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 | 국제미술평론가협회 부회장, 호남대교수
안녕하십니까? 만나 뵙게 돼 반갑습니다. 이 자리가 창의력에 관해 전문적으로 연구하시는 선생님들이 모인 자리인데, 평소 이에 대해 별 연구 경험도 없고 또 솔직히 말씀드려서 관심도 없는 제가 창의력 운운하는 것이 영 어줍습니다만, 그래도 한 때는 미술을 전공한 적이 있고 또 작품 활동도 나름대로는 열심히 한 적이 있다고 생각돼서 제 경험에 비춰 한 말씀드릴까 합니다. 혹시 진부한 얘기가 나오더라도 전문가가 아니니까 라고 생각하시고 너그럽게 양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지금은 평론을 하고 대학에서는 미술이론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만, 저는 원래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일찍이 화단에 뛰어들어 기라성 같은 선배들과 함께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그때가 70년대 중반인데, 외람되게도 대학 3학년 때였습니다. 당시에
라는 전위 그룹이 있었는데, 화단의 주목을 받는 단체였습니다. 지금은 회원이 2만 5천명이나 되는 공룡 같은 집단으로 성장을 했습니다만, 우리 미술계의 대표적 기구라고 할 수 있는 한국미술협회가 그 당시만 하더라도 겨우 2천명을 웃도는 작은 단체에 불과한 때였으니 참으로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지요. 인사동이 지금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돗데기시장같이 변해버렸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한적하기 그지없어 미술하는 사람들만 왕래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화랑이라야 명동화랑, 견지화랑, 현대화랑, 미술회관 정도가 고작이고 선화랑이 막 문을 연 그런 어둑한 시절이었습니다.
그 무렵 굴레방 다리에서 이대 쪽으로 올라가는 중간지점에 육교가 하나 있었는데, 그 부근에 이건용화실이란 게 있었습니다. 이 화실의 주인이 얼마 전에 군산대학에서 정년퇴임을 하신 이건용 선생인데, 이 분은 당시 파리비엔날레에 커다란 나무 둥치를 마치 땅에서 방금 캐낸 것처럼 두부모같이 네모지게 생긴 흙 위에 올려놓은 작품으로 파리 현지 언론의 각광을 받은 전위작가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어둑했던 시절이라 해외에 나가는 것 자체가 큰 특권으로 여겨지던 때였는데, 금의환향을 하고 돌아왔으니 국내 언론의 환대가 어떠했는지 짐작을 하시리라 믿습니다. 미술잡지며 신문이 온통 도배를 하다시피 했는데, 명성은 명성이고 가난은 가난이었습니다. 작품이 팔리지 않았던 시절인지라 호구지책으로 미술학원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던 그런 시절이었지요. 그때 저는 회화과에 재학 중인 2학년 학생으로 마침 머물러있던 누나 집이 북아현동 언덕배기에 있어 오다가다 들러 현대미술에 대한 귀동냥을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이건용 선생은 성능경, 김용민, 장석원 선생 등과 함께 이벤트라는 것을 하고 있었는데, 이 이벤트라는 게 일종의 행위미술입니다. 그 이전인 1960년대 후반에는 해프닝이란 게 정강자, 정찬승, 강국진 등등 젊은 작가들에 의해 행해졌는데, 정강자 선생은 지금은 환갑을 훨씬 넘긴 노인이 되었습니다만, 당시만 하더라도 꽃다운 20대 처녀로 팬티만 입은 몸에 비누 풍선을 주렁주렁 붙이는 해프닝을 세시봉 음악감상실에서 실연을 하여 장안의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벌어진 것이 이벤트인데 이건 좀 심심해서 마치 선문답 같은 게 주류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하나 들자면 김용민 선생은 샌드페이퍼 한 장과 흰색 물감이 묻은 붓 한 자루를 들고 나와 샌드페이퍼에 칠을 하고 박박 문대고 해서 나중에 붓이 다 닳으면 “붓이 그렸나, 샌드페이퍼가 그렸나?”하고 혼잣말을 하며 끝내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이상한 전위미술을 한다고 소문이 나서 이벤트가 벌어지는 행사장에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성황을 이루곤 했습니다. 그때는 서슬이 퍼런 3공화국 시절이라 장발 단속하랴 미니스커트 단속하랴 경찰의 일손이 달리던 시절이었는데, 또 한편에서는 데모가 많아 거리가 온통 최루탄 가스로 매캐했지요. 아무튼 그런 어려운 시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장발에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겨울이면 낡은 바바리코트 차림에 낭만적인 멋을 구가하며 작품 활동을 한답시고 한껏 폼을 잡던 시절이었습니다.
