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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지도 그리기 - 타자와 에고, 신화와 자연

고충환

난지창작스튜디오전


난지창작스튜디오가 문을 연 이래 일년 만에 창작보고전 형식의 전시를 갖는다. 이 전시에서 송영규는 자기반성적인 경향의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작가의 작품은 타자를 그 소재로 할 때조차도 타자의 객관적 진술에 이르지 못하고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타자에게 자신을 투사할 뿐만 아니라, 타자에게서마저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신영미 역시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에 그 맥이 닿아 있지만, 상대적으로 더 가볍고 발랄하며 팝적이다. 작가의 에고는 나르시스의 신화와 마찬가지로 자기애에 의해 견인되며, 상상력의 거울에 자기를 비춰보는 과정을 통해서 일종의 무의식적 욕망을 드러내고 실현한다. 그런가하면 송지인은 일종의 이종들, 변종들, 괴물들을 소재로 한 캐릭터 작업으로써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생물권력의 실체를 드러내고 비판한다. 그 이면에는 신화적 상상력과 함께 의식적 차원에서의 유목주의에 대한 공감이 놓여있다. 그리고 장희진은 기하학적 패턴과 실루엣 형상의 이미지를 매개로 해서, 미디어 시대에 있어서의 자연의 의미와 그 실체를 드러낸다.


송영규. 나는 곧 타자다
전위예술가 비토 아콘치는 ‘내 방에서 나가라’고 주문한다. 자기 방에 둥지를 틀고 있는 타자들에게 나가달라고 정중하게 혹은 절박하게 제안한 것이다. 그 방은 마음의 방이고 무의식의 방이다. 원래 내 방이었던 그 방이 이제는 타자들의 방이 되었다. 원래 선방처럼 고요하고 밝은 기운이 흐르던 나의 방이 타자들이 들여온 어둠으로 어두워졌고, 타자들이 들여온 상처로 얼룩져 있으며, 타자들이 들여온 욕망으로 소란스럽다. 그 타자들이란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내가 아닌가. 나는 타자들의 이질적이고 무분별한 그리고 우연한 집합이다. 나란 내가 보고 듣고 학습 받은 관습과 교육의 산물이며, 이는 선입견과 편견 그리고 상식과 이념 혹은 신념의 지평으로 굳어져 있다. 나는 타자들과의 상호영향사의 산물이며, 타자들과의 관계에 의해 오염돼 있으며, 그 관계의 망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렇다면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진정한 나는 끝내 붙잡을 수 없는 것일까. 이제 타자들이 들여온 어둠과 상처와 욕망을 걷어내고 처음의 평화를 되찾고 싶다, 진정한 나(진아)와 포옹하고 싶다.

송영규는 타자를 그린다. 그들은 이중 삼중의 겹으로 갇혀 있다. 그들은 단단한 피막의 껍질을 덮어쓰고 있으며, 칠흑 같은 어둠 속에 빠져있으며, 최종적으론 프레임의 틀 속에 갇혀 있다. 인물의 체형에 맞춘 세로로 긴 프레임은 심지어 관을 연상케 한다. 그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비록 얼굴과 손과 발이 표면위로 드러나 있긴 하지만, 그 나머지 신체의 대부분은 깊은 어둠 속에 침전돼 있다. 검은 물, 심연, 어둠 자체를 떠올리기에 충분한 배경 화면은 무의식의 바다를 암시한다. 그림은 그 실체가 손에 잡힐 듯한 사실적인 묘사에도 불구하고, 타자의 존재를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숨기고 있는 것 같다. 사실적인 묘사 그 자체가 오히려 그 실체를 효과적으로 숨기기 위한 기제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중 삼중의 틀 속에 갇혀진 존재, 여하한 경우에도 자신의 전체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그 실체가 모호한 존재는 결국 타자이기보다는 작가 자신이다. 따라서 타자에 대한 객관적 기술이기보다는 그 속에 작가 자신이 투사된, 타자의 껍질을 쓰고 있는 자신에 다름 아닌 것이다.

