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테러의 희생자들을 담은 보도사진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이보람의 그림들이 시작된 것은 2003년 이라크 전쟁이 발발한 해다. 비록 부드럽고 달콤한 색상으로 각색되었어도 무차별적으로 피범벅 된 잔혹성은 그다지 여과되지 않는 듯 보인다. 잔인한 현실을 감추는 역설어법에 의해 비극은 더 큰 울림을 낳는다. ‘bleeding pink’(전시부제)는 말 그대로 ‘분홍을 피처럼 흘리고 있는’, ‘끔찍한 분홍’을 보여준다. 현실성을 삭감하는 분홍 색 뿐 아니라 본래의 소재를 완전히 재구성한 방식에 의해 작품은 환상적으로 보이지만, 이 최초의 참조대상이 현실 속에서 벌어진 사건이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폭력으로 난장판이 된 장소들은 대개 이라크, 러시아, 인도 등 비서구 국가들이며, 보도 사진이 유통되는 곳은 인터넷 같은 ‘진보된’ 사회의 매체들이다. 사건들이 일어난 장소와 그것이 선정적으로 소비되는 장소 사이에 벌어진 차이는 폭력의 실체를 암시해준다. 원인이야 어쨌든 지옥 같은 저 풍경은 지금 여기의 평화로운 일상과는 거리가 있고, 사건의 진상이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어마어마할수록 이러한 거리감을 통해 가공할 만한 폭력은 숭고미에 의거하는 쾌락까지 자아낸다. 테러와 숭고는 매혹과 혐오라는 모순적 정조가 공존한다는 점에서 연결된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이러한 정조를 만들어내는 것은 경외와 테러이다. 그것은 숭고가 ‘우리가 평소에 중요하게 여기는 부, 건강, 생명 같은 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힘’을 불러일으키며, 특히 ‘전체주의적이며 테러리즘적인 이데올로기’가 그러하다고 말한다. 아렌트는 가장 나쁜 것은 정치적 숭고가 상상과 현실을 구분할 수 있는 당대 시민의 능력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리처드 커니는 [이방인, 신, 괴물 ]에서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숭고는 ‘한계 없음의 재현’(칸트)과 관계된다고 지적한다. 미를 이해하는 것에서 느끼는 긍정적 쾌락과는 달리, 숭고는 어떤 혐오감과 결합된 매혹이라는 부정적 쾌락을 불러일으킨다. 더군다나 그것은 모순적인 쾌락으로 오로지 간접적으로 발생할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형체 없는 위협으로부터 거리를 확보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외부의 고통이 내부의 쾌락으로 변화한다. 숭고는 세계로부터 물러나 자신에게로 되돌아온 상상력이다. 숭고는 ‘우리가 안전한 위치에 있다면 그 광경들이 더욱 공포스러울수록 오히려 더욱더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그것들이 세속적인 진부함 너머에 있는 영혼의 힘을 이끌어내고, 우리 안에 있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저항력을 발견해’(칸트) 낸다. 오늘날 이러한 거리두기 장치 중의 유력한 수단 중의 하나는 대중 매체이다.
이보람의 작품에서 활용된 보도사진들은 관음증을 불러일으키는 영화 같은 방식으로 소비된다. 그곳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작가는 전쟁과 테러 관련 보도 사진을 정밀하게 수집하고 분류한다. 그러나 최종 작품에서 피비린내 나는 사건의 구체적 맥락은 사라지는데, 그것은 매체가 테러를 소비하는 방식이자, 이를 소재로 하는 예술가의 작업에서도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소통구조에 대해 작가는 양심의 가책과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으며, 그것이 작품내용의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작품 속 모든 것을 초토화 시키는 거대한 버섯구름은 게임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으며, 희생자들은 석고상 같은 모습으로, 사건의 관찰자들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한 인형 같은 존재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무덤덤한 양상은 곧바로 뒤집힌다. 파스텔 색조를 가로지르는 무채색 버섯구름이나 연기가 나타내는 급작스런 난입, 고통의 극에 달하여 일그러진 모습 그대로 석화되어 버린 희생자들, 인형의 파편으로 물화된 대중들은 폭력이 벌어지는 현장의 이편과 저편을 굳이 나눌 수 없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심지어는 작품 [작업실의 희생자]처럼, 세상사와 떨어져 홀로 작업하는 화가의 공간이 전쟁터와 중첩이 되기도 한다. 화면 한 편에는 불발탄처럼 세워진 폭탄이, 다른 한 편에는 분홍 물감 통이 얹혀있는 작업실 비품이 공존하는 것이다.
