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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창작 윤리와 한국미술계의 구조

박영택

작가, 예술가란?

예술가란 “예술작품을 창작하거나 표현하는 사람”을 말한다.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아티스트란 “직업이나 취미로서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창작하는 사람”을 말한다. 그러니까 예술가란 예술적 창조를 자기 삶의 본질적 부분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이를 통해 예술과 문화의 발전에 기여하는 사람이며 그가 고용되어 있거나 협회에 소속되어 있든 아니든 예술인으로 인정받고 있거나 인정받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예술인으로서의 커리어를 입증할 만한 주요 기준으로는 일반 공중에 의한 예술인으로서의 평판, 다른 예술인에 의한 인정, 예술적 직업 활동에 사용되는 시간의 양, 예술 활동에서 얻게 되는 소득의 양, 창작한 예술작품의 질에 대한 평가, 예술관련 전문 단체의 가입유무, 스스로의 예술인 의식 등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뛰어난 예술가가 유명해지는 과정에서 거쳐 가는 네 가지는 인정의 고리는 “ 동료에 의한 인정, 비평적 인정, 화상과 컬렉터로부터의 후원, 그리고 대중들의 갈채”라고 한다.
진정으로 독창적인 작가가 대중에게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약 25년이 걸린다고 생각한다. (알란 보우니스) 그런데 과연 우리 작가들은 서로의 재능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서로를 존경하는가? 우리의 평론가들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화상들과 컬렉터들은 좋은 안목과 건전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가? 대중들은 예술을 사랑해 주고 있는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긍정적일 때 우리는 많은 훌륭한 예술가의 탄생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훌륭한 예술은 아주 보기 드물다는 것이 문제다. 오늘날 예술가의 삶은 여전히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다. 더구나 시장이 가치판단의 고유 권한을 행사하고 있는 오늘날 작가들의 소외와 고독감은 견디기 어려울 만큼 심화되었다. 반면 예술가야말로 ‘창조’라는 양보할 수 없는 가치를 사랑하기 때문에, 때때로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스스로 준엄해질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것이 나름의 작가적 윤리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윤리는 작가가 자본과 타협할 수 없는 자신의 미술관(美術觀,) 작가적 태도, 그리고 동시대 미술구조 내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신의 작업세계를 어떻게 유지, 진전시켜나갈 수 있느냐의 문제와 결부된다.

미술제도와 권력

20세기의 모더니즘이 확립되고 난 후에 경계지워진 영역으로서의 예술, 하나의 물건으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 그리고 그에 따른 아티스트란 개념은 역사적으로 특수한 것들이고 한시적이며, 공간적으로는 뉴욕이나 파리 같은, 서구의 몇몇 모더니즘의 수도들이란 지역에 한정된 것이란 주지의 사실이다. 미술관 역시 그렇다. 이후 미술관이야말로 하나의 제도로서, 담론의 장치로서 권력의 중심이 되었다. 오늘날 모든 작가들은 그 미술관을 겨냥해 작업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미술관은 어떤 대상에 작품의 지위를 부여하는 한편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기도 하고 작품뿐 아니라 관객에게 질서를 부여하고 그들을 교육, 통제, 훈련하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미술관은 결코 가치중립적인 기구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현대미술은 미술관과 그 미술관과 관련된 수많은 작가, 큐레이터, 평론가. 화상, 언론 사이의 끊임없는 거래와 공모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그 미술관을 위시해서 미술계의 권력 구조내에서 예술작품이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권력의 작용이다. 