더불어 송영규는 자화상을 그린다. 그림에서의 자신은 발가벗은 모습을 띠고 있다. 이는 자기반성적인 태도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벌거벗음이 능동적인 행위로서보다는 타자들에 의해 자신이 발가벗겨졌음에 대한 상황과 그 인식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무대 위의 자화상은 이러한 상황논리를 좀더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무대 위의 상황은 자신이 타자들의 시선에(그 자체 욕망과 동격인) 철저하게 노출돼 있다는 강박과 함께, 타자와 진정으로 소통하고 싶다는 욕망이 이중적인 결로 구조화된 것이다. 여기서 작가 자신은 타자들의 시선이 대상화한 응시의 주체이면서, 동시에 타자들을 읽는 시선의 주체이다.

이와 함께 작가는 자신의 분신 혹은 그 대리물로써 귀를 제안한다. 귀는 스스로 소리를 내고 그 소리를 저 홀로 듣는다. 일종의 이명 혹은 환청 현상으로부터 주체에 대한 단서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이는 주체의 발화 행위가 타자와의 소통을 위한 계기로서보다는 독백, 침묵, 메아리가 돼서 자신에게로 되돌려지는 것임을 주지시킨다.

이처럼 송영규는 타자에게 또는 자신에게 갇혀 있다. 그리고 근작에서는 그 틀(타자와 자신이 묶여 있는 틀) 자체를 그린다. 마치 사진에서의 클로즈업 기법을 연상시키듯 타자와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던 것에서 한 발짝 물러나서, 그 배경, 그 환경, 그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적어도 외관상으론 작가가 자신의 틀, 강박의 틀로부터 어느 정도 빠져나온 양 보이게 한다. 그리고 이는 그림의 상당부분을 여백으로 남겨놓는 것으로서 현상한다. 자신을 유보하고, 타자의 상상력이나 연상 작용이 흐를 수 있는 빈 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를 타자와의 섣부른 화해로 볼 일은 아닌 것 같다. 작가 자신은 애당초 타자와 대치한 적이 없으며, 그런 만큼 타자와 화해할 일도 없다. 작가가 대상화한 타자는 다름 아닌 자신의 한 분신이며, 따라서 대치나 화해의 계기 역시 자신에게 맞춰져 있는 것이다.
신영미. 나르시스의 신화와 실재계의 회복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의 나르시스는 물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서 그 물에 빠져 죽는다. 이는 나르시스가 물거울에서 발견한 것이 자신이 아닌 타자(자신의 분신)임을 말해주며, 자기애가 죽음과 통하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 영상은 일종의 경계와도 같은 것으로서, 진정한 나를 찾기 위해서는 그 (죽음의) 경계를 건너야 하고, 타자와의 진정한 소통을 위해서는(타자에 가 닿기 위해서는) 그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 여기서 나에 대한 절대긍정(자기애)과 절대부정(자기부정 곧 죽음)이 겹친다. ‘나는 너를 사랑해’라는 나르시스의 고백은 그 이면에 ‘나는 나를 사랑해’라는 유보된, 잠재된, 무의식적 욕망을 은폐하고 있다. 이로써 나르시스 신화는 자기애와 죽음,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하나의 결로 중첩된 존재의 비의를 드러낸다. 그리고 자신이 타자와 동격임을 드러내며, 타자가 정박해있는 이질적이고 다양한 지점들로 복제 재생산될 수 있는 미완의, 미결의 존재임을 드러낸다.

이것이 자크 라캉의 거울단계이론에서는 좀더 분명해진다. 즉 아기로 하여금 거울을 보고 웃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타자이다. 자와 타의 구분이 없는 상태, 이 행복하고 자족적인 상태는 그러나 아기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지배되는 상징계(언어와 기호로 구조화된 의식세계)에 편입하는 과정에서 좌절된다. 최초로 자기부정이 행해지며, 잠정적으로 자기가 죽는 것이다. 이렇게 부정된 나, 좌절된 나, 억압된 나의 계기가 쌓여진 지평이 실재계이며, 이는 사라지지 않고 무의식의 지층을 이루게 된다.

