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정헌조 / 존재가 발생하고 머무르며 소멸하는 장소

이선영

다양한 크기와 각도를 가지고 위를 향해 열려 있는 용기(容器) 형상은 언뜻 항아리나 도자기 같은 형태가 떠오른다. 그것은 섬세한 연필 선에 의해 수많은 층위의 명암이 엇갈리지만, 외계로부터 들어오는 빛의 방향이 불분명하며, 바닥에 접촉된 지점이 없이 붕 떠 있는 등, 3차원에 굳건히 자리 잡은 일상의 물건과 거리가 있다. 그것은 그릇 같은 개별적 형태이기 보다는, 무엇인가를 무한대로 담아낼 수 있는 존재 및 정제된 형식에 대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여러 크기와 형태로 그려져 있지만, 공통적인 것은 정밀한 대칭성이다. 작품 한가운데 기입된 작가의 싸인은 대칭적 구도를 완결한다. 통상적인 미술작품에서 작품의 중간 단계에 머무르는 연필이 정헌조의 작품에서는 알파와 오메가가 된다. 그것은 마치 동양화가가 묵에 대하여 가지는 신념과도 비교될 수 있다. 하얀 종이 위에 검은 연필 선으로 그려져 작품의 반듯한 이미지를 더욱 강화하는 듯하다. 물샐 틈 없는 완결미는 종이가 가지는 내구성과 결합하여 순간 속에 고착된 영원의 이미지를 만든다.

흑과 백으로의 환원된 화면은 연필과 종이라는 매체에 의해 결정된 측면이 강하다. 이 전시에 한 점 추가된 판화 작품은 색에 대한 갈구를 보충해준다. 붉은 색 바탕에 회색 땡땡이 무늬가 균질적으로 배열된 바탕 위에 떠 있는 형상이 그것이다. 정헌조의 작품들은 곡선자 이외에 어떤 기계나 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철저히 아날로그 방식으로 그려진 것이지만, 거기에는 개인적인 필치가 남아 있지 않다. 그는 다양한 강도를 가진 연필 뒤에 막대기를 연결시켜 화면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작업하며, 긋기의 밀도에 따라 다양한 계조의 명암이 산출된다. 그러나 정돈된 조명 아래에서 작품을 보면 그리기에 의한 명암 뿐 아니라, 바탕 면이 엠보싱 되어 생긴 명암이 추가된다. 드로잉 된 형상 위에 존재하며, 아래의 형상 입구에서 발산되는 빛을 반향 한 것처럼 작품의 아우라를 형성한다. 그려지지 않은 채 바탕 면이 변형되어 만들어진 허(虛)의 형상은 아래의 형상과 상호작용하는 듯, 그 크기와 간격이 작품마다 다르다. 전시된 작품 중에서 엠보싱이 없는 것은 형상이 아래로 길쭉하게 늘어져, 화면 상단에 충분한 공간이 남아있지 않은 한 작품뿐이다.

물리적으로 약간 변형된 것, 보여지기는 하지만 그려지거나 보태진 것이 없는 그것은 존재나 환영의 문제를 야기한다. 그것은 아래의 추상적 형상과 조응하며 명상적인 공간을 창출한다. 글쓰기나 그리기의 원초적 단계를 형성하는 흑연은, 작가가 말하듯이 그자체로 명상하듯이 파고드는 면이 있다. 작가는 시작 단계에서 전체적인 볼륨만 만들어 놓고 하나하나 파고든다. 작품에 개입되는 우연적 요소가 별로 없으며, 격렬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에 비해 단조롭고 건조하기 까지 한 방식이다. 그러나 이렇게 꼼꼼히 채워가는 시간이 중요하고, 이 과정 속에서 정신은 명상에 빠져 들듯 투명해 진다. 모든 작품에 일률적으로 붙여진 [The One is the All, the all is the One]이라는 제목은 그의 작품에 내재된 명상적이고 관조적인 분위기를 압축해 주는 말이다. 동질이상(同質異像)의 형상으로 채워진 작품들에도 불구하고, 정헌조는 하나의 스타일로 고정된 작가가 아니다. 3년 정도 몰두한 이런 스타일의 작품은 국내외에서 개최된 수차례의 개인전을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변화해온 것이다.





