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 모더니즘에서 한국적 모더니즘으로-추상의 주체적 발전
한국화에 바치는 경의 1950-2007(서울시립미술관)
서구 모더니즘 회화는 주지하다시피 추상미술과 이를 지지하는 형식논리로써 대변된다. 특히 클레멘테 그린버그가 정식화한 논리는 매체적 특수성과 장르적 특수성으로 귀결된다. 그러니까 회화를 회화이게 해주는 특정성이나 조각을 조각이게 해주는 특정성이 내용보다는 순수한 형식적 요소로부터 기인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내용은 재현의 논리를 지지하는 것으로서, 원래는 문학 고유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내용이 조형예술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것으로까지 여겨진다. 순수미술에 대한 강박으로까지 비치는 이 논리는 심지어 창작주체의 개성이 간여할 여지마저도 거부한다. 그럼으로써 외관상 어떠한 내용이나 의미도 배재된 차갑고 무미건조한, 중성적이고 가치중립적인 회화, 철저하게 표면(요새 말로는 파사드에 해당하는)으로만 축조된 회화가 가능해진다.
형식논리가 이처럼 엄격하게 적용된 사례가 있는가 하면, 이보다는 상대적으로 좀더 느슨하게 적용된 경우가 제안되기도 한다. 소위 물성과 현상 그리고 행위 개념이 그것이다. 1960년대를 전후하여 한국현대미술의 초입에 영향을 미친 대륙권의 앵포르멜과 영미권의 추상표현주의 미술을 지지하는 것이 바로 이 개념들이다. 비정형의 얼룩과 우연성의 개입, 창작주체의 내적 에너지가 실린 붓질(스트로크), 재료 고유의 물질적인 성질과 창작과정에서 비롯되는 현상적인 특수성을 매개로 하여, 작업을 의미론적인 대상으로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는 여지를 다시 열어 놓은 것이다. 이때의 의미작용은 재현논리의 변화된 한 형식으로 봐야 하며, 화면에 나타난 추상적 기호가 불러일으키는 상기와 암시에 기댄 본질주의의 한 버전으로 봐야 한다. 다시 말해서, 형식주의를 통해 추상미술의 특정성을 견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본질주의(혹은 원형주의)를 통해 의미론적인 확장을 꾀하려는 절충주의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한국현대미술에 나타난 초기의 영향관계와 관련해볼 때 이 논리의 적용은 서양화의 경우에는 상당한 설득력을 갖지만, 수묵화의 경우에는 무리가 따르는 것이 사실이다. 주지하다시피 수묵화는 사물의 감각적 표면을 재현하기보다는 그 이면에 가려진 정신(寫意)의 표현이라는, 독특한 화법을 발전시켜왔다. 또한 붓과 먹과 종이가 물을 매개로 해서 어우러지는 과정에서 비롯된 선염과 발묵, 농묵과 담묵, 그리고 갈필 등의 필법의 개념은 사실상 재료의 물성과 현상에 대한 형식실험의 한 형태로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수묵화는 진작부터 그 자체 속에 형식논리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저간의 사정을 고려하더라도 수묵화가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 매체적 특수성에 대한 인식이나, 추상미술의 한 형식으로서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 그리고 의식적인 층위에서의 형식논리에 대한 인식 등은 다분히 서구 모더니즘의 소산인 것이다. 말하자면 추상 수묵화 운동은 이러한 자생적인 인식이 잠재돼 있던 차에 모더니즘의 형식논리를 만남으로써 촉발된 것으로 보인다.
