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병춘의 회화
흐린 풍경과 검은 정물 흐린 풍경과 검은 정물. 풍경은 왜 흐리고 또한 정물은 왜 검은가. 흐린 풍경은 그저 나와는 상관없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는 무심한 풍경이 아니다. 또한 검은 정물은 그저 나와는 무관하게 내가 지나치는 무의미한 정물이 아니다. 흐린 풍경과 검은 정물은 나에게는 피상적인 세계의 지평(풍경과 정물)을 내 안쪽으로 불러들여 나와의 관계 속에서 재맥락화한 내 마음의 풍경이고 정물이다. 흐리다는 것, 그리고 검다는 것은 무심하고 무의미한 세계의 지평에 대해 내가 간여하고 개입하여 그 세계의 일부를 내 것으로 취한 만큼의 질량의 흔적이다. 그러므로 흐린 풍경과 검은 정물은 세계로부터 내가 탈취한 유심하고 유의미한 나의 풍경이고 정물인 것이다. 박병춘의 흐린 풍경과 검은 정물 연작은 이렇듯 그가 세계의 지평에 간여하고 개입한 만큼의 질량의 흔적을, 그 변질의 크기를 보여준다.
박병춘의 흐린 풍경 연작은 기억의 풍경 연작과도 통하는 것이다. 그에게 풍경은 시간을 되돌려 기억을 더듬는, 마치 오래된 앨범과도 같은 것이며, 그림 한 장 한 장은 그 앨범으로부터 더듬어 찾아낸 기억의 편린들이다. 여기서 그 풍경이 흐린 것은 기억의 속성 탓이다. 기억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과거에 속하며, 따라서 그 형태는 언제나 최소한의 흔적으로서만 존재한다. 기억은 현존하는 실체로서는 붙잡을 수 없으며, 대신 부재를 재확인하고 강화하는 불완전한 계기로서만 존재한다. 풍경이 흐린 것은 흐릿한 기억의 속성 탓도 있지만, 이렇듯 기억을 환기시키는(과거를 현재화하는) 불완전한 계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작가는 풍경을 시간 속으로 밀어 넣어 그 시간을 변질시키고 있으며, 그 변질된 만큼의(과거와 현재 사이의 벌어진 틈만큼의) 흔적이 흐린 풍경으로 나타난다. 그 희미해진 시간 속에서 작가는 ‘지금 여기’가 아닌 ‘그때 그곳’의 흔적을 더듬어 찾는다. 그럼으로써 무심하고 무의미한 풍경(랜드스케이프)을 유심하고 유의미한 기억의 풍경(마인드스케이프)으로, 시간의 풍경(타임스케이프)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때 그곳의 존재의 풍경(바디스케이프)으로 되살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의 흐린 먹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마치 낡은 흑백사진 속의 인물들처럼 빛 바랜 기억과 빛 바랜 시간 그리고 빛 바랜 존재의 흔적을 가까스로 붙잡아 보여준다.
그리고 검은 정물 연작은, 화선지에 먹으로 그린 정물이란 점에서 일단 화선지에 그린 먹그림이라는 수묵화의 기본 틀 속에서 그려진 그림들이다. 그러면서도 그림 어디에서도 모필사생이나 발묵의 효과, 운필(용필)이나 여백의 운용과 같은 수묵화에서 흔히 발견되기 마련인 어떠한 결정적인 요소도 찾아볼 수가 없다. 대신, 작가는 일상 속에서 접할 수 있는 여러 기물들, 예컨대 우유팩, 도자기, 화분, 휴지통, 성냥갑, 장난감 모형, 심지어 우체통과 같은 각종 기물들의 세부를 생략한 채 완전한 실루엣으로 처리함으로써 외관상 단색조의 검은 평면으로만 드러나게 한다. 이로써 여타의 수묵화에서 접할 수 있는 먹그림으로 표출된 부분과 여백과의 조응(호흡의 교환) 대신, 작가의 그림에서는 사실상 추상적인 기호에 다름없는 단색조의 평면과 빈 공간과의 현저한 대비를 확인할 수 있을 따름이다.
