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도 높은 작업량과 조각과 회화를 아우르는 폭, 스케일이 크면서도 완성도 높은 손진아의 작품은 일견 외형적인 화려함 및 근사함에 비해 내용이 빈약한 듯이 보인다. 농밀한 표면 밀도는 심층으로의 침투를 거부하는 듯하며, 무엇보다도 작품에 곧잘 등장하는 빈 의자와 말없음표는 부재와 침묵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단단한 표면 및 부재와 침묵을 통해 많은 이야기를 시도한다는 점이 역설적이다. 형식은 내용을 위한 형식이지 형식을 위한 형식이 아니다. 작가가 창안한 상징적 구성요소의 조합은 서사를 위한 장치이며, 엄밀한 작업의 논리를 통해 인간의 현실을 담아낸다. 그림의 경우 변형 사이즈의 캔버스를 많이 사용하는데, 그것은 단순한 시각적인 재미나 형식 유희를 넘어, 담고자 하는 이야기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2층에 전시된 작품 [long silence]는 210x30cm의 크기로, 세로에 비해 극단적으로 가로가 긴 캔버스이다. 그 안에 그려진 의자 들은 양 말단이 잘려 있어, 캔버스 너머로 연속되는 느낌을 준다. 원, 타원, 정사각형 같은 패턴이 나머지를 채우고 검정색 원이 말없음 표처럼 그려져 있다. 가로로 긴 캔버스는 정처 없이 흘러가는 시간성을 이야기한다.
반면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모서리에 설치된 작품 [situation created]는 추상적 패턴이 깔린 공간 사이로 점점 커지는 의자가 그려져 있다. 그것은 15x180cm의 크기로, [long silence]와는 정 반대의 형식을 가진다. 가로로 긴 작품이 시간성 곧 통시적 차원을 예시한다면, 세로로 긴 작품은 공간성 곧 공시적 차원을 예시한다. 이 두 작품은 비슷한 구성요소를 동원하지만, 구조의 변형(수직/수평=공간/시간)을 통해 다른 이야기를 하는 손진아의 방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특히 캔버스에 아크릴로 그려진 화면은 평면적인 색채 처리로 얇아 보이지만, 바니쉬까지 포함해서 대부분 10번 이상 층이 올라가 있다. 작품에 내포된 시간성은 서사 뿐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도 관철되고 있다. 1층에 설치된 [confession]은 구조를 통해 이야기하는 작품의 속성이 잘 발휘된 이 전시의 대표작이다. 높이 6미터의 타워가 포함된 이 작품은 용접과 절단, 조립 같은 과정을 거쳤으나, 조각적인 기념비성을 가지기 보다는 연극 무대 같은 배열을 보여준다. 구조를 통한 서사와 자기 고백적인 요소의 결합은 회화와 입체 작품 모두에 공히 적용된다.
설치 작품 [confession]에서 쇠기둥 사이사이에는 그림에 등장하는 의자의 등받이 무늬들이 색색으로 빽빽하게 붙어있으며, 그 앞에 거품 형상의 무정형 구조물이 은색, 검정, 금색 등 여러 크기의 동그라미들로 용접되어 있다. 그 주변에 의자 한 쌍과 잘려진 의자가 조합된 것이 한 쌍 배치된다. 타워라는 형식은 문화사에 그 증거가 남아있듯, 강한 상징성을 가진다. 그 위를 뒤덮고 있는 것은 상징을 이루고 있는 기표들이다. 잘려지거나 온전한 의자는 자아의 반영이거나 주체의 상징이다. 재조합된 의자들은 분열과 해체의 국면에 있는 자아를 예시한다. 중앙에서 똬리를 틀고 있는 거품 형태의 무정형 구조물은 강력하지만 쉽게 포착할 수 없는 실재를 나타낸다. 그것은 일정한 크기와 색채의 계열로 이루어져 있지만 명확하게 좌표 화 될 수 없으며, 구멍들 사이로 발산되는 빛과 그림자 같은 연극적 효과가 특징이다. 우리의 현실이나 역사가 그러하듯, 관객은 그것을 하나의 형태로서 바깥에서 파악하기 보다는 전체적인 효과 안에 스며들게 된다. 이 작품에서 실재, 상상, 상징은 함께 작용하면서 주체를 구성한다.
