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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영웅/ 거울, 존재와 존재가 반영하고 반영되는

고충환



구영웅/ 거울, 존재와 존재가 반영하고 반영되는 


고충환 | 미술평론가


영웅들이 돌아오고 있다. 시간의 사선을 넘어 영웅들이 되돌아오고 있다. 영웅들은 왜 귀환하고 있는 것인가. 작가는 왜 지금 여기에 영웅들을 소환하고 있는 것일까. 혹자는 영웅신화가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을 현혹하기 위해 제도와 이념이 만든 한갓 허구적 서사에, 순전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하고, 다른 이는 그럼에도 여하튼 시대가 영웅을 요구한다는, 더불어 꿈꿀 수 있는 존재를 요구한다는 시대적 요청을 주장하기도 한다. 

입장에 차이는 있겠으나, 적어도 영웅신화와 시대 감정이 반비례하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시대가 어지러울 때, 시대가 종잡을 수 없을 때, 시대가 안개 속일 때 사람들은 안개를 걷어내 줄, 흔들리는 중심을 잡아 줄 존재의 출현을 기대한다. 그런 점에서 영웅신화는 어지러운 시대 감정을 반영하고, 영웅을 소환하고 있는 작가 역시 불안정한 시대 감정을 반영한다. 어쩌면 온통 상실의 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현실감각을 반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영웅신화는 시대 감정을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그리고 작가의 작업은 현실감각을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예술에 대한 정의가 분분하지만, 그중 결정적인 경우로 치자면 예술은 이야기의 기술일 수 있다. 저마다 저만의 형식과 방법으로 삶을, 존재를, 시대를 이야기하는 기술일 수 있다. 여기서 작가는 영웅신화를 매개로 삶을 이야기하고, 존재를 이야기하고, 시대를 이야기한다. 사실을 말하자면 영웅신화는 삶의 서사를 함축한 존재의 알레고리일 수 있고, 이야기들의 이야기, 그러므로 모든 이야기가 유래한 이야기, 원형적인 이야기일 수 있다. 이를테면 여기에 한 존재가 있다. 그는 자기가 누구인지 모른다(하이데거는 세계에 내던져진 존재라고 했는데, 실존적 비장감이 묻어난다). 그래서 평생 자기를 찾아 헤맨다. 그렇게 자기를 찾아 떠나는 길 위에서 그는 장애물도 만나고 조력자도 만난다. 그리고 조력자의 도움으로 장애물을 극복한 그는 마침내 자기를 찾아 진정한 자기(진아)와 만난다. 

그 경우와 정도에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이야기는 이 원형적인 이야기를 심화하고 확장하고 변주한 것일 수 있다. 그 이야기에 조력자가 나오는데, 바로 영웅이다. 어쩌면 표면적인 영웅은 물론, 장애물마저 영웅일 수도 있겠다. 둘이 하나같이 삶의 명과 암을 관장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러므로 영웅신화를 소재로 한 작가의 작업은 외적으로 영웅을 부르는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는 한편으로, 작가 개인적으로는 상실한 자기, 잊힌 자기, 진정한 자기를 찾아 나서는 길 위(그러므로 과정)에 있기도 하다. 어쩌면 존재의 상실감으로 번민하는 현대인 역시 그럴 것이라는 점에서 작가의 작업은 공감을 얻는다. 


작가의 그림은 무대 같다. 상황극이 연출되고 있는, 인위적으로 구성되고 제안된 공간적 장치 같다고 해야 할까. 그 무대 위로 작가는 신들을 소환하고 영웅들을 소환한다. 고전 속 명화를 소환하고 일상적인 장면을 소환한다. 서양문명의 아이콘이 소환되고 동양 정신의 DNA가 소환된다. 전설처럼 과거가 소환되고 지금 여기의 현재가 소환된다. 

예컨대 천마 페가수스 같은, 승리의 여신 니케 같은, 헤라클레스 같은, 지혜의 여신 아테나 같은, 아킬레우스 같은, 바다의 제왕 포세이돈 같은, 주신이면서 예술 신이기도 한 디오니소스 같은, 테세우스와 아리아드네 같은, 조나단 브로프스키의 망치질하는 사람 같은, 렘브란트의 자화상 같은, 선사시대의 암각화 같은, 고대 그리스의 도기화 같은, 리우데자네이루의 예수상 같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간 아담 같은, 제프 쿤스의 동물 조각 같은, 반 고흐가 앉아서 그림을 그리던 밀짚 의자 같은,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같은, 생각하는 사람의 한국식 버전에 해당할 반가사유상 같은, 부처 같은, 이카로스 같은, 트로이목마 같은, 십자가 같은, 신라 시대 토우 같은, 브레멘 음악대에 등장하는 동물들 같은, 다보탑 같은, 가야 시대 물병 같은, 스핑크스 같은, 이성계 동상 같은, 그 자신 신이면서 신들의 전령이기도 한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과 모자 같은. 