오늘날 그 인정의 주체란 미술관과 갤러리, 관장과 큐레이터, 전문비평가, 전문딜러, 전문미술잡지 등이다. 역시 우리 미술계를 형성하는 기본 권력구조는 미술관, 화랑, 그 미술관과 화랑의 관장과 화상, 화랑가의 주요 고객층, 큐레이터 그리고 평론가와 신문기자, 미술잡지기자 및 미술대학 교수, 미술관계 고급공무원 등이다. 이런 것들이 다소 복잡하게 연결된 구조가 다름아닌 한국미술계의 현실적 지형도를 그리고 있으며 이들의 공모와 연대감, 연합 등이 권력의 층을 형성하고 있다. 이 같은 구조에 의해 제도화된 틀 속으로 편입하는 것, 그것이 예술과 작가가 되는 길이고 인정받는 길이 되었다. 오늘날 작가들은 이런 구조에서 인정받고 받아들여져야만 된다. 인정받는다는 것은 삶의 문제, 먹고 사는 일과 직결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인정을 받고자 하는 것이 미술행위의 본질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예술의 문제는 이미 예술가의 손을 떠났다. 오늘날 예술가의 활동은 그것을 조직하고, 관리하며 전시를 기획하고, 고객을 관리하며 책자를 제작하고, 작품을 선별하는 전문가들의 수중에서 더 정의되고 있다. 이제 미술경영은 더 이상 미술가의 손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것은 전시회나 프로젝트, 또는 개별작품을 지원하는 국고기금을 할당받는 것을 일차적인 임무로 삼고 있는 관료집단의 조정과 통제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늘날 작가들은 예술권력의 생산, 재생산 구조에 적극 동참하게 되면서부터 그 규율과 권력의 작용에 길들여져간다. 특히나 이 헤게모니를 둘러싼 치열한 투쟁을 통해 제도로 진입하고 권력을 잡게 되면서부터 미술계의 ‘신분귀족층’이 된 작가들은 나름의 작가정신, 학력, 공모전 수상, 경력만들기를 통해 소위 제도권미술의 핵심중추가 된다. 전시를 거듭하면서 또는 평론가의 글을 통해 자신들의 입장을 담론화하고 대형 화랑이나 미술관에서 요구하는 기준에 맞추어가면서 미술계의 주류가 되어나간 것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대학에 자리 잡은 교수화가들이다. 대한민국에서 교수가 된다는 것은 ‘화가재벌’로서 커나갈 가능성을 우선적으로 실질적으로 담보하는 것이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확산시키며 제도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우선적인 점거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그림의 값을 올려놓는다.
따라서 이들은 무엇보다도 고급화랑이나 미술관의 주인들, 언론 그리고 미술평론가와 큐레이터와의 친목과 공모를 부단히 도모한다. 이들 간의 적절한 사교, 친분관계 그리고 어떤 공생공사 의식이야말로 살아남는데 우선적인 것이다. 작가들은 그런 구조의 메카니즘에 동물적으로 적응하고 대처해나간다. 그래야 살아남는다. 그에 따라 오늘날 권력이 커지는 것이 다름아닌 미술관, 화랑의 오너들과 큐레이터들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권력은 자본에서 나오고 미술 역시 막강한 자본가들의 힘에서 나온다. 한국 사회에서 재벌미술관의 오너들이 특히나 그렇다. 삼성의 리움미술관, 금호의 금호미술관 같은 재벌급 미술관이 그렇다. 나아가 고급화랑, 예를 들어 갤러리현대, 국제화랑, 가나아트센터 등이 또한 그렇다. 그 같은 미술관/화랑에서의 전시와 작품 판매는 실질적으로 한국미술계의 역사가 되고 주류미술계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이는 곧바로 해외미술계와 연결되고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의 구실까지 한다. 이른바 스타작가로서 커나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작가들은 그런 공간에 편입되고 선정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이들 간의 먹이사슬과 사교의 형식, 관리방식과 그 모든 것들은 거의 모든 미술인에게 고스란히 모방되고 그를 통해 똑같은 권력의 틀과 행태를 반복한다. 그 같은 권력을 선호하고 제도내로 들어가고 싶어하는 모든 작가들, 젊은 작가들의 본보기가 되거나 부러움의 대상이 된다. 그것이 우리 미술계의 모범이고 모델로 둔갑한다. 그것은 ‘미술’의 문제이기 보다는 권력의 헤게모니와 제도권의 중추가 되기 위한 노골적인 투쟁, 그러니까 유명세, 명망성을 얻기 위한 암중모색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많은 작가지망생들, 작가들, 미술계의 구성원들은 그 명망성을 얻기 위한 다양한 노력들을 기울인다. 그 명망성은 여러 활동과 그에 대한 기사화이다.
