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미는 자신의 작업의 주제를 <나我 - 무無>라고 부른다. 이 주제로부터 성급한 결론을 도출해보자면, 나(혹은 나라고 부를 수 있는 실체)는 찾아보니 어디에도 없더라는 결론에 도달하며, 또는 이와는 정반대로 너무나 선명한 나라는 실체(혹은 실체감)를 무로 되돌릴 수 있는(나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한 모색과 의지의 표명처럼 들린다. 이 가운데 작가의 의식은 후자보다는 전자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말하자면 세계(캔버스 혹은 몸)의 표면 위에 내려앉은 먼지 같고, 타자로 오염된 존재의 흔적(한때의 존재를 증언해주는 부재에 각인된 흔적, 혹은 타자들이 대신 써준 텍스트에 딸린 주석) 같고, 빈 구멍(그 속이 비어 있거나 배후가 뚫려있어서 의미들이 왕래하고 중첩되는 비결정적인 텍스트)이나 틈새(사이존재 즉 존재와 존재 사이)에 머무는 무의 형상 같다. 그렇다면 이는 내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나라고 부를 수 있는 보편적 실체 같은 것은 없다는 말이며, 그 보편적 실체에 대한 의심이 작가의 작업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나에 대한 자의식은 근대와 후기근대를 가름하는 기준으로 여겨진다. 근대인이 보기에 세계는 통일된 전제를 가지고 있고, 그 세계를 바라보는 주체의 전망 역시 이에 어울리는 총체적 인식을 견지하고 있다. 세계의 지평도, 주체의 전망도 하나같이 안정된(결정적인) 체계 위에서 상호 작용한다고 본 것이다. 이를 지지하는 인문학적 배경이 데카르트의 코기토이며, 원근법은 그 원리를 그림으로 도해한 것이다(원근법에서의 소실점은 세계의 흔들릴 수 없는 중심으로서의 주체를 암시한다). 이에 반해 후기근대인에게 세계는 그저 이질적인 조각들의 우연하고 무분별하고 불안정한 집합에 지나지 않으며, 그 세계와 대면하는 주체 역시 파편화돼 있다. 그 이면에는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고, 주체에 대해 세계를 대상화하는 전제 위에서야 비로소 지식이 가능해진다고 보는 서양의 전통적인 인식론에 대한 회의가 놓여있다. 그리고 이런 이분법적 전제로부터 생산된 지식을 타자와 동질의 것으로 보고, 주체를 이런 타자에 의해 오염된(점령된) 것으로 본다. 주체란 말하자면 이성과 정신, 도덕과 윤리, 진리와 진실, 관례와 관습(죽은 아버지 즉 기의 없는 기표들)의 이름으로 나에게 내재화된 소위 상위 법률(형이상학 ?)의 소산인 것이다.
이로써 나는 타자들이 건네준 방법(법률)이 아니고서는 세계를 보거나 듣지도, 판단하거나 예측하지도 못한다. 나는 언제나 타자의 눈을 통해서 세상을 보고, 타자의 귀를 통해서 소리를 듣는다. 현상학적 에포케는 이처럼 주체의 눈에 덧씌워진 타자의 눈을, 주체의 귀에 덧대어진 타자의 귀를 박탈하고 이로부터 주체를 구제하려는 기획과 관련이 깊다. 나를 (잠정적으로) 백지 상태나 영도의 지점으로 되돌려 놓고, 기관 없는 신체로 되돌려 놓아 새로 시작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나에게서 타자의 눈과 귀가 박탈되면, 세상은 불현듯 새롭게 보이고, 낯설게 보이고, 걷잡을 수 없게 보인다. (인위적인) 지식의 체계가 코스모스라면, (지식의 전망을 걷어내고 본) 세상의 본질은 카오스이기 때문이다.
내가 머물고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장소들을 탐색하는 과정을 거쳐서 종래에는 나라고 부를 만한 (보편적인) 실체 같은 것은 없다는 결론에 이르는 이종미의 기획은 이런 주체론과 타자론, 그리고 특히 주체에 대한 근대적이고 후기근대적인 자의식과 관련이 깊다. 나라는 실체는 과연 있는가. 그리고 만약 있다면 그것은 나의(나라는 실체의) 경계를 넘어 보편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의식을 주제화하고 있는 작가의 작업은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의 한 전형을 예시해주고 있다.

뿔. 작가는 <뿔>이란 영상작품에서 실존적 혹은 존재론적 트라우마가 생성되고 머무는 장소로서의 몸을 탐색한다. 일종의 셀프카메라 내지는 셀프비디오로 정의할 만한 이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사진으로 찍는다. 그리고 사진을 동영상 화면과 오버랩시켜, 스틸 컷과 동영상과의 경계가 모호한 화면을 만든다. 자신의 몸을 객관적으로 기록한다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최종화면에서는 어쩔 수 없이 재구성되고 연출된 (의도적인) 흔적이 엿보인다.
셀프카메라든 셀프비디오든 이는 주체와 관련한 흥미로운 사실을 말해준다. 자신이 자신을 기록한다는 메타적 상황과 함께 일종의 분열적 자아현상이 발생한다. 즉 진정한 나는 영상에 속해 있는가, 아니면 영상 바깥에 있는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기록한다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영상 속의 나는 나의 오롯한 실체 대신, 다만 재구성되고 연출된 주체의 흔적을 보여줄 따름이다. 오히려 객관적으로 기록해야 한다는(그리고 기록할 수 있다는) 의도와 신념과 강박이 영상 밖의 나를 전전긍긍과 함께 주관적으로 만들어 줄 뿐이다. 주관적으로? 이야말로 주체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의 시선이 머무는 곳(주체를 확인해볼 수 있는 곳)은 영상이지 영상 밖이 아니다. 결국 나는 나를 기록할 수도, 재현할 수도, 읽을 수도 없다. 다만 부재와 암시와 흔적이라는 불완전언어를 빌려 나를 기록한 나를 추억할 수 있을 뿐이다.
