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파라다이스, 그 편의성과 유해성
하계훈 | 미술평론가
열과 압력을 가해 원하는 형태와 색상을 가진 오브제(혹은 생활용품)를 만들어 내는 합성수지인 플라스틱은 10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생활 주변에서 우리를 밀착하여 동반해 왔다(혹자는 포위해 왔다고 본다). 일상생활 속에서 가볍고 저렴하며 제작시 가공성이 좋아 사용에 편리함을 주는 대신 사용 후 폐기 과정에 있어서 다른 재질의 생활용품보다 상대적으로 분해가 어렵고 처리 과정에서 환경 호르몬이 많이 검출되며, 결과적으로 자연 생태계의 조화를 깨뜨리는 주범으로 비난받아 온 플라스틱은 동전의 양면처럼 편의성과 유해성을 동시에 가지면서 우리 주변을 떠나지 못하는, 애증이 교차하는 물질이 되어왔다.
최초의 인조 플라스틱인 셀룰로이드가 미국에서 특허를 받은 것은 1869년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그로부터 지난 100여 년간 플라스틱은 우리 생활의 다양한 오브제의 원재료를 대체하면서 일상생활에서부터 산업 활동에 이르기까지 크고 작은 사회적 변화에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예를 들어 음반 산업과 영화산업에서도 LP 음반이나 필름 등에서 플라스틱에 대한 의존을 피할 수 없었으며 안경테, 음료수 용기 등의 생활용품에서부터 자동차와 선박 등의 부품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기존의 재료들을 대체함으로써 경량화와 생산 능률을 높여 혁신적 변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시각예술 분야에서도 플라스틱은 일찍이 화가들의 화구와 붓, 물감 제조와 작품 포장 재료에서부터 완성된 회화의 보호막 형성, 그리고 조각가와 건축가들의 도구와 접착제(epoxy), 마케트(maquette) 및 건축모형 제작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예술가들의 창작 과정에 동반해 오고 있다. 상상해 보건대 오늘 갑자기 모든 플라스틱의 사용이 금지된다면 작가들의 창작은 거의 중단되거나 적지 않은 타격을 입을 것이다.
플라스틱이 예술의 장으로 진입한 역사는 아무래도 산업화가 먼저 일어난 사회와 관련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플라스틱은 합성 소재의 일반적인 용어로서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구부러지거나, 성형되거나, 딱딱하거나, 유연하거나, 액체이든 어떤 모양으로든 형성될 수 있는 폭넓은 표현 가능성을 작가들에게 제공해 줌으로써 시각예술의 장을 크게 확대해 주었다. 특히 1935년 이후 스티로폼, PVC(폴리염화비닐), 아크릴, 폴리우레탄, 에폭시, 셀로판, 나일론, 합성고무와 섬유가 발명됨으로써 작가들의 창작활동에 있어서 재료의 선택 폭은 크게 확장되었다.
플라스틱이 언제부터 미술 작품에 도입되었는가에 대하여 뉴욕의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보존과학 전문가 레이첼 무스탈리쉬(Rachel Mustalish)는 2004년 논문에서 찰스 비더만(Charles Biederman)의 <New York, Number 18>(1938)을 최초의 플라스틱 적용 작품으로 보고 있다. 그 후에도 팝아트의 선구자로 알려진 리차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이 라미네이트된 렌티큘러 플라스틱 시트로 제작한 <Palindrome>(1974), 알렉산더 칼더(Alexander Calder)의 모빌과 테오 얀센(Theo Jansen)의 키네틱 아트 작품들도 폭넓게 플라스틱을 작품의 주요 재료로 도입하였다. 작가들이 이러한 작품에 플라스틱을 도입한 것은 기존의 목재나 철제 등의 재료 특성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특징들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도 재료를 다룸에 있어서의 편리함이 그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고양아람누리의 아람미술관에서 기획한 <Plastic Paradise !?>는 우리가 이러한 플라스틱이라는 물질을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여 우리 삶에 새롭게 적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는 기획이라고 볼 수 있다. 기획자가 언급하고 있는 전시기획의 의도는 전시를 통해 기후 위기의 주범이라 불리는 플라스틱에 대한 예술가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살펴봄으로써 기존의 관점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제시하는 기회로 삼으려고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평소에 플라스틱 물질들을 자기들 창작의 주요 재료로 도입하거나 플라스틱이 주는 물질적, 환경적, 사회적 의미를 주제로 삼아 작업해 온 작가들의 대표작들이 대부분이다. 과연 플라스틱은 전시 제목의 의미 그대로 우리에게 평화롭고 아름다우며 즐거움을 주는 완벽한 장소로서의 파라다이스를 제공해 주는가에 대한 ‘!’와 ‘?’의 담론이 담긴 전시가 <Plastic Paradise !?>전인 것이다.