결국 저널이야말로 그 명망성을 가시적으로 확인해주고 부풀려주며 확인시켜주는 셈이다. 여기에는 당연히 기자와 잡지사, 미술매체와 관련된 이들 및 평론가들이 연결되어 있다. 오늘날 작가들은 이론가를 중심으로만 모이고, 이론가의 눈에 띄어야만 생존할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론을 앞서는 미술이 살아남고 설상가상으로 이젠 아예 예술가들조차 이론가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작가들은 저마다의 특정한 현대미술의 이론/담론을 내세우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에게 작품이란 “고작 자신의 이론을 입증하는 증거로 간주되었다. 그 이론들은 모두가 다 그들의 내면이 아니라, 외부에 그 근거를 둔 것들이다.”

오늘날 미술은 이제 잡다한 이론의 수다스러움에 의해서만 겨우 부양되고 있다고 지적받는다. 아무것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비평이 창작의 기반을 대신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시장에 전시된 작품들은 사실상 비평적 시각을 대변하고 있고 “확신에 찬 글은 불확실한 그림보다 더 믿음직한 것으로 되어 간다. 미술은 이제 비평으로만 존명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고, 작품은 비평적 관점의 한 알리바이에 불과”하게 되었다. 비평가들의 관심을 갖지 못하는 작가들, 동시대 미술의 새로운 논리나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지 못한 작가들은 따라서 이제 별볼일 없는 작가로 낙인찍힌다. 그래서 오늘날의 젊은 작가들은 비평가적 시각을 갖길 원하고, 그러면서 점점 더 비평가를 닮아간다는 지적을 받는다.
평론가는 우리들이 예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해주는 언어를 창조해내는 것을 도와준다. 새로운 미술을 논하기 위해서 우리가 새로운 어휘를 창조해낼 수밖에 없다. 평론가는 대중에게 자신의 취향을 강요하려 하지 않는다. 그는 책임 있는 선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오늘날의 미술을 관찰하는 데 아주 많은 시간을 보냈고 작가들과 대화를 나눴으며 동료 평론가의 글을 읽었다는 사실 덕분에 그는 남들로부터 인정받는 권위를 지닌다.
비평가들이 자신의 입장과 논리에 따라 특정한 작가를 지지하고 옹호하는 활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고 더욱 필요하다. 바로 그것이 미술작품의 가치에 영향을 주는 시스템으로 최소한 되어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구조를 전혀 갖추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문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상품가치를 포함한 미술작품의 가치는 제멋대로 결정되고 있다. 아울러 오늘날 평론가들의 평가는 시장의 평가와는 아무 관련이 없어 보인다. 미술에 있는 두 가지 가치, 그러니까 시장의 가치와 미술사적 가치에서 오늘날은 갈수록 시장의 평가가 중요해지고 있어서 작가들로 하여금 시장을 무시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아무래도 시장에서의 평가는 화제가 되기 쉽기에 그렇다. 오늘날 이전과 같은, 예를들어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같이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는 평론가를 더 이상 발견하기 어렵다. 또한 특정힌 이론이나 비평관이 주도하던 시대도 아니게 되었다. 이제는 평론가들의 평가가 시장에 영향을 많이 끼치지 못하는 반면 시장의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있다. 사실 오늘날 미술시장 또는 “경매회사는 현대에 들어서 미술사학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주디스 벤하무- 위에) 오늘날은 순수미술을 전공한 평론가들이 시장과 결합하고 있으며, 시장은 미술사학자들의 견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식으로 두 분야가 서로 얽혀있다. 이는 곧 ‘미술과 자본주의의 결합’에 다름아니다.