제가 재미도 없는 옛날이야기를 왜 이렇게 장황하게 말씀드리는가 하면 오늘의 주제인 창의력에 대해 실마리를 풀어가자니 제가 겪었던 지난 일을 얘기하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입니다. 아무튼 저는 지금까지 오로지 미술판에서 살아온 사람인지라 다른 분야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창의력을 어떻게 정의내리는 지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가끔 귀동냥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어떤 분은 남이 하지 않은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도 하고, 또 어떤 분은 세상에 전혀 없는 새로운 것을 생각하거나 창조하는 능력이라고 하시는데, 미술을 하는 저로서는 그저 기존의 관념을 바꿔놓는 행위 정도로 새기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미술사를 보더라도 선배가 이룬 것을 조금씩 바꾸거나 첨가하는 정도지 전혀 새로운 어떤 것을 세상에 내놓은 작가가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다만, 르네상스 시대에 원근법(perspective)을 발명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기베르티, 레오나르도 다 빈치, 부르넬레스코와 같은 거장들은 창의적인 사람들이었다는 생각이 들고, 그중에서도 특히 그 당시에 이미 비행기라든지, 자동차, 잠수함과 같은 개념을 생각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진정으로 천재적인 창의력을 지녔던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의 창의적인 사람을 예로 들자면, 20세기 초에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생각해 냈던 마르셀 뒤샹이 정말 창의적인 천재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한국의 백남준 선생이 있습니다. 왜 이 사람들이 그 많은 작가들 중에서 진정으로 천재적인 창의성을 지녔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이 사람들이야말로 문명이나 예술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은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시각의 합리적 체계인 원근법은 그 이전의 중세와 그 이후의 근대를 갈라놓은 획기적인 인간의 창안물입니다. 원근법은 약 천년을 지탱해 온 중세의 신 중심의 세계관 즉, 신과 인간이라는 수직적인 체계를 인간의 눈높이인 수평적 세계관으로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3대 사건이라면 흔히 원근법의 발명, 지리상의 발견, 인쇄술의 발명을 예로 듭니다만, 실로 이 3대 사건이야말로 근대화 이후 서양을 세계 지배자로 만든 주범인 것입니다. 만일 이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서양의 제국주의는 그처럼 발흥하지 못했을 것이고, 서세동점이라는 치욕의 역사는 없었을지도 모르며, 동양과 서양은 더욱 사이좋게 지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 인류사적인 입장에서 볼 때 창의력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라는 역설적인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문명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잘만 쓰면 이로운 것이지만, 잘 못 쓰게 되면 전갈의 독과도 같은 것이지요.
마르셀 뒤샹은 20세기 초엽에 레디메이드 오브제라는 것을 세상에 내놓아서 스캔들을 일으킨 장본인입니다.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매우 지성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원래 화가였는데, 피카소처럼 유명한 입체파 화가가 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부삽, 병 건조대, 변기와 같은 일상용품을 제시하여 화단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뒤샹의 이 행위는 미술에서 환영의 패러다임을 실제의 패러다임으로 바꿔놓은 일대 사건이었습니다. 그가 벌인 이 개념적 행위는 오늘날까지 많은 미술가들을 그 자장의 범위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인 백남준은 세계 최초로 미술에 영상을 도입한 작가라는 점에서 천재적인 창의력을 지닌 분입니다. 이른바 멀티 아티스트인 셈이지요. 오늘날 미술에서 영상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멀티미디어 아티스트라고 하는데 이들 또한 크게 보면 백남준 선생의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는 또한 수차례에 걸쳐 통신위성을 이용한 전 지구적 차원의 실시간 공연을 함으로써 예술을 통해 세계의 거리를 좁혔습니다.