허의 공간을 포함하여 섬세하게 굴곡진 형상들은 명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정헌조의 작품은 다채로운 내용이나 형태로 채워지기 보다는, 존재(being)에 대한 의미를 근본적인 차원에서 탐색한다. 여기에서 존재란 개별적 사물이 아니라, 특정한 방식으로 주어진 모든 것을 가리킨다. 철학적 정의에 의하면--엘리자베스 클레망, 샹탈 드몽크 편집, [철학 사전](동녘 출판사) 참조--존재는 ‘존재하다’, ‘실존하다’를 뜻하는 라틴어에서 온 것으로, 이 말은 ‘참된 것, 혼자서도 존속하는 것’을 뜻하는 ‘es’, 자라다를 뜻하는 인도유럽어 계통의 어원인 ‘bheu’, ‘머무르다’를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ues’의 세부분으로 구성된다. 그래서 존재라는 말은 ‘존속하다’, ‘자라다’, ‘머무르다’의 세 가지 의미를 함축한다. 존재 개념에 대한 성찰은 모든 형이상학의 실마리를 이루어왔다. 존재에 내포된 세 가지 의미를 두루 포함하는 정헌조의 작품은 그 말이 내포하듯, 생성과 대비되는 안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일한 형식을 가지는 작품 여러 개를 동시에 보면 변형하는 내적 움직임이 간파된다.

그것은 자기 동일적인 것으로 머무르면서도, 잠재적인 운동성을 내포한다. 마치 함입하기 시작하는 살아있는 배아 세포처럼 말이다. 그의 작품은 동일성으로의 환원이라기보다는 차이가 발생하는 생성과정을 보여준다. 관객을 향한 정면에 강력하게 자리한 형상과 그 위에 떠 있는 허의 공간은 일원론과 이원론 사이를 왕복했던 철학적 사유의 역학관계를 잘 드러내는 듯하다. 단일한 것의 기원을 다루었던 최초의 철학자는 플라톤이라고 말해진다. 플라톤은 진리의 상대성을 초월한 참된 인식의 보편성과 영원성을 강조한다. 개별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 아름다움 자체가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변화와 복수성에 좌우되는 현상계를 넘어 이데아를 통해 항구적인 실재를 요구한 플라톤적 사유는 고대나 중세 이후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감각적인 세계의 궁극적인 원리를 일자(一者)로 간주했던 플라톤은 개별적 물질을 벗어나 관조되는 것이다. 플라톤주의의 또 다른 변형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단일자에서 나오고 다시 그것에로 귀환 한다고 본다.

타자들과 이질적인 것, 다원적인 것이 선호되는 현대에, 이러한 동일성의 사유는 철지난 시대의 권위주의는 아닌가. 그러나 현대의 사유가 다양한 방법론을 통해 증명한 것은 동일성 이면의 타자들이었다. 그렇다면 역으로 타자의 이면은 바로 동일성이라는 논리도 성립--평생을 플라톤주의를 거꾸로 쓰기 위해 노력했던 현대 철학자 질 들뢰즈를 떠올리면 될 것이다--된다. 고요한 현재 속에 이상적인 형상에 머무르고 있는 정헌조의 작품은 경직된 환원주의나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라, 현대의 복잡다단한 이질성의 이면인 것이다. 그의 작품에서 거대한 주머니나 그릇 같은 형상은 그것이 가지는 자체 완결성보다는 그 안에 담겨져야 할 무한한 내용물을 예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동양의 사고에서 도(道)는 결코 채워지지 않는 비어있는 그릇 같은 것으로 비유되곤 하며, 서양의 사고에서도 플라톤이 말한 원초적인 수용기인 코라--페미니스트들은 플라톤이 [티마에우스]에서 개념화한 코라를 모성의 상징으로 전치시키기도 한다--를 닮은 것이다. 이 원초적 수용기는 비록 이데아의 형상처럼 단순 간결한 형태로 정제되어 있기는 하지만, 변화무쌍한 변모를 내포하고 있다.