새벽. 작가는 <새벽>이란 영상작품에서 존재의(존재라는 개념의) 중의적 의미를 다룬다. 여기서 모든 선명한 경계는 허물어지고, 모든 사물현상은 이중적이고 다중적인 의미를 드러낸다. 어법으로 치자면 00같은, 00처럼, 00이면서 동시에 00이기도 한. 화면에 등장하는 파리(?)는 벌 같기도 하고, 다만 파리처럼 보일 뿐인 검은 실루엣 같기도 하고, 부풀려진 망점 같기도 하다. 그 파린지 벌인지 모를 것이 철망 위(안쪽, 아니면 바깥쪽인가?)에 앉아 몸을 쉬고 있다. 그리고 일련의 숫자들이 등장하는데, 숫자 위로 초침이 지나가는 것으로 보나(아마도 속도를 가늠해 볼 때 초침일 것이다) 1에서 12까지의 숫자가 순서대로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시계 같다. 초침이나 설핏 보이다 마는 가장자리의 테가 아니라면 이 숫자는 엘리베이터의 층 넘버로 읽을 수조차 있고, 또한 그렇게 읽어도 무방할 듯싶다. 그리고 화면은 유독 10이라는 숫자 위에 오래 머물면서 이를 강조하는 것 같다. 혹 10이라는 숫자가 작가에게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주체의 흔적?). 아니면 그저 딱 떨어지는 숫자에 대한 막연한 관성 같은 것?
새벽은 정신이 가장 명료해지는 시간이다(적어도 사람들은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투명한 정신으로 본 사물현상은 온통 이중적이고 다중적이고 중의적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 정신이 본 사물현상이 맞다. 사물현상은 처음부터 이중적이고 다중적이고 중의적이었다. 다만 지식(개념)의 관성이 이러한 사물현상의 풍부한 레이어를 억압하고 이를 단순화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현상의 모든 풍부한 의미는 단순화된 그 의미의 뒤쪽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예술에게는 그렇게 사라진 의미들을 복원하는 일이 과제로서 주어진다. 묘약이면서 동시에 독약이기도 한 파르마콘은 주체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주체도, 타자도 없다. 다만 주체 속에 타자가, 타자 속에 주체가 혼입된 상호작용적인 경계, 움직이는 경계가 있을 뿐이다.

철암. 작가는 일련의 사진작품들에서 일종의 사회적 트라우마가 깃들여 있는 장소로서의 철암의 정경을 기록해 보여준다. 사회적 트라우마는 흔히 역사특정성과 장소특정성과 맞물린다. 역사적 현실이 서려있는 장소, 역사적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장소로부터 사회적 트라우마는 싹튼다. 이런 역사적 장소 중에서도 특히 한국근현대사를 대변해주는 장소로는 난곡과 달동네 같은 재개발 현장과 재건축현장, 그리고 청계천과 철암을 꼽을 수 있다. 하나같이 전쟁 이후 경제개발과 정치논리에 따른 명과 암이 교차하고, 희와 비가 엇갈리는 장소들이다. 그런데 지금 다시 찾은 그 곳, 특히 그 곳을 기록하고 재현한 도쿠멘타에도 여전히 그 때처럼 명과 암이 교차하고, 희와 비가 엇갈리고 있는가. 작가가 찍은 사진은 어떤 철암을, 철암의 어떤 레이어를 증언해주고 있는가. 70,80년대 당시 경제개발의 동력을 제공했던 철암인가, 아니면 경제개발의 허울 아래 이름도 없이 쓰러져 간 무명씨들의 혼령을 기억하고 위무하는 철암인가, 이도저도 아니면 그저 흔한 전원풍경에 비해 약간 색다르고 이색적인 풍경일 뿐인가.
나는 철암이 부르는 어떤 소리에 이끌려 이곳까지 왔는가. 그리고 내가 기록한 사진 속에서도 여전히 그 소리는 들리는가. 이러한 의문에 대해 작가는 회의로 답한다. 사진 속에서 철암은 흔히 철암의 현실로 알려져 왔던 것들을 뒤로 한 채 그저 조금은 고즈넉하고 쓸쓸하고 낭만적인, 흔한 풍경으로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이로써 철암을 소재로 한 작가의 사진작업은 아카이브와 도쿠멘타가 현실의 맨살 그대로를 증언하는지, 아니면 오히려 현실을 사라지게 하는지, 아니면 혹 현실을 신화화하고 이데올로기화하는 것은 아닌지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이 일련의 작업들, 즉 <뿔>, <새벽>, <철암>에서 작가는 주체를 상처가 남긴 흔적 즉 트라우마와 동질의 것으로 본다. 그리고 실존적이고 존재론적인 트라우마를 확인하기 위해 (자신의) 몸을 탐색하고, 사회적 트라우마를 재확인하기 위해 철암을 찾는다. 이런 탐색과 모색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끝내 주체를, 엄밀하게는 주체라고 부를 수 있는 보편적 실체를 찾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있다. 주체에 대한 작가의 의심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체에 대한 탐색을 계속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