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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의 땅에서 부르는 서정성의 노래 - 권옥연

김종근

그는 누구인가?

만약 인사동 전시장에서 건장한 체격에 남자가 세련된 매너로 아름다운 여인과 볼에 프랑스식 인사인 비쥬를 하면서 포옹을 한다고 하자.
혹은 어느 식당에나 들어서서 “장모님”하며 들어와 “나 왔어” 하는 팔순의 노화백이 있다 하자.
화가들의 경조사에 빠짐없이 나타나는 화가가 있다고 치자. 아니 성악가 이상으로 노래를 멋들어지게 부르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이 바로 무의자로 자처하는 우리시대에 최후의 로맨티스트 권옥연이다.
권옥연, 그는 사실 당대의 최고 인기작가이자. 멋쟁이 화가이며 휴매니스트이다.

알다시피 그는 함흥의 명문가인 권진사댁의 5대 독자로 태어났다. 어린 5살 되던 해는 조부로부터 붓 쓰는 법을 배웠으며, 양악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심취했던 부친의 바이올린을 통해 악음(樂音)을 익혔다고 했다. (화가가 아니었으면 지휘자가 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할 만큼 그의 노랫소리를 들어보면 우리는 그가 무늬만 화가지 거의 성악가 수준이다.) 또한 유배되었던 추사 김정희가 함흥에 들르면 꼭 찾는 집안이 권진사 댁이었다고 하니 일찍이 그의 예술적인 환경과 분위기가 어떠했는지 그의 어린 시절을 엿 볼 수 있다. 여섯 살 때 그가 아버지를 잃은 것은 불행이었다. 바이올린을 하셨던 부친의 할아버지는 그에게 마저 미술을 허락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미술학교에 진학하도록 한다면 학교에 불을 지르겠다고 교장을 찾아가 으름장을 놓았던 할아버지였다. 그러나 타고난 끼는 어쩔수 없었다. 그는 이미 경복고 시절 “선만 (鮮滿) 전람회”에 가작과 입선을 졸업반 시절엔 당시의 권위 있는 선전에 입선을 함으로서 이미 천부적인 화가로서의 재능과 이름을 날렸다. 그는 그것이 가장 후회스럽다고 했다, 정말 화가가 된 것이. 나는 단 한번도 내가 그림이 좋아서 그림을 그린 적이 없기 때문이다. 순전히 그림을 잘 그린다고 알려지면서 떠밀려 화가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내 생애에 가장 불명예라고 했다. 한번도 스스로의 그림을 자랑하지 않고 겸손으로 살아온 이러한 내면에는 그만큼 인기와 사랑을 받으면서 살아온 예술가의 험난함을 암시하기도 한다. 초기 권옥연 예술세계의 출발은 시대적으로 일제 말기를 기점으로 시작된다. 부유했던 환경에 작가로는 드물게 동경 제국미술학교을 졸업했고, 따라서 해방직후 미술활동까지 그는 일본의 미술은 물론 서구 현대미술의 충분히 배경 속에서 성장했다. 그는 일본에서 미술수업을 한 대다수 선배 화가들처럼 아카데믹한 사실주의를 비교적 충실하게 습득했다. 오히려 권옥연은 이런 관학적인 아카데미즘의 세계에 빠지지 않고, 보다 서양의 후기 인상파 예술가들의 화풍에 마음을 두었다. 마침내 그는 한국적인 미감을 보여주는 서정성을 더하면서 그만의 독특한 양식으로 권옥연풍의 색조와 형태, 그것으로 그만의 작품을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고갱에 심취한 그의 데뷔작 「고향」

