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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주리의 그림,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세계

윤진섭

황주리의 그림, ‘영원한 현재진행형’의 세계





Ⅰ. 글머리에
군사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한 학생들의 시위로 인해 서울의 도심이 최루탄 가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스의 매캐한 냄새와 분진, 그리고 난무하는 화염병의 불꽃으로 어수선하던 80년대의 초반에 황주리는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미술사적으로는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이 교차되던 시기였다. 그리고 민주화에 대한 시민들의 갈망이 점차 짙어가던 80년대 중반에 그녀는 신구상주의 계열의 기수로 부상되기에 이른다. 이 시기에 70년대의 학교 교육을 통해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은 작가들은 대부분 사회에 대한 도덕적 채무를 지니고 있었다. 60년대 후반에 기미를 보이기 시작해서 70년대의 잠복기를 거친 80년대의 민중미술은 그렇게 해일처럼 화단을 덮쳤다.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이념적 길항관계는 80년대의 어수선한 정치 지형도 속에서 후자가 승기를 잡아나가는 쪽으로 결말을 맺기에 이른다. ‘6. 29 민주화 선언’은 피로 얻은 값진 대가였다. 거기에 힘을 보태지 못했다는 모더니즘 작가들의 자책과 그로 인한 정신적 트라우마(trauma)는 현실도피나 유미적 외피를 뒤집어씀으로써 치유를 위한 모색을 길을 찾아 나섰다. 1987년 마침내 황주리는 뉴욕으로 진출한다. ‘6. 29 민주화 선언’이 있던 바로 그 해다. 그 이후 그녀는 서울과 뉴욕을 왕래하면서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혀나갔다. 그 결과 인기작가의 반열에 들었으며, 세칭 스타 작가로 그 이름이 화랑가에 회자되고 있다.
황주리는 누구인가? 아직도 그녀는 대작 위주의 엄청난 에너지를 작품에 쏟아 붓고 있는가? 그 지칠 줄 모르던 열정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은 지금도 견지되고 있는가? 사회와 문명에 대한 비판의 정신은 아직도 식지 않고 있는가? 이 글은 이러한 질문에 대한 응답의 형식으로 씌여진 것이다.

Ⅱ. 눈(眼)
몇 해 전, 나는 황주리의 작품에 대해 모 잡지에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들숨날숨, 2004. 3월호). 좋아하는 작품을 선택하여 독자들이 알기 쉽게 해설을 곁들여 달라는 편집자의 각별한 부탁도 있고 해서 나는 일부러<그대안의 풍경>(1993)을 골랐다. 그것은 매우 화려해서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해 보였다. 그녀의 그림은 흑백 아니면 화려한 원색 두 종류인데, 잡지의 성격상 후자 쪽이 더 어울릴 것 같아서 그것을 골랐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내게 있었다. 작품을 고르긴 했는데, 대체 이것에 어떻게 접근할 것인가 하는 해석의 실마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하릴없이 화집만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문득 나의 시선을 강렬하게 끄는 것이 있었다. 눈이었다. 거기, 화려한 색채의 향연 속에서 나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수많은 눈들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나는 마치 감전이라도 된 듯 깜짝 놀랐다. 그 순간, 뭔가를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화집을 앞뒤로 넘겨가며 전체를 꼼꼼히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없었다. 초기작인<성난 군중>(1980)을 비롯하여<가면무도회>(1982),<추억제>(1982-8),<땅에서>(1990), 심지어는<추억의 고고학>(1993)을 아무리 열심히 들여다봐도 이렇게 많은 눈을 그려 넣은 경우는 찾아볼 수 없었다.
왜 하필 눈인가? 나는 풀리지 않는 화두처럼 그 점이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화집을 밀쳐두고 머리나 식힐 겸, 언젠가 그녀가 내게 준 수필집<날씨가 너무 좋아요>를 집어 들었는데, 거기 까만색 안경 너머로 빤히 쳐다보고 있는 그녀의 해맑은 눈이 있지 않은가(황주리, 날씨가 너무 좋아요, 생각의 나무, 2001)! 나는 그 눈을 보는 순간 다시 한번 놀라고 말았는데, 그녀의 얼굴 사진이 있는 그 왼쪽 페이지에는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다음과 같은 경구가 적혀 있었다.