평론가나 큐레이터, 그리고 기자들 역시 그런 요구에 은연중 길들여지고 그들의 요구에 응하게 된다. 특히나 언론의 미술담당 기자들 대부분은 그런 요구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 대개 그들은 미술을 전공한 이들이 아니기에 그림에 대한 일정한 비평적 기준을 지닌 것으로 보기 어렵다. 따라서 수동적으로 정보를 나열하거나 작가나 화랑이 요구하는 선에서 써주게 된다. 특히나 미술관, 고급화랑들은 그 열악한 미술지면을 거의 독점하면서 기자들을 ‘관리’한다. 관리의 방식은 결국 자본인 셈이다. 작가들 역시 그 제한된 지면을 차지하고자 온갖 인맥과 연줄을 동원해 그 게시판 같은 곳에 실리고자 한다. 사실 미술이 언론에 나오는 경우는 그저 단순한 전시소개, 초대전을 갖는 화가들을 포장하고 화려한 수식으로 감싸는 글들, 아니면 요식행위로서의 문화기사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것은 기사라기보다는 소식과 정보에 불과하다. 그나마 그 정보란 것도 의심쩍은 정보들이다. 이 사회에서 문화, 미술은 우리들의 삶에서 잘해야 요식행위 같은 것이라는 얘기다. 일간지에 실린다는 것, 텔레비젼 문화소식란에 잠깐 얼굴과 작품이 실린다는 것 자체가 미술문외한들에게는, 고객들에게는 그 작가의 권위를 새삼 인정해주는 것 인양 위장된다. 그저 정보나 소식에 불과해 보이는 현재 언론의 미술난, 텔레비젼의 미술문화난은 미술계 정치구도를 은연중 만들어주는데 한 몫하는 편이다. 그곳에서 진정한 비평과 문화를 점검하고 진단하는 기능을 찾기 어렵다.

큐레이터들 또한 오늘날 가장 첨예한 권력의 생산 지점에 위치해있다. 90년대 들어와 더욱 심해진 이런 현상은 그만큼 대형전시공간, 미술관의 부재와 기획전시를 열만한 장소가 없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국공립 혹은 사립미술관, 대형상업화랑과 재벌급 미술관의 큐레이터들의 권력이 그만큼 커진 것이다. 따라서 이들과 작가들과의 친분관계, 학연과 사교야말로 미술계의 권력이 된다. 작가들은 당연히 그들과의 관계를 부단히 도모하고자 한다. 우리의 경우 재벌급 미술관의 오너들은 당연히 그 그룹의 친인척들이다. 피로 얼룩져있다. 당연히 해당 그룹의 이해관계, 특정한 지연과 맞물려있다. 그런 미술관과 관계하기 위해서는 오너와의 친분 내지 큐레이터와의 관계가 우선된다. 따라서 그곳에서 열리는 전시들이 과연 그런 관계나 이해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느냐 그리고 그곳에서 열리는 전시들, 큐레이터들이 기획하고 궁극적으로는 오너들이 관여하는 전시의 성격들이 과연 얼마만큼 공공성과 질적 측면을 담보하고 있으며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느냐는 매우 첨예한 문제이다. 그런 것들이 검증되고 비판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역시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동시대 미술풍경과 미술인의 윤리

현실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오늘 우리 미술문화의 모습은 한마디로 정치판과 닮아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성공만 하면 된다는, 살아남으면 된다는 우리식 천민자본주의의 초상, 그 삶의 방식이 그대로 화단에 스며들어 막강한 힘들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미술문화는 없는데 화가와 전시는 쏟아져 나오는 것이 우리 미술판의 실정이다. 전시들이 연이어 벌어지지만 가만 들여다보면 매양 비슷한 것들이고 그 작가가 그 작가-그러니까 잘나가는 상업적인 작가 내지 경력이 화려하고 대학에 있는 그런 작가들만이 인정되는 판이다. 예술가 역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 경제적인 독립과 명예,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성공의 획득에 부심한다. 때로 새롭고 독창적인 스타일에 대한 열망과 집착 역시 예술가 자신의 본성을 표현하려는 소망보다 오히려 명성을 얻고 경쟁자들을 넘어서려는 목적에 의해 더 잘 설명될 수 있음은 과장이 아니다. 오늘날은 성공과 명성이야말로 존재 자체의 입증이자 진실의 유일한 근거가 되었다. 많은 경우 시장에서 작품의 질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실체로서 작품이 희미해진 만큼 작가의 신화가 실체로 되어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들이 지닌 미술에 대한 독자한 사유와 이의 형상화를 음미하고 그것이 인정되는 풍토라기보다는 특정한 유행이나 패션에 휘둘리거나 미술외적인 ,정치적 입김이 더 강하게 좌지우지하는 형편이다.