신영미의 작업의 주제는 자기 자신이다. 그림에서 작가는 발가벗은 소녀의 모습으로서 현상
한다. 이때의 발가벗음은 타자의 요구로서보다는(예컨대 상품화된 성과 같은 관음증적 욕망의 대상이기보다는) 스스로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를 탐색하고, 자기에 탐닉한다는 점에서 나르시스적이다. 그리고 그는 단일의 주체나 총체적인 주체이기보다는 여러 이질적이고 우연한 계기들이 정박해있는 복수적이고 파편적인 주체로서 현상한다. 내가 나와 대면하고, 내가 나를 애무하며, 내가 나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껴안는 것이다. 이러한 이중 분열 혹은 다중 분열 현상은 그 자체 정신병적 징후가 아닌, 도덕으로 무장한 사회화되고 제도화된 주체의 갑옷을 찢고 그 이면으로부터 길들여지지 않은 주체, 본능적이고 욕망적인 주체, 자연적이고 본원적인 주체를 불러내서, 이와 대면하려는 적극적이고 의식적인 행위인 것이다.

작가의 그림은 이처럼 진정한 자기를 붙잡으려는 욕망에 의해 추동된다는 점에서 나르시스의 신화를 떠올리게 한다. 한편으로 신화에서의 물거울과 마찬가지로 거울반영이론에도 연동돼 있다. 작가의 그림을 보면, 실제로도 여러 형태의 거울이 등장한다(특히 연못을 배경으로 한 그림은 나르시스의 물거울을 거의 직접적으로 상기시킨다). 그리고 그림 자체에서 자기 반성적인 과정과 그 행태가 느껴진다는 점에서 거울의 속성을 이미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작가로 하여금 진정한 나, 주체, 에고라고 부를만한 자기와 대면하게 되는데, 그 거울의 성질이 현실의 그것과는 다르다. 치렁치렁하게 땋은 긴 머리가 마치 뿌리나 되는 것처럼 자신의 머리와 온몸을 감싸고 있는가 하면(이는 자기부정에 따른 죽음의 이미지를 강하게 환기시킨다), 작가 자신이 옷인 양 옷장에 가지런히 걸리기도 하고, 진열장의 상품처럼 전시되기도 한다. 스스로를 대상화하고 사물화한 것이다. 나아가 여행 중 사막에서 잠자다 맞닥트린 양이나 동물원에서 본 부엉이 그리고 한강에서 마주친 오리를 자신의 한 분신으로 보기까지 한다. 이로써 장자몽에서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고, 그리고 무엇보다도 억압된 실재계(자와 타의 구분을 넘나드는 행복하고 자족적인 의식의 상태, 미처 의식이라고 부르기조차 어려운 선의식의 상태)를 회복하게 해준다.


송지인. 신화적, 유목적 상상력
- 황제에 속하는 동물, 향료로 처리하여 방부 보존된 동물, 사육동물, 젖을 빠는 돼지, 인어, 전설상의 동물, 주인 없는 개, 이 분류에 포함되는 동물, 광폭한 동물, 셀 수 없는 동물, 낙타털과 같이 미세한 모필로 그려질 수 있는 동물, 물 주전자를 깨트리는 동물, 멀리서 볼 때 파리같이 보이는 동물 -
이 글은 남미의 판타지리얼리즘 작가 보르헤스가 고대 중국의 한 백과사전에서 인용한 것을 미셀 푸코가 <말과 사물>의 서문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정통적인 분류체계를 아무렇지도 않게 벗어나 있는 이 동물 분류법을 읽은 푸코는 바로 그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시대명사의 불가능성을 통감한다. 정통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지식체계,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지식체계, 선입견과 편견으로 굳어진 지식체계를 푸코는 그릇된 지식(독사)이라 부르고, 그 틀 바깥에 놓여진 지식체계, 그 틀을 허물고 부수는 역동적이고 가역적인 지식체계를 진정한 지식(에피스테메)이라고 부른다. 이로부터 비활성의 지식의 틀을 깨고, 억압된 활성의 지식을 회복해야 한다는 푸코의 강변이 들리는 것 같다. 그런가하면 롤랑 바르트 역시 <신화론>에서 자연스런 사실로 알려진 것이 실상은 특정 주체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덧칠되고 각색된 것임으로(신화화된 것으로 보며), 그 더께를 걷어내고 사태 자체를 투시할 것을 주문한다.