너는 철도의 레일이다
녹슬고 얼룩이 진, 은빛으로 번득이는 아름답고 막연한 레일이다
.......그리고 네 마음을 속속들이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나는 지금도 왜 황주리가 자신의 얼굴 사진과 함께 이 경구를 인용했는지 모르겠다. 다만 ‘마음’이라는 단어가 가슴에 와 닿는다. 왜냐하면 그녀의 그림은 전적으로 마음에 관한 진술이기 때문이다. 그 중심에 사람이 있고, ‘눈’이 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눈을 통해 전달한다. 그래서 눈은 대개의 경우 말보다 훨씬 정직하다. 볼프강 보르헤르트는 말했다. “네 마음을 속속들이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고.
그렇다. 타인의 마음을 어떻게 속속들이 다 알 것인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화가는 남들이 모르는 자신의 마음을 그림으로, 수필가는 수필로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결코 다 열어 보이지 못 할 자신의 마음을 말이다.
언젠가 황주리는 내게 말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글을 쓰는 편이 자신에겐 훨씬 쉽게 느껴진다.”고. 내가 보기에 그녀는 그림도 잘 그리지만, 글도 잘 쓴다. 그래서 내게 있어서 그녀의 글은 그림을 해석하는데 꼭 필요한 일종의 주석(註釋)과도 같다.




Ⅲ. 인생
황주리의 그림은 인생을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경험하고, 느낀, 온갖 물상과 자신 혹은 타인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매우 유장해서 쉽게 그칠 것 같지가 않다. 아마 그 이야기는 그녀가 생을 다하는 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마치 왕에게 매일 밤 새로운 이야기를 들려줘야만 했던 아라비안나이트의 세헤라자데 왕비처럼, 그것도 매번 새로운 이야기로......
거기에는 ‘녹슬고 얼룩이 진’ 음습하고 축축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은빛으로 번득이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다. 서울의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뉴욕의 이야기도 있다. 시골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찾아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녀는 시골에서 산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영원한 ‘도시의 사냥꾼’이다. 그녀는 이야기의 채집을 위해서 언제나 도시의 거리를 걸어 다닌다. 그녀가 운전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운전을 하는 모습을 나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운전을 하면서 관찰을 할 수 있을까? 아마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러한 관찰은 피상적인 것에 그치고 말 것이다.
수필도 그렇지만 그녀의 그림 역시 예리한 관찰과 탁월한 기억력에서 온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많은 이야기들을 그렇게 상징적으로 압축시켜 풀어낼 수는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림을 그려본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 봐도 하나의 평면에 인생의 온갖 풍상을 녹여 압축적으로 담아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림이 서사(敍事)에 적합지 않은 매체로 인식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인생을 보다 사실적으로 담아내기에는 초당 24프레임으로 이루어진 영화적 형식이나 소설 쪽이 더 적합하다.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글을 쓰는 편이 더 쉽게 느껴진다는 그녀의 말은 혹시 회화가 지닌 ‘닫힌 형식’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회화는 단 하나의 프레임으로 감동을 줄 수 있는 최적의 매체다. 파블로 피카소의<우는 여인>이나 프랜시스 베이컨의<교황 인노켄티우스 10세의 초상화 연구>는 다같이 인간적인 절규를 하나의 화면에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이 이를 증명한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림에 절망하는 이유는 자신의 감정을 하나의 화면에 담아내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 아닐까?
황주리의 그림들 가운데 하나의 화면에 하나의 인물로 이루어진 것은 자화상이다. 그 중에서도 흑백으로 그린 1989년도의 자화상과 칼라로 된 1993년도의 것이 시선을 끈다. 그녀는 지금까지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린 바 있는데, 시기별로 스타일과 표현법이 다 다른 것이 특징이다. 자화상은 자기와의 대화 방식이다. 거울을 보면서 그린 사실적인 그림이든, 아니면 내면의 의식을 밖으로 투사한 추상적인 그림이든 자신과의 대화란 점에서 공통적이다. 나는 황주리가 1989년에 제작한<자화상>(캔버스에 아크릴릭, 60cm x 45cm, 작가 소장)을 본다(Art Vivant, Julie Hwang, 시공사 09, 1994). 검은 색 바탕에 신경질적인 스크래치가 난무하는 듯한 화면에 그려진 둥근 안경 속의 두 눈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작고 예리해 보이는,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슬픔에 잠겨있는 듯한 이 두 눈은 1993년의<자화상>(캔버스에 아크릴릭, 53cm x 46cm)에 그려진 눈을 닮았다. 의식 속의 컴컴한 계단을 그린 후자의 자화상에 표현된 두 눈은 더욱 슬퍼 마치 가슴을 쥐어짜는 것 같다.
그녀는 유독 왜 이렇게 슬픈 느낌이 드는 자화상을 제작한 것일까>1986년에 제작된 일련의 자화상들은 모두 슬퍼 보이는 것 일색이다. 원고지 위에 화려한 색채로 그린 그것들은 마치 누군가에 의해 조종을 당하는 피에로이거나 가면을 쓴 인물처럼 보인다. 나는 이 시기의 자화상이 왜 유달리 슬퍼 보이는지 모르겠다. 반면에 2000년대에 들어서 그린 자화상들은 마치 일기처럼 담담하게 심경의 일단을 표현한 것들이 대부분인데, 주로 시간과 가정을 테마로 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그녀는 1992년에 쓴<가을>이란 글 속에서 “왜 날이 갈수록 지나간 시간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것일까?”라고 반문하고 있다. 그녀에게 있어서 시간이란 되돌려버리고 싶은 그 무엇이다. 그 때는 이랬어야 했는데, 왜 그렇게 못 했을까 하는 회한과 후회로 얼룩진 것이 바로 시간과 관련된 그녀의 글이다. 자신의 얼굴을 시계판으로 대신한 자화상, 시간은 황주리의 작품에서 그 만큼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인간은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우며, 동시에 얼마나 끔찍하고 잔인한가?”

