들은 마치 판토마임같이 연기한다.
거칠거칠한 표면은 드로잉을 할 수 있는 여분이 된다. 손-얼굴-사람의 관계는 부분으로 전체를 말하는 은유와 관련되고 그것이 은유인 한 어떤 이야기이다. 철파이프 구조물에 테라코타로 만든 손들이 걸린 작품 [움직임]은 모빌처럼 균형을 잡고 있다. 아래 떨어져 있는 사과는 관객의 상상력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보편적 상징이다. 다가(多價)의 상징성을 가질수록 더 열린 이야기가 가능할 것이다. 교수형 당한 듯 아래를 향한 손이나 낙과 이미지는 누군가에게는 멜랑콜리를 자아낼 것이다. 고마아트센터의 가장 큰 벽에 설치된 선반들 위에는 사물, 예술, 도구 등등이 구별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공존한다. 그 모두가 이어져서 이야기를 만들수 있다. 입체적이기 보다는 도톰한 손들은 좀 더 잘 보여지며, 전시장의 한 벽에 설치된 선반들의 작품들 또한 그렇다. 빗자루, 의자와 사다리같은 도구부터, 여러 가지 손 소재의 작품들이 놓여있다. 일회용 컵도 재료를 달리하면 조각작품으로 탄생한다.
계단 30x40cm 몽당연필, 드로잉 2024
눈, 귀, 입을 막는 가장 자연스러운 기관은 손임을 알려주는 작품은 정지된 매체에서 움직임을, 시각적 매체에서 서사를 끌어내는 방식을 말한다. 극도로 괴로운 듯한 상황을 표현하는 이 작품은 손이 가지는 표현력이 잘 나타나 있다. 작가는 이번 전시 [가위·바위·보]를 통해 ‘손의 방향과 상황 그리고 움직임의 형태로 희로애락을 경험할 수 있도록 작업하였다’고 밝힌다. 그는 ‘손의 움직임을 의미전달의 퍼포먼스로 생각’ 한다. ‘손의 움직임은 순간적인 움직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각각의 움직임이 가진 의미와 내용이 다르다’ 데이먼드 모리스는 인간의 손을 롤스 로이스에 비긴다면 다른 영장류 동물들은 자전거 정도라고 비교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손 한 쌍에는 54개의 뼈가 있으며, 손가락 동작들을 다양하게 조합하여 사용하면 전적으로 새로운 광범한 몸짓과 신호가 가능하다. 인간은 절대 절명의 순간에 손가락 걸고 약속하고 손가락을 자르고 하는 등등의 행위를 한다.
최근 사회운동 부문에서 손의 가장 충격적인 사용은 환경운동가들이 자신의 손을 길바닥에다가 본드로 붙이고서 주장을 펼치는 장면이었다. 경찰들이 이들을 도로에서 쫒아내기 위해서는 바닥에 붙은 손을 떼어내야 해서 시간이 걸리게 돼 있다. 손을 수단으로 사회적 메시지를 알릴 시간을 더 버는 것이다. 일상어에서 ‘입수(入手)하다’, ‘손보다’, ‘손떼다’ 등의 표현도 손이 가지는 대표성을 말해준다. 4분 36초 분량의 영상 [colorful Hand]는 가위바위보 자세와 그 사이에 이도 저도 아닌 자세가 함께 나오는 영상으로, 한 소재에 여러 형식을 활용한 이 전시의 특성을 알려준다. 가위바위보의 ‘보자기’처럼 김도경의 작품은 접고 펼치는 구조이다. 바위는 접힌 정도가 강한 씨앗 같은 존재다. 가위는 유클리드적인 평면을 교란시키는 요소로 이어진 것을 단절시키고 떨어진 것을 근접하게 할 수 있다. 가위바위보는 단지 소재일 뿐 아니라 방법이기도 하다. 요컨대 단위 구조를 확장시키거나 다른 매체로 변주하는 방법이 그것이다. 가위바위보의 원리는 놀이에서 예술, 과학에서 사회학까지 두루 편재하기에 변주는 무한하다.
출전; 공주문화관광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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