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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체와 군집의 서사’로 빚은 박형렬의 은유

심현섭



‘개체와 군집의 서사’로 빚은 박형렬의 은유
- 박형렬 개인전 《산-잇기: Being a Mountain》 - 



박형렬의 ‘개념’ 

박형렬은 자신의 작업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한다고 밝힌다. 이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그는 카메라에 내재한 ‘기록성’에 의존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진 매체의 객관적 ‘기록성’에 맞서 작가의 주관적 조작으로 은유를 창출한다. 예술이 인간과 매체의 투쟁으로 발전한다는 클레멘트 그린버그(Clement Greenberg)의 주장에 비추어보면, 박형렬은 자신의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닮음’과 ‘기록’의 특징을 내재하고 있는 사진매체에 저항한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사진이라는 매체 특정성과 투쟁하며 작가의 개념을 구현하는 보편적 흐름에 박형렬의 사진이 위치해있음을 말해준다. 이 보편적 흐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개념’을 어떻게 제시하느냐는 작가의 고유한 ‘표현’ 방법이다.  
박형렬은 대상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객관적이지 않은 그의 사진은 개념미술의 제작설명서처럼 작가 특유의 시각으로 조율한 빛과 구도를 특징으로 한다. 그는 고유한 형태로 인간과 땅의 존재, 욕망과 무욕, 변화와 회복과 같은 대비의 은유를 창출하고, 이러한 대비의 낯섦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여 작가의 ‘개념’에 참여하게 한다. 《Figure Project_Earth》(2013-2024)와 같은 시리즈물에서 이러한 조작과 은유는 극명히 드러난다. 그가 보여준 땅, 돌, 흙은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작가가 자신의 ‘개념’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의 손과 몸의 노동으로 조작한 형태들이다. 전작에 비해 주관적 조작이 두드러지지 않아 얼핏 대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처럼 보이는 2024년의 《Being a Mountain》과 《NoWhere Meteorite》와 같은 작업들에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가가 내부자 시점으로 자아낸 ‘개체와 군집/전체의 서사’라는 은유를 발견할 수 있다. 


‘개념’의 은유적 전달 

   

Being a Mountain #52, 2024



Being a Mountain #58, 2024

《Being a Mountain》에서 #21, #24, #52와 같은 개체사진은 #22, #58과 같은 전체사진과 연결되면서 개체와 전체 사이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지시한다. 대지 위에 놓인 돌 하나, 척박한 땅위에 이제 막 뿌리내기기 시작하는 새끼 나무들, 금세 떨어져 나갈 것 같은 풍화한 암석들과 원래 모습이었거나 아니면 각 개체들이 떨어져 나간 후의 모습을 하나의 서사로 조작한 이 시리즈는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과 인간 사이에 일어난 어떤 사건을 인식하게 한다. 《NoWhere Meteorite》(2024)에서 이러한 서사의 은유는 더욱 뚜렷하다. <SWG864>와<YJD544> 등 검은 배경에 부유하는 인상을 주는 돌들을 한가운데 배치하고 찍은 사진들은 누가 봐도 개체들의 군집인 <NoWhere Meteorite>를 지시한다. 

박형렬은 이러한 서사의 은유를 전시에서 제시한 모든 이미지들을 하나의 등고선으로 환원한 《Restored contour lines of the mountain》(2024)에서 완성한다. 이 설치작업은 박형렬이 이번 전시에서 제시한 이미지들에 감춰진 작가의 의도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인간의 개발로 사라진 산의 등고선을 스무 개의 레이어로 재구성한 촘촘한 설치물 <Restored contour lines of the mountain(Located of the 37°29'39'N126°26'59'E)>은 관객에게 지금까지 본 이미지들을 반추하게 하면서 그들의 사유를 개발이전의 등고선과 변형된 지형의 등고선 사이에 끊임없이 머물게 한다. 아울러 작가의 노동과 손길로 이루어진 조작의 시간을 집중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관객에게 등고선의 생성과 변형, 몰락 과정에 대한 질문을 그 촘촘한 층만큼이나 반복하여 던진다. 



Restored contour lines of the mountain(Located of the 37°29'39'N126°26'59'E), 2024

박형렬이 개체와 군집 및 전체로 만들어낸 서사는 상기한 대로 관객으로 하여금 자연과 인간 사이에 발생했을 어떤 사건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다. 그 ‘사건’은 분명히 인간의 지배와 폭력에 의해 무차별하게 훼손된 자연이겠지만 그는 결코 훼손된 자연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돌과 돌들의 군집, 풀과 풀들의 전체를 보여주면서 원형과 해체와 복원의 이야기로 꾸며지는 ‘개체와 군집의 서사’라는 은유를 제시한다. 이 은유가 관객에게 도달하면 관객은 스스로 인간과 자연 사이에 있었던 ‘사건’을 깨닫게 된다. 작가가 만약 훼손된 자연을 직접적으로 보여준다면 관객은 죄의식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자연을 훼손하지 않으려는 자발적 결심으로 나아갈 가능성은 줄어든다. 왜냐하면 관객은 훼손의 이미지를 너무 많이 보아왔으며, 그만큼 감각적으로 무뎌졌기 때문이다. 박형렬의 서사가 생성한 은유는 환경문제에 대한 관객의 무딘 감각을 강압하는 대신 무심히 자극하여 자발적 사유와 결심을 기다린다. 이처럼 전시장에 들어선 관객은 돌무더기에 새겨진 무늬, 갈라진 틈, 홀로 떨어진 돌덩이 혹은 돌멩이, 대지 위 웅덩이와 한 포기의 풀의 반복배열과 이들의 전체 사진, 설치작업을 보면서 서서히 이들이 지시하는 바, 즉 작품을 제작하며 의도했던 작가의 ‘개념’에 서서히 도달한다. 전시 공간의 제약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미흡한 도달은 작가의 ‘개체와 군집의 서사’를 정해진 시퀀스에 따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작품, 포토북이 충분히 보완한다. 