황주리의 이 말은 인간의 속성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3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오로지 인간에 관해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 온 작가답게 그녀는 인간의 요체를 두 개의 대립적인 속성으로 파악한다. 선과 악이 그것인데, 그것은 다시 홍대일이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아름다움과 추함, 밝음과 어둠, 가벼움과 무거움, 희망과 절망” 등등 보다 세부적인 범주로 나뉘어 진다. 인간은 크게 봐서 선과 악이라는 두 개의 속성 사이를 왕복하는 진자에 다름 아닐진대, 단지 이 양면성이 하나의 페르소나(persona)에 감춰져 있을 뿐인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처럼 인간은 인생이란 무대에서 잠시 연기하다가 사라질 뿐인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 그래서 “가면이 필요하다”고 그녀는 외치는 것 같다. 여기서 그녀의 데뷔작이<데드마스크>(1980)인 것과 80년대 초반에 집중적으로 그린<가면무도회>,<추억제>,<내가 살려면>연작이 가면을 쓴 인간 군상을 소재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가면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말을 한 번 더 인용하자면, 가면 밑에 감추어진 “네 마음을 속속들이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데드마스크>(1980)는 검은 바탕에 붉은 색조가 가미된 것과 푸른 색조로 이루어진 것 두 점이 있는데, 다 같이 삭발한 얼굴의 옆모습을 실루엣으로 처리한 것이다. 마치 부토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이 연작은 음울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군부 독재에 저항하던 당시의 시대적인 분위기 탓인지 내용상으로는 죽음을 소재로 한 것이지만, 형식상으로는 프로세스 아트와 같은 개념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이 연작을 시발점으로 하여<가면무도회>,<추억제>,<내가 살려면>,<25시>,<우리들의 천국>등등 80년대 중반에 제작된 작품들을 통해 황주리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풀어나간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내용을 담는 형식이다. 이백 자 원고지를 기본 모듈로 한<추억제>(1982)에서 비롯된 것 같은 형식적 ‘폐쇄성’은 부분적이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내용적 폐쇄성을 가져오게 된다. 이것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어린 시절, 내게 가장 흔한 물건은 아이스케키도 연필도 아니고 집 안 여기저기 쌓여 있던, 아버지가 경영하시던 출판사 ‘신태양사’라는 이름이 한문으로 찍혀 있던 누런 이백 자 원고지들이었다.”

