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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소 / 형태로부터 탈주하는 선

이선영

형태로부터 탈주하는 선


이선영(미술평론가)

  


[Untitled–일련번호]로 붙여진 최병소의 작품은 엄밀하면서도 야성적이다. 종이에 수없이 그은 선으로 만들어진 추상적 작품은 특정 형태로부터 탈주하는 선들로 이루어졌으며, 흐들흐들 들려 일어난 표면이 바싹 마른 낙엽이나 오랜 유물처럼 부스러질 것 같다. 그가 작품에 선택하는 잡지는 보통 종이보다는 견고하지만, 작가의 세찬 드로잉을 온전히 받아내기는 역부족이다. 그의 작품은 볼펜의 잉크색과 연관되어 탄화된 무엇을 떠올리기도 한다. 워낙 밀도 있는 선들이라서 그 방향도 가늠하기 힘들지만, 수행과도 같은 오랜 작업의 흔적은 오른쪽 위에서 사선으로 내려그은 것임을 추측하게 한다. 예술작품은 조형 언어, 즉 인공적인 것이지만 수많은 겹과 결을 통해 자연에 근접할 수 있다. 자연의 실재감은 무수한 층에서 확인된다. 수많은 세월 동안 눈비 바람을 맞은 바위 표면이나 나무 껍질이 그렇고, 견고하고 반듯하게 생산된 합판도 바깥에 오래 노출되면 압축된 판들이 하나하나 들려 올라간다.



데이트 갤러리 전시전경(이하 모든 사진 출전은 데이트갤러리)



그러한 자연적 대상을 찾아 재현하는 방식도 있겠지만, 최병소는 자연의 재현이 아닌 그 과정을 반복한다. 질 들뢰즈가 니이체에 영감을 받아 창안한 개념인 ‘차이와 반복’은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재현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해석된다. 과학철학자 미셀 세르는 [헤르메스]에서 기하학과 역학은 재현의 과학이라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재현의 과학은 변환이 아니라 운반의 과학이다. ‘사물이 변형될 수 없을 때는 사물의 재현이 다루어지게 된다. 재현의 공간에 길이 그려지고 이동이 표시된다. 오늘날 관심이 집중되고 있는 것은 상황이다.’(미셀 세르) 어떤 형태나 의미로 귀결되는 기하학을 무너뜨리는 쇄도하는 선들은 비재현적이다. 최병소의 작품은 추상이어서 한가지 형태가 아니라 많은 현상을 연상시킨다. 이점은 추상이 구상보다 ‘더 깊은 현실과 관계를 맺고 있다’(칸딘스키)는 주장의 근거가 된다. 몇 년 전 한 전시에서 그의 작품을 보고 억겁의 세월 동안 물을 순환시켰던 바다의 표면을 연상했다. 


생명이 탄생했던 따스하고 부글거리는 원시 수프가 종국적으로 도달할 단계는 얼어붙은 바다 표면의 무심한 반사면과 유사할 것이다. 셀 수 없는 선의 궤적인 그의 작품은 투여된 작업량이나 의지의 뜨거움과 별도로 차가운 풍경으로 보인다. 조지 존슨이 쓴 대중 과학서 [세상의 비밀을 밝힌 위대한 실험-우주의 작동 원리를 탐구한 10가지 실험들]에 의하면 열과 관련된 물리학의 원리를 소개하면서 열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점차 쓸모없는 형태로 변해간다. 엄밀한 과학 실험이 아니더라도 경험할 수 있듯이 열은 더운 곳에서 차가운 곳으로 흐르며 그 반대 방향으로는 이동하지 않는다. 조지 존슨은 열이 한번 잃으면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통해 이 세상이 한 때 대단히 뜨거웠으며 지금은 점점 식어가는 중임을, 즉 우주는 빅뱅과 함께 시작됐고 그 이후 계속 식어가고 있는 중이라고 추측한다. 과학자들에 의하면 현재의 우주는 탄생한지 약 138억년 쯤 되었다고 한다. 