파괴와 죽음의 장소는 분홍색조로 조율되고 희생자는 생사를 넘나드는 치열한 현장과 달리 무대나 제단 위에 성스럽게 배열되며, 이 엄청난 장면을 지켜보는 눈은 미동도 없이 고요하다. 눈의 표정을 만드는 것은 버티칼 같은 작은 가림 막과 종종 흘러내리는 분홍 액체이다. 이보람의 많은 작품에서 그림 속의 그림이나 윈도 창에 띄워진 또 하나의 작은 창처럼 장면을 바라보는 눈이 그려져 있다. 희생자를 바라보는 (작가를 포함한)대중들의 시선은 장면과 섞이지 않으며, 중성적인 공간을 차지한다. 그것은 사건의 추이에 아무런 영향을 줄 수 없는 무기력한 시선, 심지어는 무료한 일상을 아늑한 평화로 안심시켜주는 저 머나먼 세상의 재난과 혼돈을 소비하는 방식을 예시한다. 무한한 소비를 통해 무한한 생산을 독려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쟁마저도 주요한 사업--재난에 관한 뉴스를 생산하는 미디어 산업, 막대한 무기산업, 초토화 된 식민국가에서의 재건사업, 심지어는 원조 경제까지에 이르는--일 수 있기에, 이 거리감 있는 시선들은 폭력의 동조자 및 폭력의 확대 재생산자라는 혐의를 벗어날 수 없다. 이보람의 작업이 그림을 통해서 재난을 또다시 대상화하는 것을 벗어나는 지점은 의식적으로 도입된 시선의 정치학에 있다. 또 하나의 장치는 잘려져 배열된 손가락들인데, 이 손가락들은 하나같이 사건의 현장을 가리키고 있지만, 뭘 바라보는지 모르는 눈동자와 더불어 군중의 맹목적인 미디어 소비패턴을 암시한다. 다소간 기계적인 배열을 가지는 손가락은 재난 기사를 클릭하는 대중들의 무심한 호기심을 보여주는 듯하다.

미디어는 현실 속에서 일어난 파국적인 사태를 코드화한다. 형언할 수 없을 만큼의 사건을 소비 가능한 패턴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몇 개의 전형적인 범주로 묶인다. 이보람이 관찰한 바로는 ‘서로 다른 다양하고 개별적인 상황에 놓인 희생자들은 그들이 흘리고 있는 붉은 피 때문에, 희생자, 고통, 슬픔과 같이 단순화된 카테고리’로 묶여버린다. 작가는 또한 기사에 많이 나오는 단어들--참혹한, 피 흘리는, 끔찍한, 용케 살아난, 어처구니없는, 혈혈단신의--을 수집한다. 2007년의 작품 [‘죽어가는’, ‘오열하는’ 그리기], [‘고통스러워하는’ 그리기]는 쓰러진 사람 위에 입을 막고 우는 여인과 아이 얼굴을 감싸는 손을 그린 그림이다. 물감자국과 핏자국, 총격자국 같은 얼룩들이 중첩된 화면에 배치된 어린 희생자를 애도하는 전형적인 슬픔의 장면은 여인의 이국적인 머플러가 보여주듯, 저 머나먼 곳에서 자행된 일이다. 작품 [‘죽어가는’, ‘오열하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리기]는 앞의 두 작품을 연결하고 거대한 잘린 손이미지와 손가락 조각을 나란히 배열함으로서, 대중들에게 실제로 일어난 재난을 한층 더 가깝게 제시하지만, 작품 [‘고통스러워하는’ 그리기]를 반복해서 배열한 방식은 미디어의 상투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타인의 고통을 지나치게 자세하게 재현하고 이를 무한히 반복하는 방식은 저곳에서 일어나는 실제의 폭격에 상응하는 미디어의 폭격이라 할 만하다.
