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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눈박이라면 어떤가: 임안나의 《외눈박이와 천사》

심현섭



외눈박이라면 어떤가: 임안나의《외눈박이와 천사》


심현섭 | 미술평론가








임안나의 《외눈박이와 천사 Cyclopes and Angel》는 시선과 권력, 그리고 몸과 누드를 둘러싼 오래된 난제를 다시 불러온다. 여성의 알몸을 향한 일방적인 시선을 존 버거(John Berger)는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보인다(Men act and women appear)”고 했다. 이 명제는 서구 회화 전통에서 남성이 주체로 세계를 바라보고, 여성은 객체로 응시되는 구조를 반영한다. 임안나의 작품은 이러한 시각의 전통을 전복하고 시선의 주체와 객체 사이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든다. 

버거가 관찰한 일방적 시선은 오늘날 반드시 알몸에만 국한되지 않으며 성별의 구분 없이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한다. 프로이트(Sigmund Freud)는 시각적 욕망이 우리가 속한 사회적·심리적 맥락 속에서 형성되며, 이에 따라 그 대상과 방식이 변화한다고 보았다. 이는 시각적 욕망이 특정성별에 의해 독점되거나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오늘날 프로이트가 말한 시선의 권력관계는 여전히 광고, 패션과 같은 이미지 산업과 이를 확대 재생산하는 미디어 문화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하고 있다. 이렇듯 알몸을 바라보는 시선의 일방적인 폭력은 형태를 달리할 뿐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횡행하고 있다.

바르트(Roland Barthes)와 손택(Susan Sontag)이 다양한 방식으로 분석했듯이 사진에는 본질적으로 사진가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대상에게 가하는 일종의 폭력성이 내재한다. 사진은 대상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정지된 이미지 속에 가두며, 이를 통해 대상은 영원성의 틀 안에 갇힌다. 또한 사진은 복제 가능성과 공유의 용이함 때문에 사적 영역을 일방적으로 노출시키며, 이는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이 될 수 있다. 임안나는 “시각 기계인 카메라가 의도하지 않더라도 대상에게 가할 수 있는 무례함과 공유되는 순간 발화하는 사진 이미지의 잠재적 폭력성”에 주목한다. 이러한 사진의 폭력성이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집단적으로 작동할 때 더욱 증폭된다는 사실을 임안나의 《외눈박이와 천사》는 분명하게 보여준다.




임안나는 2016년 5월 제24회 대전 세미누드 전국 사진 촬영 대회부터 2019년 8월 제10회 동해 추암 일출 누드 사진 전국 촬영대회까지 4년간 국내에서 열린 누드 및 세미누드 촬영대회를 기록했다. 그는 누드 촬영 현장에서 반복적으로 울려 퍼지는 셔터 소리를 “한 개의 눈만 달린 기계 괴물들이 일시에 내뿜는 탄성과도 같았다”고 표현한다. 이 탄성은 축제의 흥을 돋우는 소리인 동시에 카메라의 기계적 중립성을 빌려 대상에 대한 시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환호성이기도 하다. 이 혼란스러운 상황은 임안나로 하여금 촬영 현장에서뿐만 아니라 이후 작업 과정에서 끊임없이 주저하게 한다. 그는 촬영된 이미지들을 모니터 앞에서 선별하는 가운데 이러한 시선의 구조적 문제를 재차 고민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그의 작업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사진이 작동하는 방식과 시선의 폭력성이 촬영과 공유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축적되고 확산되는지를 분석하는 하나의 성찰적 실천이 된다.

임안나는 자신의 작업 동기를 “호기심과 참견본능”이라고 하지만 누드 촬영대회를 향해 발동한 그 본능이 어느 종착지에 가닿았는지는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그는 객관성이라는, 특히 기계를 다루는 사진가에게 숙명처럼 들러붙어 있는 습성 탓인지 ‘누드 촬영대회’를 주관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몇몇 학자의 논지를 빌어 ‘누드’가 ‘사회적 소산물’이라는 점을 밝힐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임안나의 판단보류와 무관하게 《외눈박이와 천사》는 그동안 스스로 꾸민 연극적 무대를 기반으로 작업해온 임안나가 오랜만에 세상의 ‘현장’으로 들어가, 거기서 일어나는 사태를 사건화하여 관객에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그의 글과 사진의 ‘구도’가 주는 맥락과 분위기에서 임안나의 접촉점을 가늠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은데, 여성의 알몸을 앞에 놓고 거의 중년 이상의 남자들로 보이는 수많은 사람이 셔터를 눌러대는 심리상태는 어디에서 기인하는지, 이것이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증후는 아닌지, 이들의 사진은 과연 예술의 범주에 속할 수 있는지와 같은 문제에 임안나의 “참견본능”이 가닿은 것 같다.

그래서 임안나는 누드를 촬영하는 것이 아니라 알몸의 모델과 촬영자가 만들어내는 상황과 그 사이에 깔린 보이지 않는 현상을 기록한다. 그의 많은 사진이 원경에서 은밀히 엿보는 방식으로 찍힌 이유는 여기에 있을 것이다. 무례함과 폭력성에 대한 의구심에 기인한 임안나의 ‘주저’는 따라서 알몸을 직접적으로 찍는 대신에 자신을 주저하게 한 원인, 적시하자면 집단의 개인을 향한 폭력적 분위기와 이런 행위의 예술 여부에 포커스를 맞춘다. 개인을 향한 집단의 저격, 이것은 우리 사회의 오래된 악습이다. 정치인과 연예인을 향한 한국 사회의 팬덤 현상 역시 본질적으로 집단 폭력의 성격을 띠고 있다. 임안나의 ‘구도’ 속에 막으로 가려진 여자의 알몸은 우리 사회의 감춰진 집단 폭력의 악습을 역설적으로 고발한다. 