사물을 이렇듯 최소한의 실루엣으로 처리한 것은 기호에 적응하는 동시대인의 시각경험을 말해준다. 즉, 이런 약화(略畵)된 표현만으로도 그것이 무엇을 지시하는지를 금방 알아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최소한으로만 주어진 기호와 그것이 의미하는 실재와의 일대일 대응관계를 지각하는 관객은 과연 그림(사물의 이미지)을 보는 것인가 혹은 그림(사물의 이미지)의 의미를 읽는 것인가. 그림은 시각적 경험에 조응하는 것인가 아니면 개념적 경험에 조응하는 것인가 혹은 그 둘 다에 동시적으로 조응하는 것인가. 당연히 그 경계는 모호해질 수밖에 없고, 여기서 작가는 이러한 그림보기와 그림 읽기와의 모호한 경계 위에 서 있다. 마찬가지 말이지만, 사물을 이렇듯 실루엣으로 처리한 것에는 사물을 대하는 작가 개인의 주관적인 표현을 최소화함으로써 오히려 사물의 핵심(객관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을 드러낸다는, 말하자면 표현의 절약이라는 전략적 측면도 작용한다. 한편으론 이러한 표현의 절약이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단 한차례의 필(선, 획)만으로 대상의 핵심에 이르는 전통 문인화의 화법에도 접맥된 것으로 보여진다.
그런가하면, 이 일련의 검은 정물 연작 중에 ‘부라보 똥’이란 그림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그림은 말할 것도 없이 아이스크림의 대명사 격인 부라보 콘과 똥의 형태가 갖는 유사성에 착안한 것으로서, 그 둘의 형태를 중첩시켜 표현한 것이다. 이 그림을 단순한 치기나 유머로 생각하고 지나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작가가 작업에 임하는 중요한 태도의 일면을 엿보게 한다. 말하자면 일상 속에서 일면식도 없는 상호간 이질적인 사물들을, 예컨대 음식과 똥을 하나로 결합시켜 사실상 미와 추를, 선과 악을 비롯한 모든 이분법적 경계를 넘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이미지는 그 자체 객관적이거나 가치 중립적인 것이기보다는 일정한 가치관과 해석이 결부돼 있으며, 따라서 사실은 자기 내부에 양극을 포함하는 양가적인 것이거나 최소한 상대적인 것임을 말해준다. 이런 사물(이미지)에 대한 비결정적인 태도가 작가의 상상력과 만나 현실 속에 잠재하는 가능한 형태를(말하자면 부라보 똥 같은) 찾아 나서게 만든다.
작가는 그림들을 배접하여 벽에 거는 대신 철봉과 줄을 이용하여 전시장 천장에서 아래로 드리우는 식으로 설치한다. 이때 그림과 그림 사이에 일정한 간격을 둠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그림의 앞면은 물론이고, 뒷면도 감상할 수 있게 했다. 그런가하면 심지어는 그림을 보는 각도를 달리 함에 따라서 각각 다르게 보여지는 다양한 형태의 시각 경험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는 관객의 시각의 장(시각이 미치는 거리)을 그림의 표면에만 한정시키기보다는, 그림은 물론이고 그림이 설치된 공간마저 그 시각의 장 속으로 끌어들이게 하는 효과가 있다. 이로써 작가는 그림과 함께 동선과 공간 개념을 하나로 아우르는 입체적인 공간설치작업을 실현한 것이다.