평자들은 한국현대 수묵화가 전개된 양상을 대략 1960년의 묵림회(墨林會)의 발족, 1980년대 초.중반의 수묵화 운동, 1980년대 후기의 자유구상, 그리고 1990년대의 동풍(東風)의 출현 정도로 구분하고 있다. 한국화회로 계승 발전한 묵림회는 수묵의 매체적 특수성에 바탕을 둔, 다변화된 형식실험으로써 순수추상을 지향한다. 수묵에 의한 운필과 먹의 번짐에 의한 우연성 등 비구상이나 표현적 추상의 경향성을 띤다. 수묵담채를 중심으로 한 표현과 직관적인 대상파악에서는 현대적인 문인화의 정신적인 단면이 읽힌다. 그리고 1980년대 초.중반의 수묵화운동은 수묵 자체의 매체적 특수성을 견지하면서, 발묵 현상을 사의적(寫意的) 표현에 바탕을 둔 형상의 도입과 일체화한다. 그런가하면 석도의 화론 즉 ‘무법이 곧 법’이라는 논리에 의해 견인되는 1980년대 후기의 자유구상 회화는 일종의 자유연상기법으로써 형식과 법을 파괴하는 형식실험이 특징이다. 그리고 동풍은 ‘지금 여기’라는 삶의 현장성에 주목함으로써 현실적 풍경이나 사회적 풍경 등 풍경의 다양한 버전을 보여준다.
이상의 구분을 근거로 해서 한국수묵화의 경향을 대략적으로 일별해보면, 수묵추상, 수묵산수, 자유구상, 그리고 기타 기하학적 환원과 콜라주와 탁본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그 자체 결정적인 것이기보다는 편의적인 것으로서, 대개 그 경향들은 경계를 넘나들면서 상호 작용하고 있다.
수묵추상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을 중심으로 볼 때 서세옥, 신영상, 정탁영, 장상의, 이종상, 이철주, 송수련, 이종목, 조순호, 이길원 등은 수묵추상의 경향성으로 범주화할 수 있다.
사람 인(人) 자를 추상화한 서세옥의 그림은 사람과 사람이 어우러진 모습을 연상시킨다. 이는 서로 기대어 서 있는 사람의 형상으로 보이는가 하면, 중첩된 산의 형상으로도 보인다. 중요한 것은 감각적 형상이 아니라 심의적 표상인 것이다. 그 이면에는 그림과 문자를 하나로 보는 전통적인 관념에의 공감이 놓여 있으며, 서체추상작업과 함께 근래의 픽토그램 즉 일종의 문자조형작업과도 접맥된다. 신영상의 그림은 수직선과 수평선 그리고 사선이 교직된 추상적 화면으로, 빗살무늬나 전통 한옥의 문창살을 떠올리게 한다. 중첩된 붓질이 어우러진 화면에서는 내적 울림과 함께, 감각적인 대상을 선과 획의 최소한의 형식적이고 조형적인 요소로 한정하려는 기하학적 환원이 느껴진다.
정탁영은 화면에다 종이 조각들을 흩어놓고 그 위에다 먹물을 부가하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독특한 추상화면을 만들어낸다. 이로부터는 일종의 계획된 우연성에 대한 공감과 함께, 중첩된 화면에 연유한 시간과 세월의 결이 느껴진다. 때로는 종이와 마대 조각을 콜라주하기도 하는데, 이때 화면에 콜라주 된 마대조각과 종이가 맞닿는 경계에 먹물이 스며들어 비정형의 얼룩을 만든다. 이로써 화면의 독특한 표면질감과 함께, 특히 소재의 물성에 대한 관심이 읽혀진다. 그리고 장상의는 수묵담채를 기저로 하여 춤사위와 같은 전통적인 이미지를, 그리고 오방색으로 나타난 상징적인 이미지를 추상화한다. 바람과 넋, 꽃비 등을 주제로 한 작가의 그림은 말하자면 전통적인 이미지를 기억을 통해 환기해내는 과정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근작에서는 꽃을 추상화한 일련의 그림들과 함께, 모노톤의 화면과 정적인 기조를 유지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더 내면화된 경향성의 회화를 보여주고 있다.
이종상의 수묵추상을 특징짓는 진경 시리즈는 사물대상의 골격에 대한 사의적 표현을 보여주고 있으며, 더불어 원형상 시리즈는 상징적이고 은유적인 기호를 형상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예컨대 작가의 독도진경을 보면 독도의 감각적 표면현상(살)을 발라내고 그 이면의 본질(골격)을 그려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이 결코 건조하거나 앙상하지가 않은데, 이는 수묵의 발묵 효과가 고유의 아우라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진경을 단순한 실경을 넘어서는 어떤 경지로 이해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철주의 우주로부터 연작은 즉흥성과 행위가 그려낸 흔적의 소산으로 보인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중첩된 붓질에서는 역동성이 느껴지며, 이는 기(氣)의 방출과 동질의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몸에 기인한 행위와 관념적 실체로 나타난 우주를 하나로 보는 동화현상이, 상호작용성이 읽혀진다.