이 작품 뿐 만 아니라, 3개가 같이 붙어 있는 작품이 많은 손진아의 작업을 필자는 현대의 정신분석학자 라깡이 이론화한 3계의--상징계, 상상계, 실재계--상호작용으로 해석해 보고자 한다. 라깡의 이론적 구도에서 서로 구별되는 계order로서의 상징계, 상상계, 실재계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주체를 형성한다. 마단 사럽은 해설서 [자크 라깡]에서 라깡의 계 각각은 프로이트를, 즉 상징계는 슈퍼에고를 상상계는 에고를, 실재계는 이드를 연상시킨다고 인용한다. 세 질서는 주체의 장에서 조우하는 것이다. 주체는 하나의 실체를 가지기 보다는 세 가지 질서가 상호작용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그 내부에는 불연속이 존재한다. 손진아의 빈 의자나 재조합된 의자는 주체의 부재와 분열, 균열의 장소와 관련된다. 의자는 자아ego를 반영하거나 주체subject를 상징하는 소품으로, 작품의 축을 이루면서 자신의 느낌과 자신의 주변을 둘러싼 상황을 전달한다. 의자는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의 신체적 존재를 강하게 환기시키며 사회적 위치를 상징하기도 한다. 마단 사럽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과 우리가 관찰되고 있는 지점 간의 차이가 상상계적 동일시와 상징계적 동일시의 차이라고 지적한다.

상징계는 사회적 구조를 지배하는 법칙으로, 언어의 법칙과 동일하며 자율적인 구조가 된다. 주체는 언어를 받아들임으로서 자기의 자유로운 본능 에너지가 작용되고 조직되도록 허용한다. 손진아는 의자를 통해 주체의 다양한 양상을 표현한다. 마치 언어처럼 규칙화된 방식으로 다양한 어법을 구사하는 의자는 주체가 언어에 의해 관통되어 있다는 상징계의 진실을 알려준다. 현대의 언어학은 주체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에 의해 주체가 구성된다고 한다. 언어는 주체에 선재하는 것이며 휴머니즘에서 말하는 기존의 주체를 삭제한다. 이 맥락에서 손진아의 빈 의자는 언어에 의해 말소된 주체의 상황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자유롭긴 하지만 엄격한 조형적 언어를 구사함으로서, 상징적 질서에 편입된 주체의 역사를 그린다. [욕망의 전복]에서 라깡을 해설한 페터 비트머는 인간의 육체는 언어로 구성되어 있지 않아서 그것을 상징화하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그러나 언어는 구별 지으며 고립시키고, 완전한 충족을 불가능하게 한다. (상징계 밖의) 존재와 (상징계의) 사고 사이에 균열이 발생하는 것이다.
라깡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면서 자신을 남김없이 파악하는 의식에 관한 이론인 데카르트의 이론을 뒤집는다. 이로부터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 한다’라는 라깡의 유명한 명제가 탄생했다. 이 전시의 부제 ‘Im not there’는 데카르트의 명제를 뒤집은 라깡 명제처럼, 존재와 사고의 상징으로서의 의자를 부재와 욕망의 그것으로 전치시킨다. 의자는 주체의 다양한 상태와 상황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동시에 주체의 빈 공간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화면의 중심에 자리 잡은 빈 의자의 배경 면을 이루는 다양한 패턴들은 특정한 내용과 연결되지 않는 기표들이며, 특히 많은 작품에 등장하는 검정색 원은 언어의 틈을 예시하는 것으로서,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침묵의 징후 혹은 기표가 된다. 손진아의 어법은 투명하게 소통되지는 않지만, 말하는 주체의 정체성과 위치가 드러나 있다. 라깡에게 주체는 기표가 기표를 지칭하는 구조의 미궁과도 같은 체계에 갇혀있다.
언어적 상징에 의해 폐지된 주체는 의미화 사슬에 갇히며 소외에 직면한다. 이러한 이유로 손진아의 많은 작품이 아름다운 언어의 감옥에 갇힌 양상을 가진다. 동시에 고착화된 의미의 사슬을 끊으려는 노력이 도처에서 행해진다. 말이나 글은 주체가 가질 수 있는 전능한 수단이기 하지만, 자체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다는 점에서 원초적으로 결핍된 것이다. 끝없는 반복은 이러한 결핍에 대한 보상적 행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작품의 중심에 놓인 의자의 앞뒤를 뒤덮는 화려한 문양들, 즉 기표들은 부재의 느낌을 강화한다. 라깡의 체계에서 기표는 상징계를 구성하는 요소이다. 대표적인 기표는 팔루스Phallus이다. 페터 비트머에 의하면 라깡에게 팔루스는 신체의 기관이 아니라 은유이며, 기의를 갖지 않는 기표를 의미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1층에 설치된 대작 [confession]에서 무늬에 뒤덮인 텅 빈 타워는 영원히 만족될 수 없는 욕망을 향한 기표의 운동을 연상시킨다. 우뚝 솟은 타워는 일견 남성의 신체기관을 연상시키지만, 기표로서의 팔루스는 남성의 것도 여성의 것도 아니다. 손진아의 의자 또한 성이 모호하다.