이처럼 신화 혹은 신화적 사실은 진정한 현실을 은폐하면서 드러낸다. 그것이 현실과는 동떨어진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 의해 추동되며, 그 자체가 현실을 견인하며, 현실을 축조하는 현실의 한 부분이다. 더불어 현실과 현실 사이의 행간을 읽게 해주고, 현실이 은폐하거나 간과한 주름과 결을 드러냄으로써 의식의 지평을 확장한다.

송지인의 작업은 우연한 기회에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장난감 인형으로부터 시작된다. 작가는 장난삼아 그 인형의 팔다리를 떼어내 다른 인형에다가 붙여본다든지, 머리를 떼어내 다른 장난감과 접합시키는 놀이를 통해 사물이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 보이는 의외성을 발견한다. 사물의 존재방식이 미리 결정돼 있는 것이 아님을 발견하고, 이는 다만 개념과 사유의 관성에 지나지 않은 것임을 인식한다. 작가의 작업은 이처럼 사물을 결정적이고 고정된 존재방식으로부터 자유자재로 재구성될 수 있는 것임을 주지시키며, 특히 그 의미마저도 재구성될 수 있음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사슴의 뿔처럼 머리에 나무가 자라난 소년(화목인소년), 두 송이의 꽃으로 그 신체를 대신한 소녀(이형화소녀), 말의 몸과 집게발을 가진 소녀(겸각마족), 목처럼 긴 팔 끝에 사색에 잠긴 얼굴을 들고 있는 새(번뇌조), 그 몸에 현란한 무지개의 무늬가 새겨진 말(홍예칠색마), 각각 우울하거나 웃거나 분노하는 세 송이 꽃으로 개화한 얼굴을 가진 짐승(삼두화수), 머리에 커다란 종을 이고 다니는 고양이(홍발종묘), 그리고 그 머리가 두 송이의 국화로 대체된 아기와 같은 형상들이 이 기획으로부터 태어난다.

그 자체 실재하는 것이기보다는, 신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다양한 존재 양상에 대한 일종의 상징과 유비와 표상으로 읽히는 이들 캐릭터는 상식적인 맥락에서 볼 때 하나같이 비정상적인 돌연변이처럼 보인다. 여기서 상식적인 맥락 그 자체를 문제시하는 푸코의 견해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즉 푸코는 대상을 상식과 비상식으로,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고 구분하는 관례에 권력이 개입돼 있다고 말한다. 거기서 인간의 몸과 정신을 관리하고 통제하고 억압하는 생물 권력의 실체를 본 것이다. 작가의 캐릭터들은 이러한 생물 권력의 실체를 드러내고, 이에 의해 억압된 무의식과 욕망과 상상력의 실체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실체는 정통적인 권위를 부여받은 언어의 형태로는 완전히 재현되거나 환원되지 않는다. 그 자체가 사전에 미리 주어진 틀을 부정하고 허무는 언어, 지금 막 생성 중인 언어, 자유자재로 결합되고 재구성되는 현재진행형의 언어, 가변적인 활성의 언어를 통해 발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종들, 괴물들, 돌연변이들, 혼성잡종의 캐릭터들이 낯설기는커녕 친근하기 조차하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신화, 산해경, 보르헤스가 구상한 괴물 백과사전, 월터 디즈니의 만화 캐릭터들,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각종 게임에 등장하는 캐릭터들, 그 캐릭터를 흉내 내는 코스프레 놀이, 아바타의 존재 등이 이제 더 이상 현실과 비현실, 실제와 이미지, 정상과 비정상이 서로 대치되고 반대되는 개념이 아님을 주지시킨다. 송지인의 이 일련의 작업들은 그 구분과 경계를 공고히 하려는 제도의 관성이 허물어지는 지점을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식의 유목주의를 실현한 것이다.

