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차상엽의 그림자 조각

고충환

그림자, 신의 현현(顯現)


실존주의는 인간의 존재조건을 상실감으로 본다. 좌표를 상실하고, 신을 상실하고(니체), 중심을 상실하고(한스 제들마이어), 세계를 상실한(루돌프 니콜라우스 마이어) 부재의 시대에 존재해야 하는, 아이러닉한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부조리한 상황인식에서 찾는 것이다. 이러한 부조리 의식은 무지 때문에 자신을 죽이고 타자마저 죽음으로 몰아가는 고대의 비극에서 이미 그 전조가 예견된 것이며, 이것이 사무엘 베케트의 부조리극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그 정점에 이른다.
이 희곡에서 등장인물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사람인지 메시아인지 도래할 미래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한갓 추상적 비전인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극이 끝날 때까지 그 단서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등장인물들은 자신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그저 막연하게 고도를 기다릴 뿐이다. 더불어 고도에 대한 앎이 절실한 것 같지도 않고, 그 기다림이 절박한 것 같지도 않다. 그렇다고 고도를 기다리는 행위를 그만두지도 않는다(못한다). 자신들이 기다리는 고도가 무엇인지도(누구인지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그대로 덫에 걸린 인간의 처지를 말해준다. 이로써 삶의 좌표를 상실한 인간상황을, 그 아이러닉한 상황인식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부조리와 아이러니는 인간실존의 피할 수 없는 조건이 되었으며, 그는 다만 맹목적으로 그리고 무조건적으로 기다릴 뿐이다. 그는 도대체 누구를, 무엇을 기다리는가?
차상엽의 근작의 주제는 이다. 이 말을 풀어쓰면 대충 기쁜 소망과 더불어 누군가를(무언가를) 기다린다는 정도의 의미가 될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들뜬 마음으로,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린다? 이렇게 작가의 기다림은 사무엘 베케트의 기다림과는 반대되는 지점에 있다. 그는 자신이 누구를(무엇을) 기다리는지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만큼 그를(그것을) 적극적으로 기다린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상에 천년왕국을 건설하고 이를 다스리기 위한 메시아 예수의 재림이다. 실존적 인간(의식)에 의해 폐기된 신을 복원하고, 그 신을 자신이 사는 이유와 삶의 좌표로써 재차 세우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전작의 <부활>과도 일맥상통하는 이러한 주제의식으로써 실존적 인간의 부조리한 삶, 아이러닉한 삶에 대한 대안적 삶을 제안한다. 형이하학의 시대(물질과 진리를 동일시하는 세속적인 시대)에 형이상학의 비전(그림자에 의해 암시되는)을 대질시키고 있는 것이다.
차상엽의 작업은 그림자 조각으로 범주화할 만한 형태를 보여준다. 스테인리스 스틸 판 위에 와인 잔이나 향수병 그리고 선글라스와 같은 일상적인 오브제들을 올려놓은 연후에, 오브제 뒤쪽에 조명을 장착해서 벽면에다 이미지를 투영하는 것이다. 평범한 사물들을 이용해 범상치 않은 그림자를 만들어내고, 그 자체로는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적인 오브제들을 이용해서 유의미한 상(象)을 만들어낸다. 조명을 받은 스테인리스 스틸 판이 벽면에다 마치 영화의 스크린이나 회화의 틀과 같은 사각형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데, 그 판형이 사다리꼴의 형태를 띠고 있다. 사변의 길이가 같은 사각형의 경우에는 이미지가 벽면에 투사될 때 그 형태가 왜곡될 수 있으므로 이를 바로잡기 위해 사다리꼴의 판형이 선택된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근작에서 일종의 영화적 장치랄 수 있는 스크린 이미지를 도입함으로써 작품에 내재된 서사적 성질이나 구조를 강화하고 있다. 이로써 관객은 마치 영화관의 스크린에 투사된 한편의 드라마나 스펙터클을 대면하는 것과도 같은 시각적 경험을 할 수 있게 된다.
그 서사를 보면, 작가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부에다 자신을 비유하는데, 이는 재림하는 예수를 신랑에 그리고 신자(信者)를 신부에 비유한 성서의 구절에 착안한 것이다. 이처럼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부에게는 세속적인 삶의 유혹이 깃들 수가 없다. 따라서 <외계인의 눈물>에서의 외계인이란 세속적인 삶과 어울리지 못하는 작가 자신의 자화상을 지시하며, 그의 눈물은 이러한 임시적인 상황(세속적인 모든 것이 유보된 삶)에서의 고뇌를 상징한다. 이것이 작품 <독거>에서는 벤치에 저 홀로 앉아 있는 캐릭터를 통해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작가 자신의 외로운 심경이 변주된 형태를 띠게 된다. 작가에게 세속적인 삶은 무의미한 것이며,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다만 꿈꾸는 것이다. <아기천사>와 <나비인간>은 이런 세속적인 삶의 굴레로부터 초월하고 싶은 작가의 소망이 상징적으로 담겨 있다. 특히 유충으로부터 성충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을 통해 마침내 화려하게 비상하는 나비의 나풀거리는 날갯짓이 꿈꾸는 듯한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데, 이는 초월하고 싶은 작가의 욕망과 닮아있다.