작품 속 의자는 그녀의 의자이기도 한데, 그것은 18세기 프랑스의 앤틱 의자로, 2002년부터 집중적으로 작품에 등장한 모델이다. 작가에 의하면 이것은 중성적인 이미지를 가진다. 의자를 장식하는 선과 패턴들은 여성미를 풍기지만, 좌석은 매우 크다. 그것은 원래 중장년의 남성이 사용하는 집무실용 의자였다고 한다. 곡선과 직선이 같이 있는 그것은 남성도 여성도 아닌 것이다. 1층에 걸린 [situation created]는 이상적인 상징적 주체를 그려 보인다. 여러 층의 반원이 마치 천구처럼 공간을 구획하고 있고, 3개의 의자가 조화롭게 배치된다. 2층에 걸린 [symbolic relationship]은 5개의 패널이 모여 만들어진 것으로, 서로 구별될 수 있는 여러 층이 중첩되어 있다. 차이의 체계를 이루는 그것들은 자유로운듯하면서 질서가 잡혀있고. 침묵의 블랙 홀 같은 검정색 원 조차도 수직 수평 구도로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다. 보다 작은 패널들이 모여 있는 작품 [situation created]에는 상징적 주체의 다양한 상태를 표현한다. 70x70cm크기의 캔버스 18개가 사각과 원이 교차로 배열되어 있는데, 모두 정중앙에 놓인 같은 크기의 의자를 중심으로 다양한 변주를 보여준다.
원형 캔버스의 경우 중심으로부터 뻗어나가는 구도 때문에, 그리고 정사각형 캔버스의 경우 검정색으로 건축적 구획이 지어 있어 안정감을 준다. 상징적 주체는 고정된 위치 뿐 아니라, 과정중의 주체가 된다. 윈도우 갤러리에 전시된 작품 [symbolic relationship]은 3개의 금속 판 위에 여러 크기의 의자를 붙인 것으로, 정면을 향하는 중앙의 좌석들에 비해 좌우의 날개는 표류한다. 평면에 붙은 입체와 물결무늬 바탕은 역동성을 강조한다. 2층에 전시된 그림 [confession]이나 [one person]은 정사각형 틀에 기표를 대칭적으로 배열함으로서 안정감 있는 상징적 주체의 모습을 그린다. 5개의 패널이 가로로 붙어 있는 2층의 [one person]은 여러 높이에 올려진 의자를 통해 다양한 위치와 면모를 가지는 주체를 표현한다. 3층의 입체작품 [confession] 역시 상징적 주체의 다양한 위치를 표현한다. 그것은 스테인레스 기둥 위에 다양한 색과 크기, 높이, 방향으로 이루어진 의자를 올려놓은 것인데, 다리를 기둥으로 연출한 탓에 아슬아슬한 느낌을 준다. 그것은 사회적 지위의 꼭대기를 향하는 욕망의 위험성과 부질없음을 경고하는 상징적인 자리이다.

180x150cm의 패널 4개가 붙은 대작 [blow off me]는 상징계가 가지는 표면적인 안정성을 해체하면서 기표의 불안정성을 극대화한다. 이 작품은 손진아의 어떤 작품보다도 흩어지려는 경향이 강하다. 의자는 어지러운 옵티컬 패턴으로 장식되어 있고, 다양하게 배치된 의자 위를 뒤덮는 타원형 색원들은 배경에서 해방된 기표들로, 의미화 사슬의 역동성을 보여준다. 현대 언어학의 성과를 정신분석학에 도입하여 변형시킨 라깡의 이론은 기표와 기의 사이의 대칭적 안정성에 의문을 가진다. 기호가 부재한 대상을 지칭한다면, 기표는 대상이 아닌 언어의 사슬을 지칭한다. 기표는 다른 기표만을 지칭할 뿐이다. 마단 사럽의 해설에 의하면 기의가 마침내 유효범위 내에 들어올 때에도 이것은 더 많은 기표로 용해된다. 기표들은 의미화 사슬에 의해 결합된다. 라깡은 기표와 기의라는 두 영역이 절대로 결합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기표 아래 기의의 끝없는 미끄러짐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말해진 진실이 기표와 기표 사이의 공간에, 그 사슬의 구멍에 존재함을 강조한다. 기표들의 결합에는 차이들의 구조가 있으며, 기표가 결합됨으로서 기의가 형성된다. 의미화 사슬로 연결된 기표들이 화면을 뒤덮고 있는 작품 [blow off me]은 지시대상은 물론 의미로부터 해방된, 희열jouissance에 찬 모습이다. 바야흐로 말하는 주체는 금지된 것을 표현하려고 분투하는 무의식과 마주하게 된다.