초기의 작가들이 플라스틱을 자신들의 작품 창작의 새로운 재료로 바라본 데 비하여 시간이 지나고 플라스틱의 사용이 일상생활에 폭넓게 확대되면서 점차 문제점들이 드러나게 되자 플라스틱을 이용하여 작업하는 작가들이 천착하는 주제는 그 선명성에 있어서 일방적인 편으로 바뀌게 된다. 다시 말해서 작품 속에 플라스틱을 도입하거나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 그 물질의 물리적, 사회적 의미를 부정적으로 해석하여 작품에 도입하기는 비교적 수월하지만, 반대로 긍정적인 시각으로 플라스틱을 바라보고 해석하여 작품화하는 것은 관람객과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에 있어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경우에 작가 대부분이 플라스틱이라는 물질이나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속성과 의미, 그리고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효과 등을 작품에 도입하는 방법과 태도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한 일정 패턴을 이루게 된다.
플라스틱이 미술에 도입되는 방식은 크게 두 방향으로 볼 수 있다. 그 가운데 첫 번째는 1960년대 이탈리아의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에서 선행적으로 실험하였던 폐기물 성격의 물질이 작품에 도입되는 방식이다. 제르마노 첼란트(Germano Celant)의 기획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아르테 포베라는 헌 옷이나 부서진 생활용품 등 2차대전 패전국 이탈리아의 경제적 어려움과 그에 선행하였던 다다(Dada)와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이질적 재료에 관한 관심이 작품으로 연결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이 변기나 자전거 바퀴, 심지어 다락방에 오랜 시간 동안 쌓인 먼지를 작품에 도입함으로써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와 같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에게 이불, 골판지, 폐타이어 등의 오브제를 작품에 도입하는 길을 열어준 것, 그리고 이로부터 이어서 아르테 포베라와 1970년대 이후의 설치미술, 그리고 오늘날의 폐기물을 활용한 ‘플라스틱 미술’이 이어지면서 미술사적 계보화가 형성된다. 아르테 포베라와 ‘플라스틱 미술’의 공통점은 예술 창작의 동기에 미학적 요소와 함께 사회적, 환경적 요소가 비중 있게 작용하고 있고, 생활 속의 폐기된 오브제들이 새롭게 예술성으로 탄생할 가능성을 실험하였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두 번째의 경우에는 플라스틱이 미술에 도입되는 시점에서 폐기물이 아닌 정상적인 오브제의 자격으로 작가의 작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플라스틱은 폐기물의 성격으로 환경과 관련하여 작품에 동원되는 경우가 많지만, 일부 오브제들은 (어느 필자의 표현처럼) ‘예쁜 폐기물’로서 아직 그 사용 기능성이 살아있거나 갓 생산된 상태에서 용도를 포기하고 바로 작품 속에 흡수되는 경우도 있다. 아직 사용할 수 있는 플라스틱 공이나 미사용 빨대 등이 작품을 위해 동원될 때 이러한 작품 속에서 플라스틱은 재활용의 명분을 넘어 새로운 창작 재료로서 기존의 재료들과 동등한 위상을 갖게 된다. 이 경우 플라스틱 물건들은 스스로가 예술적 작품의 성립에 이바지할 수 있음을 증명하여야 한다. 하나의 오브제를 창작하는 데 있어서 왜 그것이 재료로서 플라스틱 물건들을 사용하여야 했는가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이 주어질 때 이러한 성격의 작품 창작은 설득되고 이해되어 감상되고 작가와 관람자가 긍정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출품한 13명의 작가와 팀들은 플라스틱이라는 물질을 중심으로 3가지 섹션에서 기후 위기에 관련된 주제를 사유하는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전시장 입구에서 처음 만나는 최성임의 <끝없는 나무>는 이 설치 작품이 야외의 녹색 잔디 위에 전개될 때의 시각적 효과를 온전히 보여주고 있지는 않지만, 작가가 작품의 색상이 발현하는 장식성이나 표현력보다는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설치 장소의 환경은 상대적으로 강조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도입부에서 작품이 관람객들을 전시 주제에 몰입시키는 효과는 적지 않다. 