데이트 갤러리 전시전경


사토 겐타로가 쓴 [세계사를 바꾼 12가지 신소재]에 의하면 현 단계에서 우주 전체 원소의 93% 이상이 수소이고 두번째로 많은 헬륨을 합치면 두 원소의 비율은 99.87%에 달한다. 하지만 앞으로 수백억 수천억년이라는 유구한 세월이 흐를수록 서서히 철의 비율이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강물이 움푹 팬 땅으로 흘러가듯이 모든 원소는 언젠가 철에 도달한다고 추측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철만 가득한 냉랭하고 쓸쓸한 공간이 바로 우주의 미래 모습이다. 최병소의 작품에서 새까맣고 얇은 박피는 그러한 무심한 시간의 흐름을 연상시킨다. 이런저런 연상이 가능한 그의 작품은 정확히 그 무엇도 닮지는 않았다. 특정 형태로 고정이 되기에 그의 드로잉은 과도하다, 하나의 선 뒤에 곧 다시 밀려오는 선들은 변화의 과정 그자체를 보여준다. 그가 선택하는 작품의 재료가 무엇이든 하나로 수렴시키고자 한다. 특히 신문지처럼 얇은 표면에 강도와 밀도가 반복적으로 가해지면 과정에 대한 흔적이 강조된다. 


물질의 형해만 남는다. 그가 ‘내 작업의 앞뒷면은 둘이 아니라 하나다’라고 말할 때 ‘의미와 무의미’, ‘침묵과 절규’, ‘고통과 희열’같이 일견 상반되어 보이는 가치는 서로 만난다. 한 방향으로만 가는 선형적 논리가 아니라 양쪽으로 나아가는 역설의 논리 속에서 양극은 만난다. 볼펜이나 연필로 그은 묵직한 광물성 표면 작가의 행위로 들려 일어나 이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겉과 속, 현상과 본질의 이분법이 아니라 양자의 연동이다. 세상을 보는 가장 단순한 방식, 그래서 보편적인 이원론에 대한 거부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대상/주체의 구별하는 재현주의적 관념이다. 최병소는 재현주의로부터 벗어나려는 현대미술사의 흐름과 함께 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도 속하는 추상미술 또한 재현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데, 관념의 재현 또한 재현주의이기 때문이다. 재현을 통해서 생산력의 진보를 이끌어온 대표적인 분야는 과학이다. 미술사의 어느 시기에 과학과 예술이 거의 한 몸이었다. 



데이트 갤러리 전시전경



과학기술은 자연의 표면이 아닌 그 원리를 재현함으로서 세상의 모습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왔다. 자연과학에서는 실험이 정확히 재현되어야만 보편적인 법칙으로 인정받는다. 과학기술 분야에서 자연의 재현은 일취월장하고 있다. 헤일리 버치가 쓴 [일상적이지만 절대적인 화학지식 50]는 ‘자기조립’ 기술에 대해 소개한다. 그것은 자기조립을 하는 분자, 물질, 장치를 설계하는 부분으로, 이에 의하면 과학자들은 단순히 숟가락을 만들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숟가락을 만드는 물질을 설계한다는 것이다. 현대예술 또한 재현적 패러다임에 대해 고민해왔다. 그린버그가 잘 정리한 순수미술의 조건이자 결과로서의 자율성은 이후 개념의 재현으로 이어져 현대미술사는 그럴싸한 개념들의 내전으로 가득차게 된다. 미적 자율성이나 형식주의는 그자체로 순수하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맥락 속에 있다. 가령 ‘예술계에서의 인정’(아서 단토)이 그것이다. 


현대수학에서의 주장처럼 형식주의는 모순적이다. 레베카 골드스타인은 괴델의 평전인 [불완전성]에서 괴델의 이론을 ‘수론에 적합한 어떤 형식체계에나 결정 불능의 식, 곧 그 자체는 물론 그 부정도 증명도 할 수 없는 식이 존재한다. 이로부터 수론에 적합한 어떤 형식체계의 무모순성은 그 체계 안에서는 증명할 수 없다는 따름정리가 나온다’고 정리한다. 이 책에 따르면 ‘괴델의 논문은 어떤 수학적 결론은 증명될 수 없다는 사실, 곧 수학이 어떤 공리들을 채용하든 증명될 수 없는 진리가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괴델의 ‘불완전성의 원리’는 현실을 순수한 논리나 형식으로 체계화 또는 환원하려는 시도에 대한 논리적 비판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지고한 수리 논리나 예술의 영역이 아닌 현실에서도 확인한다. 하나의 법조문으로 전혀 다르게 해석하는 정치인들을 보면 말이다. 어느 영역이든 체계의 불완전성을 인식하고 그것이 좀 더 완전할 수 있도록 이성적으로 대화하는 것이 필요하다.