황주리,<아버지의 누런 원고지>


책과 잡지들로 가득 한 옛날식 한옥의 창고방에서 잠을 자던 유년시절의 추억, 스무 살 이후 원고지의 기억을 되살려 한지로 원고지를 만들고 그 위에 그림을 그렸던 경험 등은 폐쇄성과 관련된 단서들이다. 여기서 출판사를 경영한 집안의 분위기와 황주리의 문학적 소양이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는 사실을 잊지 않도록 하자. 그녀는 말한다. “아버지는 내게 문학적 감수성을 물려주셨다”고. 그래서 그런지 그녀의 작품의 명제는 소설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오거나 패러디한 것들이 대부분이다.<우리들의 천국>(이청준,<당신들의 천국>),<25시>(게오르규),<그 중에 일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李箱),<날개>(李箱),<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밀란 쿤테라,<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안경에 관한 명상>(장정일,<햄버거에 관한 명상ㅍ) 등등. 그 중에서 특히 관심이 가는 것은 李箱의<그 중에 일인의 아해가......>인데, 분위기 상으로 볼 때, 李箱의<날개>에 나타나는 주인공 ‘나’의 심리적 폐쇄성과 아내의 화장품을 갖고 노는 유희 장면은 그녀가 유년시절에 겪은 창고방의 추억과 원고지를 갖고 논 유희 장면과 유비적 관계를 갖는다. “남아도는 원고지로 비행기도 접고, 종이배도 접고, 그림도 그리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에게 있어서 “원고지는 최초의 도화지였고, 캔버스였던” 것이다.
이 심리적 폐쇄성은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간들을 다양한 형태의 프레임 안에 가두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것은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원고지의 네모 칸을 비롯하여 새장(<땅에서>, 1990), 원(<땅에서>, 1991), 옷(<삶은 어딘가 다른 곳에>, 1992) 꽃(<식물학>, 1997) 안경(<안경에 관한 명상>, 1999-2000) 등등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Ⅳ. 시선
황주리의 작품에서 프레임의 개념과 함께 중요한 요소는 시선이다. 이 시선에 대해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밖에서 안을 바라보는 시선과 안에서 밖을 바라보는 시선의 마주침, 그 긴장을 살아가는 일이 내게는 즐겁다.......관찰하는 눈, 감시하는 눈, 따스하게 지켜보는 눈, 그 중의 어떤 눈이든 그것은 그림을 바라보는 당신의 자유다.”
황주리,<식물학>


황주리의<자화상>(1989)에서 본 작고 예리한 눈이 다시 떠오른다. 거기에 수필집<날씨가 너무 좋아요?에 실린 까만색 안경 너머로 빤히 쳐다보는, 무덤덤한 그러나 깔끔해 보이는 눈이 겹쳐진다. 이 두 시선의 이미지는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또 하나의 중요한 키워드다.<식물학>에 관한 ‘작가노트’에서 그녀는 이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것은 유년시절의 추억과 관련된다. 내수동 막다른 골목에 있던 큰 대문 집에서 골목을 걸어 나올 때 봤던 다양한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다. 거기서 그녀는 “숱하게 많은 삶의 질곡어린 형상들”을 만났다. 유명한 점쟁이 할아버지와 세 번쯤 남편을 잃은 과부 아줌마, 다운 증후군을 앓는 열예닐곱 살짜리 소녀의 일그러진 얼굴 등등. 그녀는 연민이 섞인 감정으로 훗날 그들을 기억에 떠올린다. 그녀는 그 골목이 “자신과 어머니와 세상을 연결하는 탯줄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식물학>은 탯줄을 식물의 줄기에 비유해 펼쳐놓은 ‘인연’의 파노라마다. 그녀의 말을 빌리면 “결국은 모두 다 혼자이면서 그러나 결코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고무호스 같은 식물의 줄기로 연결된 도시, 나라, 세계, 우주.......나는 이 그림 속에서 그렇게 팽창되어 가는 식물의 번식을 꿈꾸기” 위해서 그림을 그린다. 그녀의 취미가 여행과 수집이라는 사실은 단순히 호사 취미를 넘어 그 자체가 작품을 위한 취재나 재료를 모으기 위한 활동임을 말해준다. 안경, 돌, 골동품 등을 이용한 2000년대의 오브제와 설치작업은 이러한 그녀의 수집벽이 낳은 결과다.
황주리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래서 그런지 ‘신데렐라 콤플렉스’가 좀 있는 것 같고 화려한 것을 즐기는 경향이 있다. 그녀의 작품에서 풍기는 도시적 감각은 아마도 여기에 기인하는 것 같다. 문학적인 소양이 풍부했던 아버지는 그런 그녀에게 있어서 언제나 든든한 후원자요, 정신적 모태였다.

“생각해 보면 나는 하고 싶은 일도, 갖고 싶은 것도 늘 부족함 없이 누리면서 자랐다. 해도 달도 다 따다주실 것만 같던 아버지 덕분에 어쩌면 나는 조금쯤 잘못 자랐는지도 모른다.”