이보람의 작품에서 대부분의 유색인종이었을 희생자들은 석고상처럼 탈색되어 있고, 그들의 희생을 증거 하는 피만이 본래의 형태와 색채를 유지한다. 아이보리 색 석고상으로 약화된 피부색에 이리저리 튀기고 번지는 핏방울은 정교한 묘사는 매우 자극적이며, 작품마다 변형되면서 반복되는 이 모티브에서 은근한 잔혹취미도 엿볼 수 있다. 밀봉되어 있거나 때로 구상적인 면모가 드러난 석고상 같은 형태는 생명체보다 물리적인 파괴력에 더욱 취약한 듯 보인다. 석고상 같은 정교한 명암법으로 재현된 희생자들은 빛을 받는 무대의 중앙에 배치되면서 피에타나 성모상 같은 위상을 가지기도 한다. 이점에서 이보람의 그림은 다큐멘타리나 역사화 보다는 종교화에 가깝다. 다만 그것은 종교가 불가능해 보이는 시대에 등장한 비극적 종교화이다. 유화와 아크릴로 그려진 [희생자-descending] 시리즈는 희생양의 신화를 지속하고 발전시킨 기독교의 주제를 연상시킨다. 이 시리즈에는 무대 가운데서 모명을 받는 피에 얼룩진 석고상 같은 도상 외에 화면을 찌르고 나오는 갈고리, 위로 향하는 붓들, 인형 머리들, 주시하는 눈, 한 방향을 가리키는 손가락 더미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이러한 상징적 도상들을 조합함으로서 믿기 어려운 폭력이 횡행하는 현실을 연극화 된 현실로 전환시킨다. 상징적 도상들은 그저 상징의 담지자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형태를 다양한 각도로 배치하는 방식을 통해 동적인 느낌을 부여한다. 가령 서있는 붓들, 인형의 머리통, 손가락들에는 반복적인 형태가 주는 운동감이 있다. 그림의 형식으로 사진이나 동영상 등에 전형적인 방식을 수렴하고 있는 것이다,
상징적 도상들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희생자를 옮기는 동료들의 일거수일투족과 표정을 꽤 자세하게 모사한 것부터,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는 뭉글뭉글한 분홍주머니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다. 분홍주머니는 살코기처럼 갈고리에 걸려 있거나, 터져버려 무대 아래로 흘러내리는 듯한 모습이다. 분홍은 피부색이나 피의 색과의 근접성으로 인해 유기적 개체가 덩어리로 해체된 모습을 연상시키며, 그것의 범람은 형언할 수 없는 현실의 폭력을 은유한다. 동시에 같은 형상으로 갈고리에 걸린 분홍주머니는 매체가 떠주는 대로 받아먹는 대중들의 무비판적인 태도를 상징한다. 분홍 자체가 죽음을 연상 시키는 붉은 색이 약화된 색으로, 생경한 현실을 감추는 달콤한 포장 막 같은 모습이다. ‘십자가에서 내려짐’이라는 전통적인 도상이 떠오르는 이 시리즈는 테러리즘적인 숭고와 종교적 숭고가 중첩되는 대목이다. 무대 아래에는 살짝 웃음 지으며 눈도 없는 똑같은 표정의 인형들 머리가 흩어져 있다. 그것은 희생자 맞은편에 존재하는, 작가를 포함한 잔혹극의 관중들이다. 인형들은 슬픔과 고통을 상징하는 푸른 색 머리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이마저도 곧 탈색되어 버린다.
그것은 무엇을 보고 있으며 뭘 슬퍼하는지 알 수 없는 대중들을 상징한다. 클론처럼 보이는 이 군중들과 마찬가지로 희생자는 익명적이다. 그러나 군중과 달리, 희생자를 익명적으로 처리한 것은 일종의 윤리적인 태도라고 보여 진다. 지배적인 대중매체에서 살아있거나 죽은 제 3세계의 인간들에게 초상권은 보장되지 않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 소비자인 관중을 향해 적나라하게 드러나곤 하는 희생자의 얼굴은 희생된 타자에 대한 또 다른 폭력이다. 눈은 안 그리고 코와 입만 있는 희생자의 익명성적 처리는 윤리적인 태도이자, 현실을 비현실화 시키는 미학적인 태도, 요컨대 구체성을 보편성으로 전환시키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러한 미학적 거리감은 매 순간 소비 되는 뉴스 자체에 내장된 ‘지금의 나와 관계없음’의 방식이기도 하다. 재난의 현장 바깥에 존재하는 대중들은 저곳에 벌어지는 폭력을 정보화된 형태로 소비하면서 자신이 무관하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양심의 가책과 동시에 안도감을 느낀다. 희생된 자들에게 가해진 폭력을 통해 사회는 질서를 되찾으며, 희생으로부터 면제된 군중들에게 일상적 삶을 부여한다. 특히 이보람의 작품에서 제단 위에 배열된 듯한 사건의 모티브들은 고대 이래로 인류사에 존재해 왔던 희생양의 메카니즘을 예시한다. 이러한 기제에서 이단적 괴물로 억압받아 살해된 희생자는 영웅이 되기도 한다. 희생양 신화의 진보된 버전인 기독교가 그 예이다. 가령 작품 [희생자-body wrapped]에서는 버섯구름 위에 천에 싸인 시신이 승천하듯이 배치되어 있다.