이외에도 작가의 작업 가운데에는 주목할 만한 형식실험들이 다양하게 시도되고 있다. 먼저, 검은 정물 연작을 그리는 작가의 행위 과정을 녹화한 비디오 영상작업에서는 단 한번에 사물의 특징을 포착하고 표현해내는 과정을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칠판 위에 분필로 그린 산수화는 하나의 그림으로서는 불완전한 것으로서, 임의적이고 자의적인 그리기와 지우기에 노출돼 있다. 이는 마치 티베트 불교 승려들의 일시적으로만 존재하는 모래그림에서처럼 이미지에 대한 제의적 해석과 함께, 덧없는 이미지에 대한 공감이 읽혀진다(이미지란 원래 없는 것이며, 따라서 이미지인 세상도 없다). 또한 그림을 벽에 거는 대신 마치 푸줏간의 고기처럼 쇠고리로 걸어 매단 것에서는 그림이 작가 자신의 신체가 확장된 것이며, 따라서 그림을 매단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몸을 매단다는 것과 같다(그림은 작가의 분신이며 몸이다).
그런가하면 사방에 산수를 그려 각각 다른 시간대의 장소를 표현한 박스 그림은 산수를 시간의 지평 속에 풀어놓고 있으며, 이와 함께 평면의 이미지에 마치 실재하는 사물과도 같은 질량과 부피를 부여하고 있다. 그밖에도 작가는 전통 산수화를 특징짓는 요소가 용필(필의 운용)이라고 보고, 그 필을 따라서 그대로 오려낸 고무의 파편들 하나 하나를 일일이 화면에 옮겨 붙여 만든 일명 고무산수를 제작한다. 이는 산수화 고유의 선의 맛을 그대로 살리면서도 평면적인 동시에 입체적인 이중적 화면을 보여준다. 이로써 작가는 흔히 선을 치거나 그림을 그리는 식의 용법에 한정된 평면 화법을 그림을 만들고 구축하는, 일종의 입체적이고 건축적인 방법에로까지 확장시킨다.
박병춘의 근작은 일련의 흐린 풍경 그림에서 전통 산수화를 시간의 지평 속에 풀어놓고 있으며, 검은 정물 그림에서 사물에다 기호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으며, 그리고 여타의 의미 있는 형식실험을 통해서는 동시대적인 산수화를 실현하고 있다.
삶의 메타포로서의 길과 검은 풍경 박병춘의 그 동안의 작업을 보면 한국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다양하고도 파격적인 형식실험의 면면들이 느껴진다. 예컨대 목탄과 콘테 그리고 파스텔을 먹과 혼용한 인물 군상 그림을 보건대 독일 신표현주의를 연상시키는 격렬한 페이소스와 함께, 욕망과 무의식과 같은 인간 실존의 존재적 불안이 거침없이 표출돼 있다. 그리고 생고무와 청테이프와 같은 오브제로써 먹과 안료를 대신하기도 한다. 특히 검정 생고무를 이용한 일명 고무산수는 전통산수의 필(획)을 고스란히 재현해서 오려 붙인 고무조각들의 재편집을 통해 평면과 입체를 동시에 함축한 산수화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칠판에다가 백묵으로 그린 산수화에서는 이미지의 덧없음을 주지시키는가 하면, 그림을 벽에 거는 대신에 공간에다가 설치한 작업에서는 작업의 영역을 평면으로부터 공간설치에로까지 확장시킨다. 그리고 일상으로부터 차용한 소재들을 검정의 평면 실루엣으로 처리한 일명 까만 정물 연작에서는 실재와 이미지, 재현된 이미지와 기호로 환원된 이미지와의 관계를 묻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들에 대해서 한국화의 범주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로 의견이 분분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자신의 작업이 어떻게 분류되든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는 것 같다. 적어도 분명한 것은 이 작업들이 전통적인 한국화 중 특히 수묵화의 연장선에 있으며, 또한 전통적인 한국화를 ‘지금 여기’라고 하는 현재적 시점으로 끌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그 문제의식이나 감수성이 동시대적인 한국화, 당대적인 수묵화에 접맥돼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전통적인 산수화를 재해석한 일례로서 흐린 풍경이나 기억 속의 풍경과 같은 일련의 풍경 연작을 들 수 있다. 그 농담이 똑같은 엷은 묵으로 그린 흐린 풍경과 기억 속의 풍경은 서로 통하는 것이다. 풍경이 흐린 것은 기억 속의 풍경, 기억 속에서 불러낸 풍경, 기억으로부터 재생해낸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 풍경은 과거의 시점 속에 위치해 있으며, 그 과거의 시점을 현재화할 때 그 만큼의 벌어진 시간의 틈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고 그 틈이 흐릿한 풍경으로 나타난 것이다. 하나의 풍경을 기억 속으로부터 끄집어낸다는 것은 그 풍경을 시간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이다. 그러므로 흐린 풍경과 기억 속의 풍경으로 시작된 작가의 일련의 풍경 연작은, 시간 속의 풍경이나 흐르는 풍경(그 자체 고정불변의 실체가 아닌, 변화하는 풍경)과 같은, 삶의 풍경에 대해 사념의 연쇄를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객관적인 풍경을 주관적인 풍경, 나의 풍경, 존재의 풍경(나의 실존과 연속된 풍경)으로 전이시킨다.