미술계란 다름 아니라 미술과 관련된 일이 논의되고 그 일을 하기 위해 사람들이 모였고 일을 둘러싼 가치와 질의 논의가 통용되고 인정되는 곳이어야 하는데 그런 것은 부재하고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한 생존의 욕망들만이 너무 뜨겁고 노골적으로 얽혀있는 곳이 되었다. 다들 먹고 살자고 일을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제대로 일을 하면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일’은 시늉이고 알리바이에 머물고 있고 결국은 돈과 명예가 최종의 목적이라면 이는 문제가 아닐까? 오늘날 작가들은 결국 돈이 되는 미술을 해야 하고 화랑은 돈이 될 만한 작가. 작품만을 다루고 이 같은 미술시장의 논리는 이제 미술의 모든 핵심이 되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결국, 돈과 권력이 미술계의 화두가 되었다. 이제는 미술작품의 질이나 철학, 혹은 이념이란 것은 실종된 듯 보인다. 최소한 미술에 대한 고민이나 사유의 흔적 아래 작업이 풀려야 하지만 사정은 그렇지 못하다. 오늘날은 미술시장에서 팔리는 것이 유일한 척도가 되고 기준이 되고 좋은 작가의 잣대가 되고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들은 팔리는 작품을 만들어내는데 혈안이 되고 있고 미술시장의 동향에 촉수가 곤두서있는가 하면 그런 기회를 잡기 위해 마냥 분주하다. 그리고 그런 작가가 좋은 작가로 공공연하게 인정되고 있는 것 같다. 시장에서 소외되고 작품이 팔리지 못하는 작가는 형편없는 작가인양 인식되는 것이다. 특히나 근자에 들어 부쩍 보수화, 상업화되어 가는 이 사회분위기는 미술계에서도 동일하게 검출된다.
사실 우리에게는 아티스트와 아티스트적 삶은 부재하고 다만 미술과 미술가와 미술제도와 시장만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작업들이 미술시장에 너무 온순히 길들여졌고 사회와 현실 등과는 거리를 둔 체 개인적인 영역으로 파고들고 있는데 따라서 작업의 경향이 대부분 자폐적인 분위기를 띤다.
“예술에서 중요한 것은 과거의 관습을 뒤엎는 반골정신이다. 반골정신은 자유정신이다. 하지만 오늘날 미술시장은 작가들에게서 자유를 앗아갔다. 작가들은 작품을 팔아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고 때문에 현대미술은 점점 똑같아진다”(후안 폰테스)
물론 미술의 자본주의화는 분명 대다수 작가가 창작활동만으로 생계를 아어가기 어려운 현실에서 도움을 준다. 현재 국내작가 중 67.1%가 창작활동 이외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 대다수 작가가 창작활동만으로 생계를 이어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작가들이 다른 활동을 병행하지 않고 작품활동만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다면 그만큼 작품에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현대미술은 점점 국제화되기에 외국의 전시공간(여기에는 각종 아트페어, 옥션이 포함)에 노출되는 것이 그 작가의 평가에 중요하게 작용한다. 시장에서 화제가 되고 따라서 언론에 노출되는 사실만으로도 신뢰도가 올라가고 그것이 뉴스가 되고 있다. 미술수요자는 더 이상 특정 엘리트계층만이 아니다. 돈과 관련된 뉴스는 대중에게 큰 관심거리가 되고 있다. 이렇듯 오늘날 작가의 중요성은 시장의 가치로 환산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미술작품의 구입과 감상이 자본축적과 투기적 목적에 의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도 든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같은 현상을 굳이 탓할 수만은 없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술 역시도 상업적 목적과 이윤의 극대화가 절대적 잣대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두렵다. 