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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유 / 인체와 풍경, 존재론적 메타포

고충환

정은유의 작업은 대략 인체 연작, 풍경 연작, 일종의 이야기 그림(내러티브 페인팅) 연작, 그리고 근작의 패러디 연작과 일련의 설치작업으로 구별된다. 외관상으론 이들 작업이 서로 구별돼 보이지만, 인간의 본질에 연동된 내적 파토스의 분방한 표출에 의해 견인된 표현주의적 경향을 띤다는 점에서는 서로 내통관계에 있다. 이를테면 사사로운 감정과 기분 그리고 무의식적 욕망 등의 내재적 계기들이 외부로 표출되는 프로세스와 관련해서는 좀더 광의적이고 포괄적인 의미의 표현주의가 감지되고 있다.

그리고 비록 그 감정의 계기들이 개인적인 것이긴 하지만, 이를 통해 인간실존을 드러내고 있다. 해서, 작가의 그림에서 표현주의와 실존주의는 서로 연루돼 있다. 여하튼 그림들이 인간의 본질과 연동돼 있는 만큼 서사적이고 문학적이고 연극적인 상황이 두드러져 보인다. 현실 자체보다 더 현실 같은 극적상황 내지는 연출상황이 감지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현실 자체는 아니지만 현실에 대해 해석을 부여하려는 태도로부터, 현실과 현실에 대한 해석을 대질시키는 연출상황으로부터, 그리고 이에 따른 현실과 현실에 대한 해석간의 차이와 간극으로부터 극적 긴장감이 유래한다.

이러한 정은유의 그림을 특징짓는 대표적인 유형의 그림이 인체연작이다. 벌거벗은 육체, 웅크린 육체, 뒤엉킨 육체, 해골과 태아, 그리고 도살된 소와 고깃덩어리 등의 일련의 격렬한 그림들이다. 그림들에서 육체와 고기는 그 자체보다는 인간 내면의 비가시적이고 비물질적인 정신을 끄집어내기 위한 구실(메타포)에 지나지 않는다. 이때 인간의 육체와 살육된 짐승의 고기가 동일시됨으로써 그 정신이 비극적임을 드러난다. 즉, 육체를 도륙함으로써 비로소 정신의 승화가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육체는 욕망한다, 따라서 그 욕망을 부정함으로써만 정신이 순수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은 삶이다, 따라서 그 삶을 넘어설 때에만 정신과 대면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작가의 그림 속의 육체와 고기는 죽음의 메타포인 것이며, 사선을 넘어 정신과 결합케 하는 진혼곡의 서막으로서 제시된 것이다.

자기부정과 자기반성적인 경향성을 띠는 이들 아이콘은 뒤엉켜있는 육체로 변주되고 강화된다. 남자와 여자,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 심지어 인간의 벌거벗은 몸과 짐승의 살덩이가 뒤엉켜있는 듯한 그 유기적인 덩어리에서 성에 대한 구별은 무의미해 보인다. 몸과 몸이 맞닿은, 살덩이와 살덩이가 뒤엉킨 이들 그림은 인간 내면의 이중성과 양면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메타포는 자기와 자기가 분리되는 경험 내지는 자기와 자기가 대면하는 경험으로 확대 해석된다. 그러니까 의식적인 자기와 무의식적인 자기, 제도적인 자기와 그 제도에서 벗어난 자기, 낮의 자기와 밤의 자기가 만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중성과 양면성이 표면화하면, 모든 명료한 것들을 위협하는 양가성이 함께 드러난다. 작가는 이를 드러내기 위해 캔버스에 그린 그림과 투명 아크릴 판에 그린 그림을 중첩시켜 그 사이에 일종의 허상(그림자 이미지)을 형성시키거나, 캔버스 앞뒷면에 각각 다른 그림을 그린 연후에 그 뒤쪽에서 강한 조명을 비춰 그림이 겹쳐 보이게 한다. 이들 작업에서 모든 것들은 불분명하게 혼재돼 있다. 이렇듯 세상은 결코 분명하지가 않은데, 우리는 기꺼이 분명한 것으로 믿고 싶은 것이다. 인식론적 관성 탓이 아닐까 싶다.

인체에 대한 탐색(인체가 어떻게 정신의 메타포일 수 있는가) 이후 작가는 그 지평을 풍경으로 확장한다. 인체 자체가 재현의 대상이 아니었듯이 풍경 역시 재현적이지 않다. 인체가 마구 얽히고설킨 선들의 유기적인 다발을 떠올리게 하듯 풍경 역시 그저 거칠고 큰 붓질들이 지나간 자국과, 그 자국들이 서로 삼투되고 중첩된 흔적으로 현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정형의 자국과 흔적들이 하나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그 풍경은 감각적 실제를 겨냥한 풍경이기보다는 작가의 내면을 투사한 풍경, 심의적이고 주관적인 풍경으로 정의할 만하다. 이처럼 작가에게 국한된 풍경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의 내면이란 것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대동소이한 탓에 공감을 자아낸다. 이로써 풍경은 주관적이고 객관적인, 특수성과 보편성을 모두 아우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풍경이 작가의 내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란 점에서 마음의 속성을 닮아 있다. 마음처럼 작가의 풍경 역시 동적이며 가역적이고 가변적이다. 그 비결정성을 반영이라도 하듯 그림들 하나하나가 외따로 풍경을 이루는 한편, 이것들을 연결하면 보다 큰 또 다른 풍경이 된다. 대개 옆으로 긴 그 풍경은 끝도 없이 이어질 것만 같고, 풍경이 시작되는 지점과 끝나는 지점이 따로 있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러면서도 처음과 끝이 연속되고 반복되는 그 풍경들의 연쇄가 순환과 반복을 거듭하는 자연의 생성원리를 연상케 한다. 독립적인가 하면 종속적이고, 외따로 이미지인가 싶으면 전체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견지하고 있다. 따라서 집합과 해체가 자유로운 이 일련의 그림들은 풍경을 관념의 메타포로 전용할 수 있게 하며, 특히 고정된 지평으로서의 사물, 세계, 대상을 전제한 회화에 대해 새로운 지평(움직이는 지평)을 열어 놓고 있다.