3층 벽면의 부조 작품 [confession]은 언어라는 상징적 세계에 진입하기 이전의 상상계를 거울 이미지를 통해 보여준다. 스테인레스 스틸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굴곡진 표면으로 왜곡 상을 반사하는 입체 거울로 되어 있다. 작은 구와 입방체가 붙어있어 관객과 환경을 분열증적 시각으로 안내한다. 굴곡진 거울에는 의자가 붙어 있어서 왜곡된 반사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거울은 자아의 다양한 모습을 넘어 분열까지 야기한다. 2층 중앙에 설치된 브론즈 작품 [confession]은 아래의 큰 의자에서 분지된 듯한 여러 크기의 의자로, 거울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거울단계의 특징을 가진다. 거울 단계의 특징을 보여주는 또 다른 작품으로 1층의 설치 작품 [confession]에서 잘려져 재조합된 의자를 들 수 있다. 절단된 신체를 떠오르게 하는 그것은 자아의 분열상을 보여준다. 라깡은 거울 단계를 에고 기능 그 자체의 모델로 간주한다. 거울 단계는 유아가 자신의 신체 행동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처음으로 자신을 일관되고 자기 통제가 가능한 총체로 상상할 수 있게 되는 시기이다.
거울단계는 자아가 되기 위해 요구되는 구조로, 실제로는 파편으로 파악될 수밖에 없는 신체가 거짓된 환영을 제공한다. 거울의 반사 이미지는 주체를 완전성이라는 환영적 이상형의 덫에 걸리게 한다. 거울은 자아의 상상적 양식을 구축한다. 인간은 전 생애에 걸쳐 상상적인 전체성과 통일성을 계속 찾아나간다. 손진아의 작품에서 거울의 왜곡상과 분열상은 자아에 대해 가지는 허위의 동일시 및 통일성을 폭로하고 있다.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통일된 이미지에 매료된 자아는 상상적 관계의 원형을 보여준다. 상상계는 언어 이전의 구조, 예를 들면 어린이, 정신병자, 도착증 환자의 여러 원시적인 환상을 포함한다. 라깡적인 모델에서 이상적 자아는 본질적으로 나르시시즘 형성체로서 거울단계에 근원을 두며 상상계에 속한 것이다. 손진아의 작품에서 의자가 상징계와, 거울이 상상계와 비유될 수 있다면 여러 작품에서 다양한 변주로 나타나는 동그라미는 실재계와 비유될 수 있다. 실재계는 호시탐탐 상징계의 틈새로 분출을 노리며, 그것에 구멍을 낸다. 그것은 조각이든 설치든 그림이든 간에 각 작품의 바탕을 채워가며 리듬을 형성한다.
그러나 그것은 상상계나 상징계와 달리, 구체적인 이미지나 언어를 형성하지 않는다. 그것은 물질적 기질, 또는 기저 물질처럼 존재하면서 다른 계들과 상호작용을 한다. 특히 검정 동그라미는 시각적으로는 블랙홀이나 빈 구멍, 언어적으로는 침묵을 예시하면서 실재계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라깡의 모델에서 실재는 상상도 상징도 아닌 무엇이다. 실재는 배척된 어떤 것으로 파악되며, 불가능한 것으로 정의된다. 실재는 논리를 벗어나는 장소에 있으며 포착되거나 규정되기 힘들다. 마단 사럽의 해설에 의하면 실재계에 대한 라깡의 개념은 프로이트의 이드로 되돌아간다. 이것은 갑작스러움, 당황스러움, 예기치 못함과 관련된다는 것이다. 실재계는 형언불가 또는 불가능성의 의미에 가깝다. 이것은 인간 주체에게 주체 자신들을 능가하는 세계에서 자기들의 상징계 및 상상계의 구성이 생겨남을 상기시킨다. 많은 작품에서 뜬금없이 출몰하는 검은 점들은 실재처럼 표현 불가능한 것을 표현하려는 침묵의 전략이다. 손진아의 작품은 실재의 모호함과 원초적 에너지, 상상이 가지는 기만성과 환상, 상징의 언어와 소외 등을 넘나들면서 인간의 안팎을 구성한다. 구성요소들은 치밀하게 결합되지만, 그것은 인간의 핵심에 끝없는 욕망과 불확실성이 내재함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