가장 그 다운 전형적인 대표작은 국전1회의 입선작이었던 <고향> (1948. 193x130cm )으로 그의 작품 중 단연 돋보이는 풍경화 대작이다. 이 작품은 바다와 들녘을 배경으로 한 6명의 처녀들이 다양한 자세와 포즈로 구성 된 작품이다. 4명의 여인들은 서 있는데 그 중, 한 여인은 과일바구니를 이고 있는가 하면, 항아리를 안고 서 있는 여인 ,머리를 빗고 있는 여인의 정경 , 땅에 물그릇을 내려놓고, 피리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색에 잠긴 여인 , 이들은 마침 목욕을 마친 여인들로 자유스런 모습들이다.
멀리 수평적인 구도 위에 겹쳐진 배경과 구성은 향토적이며 목가적인 서정성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기본적으로 잘 짜여진 구성을 바탕으로 색상의 대조가 극적으로 대비되고 있다. 붉은 색과 청색의 대조적인 화면을 통하여 다양한 인물의 시선을 집약시키고 있다. 사실적인 화풍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1934년 이인성의 <가을의 어느 날> 이라는 작품을 떠올릴 정도로 강렬하고 구성에서 적색과 청색의 극단적인 조화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동시에 <고향>이라는 제목에서도 이미 고갱의 타히티 시대에 작품을 연상시키는 특징적인 요소들을 강렬하게 풍기고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란 그림에서처럼 고갱 적인 색채와 형태 등이 종종 보인다. 그는 고갱과 루소를 특별히 좋아했다. 루소의 그 천진난만함과 소박함 , 고갱의 그 열정적인 색채와 원시성을. 곧잘 그의 향토성과 화풍에 있어서도 고갱의 인물을 통해 조형적 영향을 받았다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다.


풍경과 인물 ,고갱의 영향

1960년대 이후에는 화면의 설정이나 색면 분할, 구성 방법에 있어 그가 얼마나 고갱에 경도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타히티란 원시적인 자연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여인의 모습들을 옮겨온 듯한 권옥연 칼라에 여인들로 고갱풍의 이미지로 묘사된다. 그는 자연이라는 풍경을 기본적인 회화의 요소로 하면서 그 안에 자신의 조형성을 색채와 구성으로 승화시키려는 특성을 고집했다. 그러나 고갱이 구상적인 작업을 중심으로 후기 인상파적 태도를 보였다면 권옥연은 다소 비구상작업도 구상작업 못지 않게 보여주었다. 그는 다른 구상작들이 가지지 않는 독특한 구성으로 절제된 색조의 침잠 하는 톤으로 작품들을 완성했다.
그의 작품 속에서 가장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쟝르는 단연 인물과 풍경이다.
이 인물과 풍경은 어느 누가 보아도 쉽게 권옥연 표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독특한 변형 (데포르마숑)과 비교적 안정된 색채로 격조 있는 분위기를 형상화한다.