배채법(엄밀하게는 그림의 전면과 이면을 뒤집어서 배접한)으로써 마치 화면의 이면으로부터 배어져 나오는 듯한 은근한 색감과 표면질감이 특징인 송수련의 그림에선 전통적인 이미지의 형상화가 느껴진다. 비정형의 얼룩들과 스크래치가 삶의 상처를 암시하며, 화면에 무심하게 툭툭 찍혀나간 집적된 점들이 마치 시간을 헤아리는 듯한 심의적 현상을 불러일으키며, 새끼를 꼬아 만든 자리(방석)의 표면질감과 함께 질박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로써 작가의 감성 레이더는 무의식적이고 잠재의식적인 지층에 맞닿아있는 기억의 원형, 존재의 원형을 겨냥하고 있는 것 같다. 이종목 역시 배채법에 따른 우연성의 효과를 조형의 일부로서 적극 수용한다. 마치 화면의 공간 속을 부유하는 듯한 비정형의 얼룩들에선 사물과 기억의 희미해진 흔적과도 같은, 그 경계가 모호한 암시적인 대상을 붙잡으려는 의지가 읽혀진다.
그리고 조순호의 그림은 외관상으론 꽃과 새 등의 자연물을 소재로 하고 있으나, 이는 다만 사물의 감각적 형상을 취했을 뿐이고, 사실은 거의 추상표현주의에 가까운 농묵의 자유분방한 발현이 특징이다. 그런가하면 수평선과 수직선의 교직과 최소한의 색면구성으로 구조화된 이길원의 그림은 음과 양, 시간과 공간, 그리고 유한과 무한으로 나타난 거대담론의 전통적인 주제의식을 이미지화하고 있다. 그 이면에선 본질주의와 함께 순수한 형식논리에 대한 공감이 느껴진다. 사물의 감각적 표면형상을 해체하고 이를 다시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점차 화면으로부터 육안으로 확인해볼 수 있는 형상은 사라지고, 마침내 순수한 조형의지만 남겨진다.
수묵산수 수묵산수로 범주화할 수 있는 작가들로는 송영방, 김호득, 송수남, 문봉선, 오숙환, 송계일 등이다.
이들 중 송영방, 송수남, 송계일의 그림은 중첩된 산세나 군집을 이룬 섬 등의 자연 소재를 반(半)추상화한 수묵담채로 귀결된다. 비록 자연을 소재로 하고는 있지만 그들의 그림에선 실상 형상과 비형상, 재현과 추상의 경계가 무의미할 만큼이나 상호작용성과 통합에의 인식이 느껴진다.
특히 폭포나 계곡을 소재로 한 김호득의 그림에서는 그 감각적 형상을 몇 안 되는 중첩된 필획으로 환원하려는 의지가 읽혀지며, 근작에 와서 이는 최소한의 점만으로 축조된 그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사물과 사물 사이, 형태와 형태 사이, 대기와 대기 사이에 천착한 이 일련의 그림들은 붙잡을 수도 정형화할 수도 없는 자연이 내포한 일종의 암시적인 속성을 드러낸다.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이 긴밀하게 교감하는 이 그림들에서는 자연의 틈과 여백에 대한 인식이 느껴지고, 호흡과 기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김호득의 그림이 직관과 응축된 에너지의 즉흥적 발현에 의해 견인된 것이라면, 주로 아득한 수평선을 소재로 한 문봉선의 그림은 상대적으로 더 내면적이고 정적이고 관조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자연의 정적과 함께 습윤한 대기를 느끼게 하는 담백한 먹 효과가 내재화된 풍경, 심의적 풍경으로 부를만한 정조를 불러일으킨다.