박병춘의 근작은 ‘길이 있는 검은 풍경’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이는 흐린 풍경과 기억 속의 풍경 연작과 함께 전통적인 산수화의 재해석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전작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클로즈업을 통한 근접시점으로써 시야가 미치는 풍경의 범주가 전작에 비해 현저하게 앞당겨지고 좁혀졌다는 점이다. 이는 대상을 집중시키는 시각적 효과를 낳고 있으며, 그렇게 집중된 길이 화면의 전면에 부각되는 구도로서 나타난다. 대개 전통 산수화에서 길은 산수의 일부분으로 그 속에 묻혀있거나, 거의 시선을 끌지 못하는 부차적인 형태로 한정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작가는 그렇게 묻혀있거나 부차적이었던 길을 풍경의 전면에 내세운다. 전작이 풍경과 주체와의 사이에 설정된 일정한 거리감으로부터 사색의 구실을 찾아낸 것이라면, 근작에 나타난 근접시점은 작가가 풍경의 실재에 바짝 접근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 길들을 보건대 가로로 누운 길도 있지만 대개는 세로로 서 있는 길이 많다. 그리고 원근법을 적용하여 화면의 전면으로 올수록 점차 넓어지고 있다. 길의 실재를 느끼기에 충분한 큰 그림들에서 길은 마치 그림 속의 화면 바깥으로까지 연장된 듯한 느낌을 준다. 그림 앞에 선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실재하는 길 앞에 서서 풍경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길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길 안에 서서 그 풍경 속의 일부로 참여하고 있는 듯한 추체험을 가능케 한다. 이렇듯 화면 외부로까지 확장되는 시야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림을 그 자체 불완전한 단면으로서 받아들이게 한다. 그리고 그 불완전한 부분을 스스로 보충하려는 심리가 자기 내면으로부터 작용하고, 이는 그대로 관객으로 하여금 작업의 일부로서 참여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일종의 미학적 장치랄 수 있는 이러한 현상은 전통적인 소통미학에 있어서의 상호소통성에 접맥돼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통적인 산수화에 나타난 여백의 개념을 화면을 벗어난 실재의 공간으로까지 확장시키려는 작가의 의도와도 통하는 것이다.
그림 속의 길은 길의 실재를 추체험하게 할뿐만 아니라, 길이 거느리고 있는 상징성, 삶의 메타포에 대한 사색으로 우리를 이끈다. 화면의 전면에서 연장된 그림 속의 길은 화면의 보이지 않는 뒤쪽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그렇게 사라지는 길은 하늘과 길이 맞닿은 지점에 지평선을 남긴다. 그 지평선이 높게 그려진 그림 속의 길은 아득한 느낌을 주고, 대개의 풍경화와 마찬가지로 화면의 아래쪽에 치우쳐져서 그려진 지평선은 시각적인 안정감과 함께 쉽게 공감을 끌어낸다. 여기서 길은 지평선이 숨기고 있는 비밀을 드러낸다. 지평선은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길이 끝나는 자리, 하늘과 길이 맞닿는 자리에 불현듯 지평선이 생겨난다. 그러므로 지평선은 길의 잠재태, 길이 숨기고 있는 가능태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길이 끝나는 자리, 하늘과 길이 맞닿는 자리, 길의 안쪽으로부터 불현듯 지평선이 솟아오르는 자리는 심연처럼 아득하고 무의식처럼 멀다. 그리고 실재와 허구, 실상과 허상, 존재와 부재가 맞닿아 있는 경계를 드러낸다. 이처럼 그림 속의 길은 그 길이 사라진 화면의 보이지 않는 뒤쪽, 있음과 없음이 합쳐지는 지점에 대한 사념을 불러일으킨다.
