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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관계를 수집하다: 삼성출판박물관 김종규 관장

윤태석


게오르규(루마니아 작가), 이어령, 김종규, 1974


을사년(乙巳年) 뱀띠해가 밝았다. 지혜로운 뱀처럼 신중한 한 해가 되길 소망해 본다. 새해가 되면 기다려지는 게 있다. 세화다. 주지하다시피 세화(歲畵)는 신년을 축하하는 뜻을 담아 임금이 신하에게 내려 주던 그림이다. 군신 관계는 아니어도 이때를 기다려 미리 준비한 세화를 나눠 주는 이가 있다. 김종규 삼성출판박물관장이다. 마음에 새겨 실천해야 할 명구를 직접 써서다.

‘남의 단점을 말하지 말고, 나의 장점을 자랑 말라.’
無 道 人 之 短, 無 說 己 之 長
무 도 인 지 단  무 설 기 지 장

‘남에게 베푼 것은 잊고, 남에게 받은 은혜는 잊지 마라.’
施 人 慎 勿 念, 受 施 慎 勿 忘
시 인 신 물 염  수 시 신 물 망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의 근원과 우물을 판 사람을 생각하라.’
飮 水 思 源, 掘 井 之 人
음 수 사 원  굴 정 지 인

금과옥조 같은 이 문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발견된다. 하나같이 사람과 사람 간 관계를 소중히 여기라는 의미다.

더불어 그의 세화가 더욱 특별한 것은, 삼성출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호랑이(기상), 닭(근면), 개(신의), 해태(수호) 등 예부터 벽사(僻邪)와 기복(祈福)을 상징해온 조선시대 목판을 복각해 찍었다는 점이다. 그는 또 그림 하단에 선물할 사람의 직함과 준 날짜를 적음으로써 특별함을 더해준다. 따라서 받은 이는 벽사와 기복의 기운을 받음은 물론 명구의 의미대로 살아야 할 것만 같은 각오를 샘솟게 한다. 박물관인 다운 섬세함이자 어른다운 면모다. 김종규의 세화가 기다려지는 이유다.



맨 우측부터 김종규, 이용우(미술평론가), 백남준, 이어령, 1992


1970년대 후반, 박경리 선생이 삼성출판사에서 『토지』를 처음 냈을 때의 일이다. 공전의 히트로 인세를 매기기 위해 찍던 도장이 다 닳을 정도였다. 그는 선생께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 “선생님! 번거로우시겠지만 새 도장을 파놓으십시오. 제가 찾으러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박 선생은 “김 사장이 알아서 파 쓰세요.”라며 더 이상의 말을 하지 못하게 했다. 두 사람의 관계를 한마디로 말해 주는 이 일화는 문화일보(2008)와 박경리 선생 추모집『봄날은 연두에 물들어』(2009)에도 소개되었다.

김종규가 걸어온다
저쪽에서 먼저 알아보고 손들어
벌써 사람과 사람이
반가움의 무덤에 파묻힌다
왜 그런지 그의 주위에는
예술가 교수 정객 묵은 정객
회장 사장들이
판소리 다섯마당으로
에워싸고 있다
      – 고은의 『만인보(萬人譜)』 ‘김종규 편(編)’ 중의 일부

이렇듯 사람에게 집중해온 김종규는 인연과 관계의 달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외에도 김종규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의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는 김종규 관장에 대해 ‘축사의 달인’이라고 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문화예술계의) 마당발, 달인, 대부, 마피아, 보스라는 단어의 촘촘한 그물망의 중심이 모두 ‘김종규’로 귀결돼 있다.”고도 했다. 그래서 김 관장의 주변에는 늘 사람이 많다. 필자가 오래 뵈온 김종규 관장은 성공한 사업가다. 출판사업, 박물관사업, 문화(유산보존)사업 등이다.

예컨대 박물관사업만 보면, 그가 30대 초반이던 1960년대 초부터 수집한 출판 관련 자료는 헤아리기가 버거울 정도다. 책도 유물이지만 인쇄물의 내용이나 거기에 실린 그림은 물론, 어떤 경우에는 활자나 제작기법까지도 자료가 되기 때문이다. 이 소장품으로 그는 1990년 우리나라 최초의 출판인쇄 전문박물관을 열었다. 자료 중에는 고려시대 대장경본인 『초조본 대방광불화엄경 주본 권13(初雕本 大方廣佛華嚴經 周本 卷十三)』을 비롯해 국보와 보물이 8점이나 될 정도로 수준 또한 높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사람 관계사업에서는 단연 압도적인 성공을 일궈 왔다. 김종규는 늘 유머러스한 화법과 천연한 표정으로 유쾌한 에너지를 발산한다. 먼저 반기고, 베풀며 배려한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친구가 될 줄 아는 고무줄 눈높이를 가졌다. 폭넓은 친교에서 얻은 지혜와 많은 독서량으로 혜안이 있고, 이를 각각의 분위기에 맞춰 전파해준다. 그래서 그는 사람 부자다.



문화유산국민신탁 보존협약유산 현장 방문
우측부터 김종헌(배재대 교수), 김양동(서예가), 김종규, 필자, 문승현(신탁 연구원), 2019


삼성출판박물관에서 2009년과 2010년, 2022년에 걸쳐 개최한 세 번의 《책을 건네다 저자서명본》 기획전은 김종규가 그간 적금해온 인연 잔고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안병욱, 이어령, 도올 김용옥, 이해인, 승효상, 작가 김훈과 조정래, 박노해, 배우 최불암과 김혜자, 이광기에 백남준, 강익중, 양방언. 이미 고인이 된 최범술, 구상, 김충열, 천경자, 유치환, 중광, 황병기, 한승원, 오명 또 엄홍길까지 정치, 사회, 경제, 인문 등을 망라한 수없이 많은 인사(저자)들과 나눈 교분의 결과다.

필자가 본 김 관장은 ‘한마디 말을 천 냥으로 만들어내는 상술의 신’이다. 봄가을 행사가 많을 때면 하루 7-8군데에서 축사를 할 때도 있다. 횟수가 많다고 달인일 순 없다. 흡입력 강한 화법으로 타고난 기억의 수장고에서 시시콜콜한 것까지 끄집어내 옛일을 그려준다. 그뿐만 아니라 주최자를 비롯한 중요 참석 인사들을 가급적 빠짐없이 거명하며 으쓱하게 해준다. 가끔은 석상에서 처음 인사를 나눈 이의 명함을 수행원에게 검색하게 해 깜짝 주연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찬 기운을 어김없이 따뜻하게 데워주는 그의 곁에 사람들이 몰리고, 서로 행사에 초청해 축사를 요청하는 이유다. 그래서 그는 ‘관계의 신’이다. ‘칭찬은 쓰리 쿠션, 조언은 다이렉트’. 김종규의 이런 관계 방정식은 소화력이 약한 이에게도 잘 흡수되게 하는 특효약이 된다. 세화도 이런 처방전이다. 60여 년간 그가 수집한 자료의 수장고는 그래서 늘 왁자지껄, 사람의 향기로 그득하다.


- 김종규(金宗圭, 1939- ) 동국대 경제학 학사, 삼성출판박물관장,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삼성출판사 회장·한국박물관협회 회장·국립중앙박물관(용산) 개관준비위원장·국립박물관문화재단 초대 이사장·2004 ICOM서울대회 공동조직위원장·문화유산국민신탁 이사장·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문화재위원 역임. 인촌상(언론문화부문)·4.19문화상·자랑스런 박물관인상 수상, 국민훈장 모란장·은관문화훈장 수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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