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여백의 반전
빛나는 여백: 한국 근현대 여성 미술가들 전(2025.1.17.~4.6, 이응노미술관)
이선영(미술평론가)
이미 미술사의 반열에 올라있는 작가들이 포함된 《빛나는 여백: 한국 근현대 여성 미술가들》 전은 제목만으로도 문제적 키워드가 다수 포진해 있다. 먼저 시대와 성(性)이다. 리타 펠스키(Rita Felski)는 [근대성의 젠더gender of modernity]에서 ‘근대성의 성별(gender)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역사적 시기와 같은 추상적인 것이 성을 가질 수 있는가’를 물은 바 있다. 저자는 우리시대에 ‘텍스트성textuality)의 역사성과 역사의 텍스트성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음’을 진단하면서, ‘성별의 역사성이라는 문제와 함께 역사의 성별화’를 화두로 삼았다. 이러한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본다면 ‘근대의 성별’은 남성이다. 전통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진보인 근대 또한 타자들에게 온전한 것일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여백’은 작품의 많은 수를 차지하는 한국화의 중요 개념이다. 고대부터 존재했던 원자론에서의 빈 공간 같은 역할을 한 여백은 세상의 근본인 원자의 운동과 변화가 가능한 잠재적 공간으로, 잉여가 아닌 필수다. 역사, 즉 남성의 이야기로 풀이되는 담론의 주체, 요컨대 세상의 가시적 주인공이 남성이었다면, 그 옆 혹은 배후에 있었던 존재들이 조명을 기다리고 있으며, 이 전시는 빈 곳을 반전시킨다. 실제로 여성의 그림자 노동은 공식 부문의 경제가 유지되는 단초였다. 이 전시는 여백, 빈공간, 그림자 등 또한 수면 위로 올라와 상호작용에 가속도를 붙여가는 문화적 추세를 반영한다.
나혜석 시흥녹동
금동원, 세검정, 1985, 종이에 먹, 색, 180×147cm,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김윤신, 소나무, 1979, 나무조각, 130×30×25cm
이응노미술관이라는 특성을 살려 고암(顧菴)과의 직간접적인 관련을 가지며, 영향을 주고받은 작가들이 11인이 선정되었다. 한국 근현대미술사가 형성되던 시기라 단순히 우연적 인맥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고암의 동반자였던 박인경을 비롯해서 스승과 제자 등으로 맺어진, 예술을 매개로 한 동지, 화우들이다. 40여점의 작품들이 그자체로도 충만한 경험이 가능했던 것은 그 시대만의 시공간 감각이 오롯이 배어 있는 작품들이 많다는 것,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로 평생을 걸쳐 작업해 온 내공이 스며있음을 들 수 있다. 한 작가가 한 세계인 밀도와 강도를 가진 몇점의 작품들을 계기로 또 다른 시간 여행을 권유받는다. 그 어느 시대고 예술하기에 녹록한 때는 없었다. 하지만 압축 성장으로 몸살을 앓았던 한국의 근현대, 가부장제의 그림자가 여전했던 시기를 관통했던 여성 작가들의 노력은 때로는 소설같은 일대기를 낳기도 했다. 관념주의에 빠질 기회나 여력이 없던 여성의 작품은 초월적 승화가 아니라 수렴의 장이다. 한 개인의 생로병사와 희로애락 그 모두가 수렴되는 미술은 어느 장르 보다도 함축적 단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1958년 이응노와 프랑스로 건너간 박인경(1926- )의 [숲] 시리즈에서 나무줄기 하나에 가득 매달린 잎들은 그자체가 하나의 세계이고 숲을 이룬다. 자연은 숱 많은 머리처럼 빈틈이 없고 풍부하다. 짙은 녹음은 짙은 먹으로 번역되었다.