그 길은 검은 풍경 속을 가로지른다. 그리고 야트막한 둔덕과 그 표면에 난 잡풀들과 덤불들이 길의 가장자리를 따라 마치 울타리처럼 길을 둘러싸고 있으며, 하늘과 길이 맞닿은 자리에 하늘을 향해 서 있는 키 큰 나무가 서로 어우러져 검은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검은 풍경이란 여백으로 남겨진 텅 빈 길과 하늘(때때로 엷은 묵이 가해지기도 한다)이 먹으로 그려진 검게 드러난 풍경과 대비를 이루는 것에 연유한 것이다.
이렇게 검은 풍경으로 나타난 박병춘의 그림은 흔히 그렇듯 먹의 농담을 조절하는 방법으로써 사물의 세부를 묘사하고 그 음영을 나타내 보인 그림들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먹을 균일하게 적용하는 방법으로써 마치 실루엣과도 같은 평면으로 대상을 환원한 그림도 아니다. 작가는 현장에서 화첩에다가 모필 사생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농담의 붓질을 중첩시켜나가는 방법으로써 사물을 나타낸다. 물론 이때의 붓질은 그냥 주어진 면을 채운다는 식의 기계적인 과정이 아니라, 사물의 생김새를 따라 일일이 그린 획들이 중첩된 것이다. 그러니까 풀과 덤불을 중첩시켜 그린 결과가 마침내는 평면이나 실루엣처럼 보일 뿐이지, 사실은 이런 식의 환원주의와는 무관한 다른 차원의 그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에서는 우선 단조로운 평면으로 환원된 사물이 눈길을 끌지만, 자세히 보면 그 검정색의 단면 속에 풀들과 덤불들의 세부가 그대로 드러나 있다.
작가는 대상의 세부와 음영을 드러내기 위해서 먹의 농담을 조절하거나, 농담에 변화를 주지 않는다. 이를테면 때때로 길이나 잿빛으로 드러난 하늘과 같은 넓은 면이나, 그리고 디테일 한 묘사를 하기 이전의 숲이나 덤불의 전체 면을 엷은 담묵으로 처리할 때를 제외하면, 어떠한 농담 상의 조절이나 변화도 찾아볼 수가 없다. 말하자면, 전작에서의 흐린 풍경이 똑같은 담묵으로써 대상을 그려낸 것이라면, 근작에서의 검은 풍경에서는 똑같은 농묵으로써 대상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는 먹그림을 이루는 여러 요소들 중에서 특히 획(필)이 두드러지게 하며, 작가의 그림을 중첩된 획으로 그려진 먹그림으로 정의하게 만든다. 이로써 작가의 근작에서는 넓은 면으로 드러난 하늘, 길 등의 빈 화면과, 똑같은 농담의 먹이 중첩된 검은 수풀과의 대비가 현저하게 느껴지며, 이로써 흑과 백과의 대비가 비교적 뚜렷하게 부각된다. 그만큼 단조롭고 심플한 외경과 함께, 그 외경이 함축해내고 있는 사물의 디테일 한 세부와의 대비가 작가의 근작을 특징짓고 있는 것이다.