0120106 Untitled,  Pencil, 2012, Ballpointpen on Newspaper 80x54x1cm



0130203 Untitled,  Pencil, 2013, Ballpointpen on Newspaper 80x54x1cm


 

대화란 선험적인 가정이나 결론을 미리 상정하지 않는 끝없는 과정이다. 최병소의 작품은 그러한 끝없는 대화의 과정에 대한 흔적이다. 이러한 과정 또한 역사적 현실을 배경으로 한다. 그는 ‘나의 신문지 모노크롬 작품은 주체의 소멸, 재현에의 회의, 미적 자율성의 붕괴라는 예술사적 위기’와 관련된다고 말한다. 또한 그것은 ‘70년대 한국 현대미술의 실천적 아방가르디즘의 열기 속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감수성과 양식에 있어 진보 의식의 최전선을 달리며 자기비판의 고집스러운 추구였던 그린버그식 형식주의를 거부하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가장 손쉬운 거리에서 와 닿은 일상의 평범한 사물인 신문지와 문구였다’고 한다. 신문을 신문지로 보고 기사를 단지 문구로 간주하는 것은 다소간 문화파괴적인 태도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형식의 내전을 일삼아온 현대미술사의 자기 파괴적 태도와 무관하지 않다. 파괴를 통한 진보는 근대의 모토였고, 역사는 그 자체가 과도기로 간주되었다. 


역사의 방향성을 자신하던 19세기 역사주의 시대에도 ‘과도기’라는 관념은 있었지만, 현대의 과도기는 시점과 종점의 관념을 상정하지 않는다. 그러한 관념은 그것은 형이상학으로 치부된다. 신문이나 잡지같은 일상의 재료로부터 시작하는 최병소는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단선적 논리를 거부한다. 그가 채택하는 재료들은 경험주의 철학자 존 로크가 말한 ‘타블라 라사(tabula rasa)’, 즉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석판’과는 이질적이다. 그것은 순수하지 않고 이미 오염되어 있으며, 그리기와 지우기, 생성과 파괴의 차이도 모호하다. ‘레디 메이드 오브제’인 그의 주재료는 ‘삶과 예술, 일상과 예술, 현실과 미술을’ 이어주었다. 그는 이에 대해 ‘언제 어디에나 있는 신문을 볼펜과 연필로 새까맣게 누더기가 될 때까지 지워나가는 것이 나의 작품이다. 날마다 쌓이는 일간지를 거실이나 서재에서 손 닿는데 놓인 필기구로 지워나가기 때문에 넓은 작업공간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비싼 재료비가 드는 것도 아니다’고 밝힌다. 설치할 때도 별다른 지지체 없이 간단히 핀 몇 개로 벽에 고정시킨다. 



0221108 Untitled, 2022, Magazine, ballpoint pen, pencil, 23.5x18.5x1cm



정보화를 통해 매체계가 급격하게 변화된 지금은 신문도 흔치는 않지만, 현재 작품의 스타일이 본격화된 1970년대 신문이나 잡지는 대표적인 언론매체였다. 그가 쓰는 볼펜과 연필도 컴퓨터 자판이 일반화 되기 이전에 가장 흔한 필기구였다. 종이와 볼펜의 만남은 이젤에 걸려있는 캔버스와 잘 조율되어야 하는 물감과는 차이가 있다. 그의 작업은 일상 속에서도 가능하며 지속가능하다. 현대는 일과 여가가 분리되어 있고 작업도 분업화되어 있지만, 최병소가 집중한 것은 ‘바탕과 표면, 지지체와 안료라는 이원의 구조를 하나로 일체화’시키는 것이었다. 미학적으로 볼 때 재현주의의 해체는 인간이나 주체의 위상, 아름다움의 개념 또한 해체한다. 추상미술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준 근대의 미학은 이를 ‘숭고’로 명칭을 붙였다. 숭고는 재현할 수 없는 모든 것에 붙여진 명칭이다. 먼 미래의 숭고 또한 낭만주의적 숭고처럼 무인지경의 폐허와 닮았을 것이다. 