어둑한 배경에 태양처럼 밝은 복숭아 하나가 놓여있는 김순련(1927-2013)의 작품은 여성성의 상징을 조명한다. 1978년 파리에서 이응노의 동료 조각가 문신을 만난 최성숙(1946- )의 작품 [뒷모습의 여인]은 익명적인 한 여성이 빛을 가득 받는다. 작품 [빛나는 아침]에서도 동물처럼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지만, 자신이 속한 주변 영역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신은 물론 그 주변까지 빛나게 하는 여성적 실존을 빛나는 식물로 표현한다. 이 전시의 많은 작품들이 오래된 공기를 품고 있다. ‘한국 근대 최초의 서양화 전공 여성 화가’로 평가받는 나혜석(1896-1948)의 [시흥녹동]은 초록 자연 속에 식물처럼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듯한 옛 건물이 있는 풍경으로, 인공과 자연을 하나의 아우라로 묶어낸다. 고암화숙에서 이응노를 사사한 금동원(1927- )의 작품은 바랜 종이가 초가집이 있던 시대의 따스한 공기를 담는다. 작품 [세검정]에서는 달의 여러 단계가 공존하며, [속초 대포리 어촌]은 속살같은 언덕이 특징이다. 작년에 이응노미술관에서 《아르헨티나에서 온 편지》 전을 연 김윤신(1935-)은 1세대 여성 조각가로 평가받는다. 작품 [미상의 나무]와 [소나무]는 자연인 나무와 인공인 예술적 의지의 합작품으로, 끊어질 듯 이어지며 수직적 균형을 잡는다. 그의 드로잉은 단단한 도구를 이용하여 붓의 궤적을 기하학적으로 남긴, 구축적 이미지로 속도감 있고 힘있는 구성을 보여준다.
나희균, 붉은 중심, 1972, 캔버스에 오일, 60.5×50cm, 안상철 미술관 소장
천경자, 아열대2, 1978, 종이에 석채, 72×90cm, 가나문화재단 소장
최성숙, 뒷모습의 여인, 1982, 화선지, 먹, 동양화 채색, 82×57cm
박인경, 나무줄기1, 2019, 종이에 수묵, 130×130cm, 이응노미술관 소장
나혜석의 조카이기도 한 나희균(1932- )은 날카로운 마름모꼴 형태가 화면에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기하적 추상으로, 전시의 다양성을 충족시킨다. 작품 제목부터 구성, 중심, 흐름 등의 키워드를 가진다. ‘동양화 작가로서는 최초로 수묵누드’을 시도했다고 평가받는 문은희(1931- )는 필획의 강도가 감지되는 최소한의 획으로 표현한 여성 누드가 특징이며, 군상의 경우. 다양한 포즈의 누드가 흑백이나 빛과 그림자같은 대조적인 명도의 얼룩 속에 배치된다. 자연과 여성의 친화력은 유기적인 작품을 낳는다. 박래현(1920-1976)의 작품은 얼룩진 주름들이 뭉쳐 만들어내는 형상들 사이의 붉은색은 유기적 생명력을 강조하는 듯하다. 심경자(1944‒ )는 오랜된 물건이나 자연물을 한지로 탁본하고 콜라주해서 전통적인 화법에 새로움을 불어넣는다. 추상이지만 깊은 공간감이 특징인 이번 전시 작품은 화면에 포함된 탁본이라는 이질적 영역도 하나의 흐름으로 종합한다.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비정형 형태들은 마치 여성의 내부기관 같다. 1940년대 일본에서 수학한 천경자(1924-2015)의 자연은 화려하고 이국적이며, 나른함과 욕망이 깃들어 있다. 작품 [아열대2]는 꽃과 나비라는 주제를 화병이 아니라 꽃보다 더 붉은 화면 바탕에서 바로 피어난 듯한 구도로, 화면 안에서 시선이 계속 움직여지는 역동성이 특징이다. 만개한 꽃다발이 함께하는 작품에서 여성적 주체의 욕망은 화려하게 피어난다.
출전; 월간미술 2025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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