여러분, 창의력이 무엇입니까? 저는 단군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정신이야말로 창의력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는 이 ‘홍익인간’의 정신이야말로 세계가 새겨야 할 가장 소중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것을 생각하고 창안하되, 인간에게 이롭지 못하면 하지 않음만 못합니다. 사람을 죽이는 각종 무기도 창의력의 소산입니다. 인간의 창의력에 의해 수만 년 전에 고작 돌을 갈아 짐승을 죽일 때 쓰던 무기가 점차 발전하여 이제는 단추 한번 누르면 수백만 명을 죽이는 가공할 살육의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이라크 전쟁에서 입증되었듯이, 발달된 기술의 진보는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하듯이 사람을 죽이고 있습니다. 쟝 보들리야르가 말한 그대로 오늘의 시뮬라크르 시대는 원본 없는 가짜가 진짜처럼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컴퓨터로 조종하는 병기를 사용하는 병사는 죄의식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멀리서 죽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그 병사는 생명의 외경이나 존엄성을 느끼지 못하고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하듯이 수만 명을 살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현대전은 점차 한판의 신나는 불꽃놀이거나 장엄한 축제와 같은 모습을 띠어가고 있습니다. 이 역시 인간의 창의력의 소산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과학 혹은 기술 문명에서의 창의력과는 달리 예술에서의 창의력은 인간에 끼치는 해독이 적거나 거의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술 또한 본분에서 벗어나 기술문명과 결합할 때, 공범이 되어 인간에게 해독이 되는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과학은 인간에게 이로운 것인데 기술과 결합하여 무기를 생산하는데 조력을 하는 것처럼, 미술이 가령 폭력물 컴퓨터 게임에 동원이 되었을 때 결과적으로는 인간에게 해로운 결과를 낳는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 그래픽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예술작품은 선하기 때문에 저는 예술이 누굴 죽였다거나 다치게 했다는 소리를 아직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일찍이 플라톤은 칼로카가티아(kalokagathia)를 주장했습니다. 미(kalos)는 궁극적으로 선(agathon)을 지향하여 인생에 유용하며 목적에 합치되었을 때 그것이 곧 ‘선’인 동시에 ‘미’인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는 의미지요. 홍익인간의 정신을 상기시켜 주는 대목이 아닙니까?
예술은 ‘반성적(reflective)’ 입니다. 예술작품은 영혼에 낀 때를 벗겨주는 ‘눈물’과도 같습니다. 반성은 곧 ‘우는 것’입니다. 흠뻑 눈물을 흘리며 울고 난 후에 우리의 마음은 마치 비가 갠 뒤에 산허리에 걸린 무지개를 볼 때처럼 맑아집니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보면 내 가슴은 뛰누나”라고 읊었습니다. 그것은 경이, 곧 놀라움입니다. 그 때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립니다. 눈물은 우리의 몸에서 나오는 맑고 순수한 액체입니다. 오늘날 몸에 관한 담론이 성행하고 있는데, 이는 정신의 비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해진 ‘몸’의 중요성을 상기시키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주지하듯이, 인간의 이성, 상상력, 지식, 영감, 천재성 등에 바탕을 둔 창의력은 정신 작용의 소산입니다. 거기에는 정신의 능동성은 있을지언정 몸의 능동성은 결여되어 있습니다. 물론 떠오른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몸이지만,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몸의 의미는 몸이 기댈 은신처로서의 대지(大地)를 가리킵니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니체가 말한 의미에서의 토양, 즉 대지를 말합니다. 창의성은 때로 권력의 시녀 역할을 합니다. 진보적 발전이론의 도구가 되기도 합니다. 인간의 창의성이 창출한 많은 도구들, 문명의 각종 이기들은 도구를 만드는 인간 즉, 호모 파베르(homo faber)의 소산이며, 생각하는 인간, 즉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적자들입니다. 그것들은 호이징가가 말한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그러나 예술과 문화에서의 창의성은 호모 루덴스의 자식들임에 분명해 보입니다.
호모 파베르와 호모 사피엔스가 정신의 아들이라면, 호모 루덴스는 몸의 딸입니다. 몸은 축제와 제의(ritual)의 성소로 가는데 꼭 필요한 탈것(vehicle)입니다. 축제와 제의의 제전에는 몸이 없으면 입장을 하지 못합니다. 정신 혼자만으로는 이 축복된 땅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습니다. 축제에서 인간의 몸은 서로 부딪히고 섞입니다. 그럼으로써 크나 큰 해방감을 맛보고 대지의 영성(靈性)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창의력 분야에는 문외한이라 잘 모릅니다만, 혹시 창의력에 윤리라는 것이 있는지요. 스티븐슨의 소설<지킬박사와 하이드씨>에 나오는 지킬박사의 운명처럼, 제 스스로 창의력의 덫에 걸려 삶을 망가뜨린 그런 사람들을 위해 창의력을 규제할 수 있는 그 어떤 윤리규정 같은 것은 없는지 묻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출처 | 한국창의력교육학회 학술세미나 기조강연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