최병소는 작업과정에 대해 ‘서로 흡수되고, 침투하여, 지우고, 칠하며, 부딪히고, 격렬하게 접촉되어 찢어지고, 함열하는 충격과 마찰의 물리적 과정에서 몸의 살아있음은 감각의 부활과 함께 의식의 연금(鍊金)으로 이행되고, 신문지는 하나의 숭엄한 순수물질로 화(化)하게 되어, 완전히 변용되어 버린다’고 말했다. 살짝 건드리면 검은 재로 부스러질 것같은 그의 작품에서 태워진 것은 시간과 몸이다. 사실 모든 유기체가 살아가는 과정 그자체가 연소이다. 타임지 표면에 그은 선들은 작품에 내재한 시간성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모더니즘적 추상은 시간성을 억압했다. 단칼에 베어진 듯한 공간의 단면은 그린버그가 추구했듯이, 미술에서 서사를 배제함으로서 매체의 순수성을 구가하려 했던 모더니즘의 정점에 있다. 최병소의 추상적인 작품 또한 관객에게 작품의 의미를 말해주지 않는다. 의미 즉 서사는 기승전결같은 시간적 흐름에 뒤따르는 내용이다. 작품 스타일에 따라 선적인 인과성의 정도는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언어적 논리는 시간적 순서와 연동된다. 



0230106 Untitled,  Pencil, 2023, Ballpointpen on Newspaper 41x54,5x1cm



0230122 Untitled,  Pencil, 2023, Ballpointpen on Newspaper 41x54,5x1cm



그의 작품에 시간성은 있지만. 서사는 없다. 굳이 있다면 작가의 수행적 행위 그자체에 대한 의미 부여일 것이다. 잭슨 폴록의 추상표현주의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작가가 화폭이라는 장 안에 들어가서 한 행위다. 미술사는 인디언의 모래 그림 등 추상표현주의의 연원을 지적하지만, 결코 반복될 수 없는 사건이 작품의 내용이 된다. 하지만 이 또한 영웅적인 예술가의 신화로 귀결된 면이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추상예술은 감각을 순수한 정신적 존재로, 사유하며 사유되는 빛을 발하는 하나의 질료로, 즉 더 이상 바다나 나무에 대한 감각이 아니라, 바다나 나무의 개념에 대한 감각이 되어질 수 있도록 하는 그러한 건축학적 구성의 구도를 표방함으로서 오로지 감각의 세련과 탈물질화를 추구한다’고 말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세계를 가득 채우며 또 우리를 감동시키고 생성가능하게 해주는 감지불능한 힘들을 감지될 수 있도록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지각’이다. 이 맥락에서 보자면 최병소가 회화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힘들을 그려내는 일’(들뢰즈와 가타리)이다. 


작가의 감각적 행위가 농축된 화면은 힘이 잠재되어 있다. 물리학이 말하듯이 물질과 에너지는 호환적이다. 검은 석탄 한 덩이는 불을 피울 수 있다. 앞서 인용한 헤일리 버치의 책은 우리의 일상적 삶의 기초를 형성하는 수많은 중요한 화학물질이 원유를 정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지적한다. 볼펜의 잉크도 마찬가지다. 최병소의 작품이 주조색인 블랙은 더욱 에너지를 생각하게 된다. 볼펜과 함께 쓰는 연필도 화석 연료다. 헤일리 버치에 의하면 화석 연료는 에너지가 액체 형태로, 화학 에너지 형태로 저장한다. 단위 무게당 가장 많은 양의 에너지를 담을 수 있는 것이 석유제품이다. 압축된 스프링에 저장되어 있는 에너지와 마찬가지로 화학물질 안에 들어가 있는 잠재된 에너지처럼, 최병소가 작품으로 구현한 밀도있는 ‘물질’의 잠재 에너지는 풍부하다. 물질과 에너지는 호환된다. 추상미술과 자연의 관계는 새로운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재조정 될 필요가 있다. 