박병춘의 그림은 무엇보다도 철저한 현장에서의 모필 사생에 바탕을 두고 있다. 화첩에다가 그린 모필 사생은 그림을 확대할 때에도 거의 여과 없이 그대로 적용된다. 화면이 커지고, 사물을 묘사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디테일해진 것을 제외하면 거의 화첩 그대로의 생생한 현장감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의 그림은 흑과 백의 대비가 두드러져 보이는, 검은 평면과 실루엣으로 환원된 화면으로서 어필되는 첫인상과는 달리, 보면 볼수록 그림이 비롯된 지점 즉 실제의 풍경과 그 현장 속으로 빨려들게 만든다. 실제로 그림 속의 나무들을 보면 그 하나하나의 종류를 알아볼 수 있다. 그것도 그냥 일반적인 나무가 아니라, 현장사생을 할 당시의 대기와 습기 그리고 바람과 몸을 부대끼며 호흡을 섞던 바로 그 나무가 생생하게 느껴지고 전달된다.
작가의 근작에서는 일종의 환원주의에 바탕을 둔 추상적 평면과 함께, 실경의 사생에 바탕을 둔 생생한 현실감이 하나로 뒤섞여 있다. 선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모호한 이중성, 접점, 경계에 대한 인식과 성취야말로 작가가 검은 풍경 연작에서 일궈낸 성과라고 할 만하다.
실경과 진경 사이 혹은 실재와 그림 사이에 흐르는 풍경 풍경은 나와 무관하게 저 홀로 펼쳐진 객관적 지평이 아니다. 풍경과 나는 상호 내포적인 관계에 놓여 있으며, 나의 주관적 전망 안에서만 그 형태와 의미를 갖는다. 풍경은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주관의 소산인 것이며, 주관이 자기를 열어 보이는 비전의 한 종류인 것이다. 그 속에 내가 내재된 나의 일부이며, 나의 연장이다. 이를 메를로 퐁티는 ‘우주적 살’이라고 부른다. 나와 풍경 사이에는 나의 육화된 의식이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다.
이로써 풍경은 나의 하늘, 나의 나무, 나의 바람, 나의 공기가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모네가 본 하늘과 고흐가 본 하늘이 서로 다른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사람들은 이런 연유로 저마다 다른 풍경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화가들의 그림에 나타난 실재와의 객관적 닮은꼴은 다만 이를 유형화된 풍경으로 읽게 만드는 의식의 간계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실재가 한갓 붓질자국으로 환원될 수 있단 말인가. 바람은 어떻고, 또한 공기는 어떤가. 결국 모든 실경(객관적 지평으로서의 풍경)은 사실은 진경(주관적 전망으로서의 풍경)일 수밖에 없다. 풍경은 그 자체 객관적 실재가 아닌, 실재에 대한 주관적 개념의 소산인 것이다.
박병춘에게 있어서 풍경은 저절로 주어진 객관적 지평이 아니라, 작가로 하여금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는 창 그 자체이다. 그 동안 작가는 기억 속의 풍경, 금빛 풍경, 흐린 풍경, 검은 풍경, 낯선 풍경이란 창을 통해서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철저한 사생에 바탕을 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풍경들은 실재에 대한 단순한 감각적 닮은꼴을 넘어선, 실재에 대한 주관적 개념의 소산이다. 즉 실재에 기생하면서도 궁극적으론 작가의 관념이 만들어낸 풍경인 것이다.