피 흘리는 희생을 볼만한 것으로 포장하거나 약화시키는 분홍은 대중이나 매체의 위선 뿐 아니라, 현실과 일정정도 거리를 둘 수밖에 없는 화가의 자의식과도 연관된다. 화가에게 그림은 세상을 보는 창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이자, 타자와 접촉하는 인터페이스가 된다. 분홍 물감이 주렁주렁 맺혀있는 도상은 물론 화폭 옆으로 까지 줄줄 흘러내리는 분홍색은 피 이면서 물감이다. 분홍은 중간 색조의 부드러움을 가지며 인간의 피부를 닮았다. 에바 헬러는 [색의 유혹]에서 인간의 피부색을 회화에서 ‘inkarnat’라고 부른다는 것을 상기시키면서, 이 개념은 육화(肉化)를 뜻하는 inkarnation에서 기원한다고 말한다. 이보람의 작품에서 분홍은 비현실적이거나 상업적인 색이자 육화의 상징이라는 이중성을 가진다. 붉은 색을 묻힌 붓들은 사람처럼 벌떡 일어나서 희생자들을 기념하거나 또 다른 희생자로 만들어 버린다. 공격적으로 세워진 붓들은 희생자의 상처를 보듬기 보다는 창처럼 찌르면서 상처를 덧내는 듯하다. 작가는 ‘붓털의 붉은 색들로 인해 마치 그것들이 희생자들을 찔러 피를 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엔 나의 불편함과 죄책감이 담겨 있다’고 하면서, ‘나는 그것을 그림으로 붙들어 놓았을 뿐이다. 나의 작업은 전쟁이나 테러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 대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보람은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사회의 폭력에 그 누구도 배제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자신의 작업 깊숙이--단지 소재주의를 넘어, 세계에 대한 어떤 태도와 연관된다는 점에서--까지 끌어들인다.
타인의 고통을 상징적으로 재현하는 작품들은 형식적인 면에서 사진과 회화 사이에 걸쳐 있으며, 희생양이라는 신화적이고도 종교적인 주제와 연관된다.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에서 모든 문화를 초월하여 집단적 폭력의 도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하려 한다. 그에 의하면 집단적 폭력에 대한 구전자료나 기록들은 첫 번째로 사회 문화적 위기, 즉 전면적인 무차별화에 대한 묘사, 두 번째로 무차별화의 범죄, 세 번째로 범죄 용의자들이 희생물로 선택될 징후나 무차별화의 역설적인 지표를 다 같이 포함하고 있다. 한 사회를 이루는 집단은 특정한 희생양에 대한 폭력을 만장일치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집단적 박해에서 나타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사회적인 것의 근본적인 소멸과 문화적 질서를 규정하는 차이들과 규칙의 소멸이다. 문화적인 것의 소멸 앞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무능을 느끼게 된다. 문명은 이러한 폭력적 질서 위에서 세워지고 이는 고대 이래로 크게 달라진 바가 없다. 오늘날 서구 제국의 중심이 되어 세계 경찰을 자임하는 미국은 아메리카 원주민과 흑인노예, 공산주의자에 이어 아랍권으로 희생양으로 삼고 있다. 선악을 분명히 구별하는 근본주의가 또 다른 근본주의를 향해 벌인 ‘대테러 전쟁’의 장이 바로 서구 문명과 대척점에 놓여 진 아랍권이다. 아랍권의 저항은 911 같은 엄청난 테러를 낳았고, 자국 내 안보 이데올로기가 가동되면서, 일상 역시 준 전시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 세기말 이후의 묵시론적 풍경이다.