0231219 Untitled, Paper, 2023, ballpointpen, pencil, 80x120x1cm



헤일리 버치는 화학자들과 자연의 방식을 대조한다. 화학자들은 어떤 물질 덩어리를 구한 다음 원하는 모양과 크기로 조각해 나간다. 반면 자연은 큰 덩어리에서 조금씩 줄여 작은 것을 만드는 대신 작은 조각에서 시작해서 덧붙여서 키워나간다. 나무든, 동물의 뼈든, 거미줄이든 모든 자연의 물질은 분자 하나 하나가 스스로 조립되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최병소가 사용하는 필기구 중의 하나인 연필심의 재료는 흑연이며, 그것은 생명체를 이루는 탄소가 주성분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한 층의 원자로 이루어진 층이 수백 수천 장 포개져 있다. 각 층은 약한 결합으로 서로 뭉쳐져 있다. 연필심의 느슨한 원자 배열은 최병소의 화면에서 압축적으로 펼쳐진다. 헤일리 버치는 탄소로만 만들어진 특수 재료를 소개한다. 그 소재는 지구상에서 가장 가볍고 얇으면서 또한 가장 강한 물질이라고 한다. 작품 [0210828 Untitled](2021)에서 잡지 화면의 윗부분이었을 ‘TIME’이라는 인쇄체 또한 시간의 공격을 받겠지만, 그 아래만큼은 아니다. 원래 있었을 인쇄 사진은 작가가 가속시킨 시간의 공격에 의해 변해버렸다. 


그것은 종이나 볼펜, 연필의 원재료인 석탄이나 석유, 섬유질 같은 원래의 재료로 되돌아가려는 듯하다. 다른 작품과 달리 간격이 있는 분절화 된 화면이다. 최병소가 사용하는 도구는 붓이 아니라 필기구, 즉 볼펜과 펜슬이다. 그리기보다는 일종의 쓰기이다. 하지만 과도한 쓰기는 지우기와 마찬가지다. 그의 작품은 빽빽하게 쓰거나 빡빡 지운 것과 비교될 수 있다. 또 다른 작품에서 ‘TIME’이라는 단어는 분홍색 바탕 면이다. 무채색 표면에서 색스러운 부분에 글자가 인쇄되어 있다. 전후에 마땅한 볼거리가 없던 시절부터 전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해왔던 타임지나 라이프지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건들을 기록해왔는가. 밀물과 썰물의 움직임처럼 수많은 기사들이 오르내렸지만 궁극적으로 남은 것은 타임이나 라이프라는 지면이다. 그 또한 매체계의 진화에 의해 역사가 됐다. 무엇인가를 형상화하는 것에 회의적일 법한 작가에게 확실한 것은 그저 그림 또는 그리기일 따름이다. 



0231228 Untitled, Paper, 2023, ballpointpen, pencil, 80x120x1cm



모더니즘 초기에 화면의 자율성, 즉 평면성을 실험하기 위해 입체파는 꼴라주를 시도했고, 당시의 인쇄물의 조각을 화면에 남겼다. 인쇄된 문자는 그것이 평면 그자체임을 알려준다. 최병소의 작품에서 인쇄글자는 작품과 내적으로 공명한다. 다른 작품에 드로잉 바깥에 남아있는 ‘LIFE’ 또한 시간적이다. 생명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병들고 죽는다. 그 모두가 시간적 과정이고, 치유의 과정에도 시간이 필수다. 의사들은 병원의 방문자에게 언제 그 증상이 나타났냐고 물어보며, 치료 후 다음 치료 날짜를 알려준다. 한때 매우 인기 있었던 라이프 잡지의 로고만 남아있는 화면은 인쇄 부분만 평면적이다. 사선으로 무수히 그은 선들에 의해 들려 올라간 종이는 입체화되어 화면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추상미술에도 추상적 원근법이 있지만, 최병소의 작품에서는 환영이 아닌 물리적인 입체감이다. 깊이 없는 깊이의 회화는 또다른 경계를 넘기 위해 섬세한 촉수를 들어올린다.


출전; 데이트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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