장희진, 미디어 시대의 자연의 의미
현대인에게 자연은 무슨 의미일까. 그는 자연을 찾아나서기보다는 자연풍광을 선전하는 카탈로그의 관광지 사진을 보고 즐기며, 힘겹게 산을 오르기보다는 TV 속의 에베레스트 등정 장면에 공감하며, 내셔널 지오그래픽에 방영되는 불을 내뿜는 활화산 장면에 감탄한다. 자연 자체보다는 자연의 이미지를 향유하는 것이다. 사진과 영상, 잡지와 각종 인쇄물 등의 온갖 매체들이 이러한 자연의 이미지를 유포시킨다. 이 매체들은 자연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일종의 아우라를 부여해서 자연을 신비화한다. 자연 그 자체란 모든 살아있는 유기물이 그렇듯이 아름답지만은 않다. 그리고 대개는 삶의 현장으로부터 동떨어져 있기 마련이다. 미디어는 자연의 아름다운 국면만을 극대화하고, 더욱이 눈앞에다 들이밀 듯이 실현해보여주기 때문에 쉽게 매료된다. 자연보다 더 아름다운 이미지, 자연보다 더 자연 같은 이미지, 마침내는 실제의 자연과는 최소한의 상관성마저도 결여한 고도로 추상화된 이미지(자연의 순수한 표상을 획득한 이미지)가 실제로 자연을 대면하기까지의 수고로운 과정을 덜어준다. 더욱이 정작 자연을 대면할 때의 감각경험은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한 장의 사진 속에 찍힌 자연의 이미지는 두고두고 그 감각을 즐기게끔 해준다. 현대인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자연을 상실한 것이다.

자연을 소재로 한 장희진의 그림은 자연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현실인식을 주지시키는 한편, 현대인이 상실한 자연을 되돌려주려는 기획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 작가는 자연의 감각적 외피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일정정도 이를 추상화한다. 자연을 직접적으로 모사하는 대신에 일종의 암시적인 과정과 방법을 통해 감각적인 표면의 이면에 가려진 자연의 본질(자연성)을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얼핏 보면 그림에서의 자연은 그 실체가 잘 드러나지가 않는다. 그림에선 다만 기하학적인 줄무늬 형태의 패턴화된 문양이 반복적으로 중첩돼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화면에 그려진 것이 아니라 마치 저부조처럼 깊게 패인 요철의 형태로서 현상하며, 이 요철이 화면에다 그림자를 만들고, 나아가 시점에 따라서 화면을 다변화시키기조차 한다. 작가는 이렇게 패턴화된 요철이 조성된 화면에다 특정의 한 가지 색채로만 자연의 이미지를 덧그리는데, 자연 자체보다는 자연이 머문 흔적, 그 자취를 암시할 뿐이다. 예컨대 파문을 일으키며 번져나가는 수면에 투영된 자연의 반영상을, 그리고 벽면에 드리워진 자연의 실루엣 형상을 연상시킨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의 자연은 기하학적 문양과 단색조의 화면으로 한정돼 있다. 미니멀리즘적 환원을 떠올리게 할 만큼 금욕적이면서도 장식적인 이 화면을 통해 작가는 자연의 감각적 실제보다는 그 관념적 실재를 표상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바람과 대기가 하나로 어우러지고 빛과 어둠이 서로 희롱하는 자연의 비가시적인 영역을 드러낸다. 화면에 새겨진 규칙적이고 반복적인 결로써 자연의 결을 드러내는데, 이는 자연의 호흡이나 숨결과도 통한다. 또한 프린터와 같은 각종 미디어를 통해 재해석된 자연의 이미지를 암시하며, 엄격한 화면 구성과 유기적인 이미지와의 결합을 통해 미디어 시대의 자연의 (진정한) 의미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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