지금 사두면 이후 몇 배의 이윤을 남겨 주리라는 확신을 주는 소수의 작가들로만 돈이 몰리고 있고 미술시장은 그저 잘 팔리는 그림에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그리고 젊은 작가들 역시 시장에서 원하는 기막힌 손의 솜씨에 의존해 극사실적인 기교를 자랑하거나 새로운 재료를 고안해 이룬 특허품 같은 작품들을 만드는데 여념이 없디면 예술의 질적 측면에 대한 논의는 성가시거나 무의미하거나 또는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미술 시장이 호황이고 경매가 활성화되는 한편 전시가 많아졌지만 우리 미술계의 풍경이 평면적이 되거나 더러 황폐해지고 남루해지고 있다는 생각이다. 며칠 전 유명작가들의 그림만 전문으로 그려온 사람과 미술 중개인이 구속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근래 들어 이 같은 일은 늘어만 간다. 몇 년 전 이중섭 그림을 둘러싼 유족과 감정 협회간의 법적 공방도 그 대표적 사건이었다. 화랑들 역시 알게 모르게 위작들을 거래하고 있다고들 한다. 제대로 된 감정기구가 없다보니 위작들이 더욱 기승을 부린다. 사실 구매자들이 특정작가의 작품만을 사겠다고 하니 화랑으로서는 그 유혹을 진정시키기가 쉽지는 않아 보인다. 화랑들이 좋은 작가와 작품들을 엄선하고 그 의미와 가치를 전시를 통해 부여하는 한편 이를 대중, 고객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리면서 질이 확보된 매력적인 상품으로 만들어나가는 역할을 해야겠지만 우리화랑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객들이 원하는 작품을 구해다주거나 잘 팔리는 작가만을 상대하는 것은 사실 화랑이라기보다는 구멍가게에 해당한다. 그러다보니 위작의 유혹에 넘어가기 쉽고 동시대 미술문화의 흐름이나 진정한 작품의 질과 의미에 대해서는 무지할 수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의 경제규모가 커짐에 따라 우리의 미술분야도 상품가치가 작품의 질이나 문화적 가치에 우선하는 서구 미술시장의 병폐를 신속하게 닮아가고 있고 가속에 가속을 더해가는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상업주의 속에서 과연 예술은 순수함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가 의문이다. 우리 시대에 미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고 무엇이 우리 시대에 필요하고 좋은 그림인가 하는 논쟁은 어디에도 없고 그저 매스컴에 의한 저널적 센세이셔널리즘과 돈의 위력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듯 하다. 매스컴에서 떠들어대고 많은 구매력을 갖는 작품이 좋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오늘날 작가들은 전시장에서 전시하지 않고 여러 아트페어를 떠돌며 파는데 열중하고 있다. 알다시피 아트페어는 지극히 상업적인 시장이다. 시장경제의 원칙이 강력히 작동하는 곳이자 작품의 질보다는 상업적 목적과 이윤이 우선하는 곳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제 이 아트페어에서의 매매실적과 주목이 곧바로 현대미술의 중요한 척도가 되고 작품의 질을 규정하는 힘과 권력이 되고 있다. 아트페어나 옥션에서 좀 팔렸다는 작가들이 이내 스타작가가 되고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작업들이 모두 아방가르드작업이나 중요한 현대미술인 것처럼 논의되거나 인정되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이질적인 재료를 장인처럼 다루거나 ‘눈알이 빠질 정도’로 극한 묘사에 몸을 맡기거나 스펙타클한 볼거리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들이 대부분이 작업이 되고 있다. 따라서 젊은 작가들 상당수는 밖의 시장과 옥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고 결국 그런 시장에서의 판매상황에 비례해서 작가와 작품의 수준을 비교, 측정하고 있는 곳이 이곳 미술계의 현실이다. 미술에 대한 풍성하고 진지한 사유와 담론, 비평과 작품의 질에 대한 고민들은 사라지고 오로지 작품의 판매수치와 자본의 회전이 절대적인 척도가 되고 모든 미술행위가 시장에서, 시장 논리 안에서만 이루어지고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척이나 황폐하고 삭막한 풍경일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작가의 윤리의식이 요구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늘날은 단지 성공을 원할 뿐인 새로운 예술의 세대가 태동한 시대다. 