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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무 / 미술과 이데올로기

이선영

대한민국에서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다니고, 현재 화가로 활동하는 북한 출신의 작가 선무(線無)는 30년 넘게 북한에서 살다가 그곳을 탈출해서 2002년에 남한에 온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특이한 자전적인 배경과 관계를 가진다. 자연과 무의식까지 전면적으로 체계화, 물신화되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탈주’라는 말이 매우 선호되기도 했지만, 선무는 자기가 태어나고 자랐던 세계로부터 진짜 탈주를 감행한 인간이다. 올 여름 대안 공간 충정각에서 한 달간 열렸던 그의 첫 개인전 ‘행복한 세상에 우리는 삽니다’ 는 그가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북한의 암울한 체제에 대한 비판을 냉소적으로 표현한 일종의 리얼리즘 회화이다.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이데올로기의 종언’이 회자되는 시대에 그 어느 작가보다도 강력하게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입장에 섬으로서, 작가 스스로도 또 다른 이데올로기적 입장을 취한다.

자신의 신념 및 사고는 이데올로기가 아니고, 상대의 그것은 이데올로기라고 간주하는 것은 모순일 것이다. 권력투쟁으로 귀결되기 마련인 사회적 갈등의 장에서, 투명한 중립 지대 보다는 지배적 이데올로기와 저항적 이데올로기가 있을 뿐이다. 선무의 작품에서 비판되는 북한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영국의 문예이론가 테리 이글턴이 [이데올로기 개론]에서 정리한 바 있듯이, ‘체계적으로 왜곡된 의사소통’이며, ‘지배적 정치권력을 정당화하는 것을 돕는 잘못된 사고’에 가깝다. 그러나 예술 활동을 통해 그 체제를 열렬하게 비판 하는 것 역시, 모종의 ‘행동 지향적 신념체계’라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억압을 벗어나 자유를 찾아 길을 떠난 작가의 신념과 행동이 그러하다. 자유와 풍요에 대한 갈증으로부터 비롯된 이러한 신념과 행동은 북한 사회의 어두운 측면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원동력이 된다. 이데올로기는 북한 당국이나 탈주자 모두에게 자기 정당화의 사유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술가는 국가만큼 조직화되어 있지 않았을 뿐, 자기 행위의 목적과 수단을 설정하고 정당화하려 한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 입장이다. 인간은 변화에 적응하는 편이지만, 한국에 온 지 10년도 안된 그가 완전한 남한 사람이 되었다 하기에도 어렵다. 어디에도 완전히 속할 수 없는 경계인의 입장은, 그럭저럭 무던하게 살아가는 것이 행복일 수 있는 평범한 생활인에게는 불행일지 모르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신의 모든 것을 쥐어짜내야 하는 예술가에게는 귀중한 자산이 된다. 사실 화가라는 입장 자체가 현대사회에서는 아웃사이더의 입장에 놓여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선무에게 경계라는 것은 단지 분단의 상징을 넘어 수많은 차원을 가진다. 그는 선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선무라는 이름으로 개명을 했다지만, 작가란 선을 넘기 위해 그 앞에 가로 놓인 선을 더욱 분명히 하고, 그 선을 넘어 또 다른 선들을 무수히 맞딱뜨리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체제에 완전히 귀속되어 움직이지 않는 자는 선을 발견할 수 없으며, 선은 선을 넘어서서 나아가려는 자들에게 보다 분명하게 나타난다. 선무가 겪었던 종류의 절대 절명의 경험들은 대개 그것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둔 제3의 인물들에 의해 재현되기 마련인데, 그의 경우 경험의 당사자이자 그것을 재현하는 입장에 놓여있는 특이한 경우이다. 물론 스스로 특수한 경험의 주체가 되어 이를 재현, 또는 표현하는 입장에 놓이는 것이, 곧바로 예술적 성취나 객관성을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특수한 경험은 필요조건은 될 수 있어도 충분조건이 되지는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선무의 작품에서 한 체제의 내부 고발자로서의 생생한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앞으로 남한 사회에 화가와 남편과 아버지 등으로 살아가면서 만날 수많은 선들에 대한 ‘내부 고발자’로서의 시선은 아직 예고편으로 남아 있다.