그 풍경들은 작가로 하여금 오랜 사진첩 속의 색 바랜 흑백사진을 뒤적이듯 사사로운 기억을 들추어내게 했으며, 노란 색(금빛) 필터를 통해 본 세상처럼 현재를 과거 속으로 밀어 넣게 했다. 그에게 풍경은 다만 그 지정학적 위치가 지금 여기라는 현실에 속해 있는 것일 뿐, 그 실질적인 위치는, 특히 그 시간적 위치는 언제나 과거 속으로 되돌려지는 것이었다. 이처럼 과거로부터 불러낸 그 풍경이 작가에게 때로는 흐릿한(흐린 풍경), 때로는 암울한(검은 풍경), 때로는 낯 설은(낯선 풍경) 기억으로 남겨진다. 이 모든 정서의 계기들은 사실상 작가가 자신을 투사한 풍경의 지점들, 자신의 주관을 투사한 삶의 성분들에 다름 아니다. 똑같은 풍경이 자신의 주관과 삶의 성분에 따라서 흐릿하게도, 암울하게도, 낯설게도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결국 그 풍경의 변화된 주기는 그대로 풍경에 대한 작가 자신의 주관이 변화된 지점들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이제 작가는 흐르는 풍경 속에다가 이 모든 풍경의 계기들을 흐르게 한다. 마치 흐르는 물처럼 풍경의 계기들이 그 경계를 잃고 함께 흐르는가 하면, 마치 주름처럼 주체의 성분들이 하나의 지층으로 포개지게 한 것이다(작가에게 풍경과 주체는 동격이다). 그렇다고 흐르는 풍경이 단순히 구분의 경계를 넘어 무구분과 통합의 단계로 도약하는(도사연하는) 논리적 비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작가에게 있어서의 실경(지금 여기에 현재하는 풍경)이 진경(그 풍경에 대한 주관적 해석과 간여의 소산인)과 혼연일체이듯이, 흐르는 풍경은 (마치 유기체와도 같이) 흐르는 기억과 사유와 개념의 생리(주관의 생리)를 암시한 것으로 읽을 일이다. 일면적으론 흐르는 풍경이 지금까지의 풍경 시리즈의 결정판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전 풍경 시리즈에 나타난 풍경의 의미들을 모두 아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실경과 진경 사이, 혹은 실재와 그림 사이에 흐르는 풍경이랄 수 있을 것이다.
박병춘의 그림에서의 특징적인 사실은 실경을 바탕으로 해서 이를 스케치한 사생(寫生)첩의 작은 그림이 거의 그대로 크게 확대되어 그려진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는 단순히 크다는 점에서 뿐만 아니라, 스케치 당시의 생생한 현장성이 큰 화면에도 그대로 옮겨지고 전달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붓으로 그린 먹그림임에도 불구하고 흡사 목탄 그림과도 같은 표면질감이 특징이며, 또한 몽실몽실한 특유의 준법이 발견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일명 몽준이라 이름 붙일 수 있을 것이다(어떤 이는 작가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특유의 준법을 라면준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그만큼 작가의 준법이 자유자재하다는 뜻일 게다).
작가는 이 특유의 준법으로써 거의 화면이 꽉 차게 그린다. 주로 화면의 위쪽과 아래쪽에 가로로 좁고 길게 드리워진 하늘과 강을 제외하고는, 그 주요 대상인 산세(산의 형태)를 묘사하는 것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처럼 꽉 찬 화면에서 여백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대신에 여백은 그려진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 주름과 주름 사이, 준과 준 사이로 파고들어서 일종의 내적 울림을 만들고, 그 파동이 그림 전체에 퍼지게 한다. 이는 그림이 결정적이고 고정된 실체로서 느껴지게 하기보다는, 그 자체 잠재적인 운동성, 잠재적인 움직임을 내포하고 암시하는 형태로서 느껴지게 한다.
그리고 풍경의 특성상 옆으로 긴 그림들이 많은 점도 눈에 띤다. 원래 자연이란 이처럼 풍경이 옆으로 전개돼 보이며, 화면 뒤쪽이나 안쪽으로 중첩되면서 전개된다. 이는 대개 수직적 구도로 나타나기 마련인 문명이 그린 풍경과 비교되는 것이다. 이러한 구도 자체는 그림에 쉽게 동화하게 만든다. 작가는 이 모든 그림을 하나의 붓으로 그린다(물론 일부 예외가 없지 않지만). 똑같은 농담의 먹을 찍어 붓을 세워 그리는가 하면 옆으로 뉘어 그리기도 하면서 대상에 대한 묘사와 함께 원근과 음영, 이 모두를 표현한다. 작가의 그림은 그러니까 먹을 중첩시켜 그린 그림이 아니다. 아무리 복잡한 세부라도 일회적인 붓질에 의한 것이며, 이러한 사실은 작가의 그림으로 하여금 평면화의 경향성이 두드러져 보이게 한다. 평면화 자체는 구상(형상)보다는 추상의 경향에 가까운 것으로서, 이는 작가의 그림에 나타난 실경 사생에 바탕을 둔 생생한 현실감과 부닥치면서 상당한 긴장감을 연출해낸다.
