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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특정적 site specific 미술에 대한 비평적 노트

이영철



미학의 행정화: 공장, 공원, 백화점, 창고, 거리 등에서 장소 지향적인 작업(site-oriented work)이 늘어간다. 이는 한국을 포함하여 코스모폴리탄 미술계의 공통 현상이다. 경제와 문화의 그로벌화 속에서 미술가들은 도시에서 도시로 이동함에 따라 중요한 것은 국가 간의 교환 보다는 도시와 도시의 연결이다. 국경의 존재는 종종 방해가 되기도 한다. 이제 장소에 합당한 작업을 해야 하는 작가는 더이상 작업실에 안주하는 오브제 제작자가 아니며, 성공적일 경우, 단순히 미술가가 아니라 세계 도시의 방문자, 여행자, 일시적인 비평-예술가, 사이비 인류학자 혹은 사회학자, 도시 연구가 등이 되어 베니스, 카셀, 서울, 도쿄, 샹하이, 베를린, 암스테르담을 철새 처럼 이동한다. 장소 특정적(site specific) 작업은 지형학적, 시간적 환경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그리고 부분적으로 프로젝트를 충분히 예견할 수 없고 사전에 프로그램화할 수 없는 여러 요소로 인해, 프로젝트의 구상은 일시적이고 때로는 변경되기도 한다. 오늘날 생산과 노동 관계의 암호로서 상품의 성질은 더 이상 제조 영역에 머물지 않고 서비스와 행정 산업으로 전환되었다. 이런 경제적 변화가 미술 영역에 초래한 것은 오래 세월에 걸쳐 고도로 전문화된 미학적 오브제를 생산하는 자로서의 미술가라는 것이 다소간 시대착오적 개념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미적 가공물을 직접 생산하는(produce) 것으로부터 기존 미술 기구와 제도 안에서 '비평-예술적(critical-artistic)' 용역, 사회 교육을 위한 창의적인 예술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자(provider)로 역할이 변하고 있는 것이다. 장소 특정적 미술을 행하는 자는 전통적 의미의 장인적 창작자와 그 의미 위상이 크게 다르다. 생산자에서 사용자(user) 위주로 개념상의 변화가 일어남으로써, 활동성(activity), 수행성(performity) 그리고 행정화(administration)가 장소특정적 미술에서 요긴한 항목이 된 것이다. 벤자민 부클로는 1960년대 말과 70년대의 미국 개념미술에 내재한 제도 비판적 성격을 행정의 미학(aesthetics of administration)으로 묘사했지만, 행정의 미학은 1980년대, 90년대를 거치면서 기호 경제의 확산과 사회적 코드 체계의 혼란 속에서 미학의 행정화로 이행해 버린다. 이제 미술가들은 미적 오브제를 만드는 사람에서 문화 설비자, 대중 교육가, 코디네이터, 문화 관료 등으로 변했다. 각종 문화재단의 위력이 강화되고, 미술관은 과거의 공공적 권위를 벗어버리고 점점더 문화 서비스 기관으로 스스로 변해간다.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 사이의 경계는 모호해졌고 이제 미술가들은 미술 기관의 행정 기능(큐레이팅, 교육, 아카이브)을 자신의 창조적인 과정의 부분으로 채택하기도 하고, 대안 공간, 온 라인, 재단 등에서 미술 매니저(큐레이터, 교육자, 공공 프로그램 디렉터)가 되기도 한다. 장소특정적 작업을 형태지각이나 표현 매체로 접근하는 것은 완전히 낡은 관점이다. 그런 관점에서는 장소특정적 작업은 고작해야 옥외에서 펼치는 설치 미술이 머리에 그려질 따름인 것이다.