오늘날 현대미술의 스타들은 모두 자신을 짧은 순간 자극적으로 다가오는 하나의 이미지로 만드는데 성공한 이들이다. 70년대 이후 태어난 신세대 아티스트들에게 미술은 학문이라기 보다는 쇼 비즈니스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미술이 소수 컬렉터만을 위한 폐쇄적 미술시장이나, 미술대학 기반의 아카데미즘에서 대중적 엔터테인먼트이 성격을 띄는 것으로 변화했다. 그런데 오늘날 가장 비판해야 할 작가들은 누구보다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작가이다. 대중의 취향에 맞추고 유명세만을 추구하다 보니 작품의 개념을 잃어버린 채, 사회의 고정관념과 클리쉐를 복제하고 퍼트린다. 아울러 대중매체와 연관된 ‘포퓰리즘’이 문제이다. 일반 대중을 예술적으로 이끌어야 할 작가가 도리어 그들의 눈치를 보고 그들이 좋아하는 말초적 자극을 자초한다는 것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작가 자신이 연예인이나 스타처럼 향동하는 작가인데, 이는 자본주의가 가진 병폐를 비판할 의식조차 없이, 그저 표피적인 소비욕망, 상품화된 여성상을 복재하고는 스스로 상품이 되어버린다. (낸시랭의 경우가 그 대표적이다. 낸시의 목표는 애교로 세상을 날로 먹는 거라고 한다. 그녀는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미소로 말했다. “사람들한테 영향을 미치는 세계적인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요. 그래서 부와 명성을 다 얻고 싶어요.” (BAZAAR 2004녀7월호) 그녀는 빅토리아 시크릿란제리를 걸치고 퍼포먼스를 하고 명품, 노출, 애교, 육감적인 몸매와 각선미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데 사실 그 아티스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같은 기호들에 비상하게 관대하고 허용적인 어떤 시대적 욕망, 욕망이 함의들이 더욱 큰 문제디) 작가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런가하면 대중은 이들을 솔직하다느니, 대담하다느니 하며 마냥 치켜 세운다. 이들은 직설적이고 단순하고 말초적이다. 여기에 약간 불량기가 가미되면 더욱 뜬다. 뭔가 삐딱하면 ‘쿨’한 줄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저급한 감각주의는 오늘도 소리없이 노력하며 자기 세계를 쌓아가는 ‘좋은’ 작가들을 죄절시키는 ‘나쁜’이들이다.
그만큼 오늘날 예술적 성공이란 매우 혼란스러운 개념이 되었다.

나오는 글

자본주의적 삶의 구조에서 어떤 일을 하던 그것은 모두 다 먹고 사는 일의 관계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화가들도 미술행정가들도 평론가나 화상들도 그 먹고 사는 일에 걸려있지만 그래도 문화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일정한 책임을 지니고 살면서 이를 작업으로 드러내고 그런 식의 자기 삶의 감각과 셰계관을 스스로 보여주어야만 한다. 그것이 그 작가/미술인을 신뢰케 하는 유일한 지점이다. 그 책임이란 무엇보다도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 인간의 삶과 정신의 가치에 대해 예리한 인식을 드러내고 풍부한 상상력과 자유로운 사고를 통해 보다 나은 삶에 대해 발언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삶이 아닌 다른 식의 삶 말이다. 상투적 인습과 이데올로기에 물든 사물과 세계를 다르게 보여주고 이를 확장시키는 것이야말로 미술의 의미일 것이다. 우리가 한편의 영화나 책과 시, 그림을 보고 음미하는 것도 바로 그런 깨달음과 감동, 생각의 무거움을 그러나 정화되는 기분과 감정을 부여해주기 때문에 문화를 향유하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 일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이 없다면(이런 측면에서의 윤리적 책임감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작가나 미술인들은 끝없는 불신을 주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불신은 곧바로 문화, 예술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렇지 않을까?