60년대 화풍 이후 권옥연 풍경화의 새로운 조형성

권옥연이 파리에 간 56-60년은 한창 앵포르멜이 풍미하던 시기이다. 많은 화가들이 앵포르멜의 시대적 미의식에 머물고 있었는데 그 역시 5-60년대 작품은 그의 화면에서 비정형의 흔적과 형태를 암시적으로 보여준다.
초기의 회화세계가 이렇게 추상성에서 다분히 이국 취향 적인 색채를 띄며 앵포르멜에 크게 동요되거나 편승되지 않고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와 모티브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탁월한 우리 것에 대한 미감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결과로 살롱 도 똔느나 레알리테 누벨에 초대받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고 앙드레 부르통의 자택에 초대를 받는 등 이름을 날렸다.
1960년 이후 권옥연의 작품세계는 초기의 구상적인 세계보다는 다소 내면의 감성을 조형적으로 표출해내는 심화 된 추상성의 회화형식을 보여준다. 우화나 절규 등 50년대 후반의 작품들이 대부분 어떤 구상적인 모티브를 추상화시키거나 단순화하는 특징들이 그것이다. 그러나 60년대 후반 7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의 화면의 풍부한 거친 마티에르와 특유의 회색조의 톤들이 원숙한 화풍으로 단순화 된 양식들을 보여준다. 그 모티브는 많은 비평가들이 지적하듯이 고대 토기 모양의 형태와 토기 표면에 있는 구멍, 그리고 추상적 형태의 기호들과 어울려 화면에 등장한다. 이러한 골동품에 대한 애착과 관심은 그의 색채가 회색조로 천착하게 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그림의 특징은 절제된 형태와 차분한 토기빛 색조의 자연스런 구성으로 대중을 사로잡는 감성적인 화면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80년대 후반 90년. 여전히 권옥연의 작품세계는 두 가지의 변모를 보이고 있다. 70년대 후반의 회색을 주조로 한 여인상과 풍경화가 그것이다. 풍경화로 보면 그의 향토적 서정성이 짙은 앞마당에 자리하고 구성적인 집과 풍경들은 70년대 후반 프랑스의 풍경과 기억들이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80년대는 우리의 전원적인 시골풍경을 연상시키는 시기로 불려질 만큼 주목할만한 작품들을 제작했다. 그 작품들은 2002년 국립 현대미술관 오늘의 작가전에 일부가 선보였다. 그러나 그의 진면목은 그가 도안하고 손수 제작한 세종문화회관의 대극장과 소극장의 무대에 설치된 타피스트리 기법을 응용해서 장식한 작품이다. 이 대극장의 무대막 작품은 십장생(十長生)의 이미지를 현대적인 조형감각으로 디자인한 권옥연 예술의 또 다른 진수이다.

그는 이제 평면에 대한 그 자신의 역량을 어느 정도 만족한 듯 그는 90년대 들어 평면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에서 벗어나 입체적인 조각작품을 보여주었다. 주로 테라코타로 제작 된 이 작품들은 그의 삼촌인 조각가 권진규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권옥연의 회화와 조각가들은 그것이 구상이든, 추상이든 독특하면서도 일관된 특징으로 인간과 풍경의 세계를 형상화했다. 환상적이리만큼 회색조의 운치와 정조로 우리들의 민족적인 감성을 회색으로 변환시키려는 듯 세련된 환상과 구성의 세계로 우리들을 그의 예술세계로 밀어 넣었다.
그는 완벽주의를 꿈꾸는 화가이다. 또한 스스로 모든 사람들에게 완벽하게 보이고 싶어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종의 결벽증이라 할 만큼 . 요즈음도 가끔 과거의 자기 그림을 가져와 감정을 해달라거나 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그는 자기가 이렇게 그림을 못 그렸는지 볼 때마다 좌절하며 괴로워하고 실망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수없이 많이 그려온 인물이 가장 어렵다고도 했다. 요즘도 정말 내 그림의 특징이 무엇인지 그런 그림을 단 한 점이라도 남기고 싶어하는 열망을 곳곳에서 드러내었다.
장충동 아뜨리에를 증축하면서 잠시 짬을 내 만난 부인 이병복여사(극단 자유 대표)는 옛날 편지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무의자 권옥연 그는 팔순의 나이에도 지나간 대작들을 다시 붙들고 손을 보고 있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서 나는 선명하게 오버 랩되어 기억한다. 몇 년 전 그와 함께 파리에서 30 키로쯤 떨어진 오베르 쉬르 와즈의 고흐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을 .
그 눈물은 자기는 아직 인생을 더 살아야 한다고 일생을 몸바쳐 살다간 불행했던 화가 고흐의 무덤에 빈손으로 온 자신의 불찰을 나무라고 있는 휴머니티였다.
꽃 한 송이 사 가지고 오지 못한 자신의 행동을 자책하는 가슴 여린 화가 .그것이 화가 권옥연의 참다운 모습이다. 아마도 풍경화로 이만큼 우리의 대중들의 감성을 붙들어 놓은 화가가 일찍이 없다는 점에서 이제 그의 예술세계에 매력을 새롭게 평가해야 할 때이다.


- 국민은행 FOR YOU 2004년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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