올 여름 첫 개인전에서 북한사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강한 인상을 준 그이지만, 2006년부터 2008년에 제작된 80여점이 넘는 많은 그림들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부모 형제가 있는 고향의 모습은 향수어린 회고와 굶주림에 대한 쓰라린 추억으로 점철된다. 이러한 양면성은 탈출 과정을 그린 작품들에서도 발견된다. 가령 작품 [두만강]에서 아름답게 펼쳐진 두만강 풍경을 가르는 작은 물살이, 알고 보면 목숨을 건 도강의 장면이다. 그러나 그가 떠나온 북도 정착할 남도 아닌, 중국과 동남아에서 지낸 몇 년은 양가감정 보다는 삶의 가혹한 조건에 그대로 노출된 상황으로 표현된다. 작품 [눈에 달이 뜨다]는 숲 속의 번뜩이는 탈주자의 눈을 보여주며, 작품 [버려진 영혼]에서 어디인지 가늠할 수 없는 밀림, 라오스의 감옥 등을 그린 작품들은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고 중국과 동남아를 거친 몇 년간의 경험이 표현된 것이다. 국외자로서의 삶 그자체인 탈주 시기의 경험들은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불안한 존재 조건으로 생생하게 가시화됨으로서, 개인의 특수한 상황은 보편성을 획득 한다.

북한의 아이들을 통해 북한 체제를 본격적으로 비판한 작품들은 남한에 정착하여 자기가 지나온 선들을 확인하고, 탈출이라는 자신의 선택과 행동에 대한 정당화와 관련된다. 체제 옹호에 대한 선전 기술은 반어법으로 각색되는데, ‘행복한 세상에 우리는 삽니다’, ‘정말로 좋아’, ‘세상에 부럼 없어라’ 같은 문장이 그림과 결합되곤 한다. 도처에서 튀어 나오는 ‘기쁨’과 ‘행복’과 그에 상응하는 너무나도 해맑은 상황들이 연출되는데, 그러한 천편일률적인 아이들의 모습은 연출이라기보다는 실상이 그러하다. 종종 매체를 통해 접하는 북한 어린이들의 신기에 가까운 기예와 표정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작가는 사실을 사실대로 그린 것이고, 그러한 장면들이 사실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이 성립된다. 꼭두각시 인형같은 북한의 어린이들은 이데올로기라는 것이 단순히 허위의식이 아니라, 가상과 현실 사이에 놓인 애매한 범주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데올로기가 단지 거짓과 환영, 왜곡과 신비화의 문제라면 그토록 오래 수많은 사람들을 속일 수는 없다. 강력한 영향을 주는 것은 그것이 설사 가짜라 하더라도 현실이다. 그것은 강력하게 체험되는 것이며, 실제적 효과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데올로기는 예술과 유사하다. 많은 철학자들이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구별하려고 노력했지만 쉽지는 않다. 과학은 객관적이고, 이데올로기는 주관적인가? 양자를 구별하고자 한 철학자 알튀세는 ‘표상체계로서의 이데올로기는 이론적 기능보다 그 실천적 사회적 기능이 더 중요시된다는 점에서 과학과 구별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과학으로 대변되는 지식 역시 사회나 권력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학문과 예술의 자율성과 순수성을 말하는 것 자체가 사실이 아니라, 희망사항일 뿐이다.




[이데올로기 개론]에 의하면 알튀세에게 이데올로기가 재현하는 바는 주체가 사회 전체에 대한 관계를 체험하는 방식이며, 이것은 진위의 문제가 아니다. 알튀세에게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사회적 주체로 계속해서 구성하는 특정한 기호적 관행의 조직이며, 주체가 이를 통해 어떤 사회의 지배적 생산관계에 관련되는 체험을 산출한다. 이데올로기는 주로 세계에 대한 정서적이며 무의식적인 연루 방식을 말한다. 이데올로기는 현실을 묘사하기보다 하나의 의지, 희망, 혹은 향수를 표현 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중립적인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정서의 문제이며, 이데올로기에 종속된 사람들의 필요와 욕망을 형성한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데올로기는 예술과 유사하다. 예술처럼 이데올로기도 단순한 오류나 허위가 아니다.