신들이, 영웅들이, 명화가, 일상적인 장면이, 서양문명이, 동양 정신이, 과거와 현재가 하나의 화면 속에 다 들어와 있는 것이 얼핏 무분별해 보이기도 하고 어지러워 보이기도 할 것이다. 서로 이질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것들이 한자리에 있게 된 무슨 공통점 같은 것이라도 있는가. 이를 통해 작가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것일까. 아마도 작가의, 작업의 메시지에 해당할 것이다. 

그게 뭔가. 작가의 표현으로 치자면, 혼종성이다. 종 다양성이다. 의식의 흐름이다(마르셀 프루스트). 다성성이다(미하일 바흐친). 상호영향사다. 맥락 결정성이다. 풀어 쓰면, 나는 타자다(랭보). 나는 나의 인격을 형성시켜준 것들, 내가 보고 들은 것들, 그러므로 타자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이다. 내 속엔 타자들이 살고 있다(보르헤스의 거울 타자). 내가 하는 말속엔 무수한 다른 목소리들이 섞여 있고(다시, 미하일 바흐친), 나는 내가 하는 말속에 들어있지 않다(자크 라캉). 의식은 인과적으로 흐르지 않고, 시간은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는다. 나는 매번 다른 상황, 전제, 문맥, 맥락 속에서 갱신된다. 그러므로 나는 없고, 오로지 나들이 있을 뿐이다. 미술사적으로 말하자면 패러디를 매개로 브리콜레르와 브리콜라주가 수행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러므로 상호 간 이질적이고 무관계한 것들을 그러모아 제3의 현실이 창출 제안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인문학적으로 나는 타자라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한편, 미학적으로 관계의 미학, 네트워크의 미학이 제안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다만 우연하고 무분별할 뿐일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모티브를 한자리에 열거해 놓은 것이 얼핏 그렇게 보일 수는 있으나, 그 와중에도 작가는 구성상 최소한의 규칙을 적용해놓고 있는데, 주로 영웅과 신을 아우르는 영웅신화의 주체들을 무대 상단 그러므로 그림 위쪽에 배치하고, 사건과 같은 일상적 현재에서 호출된 모티브들을 무대 하단 그러므로 그림 아래쪽에 위치해 구분한다. 화면의 위쪽과 아래쪽이, 그러므로 어쩌면 하늘에 속한 것과 땅에 속한 것이, 과거와 현재가, 영웅신화의 주체들과 현재를 사는 인간적 삶의 현실이 서로 반영하고 반영되게 한 것이다. 

반영하고 반영되는? 불교에 인드라망이 있다. 서로 밑도 끝도 없이 반영하고 반영되는 유리구슬로 만들어진 그물이다. 우주적 그물이고 존재(론)적 그물이다. 나는 너를 비추고, 너는 나를 반영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비추고 반영한다. 하늘은 땅을 비추고, 현재는 과거를 반영한다. 영웅들은 사람을 비추고, 사람들은 신을 반영한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반영하고 반영된다. 작가의 그림에 보면 비정형의 얼룩들 위로 모티브가 그려져 있는데(작가의 그림에선 마티에르가 강하고, 그 특유의 질감이 비정형의 얼룩을 만든다), 미세 크랙 같고 그물 같다. 신들이, 영웅들이 뚫고 나오는 시간의 벽 같고, 과거와 현재를 하나로 아우르는 시간의 그물 같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의 작업은 서로 반영하고 반영되는 존재의 거울을 상기시키는 한편, 과거 없는 현재가, 그리고 여기에 어쩌면 네가 없는 내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이처럼 작가의 작업에서 영웅신화는 시대 감정을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현실감각을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시간이 시간을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존재가 존재를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그리고 근작에서 이런 반영하는 거울은 감각적 실체를 얻으면서 극대화된다. 스테인리스스틸 소재를 그림에 도입하는데, 주지하다시피 스테인리스스틸 판에 광(폴리싱)을 내면 거울이 된다. 엄밀하게는 회화적 평면으로 처리된 캔버스 전면에 스테인리스스틸 판을 중첩한 것인데, 기왕의 그림에 나타난 영웅신화의 주체들을 레이저 커팅으로 따낸 후 그 부분을 화면 위로 돌출시켜 일으켜 세운 것이다. 평면의 실루엣으로 나타난 커팅 된 부분 뒤쪽 화면에는 주로 영웅들을 밝혀주던 후광을, 화살처럼 퍼져나가는 빛살을 그려 넣어 영웅의, 신상의 아우라를 더했다. 

이처럼 회화적 평면과 스테인리스스틸의 금속 소재가 중첩된 화면으로, 평면 위로 돌출된 조형으로, 그러므로 이중화면으로 작가는 회화의 경계를 넘어 조각을 아우른다. 조각적 평면, 조각적 회화가 형식 실험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작가는 그림 속 현실(그러므로 어쩌면 관념적 현실)과 그림 밖 현실(그러므로 어쩌면 감각적 현실)이 서로 반영하고 반영되는 열린 거울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내가 너를 반영하고 네가 나를 반영하는 관계의 거울(그러므로 관계의 그물망)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존재와 존재가 반영하고 반영되는 존재의 거울을 형상화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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