관람객들이 작품을 대상화하여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고 작품 속으로 걸어 다니면서 좀 더 밀접하게 작품을 체험하게 한 공간 구성도 긍정적으로 평가된다. 작가는 생활공간에서 발견되는 양파망이나 플라스틱 공들로 생활 속의 가족관계와 몸에서 몸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시간의 연속성 등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어서 이진경이 구겨진 검정 비닐봉지들을 전통 산수의 장면으로 치환한 발상은 자전거 안장과 핸들로 만든 피카소의 <황소의 머리>(1942)만큼이나 흥미로운 작가적 상상력과 사유의 전형을 보여준다. 작가가 주변의 감상자들의 단조로운 탐미적 취향을 극복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작가의 현실 인식과 그로부터 형성되는 의식이 이러한 작품으로 귀결되는 것은 긍정적이며 같은 주제를 영상으로 확장하게 시키는 작자의 재능도 높이 평가받을 수 있다. 작품의 주재료로 검정 비닐봉지를 사용하지만, 이러한 보잘것없는 일상의 재료를 통해 관람객들이 작가의 창작 시간과 경험을 공감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이진경의 작품 안에서 적당히 구겨진 검정 플라스틱 봉투가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에 등장하는 산의 주름과 나무의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는 인식상의 전환이 가능해지는 것도 신비롭다.
이번 전시에서 특히 두 번째 섹션의 작가들은 플라스틱 덕분에 행복했지만 동시에 플라스틱 때문에 불행할까봐 두려운 현대인이 가진 내면의 이중성, 즉 유토피아의 이면에 공존하는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을 작품들을 통해 사각화해주고 있다. 아마도 이 섹션의 작품들이 관람객과의 공감의 접점을 가장 밀접하게 드러나는 작품들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황문정은 도시 공간의 구성 요소를 인간성과 비인간성으로 나누어 인간을 제외한 건물, 환경 등의 제 요소들이 만들어 내는 스펙터클의 장에서 벌어지는 역동을 관객 참여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 플라스틱 파라다이스 모티브를 직접적으로 도입하지 않지만 인간성과 비인간성의 대비 그 어디쯤에서 작가는 공간 관찰의 촉수를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미승은 미세플라스틱이 담긴 폐화장품을 재활용하여 그림 재료로 활용하고 있으며, 정찬부의 작품에서는 자연을 닮은 도시의 식물들이 일회용 빨대로 만들어졌다는 불편한 진실을 감당하는 것도 결국 그 공간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몫인 것을 일깨워 준다. 일부 작가는 플라스틱 주제를 확장하여 우리들의 먹거리 문제와 음식 재료로서의 동식물들의 먹이사슬 문제에 연관된 미세플라스틱의 문제를 시각화하는데, 우리의 식문화를 이러한 시각으로 바라본 망무의 작품도 흥미롭다. 작가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이용하여 우리의 식재료가 되는 동물들의 몸과 살을 형상화하고 그것을 식탁에 올려 우리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자연의 최상위 포식자로서의 인간에게 삶과 환경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한다.
세 번째 섹션의 참여 작가들인 퍼블릭 퀘스천(PQ Studio)의 비닐백에 바느질한 작품들은 우리가 어쩔 수 없는 플라스틱 세대임을 다시 한번 시각적으로 인식하게 해주면서 자연스럽게 다음 공간에서 KF 국제교류재단이 기후 위기 속의 지구를 다룬 영상작품으로 연결하여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환경’을 전시 공간을 마무리한다.
이번 아람미술관에서 기획한 <Plastic Paradise !?>전은 모두가 인식하고 공감하는 우리 시대의 기후 위기 문제를 플라스틱이라는 물질을 매개로 폭넓게 사유해 보는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