이와 함께 농담이 엷은 먹을 수차례 중첩시키는 과정을 거친 오숙환의 그림은 투명하고 맑은 인상을 준다. 마치 물이 빠져나간 강변의 모래톱을 연상시키는 그림에선 섬세한 결이 나타나 보인다. 그리고 이는 그대로 중첩된 시간의 지층을 보는 듯한 아득한 느낌을 자아내며, 때로는 우주공간의 막막한 공허를 불러일으킨다. 더러는 한지를 인두로 지져 부분적으로 비정형의 얼룩을 조성한 다음, 그 위에다 별자리와 같은 관념적인 기호를 그려 넣은 화면을 수묵그림과 병치시키기도 한다. 이로써 작가는 감각적인 공간현상과 관념적인 공간개념이 그 경계를 잃고 하나로 통합되는 절대공간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자유구상그런가하면 홍석창, 이철량, 이왈종, 황창배, 김병종, 석철주, 김대원 등의 그림은 자유구상 경향의 회화로 범주화할 수 있다.
홍석창은 꽃 등의 자연 소재를 반추상화하고 있는데, 이로부터 내적 에너지의 분방한 표출과 함께 추상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거칠고 질박한 표면질감과 필세가 느껴진다. 그리고 이철량의 그림에서는 그 농담이 엷은 먹과 중간 먹 그리고 짙은 먹을 중첩시켜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이 반드시 순차적이지는 않으며, 그때그때 드러나는 화면 자체의 속성에 따라 상호 내포적으로, 상관적으로 작용되는 듯 보인다. 수묵과 채색이 어우러지는가 하면 추상과 형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의 그림은 기실 신시(神市)를 주제화한 것이다. 사람과 사람이, 인간과 자연이 하나로 어우러진 어떤 경지를 암시하는 신시는 더 나아가 회화를 이루는 화면 내의 개별 요소들이 그 차이와 경계를 허물고 서로 일체되는 수묵의 경지를 지시하기도 한다.
한지부조 위에 아크릴 칼라로 그린 이왈종의 생활의 중도 연작에서는 최근에 이슈가 되고 있는 일상성 담론에 대한 공감이 느껴지며, 그 자체 거대담론에 대한 안티테제의 한 형태로 보인다. 수묵화와 관련해볼 때 거대담론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아마도 전통적인 묵법이 될 것인데, 작가의 그림에선 이러한 묵법에 구속 받지 않는 자유분방한 표현이 발견된다. 실경사생에 의한 소소한 그림들과 일상사를 민화적인 방법으로 재구성한 그림들에선 세속적인 삶, 중도적인 삶에 대한 긍정이 읽힌다.
형식파괴와 자유구상으로 특징되는 황창배 역시 상당정도 전통적인 민화에 나타난 한국적인 이미지를 재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이를 실현하고 있다. 이와 함께 일종의 자유연상기법에 근거한 일련의 그림들에선 한국의 집단적인 무의식의 원형을 추출하려는 작가의 의지가 읽혀진다. 그런가하면 김병종의 바보 예수 연작에서는 시대를 풍자하는 메타포의 한 형식이 읽혀진다. 이와 함께 한지 릴리프로 떠낸 저부조 입체의 표면에다 채색한 민화와 설화를 소재로 한 생명의 노래 연작에서는 원형적인 생명력의 분방한 표출과 함께, 도가사상에 그 바탕을 둔 상생(相生)의 철학에 대한 공감이 느껴진다. 이로써 작가는 생명의 본질과 그 환희를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자유구상과 몽환적인 화면이 특징인 석철주는 보이는 것과 보는 것 사이의 주제에 천착한다. 물감을 바른 화면 위에다 물로써 그림을 그리고, 채 마르기 전에 이를 지우는 식의 소위 훔치기 기법으로 그린 그의 그림은 물로 그리기라는 일견 역설적인 화법이 구사되고 있다. 이로써 작가의 그림은 그 경계가 흐려진 모호한 사물의 존재양태를 드러낸다. 일견 70.80대 한국모더니즘의 회화적 성과로 지목되고 있는 단색조 회화와의 영향관계가 느껴지기도 하고, 때론 네거티브 이미지나 적외선을 통해 투시해 본 듯한 사물의 이면 형상이 연상되기도 한다.