이처럼 정은유는 인체를 소재로 해서 내면적 파토스라는 극적 상황을 연출하는가 하면, 풍경연작을 통해서는 풍경을 관념을 위한 메타포로 전용함으로써 또 다시 자기내면과 연결시키고 있다. 결국 인체와 풍경은 그 소재만 다를 뿐, 사실은 작가의 내적 관념을 투사한 풍경, 일종의 존재론적 풍경이 변이된 지점이나 양상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그 이면에 일정한 의미를 함축한 풍경인 것이며, 서사를 내재한 풍경인 것이다. 한마디로 서사적 가능성 즉 그림을 이야기를 풀어내는 한 매개체로 보는 식의 이러한 태도는 작가의 작업을 관통하는 한 속성으로서, 이를 의식적으로 드러내고 반영한 작품이 <깨끗한 눈> 연작이다.

이건수의 개념영화 <깨끗한 눈>의 시납시스에 근거해서, 정은유가 이들 장면을 컷으로 분절해 그린 일련의 서사적 그림들이다. 주지하다시피 서사야말로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특성이랄 수 있으며, 이는 작가의 그림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이 일련의 그림들은 일종의 서사적 그림 내지는 문학적 그림이라는 특정 형식의 정식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풍경연작이 독립적이면서도 연속적인 풍경화의 가능성을 열었다면, 이 일련의 그림들은 독립적이면서도 연속적인 서사회화의 가능성을 예시해주고 있는 것이다.

더불어 이 그림들의 주조색인 검정색과 청색 그리고 회색의 감각적 사용이 돋보인다(이는 그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작가의 여타의 그림들에서도 느껴지는 바이다). 아마도 암울한 분위기와 함께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강조하기 위한 색으로 주효했던 것 같다. 그 상징적 등식은 낭만주의의 유산이다. 즉 낭만주의 이후 검정색은 인간 내면의 파토스를, 그리고 청색은 에토스를 상징하며, 하나같이 죽음에 연루돼 있다. 밤과 어둠, 성애와 욕망, 거세와 불안, 고독과 절망, 꿈과 몽상, 잠과 휴식 등 죽음의 계기들을 거느린 상징색인 것이다. 그 상징적 등식을 작가는 거의 동물적 감각으로 체득하고 있으며, 이로써 인간 내면의 파토스를 극대화해 보여준다.

지금까지 작가는 구획된 타블로에 응축된 회화적 표현에 주력해왔다면, 근작에서는 형식적으로 의미 있는 변화를 꾀하고 있다. 물론 그 전에도 캔버스에 아크릴 판을 중첩시키거나, 캔버스를 사선으로 뉘어 세팅하거나, 그림을 허공에 매달아 설치하거나, 나아가 수송용 나무 상자를 캔버스 삼아 그 위에 그림을 그리는 등 형식적으로 변화를 꾀하려는 시도가 없지 않았지만, 근작에 비하면 지엽적인 시도였다. 근작에서처럼 의식적인 층위에서의 변화는 아니었던 것이다.

‘흡수’를 주제로 한 근작은 크게 두 경향으로 구별된다. 서양미술사를 차용한 패러디 연작과 작가의 개인사와 관련된 일련의 설치작업들이다. 패러디의 경우는, 작가가 현재 자신의 생활공간에서 발견되는 각종 기물들을 마티스나 세잔의 정물화에 나타난 이미지 그대로 재배열하고 재구성해 그린 것이다. 이로써 거장과 자신이 정신적으로 만나고 과거와 현재가 중첩되는 현상, 즉 일종의 지평융합 현상이나 상호영향사의 개념을 반영하고 실천한 것이다. 이는 현재 나에게 흡수된, 나의 회화적 아이덴티티를 형성시켜준 원전에 대한 오마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가하면 작가는 이 일련의 그림들을 타블로가 아닌 원형 캔버스에다가, 그것도 그 캔버스를 빙글빙글 돌려가며 그렸다. 이 작화방식은 일종의 전방위적 시점을 적용한 것으로서, 고정된 시점을 전제한 전통적인 원근법을 수정한 것이며, 그 고정된 시점의 주인인 전능한 주체를 의문시한 것이다. 시점이 사통팔방으로 열려 있듯 세계도 열려있고, 시점이 움직이듯 주체도 다양한 층위나 전망을 갖는다고 본 것이다. 고정된 실체 같은 것은 없다. 다만 이중성과 양면성, 상대성과 다중성의 차이 나는 연쇄가 있을 뿐이다.

또 다른 작업에서는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에게 이어진 끈끈한 혈연을 주제화한다. 어머니가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치마와 저고리 등 옷가지들(외할머니가 손수 만든)을 설치형식을 빌려 재구성하고, 그 오브제들이 상기시켜주는 이미지를 그림으로 재현해서 설치된 오브제와 대비시킨 것이다. 삼대(三代)를 거쳐 현재의 자신에게로 이어진 혈연을 침묵으로 증언해주고 있는 오브제들, 나아가 시간과 공간, 세월과 역사, 존재와 부재, 상처와 흔적을 자기 내부에 흡수해 들이는 오브제들에게서 차후 작가의 작업의 변화를 예감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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