알다시피 미술이란 사실 정답이 없는 부분이라 사기와 가짜가 판칠 수 있는 희한한 영역이다. 그러나 미술이란 사물과 세계를 보고 이해하는 놀라운 눈과 감각, 가치를 추구하고 실현하는 과정이며 이를 판독하며 이해하는 취향과 안목의 투쟁이다. 그런 질적인 측면들에 대한 엄정한 위계와 그 위계에 대한 존중과 인정은 부재하고 그저 목소리 크고 권력적인 기관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자리가 곧바로 가치와 질로 연결된다고 믿는 이 후진적 발상이 결국 모든 문제의 핵심이다.
오늘날 미술제도는 힘이 커져있고 편재하고 또 그 안에서 게임도 더욱 정교해졌다. 그런데 제도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제도를 이용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계산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오히려 그런 부담을 놓아버리는 것, 제도를 놓아버린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형식을 가지게 되면 결국 제도라는 것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결국 제도와의 거리를 잘 해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좋은 작가가 된다. 제도와 충분한 거리를 두고 독특한 것을 만들고 제도를 거꾸로 이용하기도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그간 예술은 위대함이라든가 상상력이 탁월하고 지독한 그 무엇으로 신비화되어 왔다. 그러나 미술을 하는 사람은 우선 잘 놀아야 한다. 잘 놀아야 깊숙하게 만난다.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잘 노는 속에서 정말 진지한 문제를 발견해내는 것이다. 그들은 미술뿐만 아니라 인생의 여러 측면이나 세상의 관찰자로서 끊임없는 새로운 화두를 던져야 한다. 각자가 자신만이 생기있고 활발한 지적 사유권, 예술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럴때 사람이 생산적으로 고양된다. 개인적인 경험이지만 진정한 미술가로서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고 여겨진 작가들은 특정한 형태로 굳어진 가치에 안주하지 않고, 길들여지지 않는 시선과 감각으로 매번 미술을 새롭게 사고해보려는 것, 자신의 일작업 이외에는 완전히 무심한, 심플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아울러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조차 극구 두려워하는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세속적이고 권력적인 욕망의 끈을 가능한 방기한 상태에서 그저 그림이 좋아서 그릴뿐이며 나아가 자신에게 절실한 소통의 욕구에 끌려서 사람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기 위해서 작업을 하지 그 이외에 어떠한 세속적 욕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림을 그리는 일을 두려워한다. 그러니까 작업하는 일에 완벽하게 자신을 던지지만 동시에 그 모든 일을 무로 돌려버릴 줄 아는 그들은 낙관도 절망도 없이 그 경계에서 평심을 유지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자신의 작업이 결국 주어진 삶에서 잠깐인연을 맺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밖에는 잘하는 게 없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작업에 임하는 자들이다. 이런 무심함과 겸손함 속에서 결국 작업은 과하거나 넘치지 않고 또는 신비주의나 허황한 예술지상주의로 전락하지도 않으면서 정확하고 예리하게 몸을 내민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과 시도야말로 삶을 창조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이자 예술가의 전제조건이었던 것 같다. 이들에게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하여 생을 바치는 각오이고 생에 대한 치열함이다. 그것이 그들의 윤리다. 자신의 삶의 리얼리티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이 얽힌 것이 그들의 그림/작업이다. 결국 작업은 자신이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것, 작업하는 것은 사는 것에 다름아니며 표현하지 않고 존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들에게 미술행위는 자신과 삶을 온전하게 표현하기 위한 도구에 다름아니다. -------------------------------------------------------------------------------------
1 알란 보우니스, 예술가는 어떻게 성공하는가?, 하계훈 옮김, 조형교육, 2001, 13쪽
2 윤나지 엮음, 전시의 담론, 눈빛, 2002, 참조
3 브랜든 테일러,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리얼리즘, 김수기. 김진송 역, 시각과 언어, 1993, 92쪽
4 심상용, 현대미술의 욕망과 상실, 현대미학사, 1999, 16쪽
5 심상용, 같은 책, 20쪽
6 심상용, 명품의 권력과 빈곤 바라보기, 그리고 귀한 비판정신의 진원지로 한 발 더 나아가기, 미술세계, 2005, 4, 62쪽
7 전영백, 서울아트가이드, 2008,12
8 박영택, 예술가로 산다는 것, 마음산책, 199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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