미술관을 리사이클링 하기: 장소특정적 작업은 1960년대 말과 70년대에 모더니티의 사회적 장소로서의 미술관의 화이트 큐브 공간에 대한 대안 운동적 관점에서 생겨났고 도시적, 건축적, 풍경적 변수들과의 연관 속에서 장소site의 특정성에 주목한 것이었다. 이는 분명 공공 영역으로서의 협애한 미술관의 문을 박차고 나가 삶의 유동하는 현장이나 자연 풍경 속에서 '탈영토화의 동학(dynamics of deterritorialization)'을 실험한 것이다. 미술가들이 미술관 문화(과거형 시제 속에 거처하는)에 길들여져 뮤지엄 피스를 생산해온 방식, 그 정적이고 위계적 시스템에 대한 하나의 대척점이었다. 다니엘 뷔렌은 미술관 전시를 거부하여 도심과 거리, 옥외에서 전시를 했지만 행위의 결과물로서의 시각 정보와 기록물들은 결국 다시 미술관 안으로 들어오게 되고, 결국 아이디어든 미학적 물건이든 작품은 그것을 보호할 집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만들었다. 또한 모든 예술 작업들은 자신 안에 대지를 향해 스스로 설 수 있는 집(골조) 혹은 외관(facade)을 가져야 한다.(이에 대해 들뢰즈의 [철학이란 무엇인가]의 예술의 장 참조) 하나의 유행 언어가 되어버린 설치미술이 내재적인 골조를 갖지 못한다면 재료들은 무너져내리는 살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지각의 현상학은 살(감각)의 중요성만 이야기할 뿐 그것들이 의지할 수 있는 골조의 구도plan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렇다면 미술 작품을 위한 집으로서의 미술관은 화이트 큐브의 이념형이 아니라 복수태를 허용하는 가변 공간으로 리사이클링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장소특정적 미술은 반드시 미술관 바깥에서만 펼쳐질 이유가 없으며 내부로 귀환하여 보편화된 모더니티 장소로서의 미술관 공간을 시간화(운동적 요소들의 활성화)해야 한다. 운동은 정적인 것을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자로서, 그 핵심은 힘force이며, 다양한 힘들의 관계들을 조성하는 마술적 공리(一卽多, 多卽一)의 문제인 것이다. 시민사회의 모더니티가 전제하고 있는 미술관의 내부/외부의 구분, 공적인 영역/사적인 영역의 구분이 붕괴하는 과정 속에서(사회가 새고 있다!) 장소성에 새롭게 주목하는 모든 종류의 미술 작업에 대해 장소 특정적 미술이란 표현 보다는 좀더 포괄적인 표현으로서 현장 미술(in situ work)이라 말이 애용되기도 한다. 지리적 제약성과 홍보 미흡으로 인해 2회 부산비엔날레는 많은 사람들이 보질 못했으나, In Situ 작업들을 많이 선보였고, 그 이전에 [도시와 영상-의식주] 전시와 1회 공장미술제는 거의가 바로 장소의 특정성을 부각시키려는 시도였다. 온통 대형 창문으로 가득찬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샘 사모레는 시들을 기입해 넣었고, 호노레 도어는 이 파시스트 건축물의 구조에 pvc 관들의 유연성과 에너지를 불어넣었다. 그의 작업은 pvc 관들의 상대적 배치의 공간적 관계들에 국한되지 않으며, 그것을 관통해서 작용하는 에너지의 흐름이나 사용자(관객)의 참여의 결과로써 발생하는 사건이나 질(상태의 전이)을 통해 이해된다. 거기에는 매개 변수, 극한, 경계 그리고 카타스트로피 상태가 존재하며, 이것들은 항상 특이점(singularity) 주위에 모여든다. 화장실로 가는 복도 벽면에 이소미는 스마일 인간이 떨어져내리는 비디오를 프로젝션 했고. 교토의 영상 작가 그룹인 큐피 큐피의 비디오 작업은 광고판처럼 미술관 계단의 전면에 크게 부각시켰다. 이처럼 비디오 작업도 쓰임새에 따라 장소특정적 미술이 된다.


언술적 서사 공간discursive narrative space으로서의 장소:
4회 광주비엔날레는 미술관 내부와 외부 전시 전체를 장소 특정적 전시로 보여지게 총체적으로 구조화했던 사례로 기록될 수 있다. 그 내부는 역사적 장소의 의미와 컨텍스트를 기억 공간으로 재구축한 것, 장소의 역사적 제약과 이주의 경계가 만들어낸 정체성의 정치학이라는 의미의 공간화, 그리고 비엔날레관의 공시화된(synchronized) 다성성 전시가 각기 다른 수준과 방향으로 결합되었다. 일시정지pause라는 기치를 내세운 전시는 매우 중요하게도 전시 공간 자체를 일상 생활의 언술적인 서사 공간 discursive narrative space으로 활성화시키면서 협상, 협동, 리서치, 조직, 인터뷰 등을 작품의 내용에 적극적으로 포함하는 집중화된 노력을 보여주었다. 오늘날의 젊은 미술은 점점 제도 비판의 지향성과 의식화된 행정적인 자선 행위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시도는 세계 도시들을 이동하며 열렸던 일련의 프랫폼 심포지엄과 11회 카셀 도큐멘타 전시를 통해 다소 지나치리만치 정치적 접근을 시위했던 아카이브형 도큐멘타리 전시를 통해 보다 포괄적으로 구체화되었다. 오늘날 장소 지향적 작업은 모든 장소를 언술적 서사의 실효 공간으로 전제한다는 점에서 새로운 투쟁 방식을 고무시킬 수 있다. 역사적으로 그와 유사한 작업이 국내에 처음 나타난 것은 반(反)모더니즘 미학을 위한 미술 내적인 해석이 아니라 현실적 필요와 문화적 욕구로서 분출되었던 대성리 강변의 야외 전시와 민중 미술의 집단적 시위 현장 미술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개별적인 작업으로는 이우환을 위시한 한국의 모노크롬 세대의 입체 작업들, 그리고 탈모더니즘적 미술을 시도하던 일군의 청년 작가들의 작업에서 부분적인 시도를 찾아볼 수 있다. 아마도 장소성의 문제에 관한 한, 현상학적 지각의 범주 내에서 철학의 장소성을 미술에 적용하려 했던 이우환, 그리고 일상적 삶에서 언어-상황의 결합을 시도했던 이건용, 성능경의 작업 정도가 비교적 장소 특정적 미술의 특성에 근접하는 것이라 할만한 데, 그들의 경우에도 모더니즘의 자율성, 자기지시성 미학의 추구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장소의 탈장소화라는 순수성 논리에 머문 감이 있다. 1990년대 들어와 개별 작품으로 기억에 남는 것은 2회 광주비엔날레에서 하랄드 제만이 몇몇 작가들의 작업을 장소성을 살려 재문맥화한 사례들이다. 그는 게리 힐의 아주 작은 비디오 작품(잠망경)을 거의 1백평 규모의 어두운 방 한쪽에 설치함으로써 장소에 대한 새로운 지각을 유발시켰다. 또한 테니스 공들이 큰 방 안에서 우발적으로 날아다니는 작품, 5개의 전시실을 잇는 복도의 벽면에 미니멀적인 점들을 찍은 닐 토로니의 작업. 존 케이지와 부르스 나우만의 각각의 사운드 작업에서는 방은 결코 작품을 위한 텅빈 컨테이너가 되지 않으며 관객은 자신의 신체를 통해 소리의 물질성, 공간의 볼륨과 시간성을 강렬하게 체험하게 된다. 진동하는 여백으로서의 공간은 자체 안에 시간성을 가지며 소리의 진원, 운동 거리와 보이지 않는 소리벽(실제의 벽은 소리벽의 가시화이다)으로 이뤄진다. 여기서 우리는 시각적 원근법의 기원을 청각적 작용으로 접근해볼 수 있는 아이디어를 얻게 된다.