존재론적 명상을 자아내는 정헌조의 작품은 철학적 개념 못지않게 그 신비로운 분위기로 주목된다. 그것은 모든 것을 포함하고 생성할 수 있는 원초적 수용기가 가지는 강력한 합일의 느낌이다. [The One is the All, the all is the One]이라는 작품 제목은 전체 속에 하나를, 하나 속에 전체를 보는 만유재일적(panenhenic) 체험으로, 하나 속에 모든 것이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학의 또 다른 변종인 신비주의에 깔려 있는 것이며, 동양의 도교나 불교 사상, 그리고 요즘 대학에서 동양철학을 배우고 있다는 작가에게도 익숙한 개념이다. 하나 속에서 모든 것을 보는 것은 동일성(identity)에 대한 또 다른 진술이다. 주체와 객체 사이의 구분이 사라지는 불이일원론(不二一元論), 또는 온전함(wholeness)의 상태는 우주와 자아를 망라하는 정적과 초월로 특징지어 질 수 있다. 그것은 보편적인 하나(Universal Oneness)에 대한 파토스를 보여준다. 정확한 대칭을 이루는 정헌조의 작품은 완전한 중심의 모델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명확한 선으로 한계 지어진 형상은 완전을 추구하면서도 닫혀있지 않다.

정헌조의 작품은 단일성에 대한 우주적 감각을 지향했던 신학자 테야르 드 샤르댕이 주장하듯이, 눈앞에 대상으로 감각할 수 있는 다양성을 꿰뚫어 세계의 궁극적이며 총체적인 단일성을 깨닫고 예감하는 신비주의적 사고를 포함한다. 그것은 무질서를 향하는 엔트로피에 맞서 하나로 수렴되는 질서를 예시한다. 이러한 일체적 사고는 종교처럼 존재의 전체성을 지향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전체성은 단서 조항이 있다. 연필로 그려진 형상 위에 떠 있는 허의 공간이 그것이다. 허의 공간을 이루는 호의 크기는 작품마다 다양하며, 형상과의 간격은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형상이 너무 길면 호는 사라진다. 색이 여백을 채우는 판화 작품에서 호는 형상 내부에 머물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서 어떤 형상은 지면 아래까지 연장되어 존재의 바닥없음 상태를 더욱 강조하기도 한다. 위대한 하나는 강조되지만, 또 다른 것과의 관계 또한 중요하다. 형상과 허의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일련의 장은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관계를 예시한다.

정헌조의 작품은 모든 것을 하나로 귀결시키는 융합적 사고를 넘어서 결코 동화할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을 슬쩍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거리감과 외재성은 타자에 내포된 신비로움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신비주의적 측면은 더 이상 정설로 인정되지 않는 잡다한 것들이 모여 있는 것과는 무관하다. 한 치의 흐트럼 없는 형식은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느슨한 절충주의와 거리가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일련의 엄격한 논리적 형식을 갖추고 있다. 작가는 표면을 그리고 채워가는 기술에 어떤 하나의 통일적 형식을 부여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에서 규칙들은 상징들과 동등하며, 규칙들 속에서 그 상징들의 뜻이 반영된다고 본다. 논리는 세계를 가득 채우고 있다. 세계의 한계들은 또한 논리의 한계들이기도 하다. 사고들의 총체가 세계의 그림(世界像)에 해당되며, 명료한 외곽선을 가지는 정헌조의 그림은 한계 지어진 전체로 나타난다. 비트겐슈타인은 영원의 상(相) 하에서 세계를 본다는 것은 세계를 전체로서 본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비스러움은 바로 그 한계 지어진 전체로서의 세계에 대한 느낌으로부터 발생한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