정도의 차이일 뿐, 체제가 입력한 그대로 자동인형처럼 움직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남한 사회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행복한 세상에 우리는 삽니다’라는 식의 메시지는 자유와 풍요를 구가하는 남한의 선전에도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해맑은 ‘행복동이들’ 뒤의 음험한 그림자나, 북한에서 신격화하는 주인공의 초상을 실루엣으로 표현하는 등 숨겨진 상징이나 알레고리를 삽입하지만, 붉은색 푸른색 등으로 강렬하게 칠해진 색감처럼, 그 사회에 대한 입장과 비판은 단호하다. 북한 아이들이 나오는 작품과 달리, 북한 여성이 나오는 작품들은 좀 모호하다. 섹시한 젊은 여인들이 스트립쇼를 하듯이 북한의 국기를 벗고 있는 [벗다] 시리즈는 ‘북한 체제를 벗고 싶다’는 작가의 의도가 명료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북한이 가부장적 독재사회라고 볼 때, 젊은 여성과 체제를 동일시하는 관점이 적절한가. 서양미술사에서 누드는 진리의 알레고리로 등장하기도 했지만, [벗다] 시리즈의 여성들은 누드nude라기보다는 벗은naked 여자에 더욱 가깝다. 누드가 아닌 벗은 여자는 ‘체제를 벗어나고 싶은’ 긍정적인 상징이기 보다는, 섹스 오브제라는 부정적인 상징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차라리 [벗다] 시리즈에 나오는 여성에 비해, 나이키 모자를 쓴 북한의 여자 응원단을 그린 장면에 [나는 정말 행복할까]라는 반어적 제목을 붙인 작품에 공감이 간다. 선무의 작품에서 아이들은 체계가 찍어낸 붕어빵 같은 모습으로 전체주의 체제의 추악함을 드러내는 배우들이다. 소년 소녀가 아닌, 작가의 13개월 된 아들이 모델로 등장하는 작품들은 갓난아이의 순진무구함을 해치려는 사악한 체제와 비교가 된다. 아직 때 묻지 않은 아이의 관점처럼, 그가 선택한 새로운 세계의 풍경은 그가 떠나온 북한만큼 구체적이지 않다. 예를 들어, 작품 [감정]은 락카페에서 노는 젊은이들을 처음 보았을 때의 인상을 그리고 있는데, 미친 듯 이 놀고 있는 그들을 다른 종족을 보는 국외자적 시선으로 묘사했다. 앞으로 비중이 더 높아지기는 하겠지만, 이러한 국외자의 시선이 남한사회에도 정조준 될 때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무척 궁금하다.

드러나는 것도 많지만 숨길 것도 많은 자유주의 사회에서도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독재 국가 못지않게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남한은 세계자본주의 체제에 적극적으로 편입하면서 물질적 풍요를 달성했지만, 이데올로기적 정당화가 필요 없을 만큼 정의로운 사회를 향해 가야할 길이 멀다. 아직 자신이 떠나온 곳에 대해 ‘가슴 속에 응어리 진 것이 많은’ 입장에서 선무의 작품은 개인적인 경험과 그에 뿌리를 둔 메시지 전달에 주력한다. 형식적인 면에서 그의 작품은 반어적 문장--그것은 작품 속에, 또는 제목으로 나타난다--과 결합하여 삽화적인 면모가 강하다. [우리는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처럼 추상적인 작품도 있지만, 그의 전체 작품 목록에서 수가 적고 예외적이다. 보고 보이는 눈초리를 그린 [시선] 시리즈의 평면적 화면은 추상이라기보다는 국기나 붉은 장막 등을 재현하거나 상징성이 더욱 강하다. 북한과 남한 모두에서 미술을 전공하였으며, 할 말이 많은 그가 영화나 문학, 풍자만화, 다큐멘타리 등과 비교해서, 회화라는 장르에서 경쟁력을 갖춘 독특한 어법을 얼마나 찾아낼 수 있는가 하는 것도 그의 과제이다.

출전 | 프레파라트 연구소 [세상에 부럼 없어라], 프레파라트,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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