현장작업(in-situ work)의 윤리학: 장소 지향적 설치 미술은 감각적, 물질적 요소들의 멍청한 기표적 유희도 아니고, 기의로 닫혀진 단순하거나 복잡한, 나이브하거나 지적으로 포장된 상자가 아니며, 일상적 삶에서 현재형으로 그것이 작동하는 상황적 의미에 연관된다. 따라서 장소 특정적 미술은 원래 '작품이 놓여진 바로 그 장소를 떠나면 파괴되어야 한다'(리차드 세라)는 윤리의식에 기초한 것이었으나 이제는 '장소가 적절하면 작품이 그 장소로 이동하여 조절될 수 있다'로 바뀌었다. 빌 바이올라의 비디오 작품은 장소와 용도의 차이에 따라 다른 작업이 된다. 사람들은 이미 만들어진 것들의 세계에 중독되어 현실(생성)의 시간을 보지 못한다.

공간은 매체(medium)이다: 장소 특정적 미술에서 관객은 고정된 작품을 만나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 작품이 시작하고 어디서 끝나는지, 분산된 부분들에 대해 어떤 위치를 발견하고 취해야 할지 스스로 정해야 한다. 작가 역시 자신의 작품이 관객과 어떤 위치에서 만나지게 될 것인지 미리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에서 공간은 매체가 되었다. 매체가 된 공간은 예술적 개입에 의해 언제나 새로운 예술 공간으로 탄생하며, 이때 행위자의 주관적이고 사회적 시간이 장소에서 무대화staging한다.

공간은 실천된 장소(practiced place)이다: 공간은 공간을 방향지우고, 정초시키고, 시간화하고, 그것을 다양체로 작동시키는 예술적 개입의 효과이다. 현장 설치 작업들은 매우 기능적인 변이 공간들, 운동과 순환의 공간들을 취급하며, 그것의 상황주의적 성격은 배경으로 존재하는 문맥들에 균열을 가한다.

공간은 말(word)이다: 공간은 '발설된 말'과 같다. 말은 항상 관습, 관행에 의한 용어로 변형되며, 현재의 행위로 정초되고, 사용되는 맥락들에 의해 수정된다. 70년대의 개념적 현장 조각이 낙하, 분리, 굴리기, 접기, 자르기 따위의 물리적 단위로서 탈장소성을 드러냈던 반면에 이제는 협상, 협동, 리서치, 조직, 인터뷰 등이 작품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는 건축적, 도시 담론 안에서 구체화되고 있으며, 교환, 이동, 소통의 확장으로 인해 사라져가는 공간적 장벽들에도 불구하고 장소에 의해 제약되는 정체성들이 세계 도처에서 새롭게 이슈화되기도 한다.

작업은 항상 현실적real이다: 현장 작업은 현실(생성)의 시간을 다룬다. 그것은 이미지의 배열이 아니라 비유기적 생성 엔진이다. 시간은 언제든 물질을 생산함으로써, 정확히 말해 물질을 언제나-다른-생성(becoming-ever-different)의 과정으로 도입함으로써, 스스로를 표현한다. 그리고 항상 다른 것으로의 생성(야생성)이 산출하는 것을 비로소 새로움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앙리 베르그송은 적절한 말을 했다. '현실, 그것은 끊이지 않는 생성이다. 그것은 스스로를 창조 혹은 재창조하지만 무엇인가 창조되어진 것으로써 존재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장소 지향적 미술은 무엇인가 이미 창조된 것이 아닌 현실에 충실한 지향성, 오로지 생성의 사건에 자신을 맡기며 한발씩 자신의 운명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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