황주리,<아버지 이야기>


화려한 원색의 그림과 흑백 그림의 사이를 왕복하는 황주리 역시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듯이 이중적 인격의 페르소나를 지니고 있다. 연민과 경멸, 사랑과 증오, 관용과 편협, 대범함과 소심함 등등의 감정이나 성격은 동전의 양면처럼 상황에 따라 모습을 바꿔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 시시각각으로 모습을 달리하는 감정은 긍정 혹은 개방성(원색)과 부정 혹은 폐쇄성(흑백)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래서 그녀에게 있어서 시간은 부정적인 기억을 애써 긍정적인 기억으로 환치하려는 원망(願望)의 기제로 작용한다. 그녀의 글이 유달리 회상에 치우치고 있는 까닭도 시간을 일종의 도피처로 삼고 싶은 무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그대안의 풍경>과<식물학>연작에 나타나고 있는 수많은 눈들이 뉴욕 체류시절을 소재로 흑백으로 그린<맨하탄 블루스>(1995) 연작에는 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도 특이하다. 그녀의 말대로 그것이 관찰하는 눈이든, 감시하는 눈이든, 따스하게 지켜보는 눈이든 간에 흑백의 그림에서 시선의 부재는 부정성과 모종의 관련이 있어 보인다. 이는<맨하탄 블루스>의 원형이랄 수 있는<가면무도회>(1986),<땅에서>(1988-1990),<내 사랑 히로시마>(1992-1993)에 등장하는 인간 군상이 일그러지고 흉한 얼굴로 묘사됨과 동시에 눈이 그림의 중요한 요소로 간주되고 있지 않은 사실과 서로 맥이 통한다.
Ⅴ, 맺음말 : 근작에 대하여
황주리에게 있어서 그림은 의식 또는 무의식의 심부(深部)로부터 길어 올리는 회상의 두레박이다. 그것이 화려한 것이든, 어둡고 우울한 것이든, 거기에는 자기애와 인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이 뒤섞여 있다. 그녀의 캔버스는 마치 통조림 속에 든 정어리처럼 프레임에 갇힌 온갖 인간 군상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감시의 대상인 동시에 감시하는 자이기도 하다. 그들의 시선은 항상 화자(話者)인 나를 향해 있다. ‘나’는 결코 그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들의 시선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벗어남, 곧 자유는 관습과 고정관념, 그리고 사회적 상식으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한다. 어쩌면 그것은 유년시절에 그녀의 그림에 부재했던 ‘아버지’에로의 귀향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나이 서른이 넘도록 한 번도 결혼을 하라”는 재촉을 한 적도 없었으며, 심지어는 “밥을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한다.”고 말한 적도 없다(작가노트,<식물학>).

“맨 처음 내가 연필로 끼적거린 그림은 그저 의미 없는 선 또는 점이거나 엄마 얼굴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얼굴은 분명 아니었다. 그런데 어릴 적 한 번도 그리지 않은 아버지의 얼굴이 날이 갈수록 또렷이 기억나는 까닭은 무엇일까?”
황주리,<식물학>


황주리의 근작들은 ‘아버지’에로의 귀향을 의미하는 여행에서 모은 각종 엽서들로 채워진다. 백호 크기의 작품 30점에서 고른 10점 정도가 전시된다. 엽서들의 콜라지인 이 작품들은 기성의 엽서(오브제)에 다양한 사연들을 덧붙인 것이다. 갖가지 추억과 회상들로 채워진 이 엽서 그림들은 인생의 만화경이자 그녀가 들려주는 유장한 이야기다. 한 번 더 강조하자면, 그녀는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 등장하는 세헤라자데 왕비처럼 ‘새로운 이야기’를 끊임없이 들려준다. 마치 넓은 세상을 둘러보고 온 이방인 나그네처럼 그녀는 우리들에게 신기하고 따끈한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거기에 다시 예의 눈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창이다. 그 창을 통해 바라보는 시선은 이제 더 이상 감시와 관찰의 시선이 아닌, 연륜의 깊이로 녹여낸 고즈녁하고 평화로운 시선이다. 이수명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영원한 현재진행형’인 황주리 특유의 인간적이며, 따뜻한 시선인 것이다.


참고문헌

Art Vivant, Julie Hwang, 시공사, 1994
윤진섭, 들숨날숨 3월호, 2004
황주리, 날씨가 너무 좋아요, 생각의 나무,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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