이와 함께 작가는 풍경 속에다가 사사로운 경험이나 공적 사건을 그려 넣어 풍경의 지평을 일종의 시대적인 풍경, 시사적인 풍경, 서사적인 풍경으로까지 확장한다. 가족여행 장면이나, 여행하다가 들른 동료의 결혼식 기념촬영 장면을 그려 넣어 마치 사적인 일기나 일지와도 같은 일면을 엿보게 한다. 그리고 대통령 순방장면, 서울시장 후보들의 기념촬영장면, 데모 진압장면, 유기된 아이 등의 신문이나 매체를 통해 본 뉴스를 그림 속에다 끌어들인다. 작가의 풍경 속에는 이처럼 당대의 시대적 상황이, 그 사회적 풍경이 고스란히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적이고 공적인 사건 이외에도 패러글라이딩이나 거대한 풍선기구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사람이나, 숲 속에서 성행위에 열중하고 있는 연인들과 같은 해학적인 모티브를 그려 넣기도 한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연상시키는 이러한 모티브들 자체는 작가의 그림으로 하여금 단순히 자연을 대상으로 한 풍경을 넘어서게 해준다. 따라서 주제인 흐르는 풍경이란 이처럼 여러 이질적인 제 요소들이 하나의 화면 속에 녹아들어 있는 풍경을 말하며, 하나의 풍경 속에 여러 서사적인 계기들, 시사적이고 일상적인 계기들을 숨겨 놓은 마치 일기 혹은 일지처럼 읽히는 풍경을 말한다.
박병춘의 그림은 이처럼 실경에 대한 사생에 바탕을 둔 것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림에서의 정황 자체는 단순한 실경을 넘어선다. 예컨대 그림 속에서처럼 모래사장 위에 빨간 소파가 놓여져 있을 리가 없고, 화분이 놓여져 있을 리가 없다. 이것들은 차라리 집의 실내에나 놓여져 있을 법한 기물들이다. 이러한 사실은 서로 다른 시간대가 그림 속에서 서로 중첩된 경우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실제로 사생이 진행되는 현장과, 이를 바탕으로 해서 작업실에서 큰 그림으로 옮길 때의 시간대가 중첩되고, 실경과(현장에 속한) 생활 모티브가(일상적 공간에 속한) 중첩되는 것이다. 이렇듯 풍경으로서의 실경 속에다가 사사로운 생활사를 슬쩍 밀어 넣는 행위는 작가 자신이 풍경을 일종의 내면적이고 주관적인 비전의 한 형태로 보고 있음을 말해준다. 세계를 들여다보는 창과 풍경을 동격으로 놓고 있음을 뒷받침해주는 것이다.
이외에도 작가의 근작에서는 전통적인 민화에 대한 재해석이 느껴진다. 예컨대 부부애를 상징하는 원앙 한 쌍이 산수를 배경삼아 유유자적하게 날고 있거나, 화려한 나비 한 마리가 허공을 날고 있는 그림에서의 민화적 모티브가 수묵으로 그려진 흑백의 화면과 대비를 이룬다. 그림 속에다가 일종의 의외성, 일탈성, 해학성의 계기를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박병춘의 그림은 이처럼 점점 더 그 모티브가 확장되고, 때로는 논리마저도 넘어서는 여러 이질적인 계기들이 중첩돼 나타난다. 이는 실경에 대한 탄탄한 사생에 바탕을 둔 것이란 점에서, 실경과 진경이 긴밀하게 짜여져 그 표현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있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