아름답고 섬세한 ‘개념’ 

게다가 그의 작품은 매우 미적이다. 작가가 자신의 개념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문제는 관객의 감상적 효과와 관련한 것으로 ‘개념’ 못지않게 핵심적이다. 그는 자신의 개념을 매우 미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관객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간다. ‘개념이’ 숭고든 경이든 아름답게 전달될 때 관객은 ‘개념’을 강요받거나 억지로 동의하는 수동적 해석에서 해방된다.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가 예술의 표현에서 강조한 제작(poiesis)과 해석(aisthesis) 영역의 단절이 가능해지는 분위기는 이 지점으로부터 발생한다. 전시장 3층에 자리한 등고선 모양의 설치물은 그 모양새나 배치 자체가 탐미적이라 할 만큼 미적이다. 작가가 촘촘히 제작한 아름다운 등고선 형상과 함께,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빛을 고려한 구도와 한쪽의 작은 구멍을 통해 전시장 창밖 풍경을 시선에 끌어들인 섬세한 배치는 작가가 지시하고자 하는 인간과 자연 관계의 성찰이라는 ‘개념’을 아름답게 성취한다. 

개발현장에서 포착한 돌멩이 이미지들을 검은 허공에 모아 우주의 운석처럼 배열한 콜라주 작업인 <NoWhere Meteorite>는 섬세한 보정으로 아름답게 다가온다. 개발의 폭력에 상처 입은 돌의 정처 없는 부유와 우주의 행성이나 운석처럼 떠있는 돌의 신비 사이에서 발생하는 슬픈 대비는 비애미를 불러일으킨다. 나아가 인간과 우주, 그 왜소함과 광활함의 상기는 보는 이에게 자기존재의 한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연을 소유하려는 부질없는 욕망의 실체를 마주하게 한다. 박형렬에 따르면 이번 전시작 《Being a Mountain》은 관찰자 시선의 전작과 달리 산으로 들어가 내부자 시선으로 대상을 바라본 결과물이다. 작가는 내부자의 시선으로 척박한 개발현장에 도무지 있을 것 같지 않은 아름다운 형태와 구도를 포착한다. 풍경으로부터 눈의 노동으로 인용한 박형렬의 심미적 몽타주는 개발의 폭력성과 풍경의 아름다움이라는 이질적 대비를 자아내면서 관객의 관심과 몰입을 유도하고 작가의 ‘개념’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주체적 ‘개념’의 심미적 표현

박형렬의 ‘개념’이 관객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되는데 작용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작가의 주체의식이다. 나는 박형렬의 주체의식이 기본적으로 사진매체의 ‘기록성’에 저항하여 작가의 ‘개념’을 전면에 내세우려는 태도에서 형성된다고 본다. 이러한 태도는 특히 객관성을 내재한 사진매체를 다루는 사진가에게 매우 중요하다. 무의식, 우연성, 객관성이라는 이름으로 결코 감출 수 없는 자신의 주체의식을 감추려는 모호한 태도보다는 자신이 전달하고자 하는 ‘철학’과 ‘개념’을 분명히 밝히는 주체적 태도가 전달에 있어 더 효과적이다. 자신의 주체의식을 스스로 수용하지 못하면 거꾸로 대상의 주체성 또한 인정하지 못하고 타자의식에 매몰될 가능성이 크다. 주체의식은 특히 자연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더욱 요구되는데, 양자사이에서 발생하는 갈등의 원인이 자연의 파괴와 훼손에 있다고 봤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려는 책임 있는 주체의 출현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객관성은 분명한 주체의식 가운데 대상을 똑같은 주체로 인정하는 겸허함을 전제할 때만 가능하다. 그렇지 않은 객관성은 결국 또 다른 타자를 낳을 뿐이며, 나아가 객체를 지향하면서 정작 인간을 배제하는, 특히 예술에서 조작의 주체인 인간(작가)이 소외되는 본말전도의 현상이 일어난다. 더 큰 문제는 정작 인간의 주체성이 소외되지 않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주체성을 상실했다는 연극의 무대를 조성함으로써 객관성에 도달했다는 가식적 정의에 취한다는 점이다.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가 말한 허상에 휘둘리는 ‘황홀경’이 바로 이러한 상태일 것이다. 이 착각의 혼란 속에서 주체의 부재와 무책임이 발아한다. 레지스 드브레(Régis Debray)는 그 조짐으로 인간과 동물이 동등한 존재로 대접받는 현상을 지적한다. 

이와 같은 주체상실의 시대에 박형렬의 이번 전시는 객관성이 내재한 사진매체에 사진과 그 이외의 방식으로 맞대응함으로써 관념에서나 있을 법한 객관적 시각을 주체적 시각으로 치환한다. 박형렬은 자신의 주체의식을 바탕으로 ‘개념’과 ‘철학’을 분명히 드러내는 동시에 사진사의 발전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작가와 사진매체의 투쟁의 흔적을 사진뿐 아니라 콜라주, 설치의 방법으로 전시장 곳곳에 심어놓았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주체의식과 개념, 은유라는 명사들이 작가의 조작과 관객의 참여라는 동사와 결합한 심미적 개념사진을 선보임으로써 예술사진가의 면모를 드러내는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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