차상엽의 작업은 무엇보다 기독교의 도상학에 그 바탕을 두고 있으며, 그 기원은 성서해석학에로 소급된다. 즉 성경은 신의 말씀임으로 그 자체 직설화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자의적인 해석으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 있는가 하면, 한편에선 신의 말씀이 인간의 화법과 같을 수는 없음으로 성경은 당연히 상징화법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 있다. 작가의 작업에서는 성서 해석학의 이 두 갈래가 종합된 것으로 보이며, 이들 중 특히 상징화법 쪽에 그 무게중심이 실린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상은 예수의 재림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해놓은 요한계시록이 거의 상징 백과사전을 방불케 한다는 점과도 통한다.
특히, 작품 <알파와 오메가>는 작가의 여느 작품들에 비해 현저하게 기독교의 상징체계가 집대성된 것으로서, 그 전체 형상이 성전(聖殿)의 미니어처를 보는 것 같다. 그러니까 12개의 철사를 이용한 얼굴의 프로필 형태가 이마를 맞댈 듯이 서로 마주보며 둥글게 모여 돔 형태를 띠게 함으로써 성전을 표상한다. 더불어 철사의 안쪽에 설치된 반원 형태의 투명한 아크릴 구조물로써 돔 형상을 더욱 강조한다. 이때 성전의 골격을 이루고 있는 12개의 프로필 형상은 12사도를 상징하는데, 이는 작품 아래쪽에 점토로 빚어 만든 12사도 형상으로 재차 변주되고 있다. 그리고 본체 형상의 위쪽에 얹힌 구조물은 그 형상이 마치 종루처럼 보인다. 상층부에 해당하는 이 형상 안쪽에는 부활한 예수를 중심으로 해서 양쪽에 파이프오르간과 성물함이 배치돼 있고, 그 위쪽의 첨탑처럼 돌출된 종탑 안에 설치된 전등이 성전의 내부를 환하게 비춘다.
그런가 하면 종탑에 난 창과 문자 알파의 형태를, 그리고 반구를 통해 성전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사방에 난 문과 문자 오메가의 형태를 일치시킴으로써 알파와 오메가, 처음과 끝으로 대변되는 기독교의 상징체계를 완성한다. 이와 함께 성전의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는 61개의 계단의 숫자로써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예수는 하나)을 강조한다.
한편, 작품 <알파와 오메가>는 이처럼 기본적으론 성전을 형상화한 것이지만, 동시에 치마(웨딩드레스)를 두른 신부의 형상을 연상케 한다.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는 신부로서의 작가의 정체성이 손에 등을 든 신부의 형태로 반복 재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의 재림이 언제일지 모르기에, 부지불식간에 도래할 지도 모를 예수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해 세속적인 삶을 상징하는 밤의 어둠을 밝혀줄 등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다. 모두가 잠든 순간에도 항상 깨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모든 형상들이 어우러져 천장에 태양과도 같은 아우라가 연출된다. 성전 안쪽에서 창으로 된 돔 위쪽을 올려다 볼 때의 빛이 쏟아져 내리는 것 같은 판타지를 통해 지상에 도래할 신의 나라와 그 영광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외에도 차상엽은 아담과 이브를 소재로 한, 양식화된 형태의 브론즈 조각을 제안한다. 잠든 아담의 몸으로부터 갈비뼈를 취하는 신의 모습, 선악과를 삼키고 후회하는 이브의 모습, 아담과 이브를 현대적으로 각색한 모습, 아담과 떨어져 홀로된 이브의 모습을 각각 형상화하고 있다. 그리고 빛을 투영하는 비누의 재료적 성질에 착안해 만든 작품으로서, 각각 성모 마리아와 천사장 가브리엘을 부조형식으로 조형화한 것이 있다. 이때 그 뒤쪽에 등을 설치해서 형상 앞쪽으로 은근한 빛의 아우라가 뿜어져 나오게 함으로써 전통적인 도상학에서의 후광을 강조한다. 또한 소나무를 조각해 만든 부활한 예수의 형상에서는 손등에 난 못 자국을 송진이 스며 나와 단단하게 굳어진 부분에 일치시키는가 하면, 나무 본래의 결을 따라 얼굴의 형상을 조각하는 등의 나무 자체의 본성을 가급적 살리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띤다. 이와 함께 못 자국이 있는 두 손등을 가슴에 포갠 예수의 이미지를 표현한 드로잉에서는 못 자국을 예수가 가슴에 품고 있는 교회의 십자가와 일치시킨다.
이처럼 작가는 작품마다 상징을 숨겨놓고 있는데, 심지어는 전시된 작품의 숫자조차 상징성을 띠고 있다. 그림자조각 5점, 브론즈조각 4점, 비누조각 2점, 목조각 2점, 그리고 드로잉 2점 등 총 15점이란 작품의 수는 그러니까 예수께서 13일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3일째 되는 날 부활하셨으므로 결국 그 날이 15일이 되는 셈이며, 이로써 작품의 숫자 15는 예수의 부활을 상징하는 것이다.

차상엽의 그림자조각은 빛(라이트아트)과 소리(사운드아트), 동력(키네틱아트)과 공기(발룬아트)를 소재로 한 일련의 시도들과 함께 탈조각 특히 비물질조각으로 나타난 현대조각의 특징들을 현저하게 반영하고 있다. 특히 그의 그림자조각은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마저 흔들어 놓고 있다. 그러니까 그림자가 흔히 그렇듯이 사물에 부수되는 이차적인 존재이거나 우연한 현상이 아니라, 그 자체 자족적인 존재성을 갖는 필연적인 것으로서 현상한다. 나아가 오히려 사물이 그림자를 위해 존재하는 양 보이며, 그림자로 인해 비로소 의미를 갖는 양 느껴진다. 이처럼 가시적인 것으로 하여금 비가시적인 것을 암시하고 상기시키는 행위야말로 예술이 지향하는 의미가 아니던가. 이로써 작가의 작업은 세계의 물질적인 표면현상을 넘어 이면과 사이에로 유도하는 한편, 감각의 저편에 있는 초감각적인 존재를 사념토록 한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