임안나가 문제 제기에 그치려 자제해도, 그의 ‘구도’에서 드러나는 개인을 향한 집단의 무례함과 폭력의 흔적은 아무래도 피할 수 없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은 근본적으로 서양의 누드, 즉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한 누드의 본래 목적, 즉 ‘누드’라는 용어에 담긴 기호적 함의를 간과한 채 알몸의 형태를 취하려 한 ‘누드 촬영대회’의 가벼움에 있다고 여겨진다. 누드를 인간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철학적 행위로 파악했던 서양의 인식이 반드시 옳다는 말이 아니라, 알몸에 대한 인식의 결핍과 ‘몸’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이라는 과정의 부재가 무례와 폭력의 형태로 드러나지 않았나 하는 자기반성의 의구심을 던지는 것이다. 

임안나의 사진에서 여성의 누드가 전통적으로 이상화한 이미지가 아닌 모호한 위치에 자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구심, 즉 예술로 완전히 확인되지 않는 모호함의 영향으로 보인다. 케네스 클라크(Kenneth Clark)는 ‘누드(nude)’와 ‘벌거벗음(nakedness)’을 구분하여 예술적 이상으로서의 누드와 사적인 수치심을 동반하는 벌거벗음을 대비했다. 알몸을 향한 가벼운 인식이 미적 명분을 획득하는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을 예술로 승화하는 것이다. 클라크가 말했듯이 누드가 단순한 신체의 묘사를 넘어 예술의 한 형식이라면, 거꾸로 알몸을 예술의 형식으로 만드는 것이야말로 서양의 누드 전통과 등가를 이루는 길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예술을 형성하는 제작과 해석의 영역에서 주체가 뚜렷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독단적으로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제작과 해석의 영역을 각각 책임질 수 있는 ‘고독한 주체’다. 



임안나는 그러나 이러한 이분법적 분리를 해체하여 주체를 애매한 위치에 둠으로써 몸을 매개로 형성된 권력관계에 균열을 내고 관객의 시선을 교란한다. 따라서 임안나의 사진을 바라보는 관객의 눈에 예술 생산에서 필수적인 주체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의 사진 속에서 알몸의 피사체와 촬영자는 하나의 풍경 속 사물로만 존재하며, 예술 창작의 과정이나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 집단 속 ‘아무나’의 위치에서 셔터를 누르는 객체로 남는다. 알몸을 가린 하늘거리는 막은 집단의 폭력성과 더불어 이러한 주체의 부재를 상징적으로 암시하는 기호로 작용한다. 관객들은 이 모든 피사체들을 하나의 ‘구도’ 속에 포섭하여 은유를 생성하고, 막의 신비로 사물화한 대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임안나의 사진에서 예술의 흔적을 발견한다. 한편, 임안나가 누드 촬영대회에 대해서 품고 있는 의문 역시 ‘구도’를 통해 표현되고 전달된다. 그는 대상을 프레임 안에 완전히 가두지 않는다. 마치 세잔느(Paul Cezanne)가 사각의 캔버스에 반쯤 잘린 사과를 배치함으로써 오히려 캔버스를 확장하는 효과를 거두듯이, 임안나 역시 피사체를 잘라내는 방식으로 ‘구도’를 프레임의 가장자리 밖으로 확장한다. 이러한 확장은 단순한 형식적 실험에 그치지 않고 관객의 인식과 상상을 자극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경계를 비집고 나오는 것 같은 피사체의 배치는 임안나가 안정적이고 균형 잡힌 구도 대신 프레임을 벗어난 형식 실험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메시지를 담기 위해 특정 지점에서 멈춘 ‘정지’를 함의한다. 이러한 에포케(epoche)의 상태에서 사진이라는 매체는 단순한 객관적 기록 장치에서 벗어나 임안나의 의도를 반영하는 주관적 오브제를 생산하는 도구로 변환한다. 이를 통해 그는 촬영자와 대상이 만들어낸 상황과 분위기와 그 속에 잠재된 욕망과 은밀한 폭력성을 다양한 은유로 형상화하며, 그 효과를 극대화한다. 다시 강조하자면 임안나의 프레임의 가장자리로 향하는 행보와 특정 지점에서의 멈춤은, 그의 예술적 모티브인 사회적 관심과 참견본능을 담은 ‘구도’를 창조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겉으로 달라 보이지만 《클라이맥스의 재구성 Restructure of Climax》이나 《프로즌 히어로 Frozen Heroes》에서부터 《외눈박이와 천사》에 이르기까지 임안나의 모든 작업은 연출 여부와 피사체의 유형을 떠나 일관된 흐름을 유지한다.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이 흐름은 사회적 관심과 참견본능을 바탕으로 형성된 ‘사회성’과 이를 시각적으로 포착한 ‘구도’로 이루어진다. 《외눈박이와 천사》의 구도는 프레임이나 피사체가 요구하는 어떤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유연하게 출렁인다. 이 ‘출렁이는 구도’에서 임안나 사진의 미학과 매력이 발산한다. 어쩌면 사진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이러한 시각적 유혹의 분위기인지 모른다. 이것이야말로 관객을 사유의 길로 이끄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임안나는 연출 사진이든 스냅 샷이든 언제나 사회적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한 ‘구도’를 설정하여 관객의 시선과 사유를 유도한다. 나머지 한쪽 눈을 떠 “카메라가 보여준 무의식(optical unconscious)의 세계”를 발견하는 관객이 있다면, 작가 임안나가 외눈박이인들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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