전쟁과 테러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즉 하나의 질서를 강요하는 제국의 입장이 격돌하는 현장이다. 타자를 인정하지 않는 동일자의 폭력은 한 사회 내부에도 작동하고 있으며, 그것이 먼 이국에서 일어난 테러에 잠재의식적으로 불안과 위기감을 느끼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한사회의 신화와 종교, 정치 이데올로기를 관통하는 희생양의 메카니즘은 단지 정신의 구조와 관련을 맺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리처드 커니는 [이방인, 신, 괴물]에서 희생양의 메커니즘은 단지 신화적 판타지라기보다는, 피와 살점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희생양을 통해서 한 무리는 질서를 되찾지만, 희생양을 만드는 기제는 무차별적 혼돈을 내포하고 있다. 이보람의 작품에서 폭력의 무차별화는 분홍 주머니들이나 인형머리들, 석고상 같은 도상들처럼 차이의 체계로서의 신체적 개체를 해체 시킨다. 그녀의 작품에서 폭력이 자행되는 곳은 ‘이방인’들의 영역이다. 이방인들은 희생양이 된다. 리처드 커니는 죄악의 전염이라는 위험을 제거하면서 사회 내부적 죄악들을 뒤집어쓰고 황무지로 내쫒기는 것은 염소의 역할이었는데, 오늘날 희생양은 다시 인간이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나안 사람, 기독교도, 유대인, 이교도, 이단자, 그리고 식민주의 제국들에 의해 신대륙이 발견된 이후부터는 개종하지 않은 야만인들로 알려진 사람들에게까지 희생염소의 역할을 다시 인간이 맡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람의 작품에서 한 사회의 동질성의 확보와 유지를 위해 필요한 희생양은 이방인일 뿐 아니라, 우리와 자신 내부에도 존재하는 것이다. 크리스테바는 [우리 안의 이방인]에서 스스로가 이방인이라는 낯선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외국인 혐오증이 생겨난다고 지적한다. 자기 안에 있는 타자는 주체의 분열과 ‘기묘한 낯설음uncanny’(프로이트)을 자아낸다. 예를 들어 이보람의 작품에서 클론 같은 인형머리들은 대중으로서의 자신이기도 한데, 그것은 분열된 존재이자, 낯선 타자로서의 주체에 대한 무한 반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안의 타자를 불러일으키는 화면들은 사진사의 의도와 명확히 일치할 수 없는 사진의 메카니즘에 의거한다. 특히 사진은 죽음이라는 타자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다.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고통의 도상학의 오랜 전통을 논한다. 그녀에 의하면 재현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고통은 신이나 인간의 분노가 낳은 것이라고 생각되는 고통이다. 고통 받는 육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은 나체가 찍힌 사진을 보려는 욕망만큼이나 격렬한 것이다. 수세기 동안 기독교 예술을 지옥의 묘사를 통해서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욕망을 모두 충족시켰다. 특히 이교도 신화는 만인의 취향에 알맞은 이야기를 기독교 전설보다 훨씬 더 많이 제공했다. 이러한 잔혹함을 재현한다고 도덕적 비난을 받지는 않았다. 단지 도발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어서 수전 손택은 카메라가 발명된 1839년이래로 사진은 죽음을 길동무로 삼아왔다고 지적한다. 카메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말 그대로 렌즈 앞에 놓인 그 무엇인가의 흔적이었기 때문에 사진은 사라져 간 과거와 떠나간 사람을 추억케 해주는데 있어서 어떤 그림보다도 탁월했다. 실제로 발생한 죽음을 포착해 그 죽음을 영원히 잊혀지지 않게 만드는 일은 오직 카메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리고 죽음의 순간(혹은 바로 그 직전)에서 곧바로 찍어낸 사진들은 가장 자주 재생산되는 전쟁사진들 중의 하나이다. 전쟁사진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와 총을 쏘는 행위는 ‘shot’이라는 공통의 단어로 수렴된다. 사진 자체가 내포하는 공격성에 미디어 산업의 조작이 가세한다. 오늘날 화가는 미디어 산업의 조작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진을 활용하곤 한다. 이보람에게 사진과 회화의 극적 차이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색채이다. 붉은 선혈이 캔버스의 하얀 바탕과 만나면서 만들어졌을지 모르는 분홍은 피라는 실제와 캔버스라는 또 다른 실재가 결합하여 만든 환상적인 산물로 보여 진다. 두 개의 현실이 부딪혀 강한 환상을 만들어내고, 이 환상은 다시금 또 다른 차원의 현실을 지시한다. 현실이 신화가 되고, 신화가 다시 현실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인간사회에서 희생양을 만들어내는 폭력의 재생산 과정과 닮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