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가시적이고 감각적인 표면현상을 넘어 사물의 비가시적인 본질을 붙잡으려는 의지의 소산으로 보인다. 그리고 감각적 사물현상을 반추상화한 이미지와 색면 콤포지션이 결합된 김대원의 그림에선 우연성과 즉흥성이 그 적극적인 계기를 얻고 있으며, 이로부터는 내적 에너지의 분방한 표출이 느껴진다. 화면에 나타난 중첩된 결들이 시간의 지층을 보는 듯하며, 기억으로 되살려낸 사물현상의 희미해진 흔적을 연상시킨다. 이로써 작가는 일종의 기억놀이로 정의할 만한 특유의 주제의식을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기하학적 환원, 콜라주와 탁본 이외에 이규선과 홍순주가 그린 일련의 그림들에선 일종의 기하학적 환원으로 정의할 만한 형식논리에의 공감이 확인된다. 특히 홍순주는 전통적인 조각보에 착안한 화면구성과 모시와 삼베 등의 표면질감을 재현하는가 하면, 색동천에 나타난 원색을 부분적으로 차용하기도 한다. 이로부터 기하학적 환원과 함께 여성적인 감수성이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원문자는 엠보싱 된 한지의 표면에 채색한 저부조 작업을 통해서, 그리고 김춘옥은 콜라주 작업을 통해서 각각 수묵의 표현영역을 증대하고 있다. 이는 수묵 고유의 그리는 과정에다가 만들고 축조하는 공작성을 더해 평면의 한계를 확장한 것이다. 특히 꽃과 자연을 반추상화한 김춘옥의 콜라주 작업은 엄밀하게는 데콜라주로 보아야 한다. 한지를 여러 겹 배접한 위에다 이미지를 그리고 채색을 한 연후에 이를 부분적으로 뜯어낸 그의 화면은 시각적 기호의 경계를 넘어 촉각적인 경험에로 유도한다. 한지를 뜯어낸 비정형의 자국 자체가 이미지의 한 요소로서 기능하며, 그 자국과 화면에 그려진 이미지가 하나로 어우러지는 중첩된 화면이 특징이다.
그리고 심경자는 70년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특유의 탁본 기법을 지속해오고 있다. 그의 화면에는 탁본에 의해 채집된 온갖 기물들의 이미지가 혼재한다. 나무를 횡단면으로 자를 때 생기는 나이테와 그루터기, 나무껍질, 목판에 난 옹이, 옛 동경(銅鏡)의 뒷면에 돋을새김을 한 문양, 엽전과 기와편(기와 조각), 떡살문양의 목판, 석상(石像), 돗자리, 가마니 등의. 전통적인 소재로부터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채집된 이 기물들은 본래의 형태를 상실하고 해체되면서, 화면 자체의 논리로 편입되고 재편된다. 이로써 아득한 시간 저편으로부터 발굴해낸 유적인 양 경화(硬化)되고 박제된 사물의 희미해진 흔적을 보여준다. 일견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관조의 미학으로 부를 만한 작가의 작업은 물리적인 시간 저편의 원형을 떠올려준다.
수묵화는 사물, 세계, 대상의 감각적 표면현상에 대한 재현의 논리보다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표현에 강하다. 물을 매개로 한 먹과 종이의 만남은 스밈과 침투로 나타난 일체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는 지지대와 그 표면에 피막을 형성하는 서양의 불투명 매체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수묵화는 풍부한 화면효과와 함께 심의적 표현을 가능하게 해주지만, 자칫 현실성과는 거리가 먼 거대담론과 순수한 관념적 유희에 머무를 수도 있다. 따라서 수묵화가 갖는 매체적 특수성의 경계를 넘어 ‘지금 여기’의 동시대적 삶을 담보할 수 있는 가능성과, 인간실존의 보편조건을 표상하는 도구로써의 가능성이 모색돼야 한다. 예술이 시대의 자식이라는 당위적 요청으로부터 수묵화 또한 자유로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