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양유연; 꿈과 무의식의 무대
양유연의 작품들은 마치 작가의 무의식과 꿈으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보인다. 가령 [감정의 무대]와 [절단된 풍경]로 분류된 작품들은 무대와 풍경의 면모를 보인다. 무의식과 꿈은 별천지의 세계라기보다는, 의식과 현실을 해체해서 재구성한 장면에 가깝다. 응축된 장면들은 환상적으로 보이지만, 현실에서 느꼈을 법한 감정, 희열, 욕망들이 드러나 있다. 작가 말대로, 그것들은 삶의 흔적이자 감정의 결정체들인 셈이다. 장면을 만드는 무대와 풍경에는 주인공이라고 할 캐릭터가 등장한다. 이 캐릭터들은 자아의 대역이지만, 타자들과 자리를 바꿀 수 있을 만큼 보편적 공감대를 자아낸다. 사춘기적인 감수성이 아직 남아있는 이 작품들은 차갑고 낯설게 다가오는 세상에서 겪었을 법한 상처와 충격이 담겨 있다. 캐릭터는 동공이 없는 가면의 형상으로 변형되며, 밖으로 뚫린 신체의 구멍들에는 심리적이고 육체적인 공황상태에서 출몰하는 눈물, 콧물, 피 같은 분비물이 범람한다. 격변 중인 감정의 상태는 바람 부는 사막 같은 황량한 풍경으로 전치되곤 한다. 여러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회귀하는 가면들은 억압된 욕망을 현시한다.
가면은 정체성을 고정시키면서도 변화시킨다. 가면은 작가의 또 다른 얼굴이지만, 작품에는 풍경화 된 가면을 바라보는 소녀상들이 존재한다. 자신을 바라보는 또 다른 자신이라는 분열적 이미지는 [절단된 풍경]으로 분류된 작품 군에서도 나타난다. 잘린 손으로 만들어진 풍경은 몸 전체를 환유한다. 몸 일부가 전체를 나타내는 것은 정신분열증의 특징이기도 하다. 또한 정신분석학은 꿈속에 등장하는 모든 사물들을 자아의 일부라고 해석한다. 분신들이 절단된 신체로 이합집산 하면서 주체가 잠겨있는 감정의 상태를 전달한다. 잘려져 있으나 화초처럼 자라나는 손이 있는가 하면, 마법으로 인해 안전을 보장 받아야할 마술 상자 속의 토막 난 소녀는 정말로 피가 흐른다. 꿈과 무의식의 무대인 양유연의 작품은 고전적인 초현실주의와 달리, 서로 구별되는 두 세계 간의 종합이나 화해가 일어나지 않는다. 물화된 채 기괴하게 굳어있는 가면은 뒤에 감추어진 얼굴을 결코 보여줄 것 같지 않으며, 자아가 투사된 또 다른 캐릭터인 소녀가 작아질수록 거대해지는 듯하다. 거대한 가면들로 채워진 사막 같은 풍경은 위협적이고 낯설게 다가오는 세계의 얼굴이며, 작가는 그림 그리기를 통해 자기 보호막을 치려한다.
2. 이후창; 욕망으로 불투명해진 유리 인간들
조소와 유리 조형을 모두 전공한 드문 경우인 이후창은 유리라는 매체가 가지는 고유의 특성을 최대한 활용하면서도 장식이나 쓰임에 치중하는 공예에 머물지 않는다. 그의 작품은 전체적으로는 조각이지만, 유리가 가지는 매체의 속성으로 인해 기념비적인 하나의 덩어리를 유지하면서도, 내부로 접혀지는 또 하나의 형태와 빛을 머금은 색채 연출이 특징이다. 그가 [상실의 시대]에서 주목하는 ‘상실’은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 관계로 생겨난 인간 정체성과 고유성의 상실을 말한다. 전반적으로 인간의 사물화, 자연의 상품화로 특징지어 진다. 사물화와 상품화의 조건은 유기적 전체로부터 유린된 파편들이다. 죽음의 표본들이라 할 만한 이러한 파편들은 상실감을 낳지만, 그의 작품에서 이 상실감은 종종 오묘한 아름다움으로 전화되곤 한다. 길쭉하게 변형된 얼굴은 우수에 잠겨 있곤 하지만, 동시에 원시가면 같기도 한 이 마스크들은 제어할 수 없는 광기를 내비친다. 거기에는 유리라는 매체의 특수성을 통해 드러나는 또 다른 얼굴의 응시가 있다. 그것은 동일자 내부의 타자이다. 그것은 내부의 타자를 넘어서, ‘타자로서 자기 자신’(폴 리꾀르)을 향한다.
[타자의 시선] 시리즈는 세계를 보는 주체, 그리고 보여 지는 대상으로서 주체라는 이중적 시선이 공존한다. 미묘한 시선의 유희를 가능하게 하는 차원, 그리고 볼 수 없는 것을 보게 하는 형식적 특성은, 부피를 유지하는 단단한 겉면과, 액체처럼 속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유리 캐스팅 기법에 힘입은 바 크다. 그것은 견고한 외곽선을 가지면서도, 빛을 투과하는 성질로 인해 자아와 주체 내부에서 일어나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공간을 보여줄 수 있다. 인간 상 내부에 흐르는 물결무늬는 인간이라는 소우주에서 망망대해 같은 대우주를 교차시키기도 하고, 색상에 따라 감정의 분출과 흐름, 고임 같은 이미지를 주기도 한다. 인간에게 타자는 어머니와 언어로 다가온다. 언어 또한 타자로서의 어머니처럼, 메워질 수 없는 균열들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은 타자(어머니)에 의존하고 타자(상징적 언어라는 부계적 영역)에 의해 규정될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이 타자들과는 합일 될 수 없는 차이가 존재한다. 그래서 욕망은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다. 이후창의 작품에서 욕망의 흐름은 시선의 흐름과 밀접하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는 ‘타자의 시선’은 ‘바라봄과 보여짐의 엇갈림’이라는 라캉 식 주제를 도입하면서, 상실과 소외를 넘어 욕망하는 인간을 무대 위에 올린다.
3. 전희경;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욕망의 기표들
전희경의 작품에는 인간의 외형이 있지만, 사지가 절단되고 그 자리에서 다시 돋아난 촉수들로 가득한 ‘유기체’들이 꾸물거린다. 작품이 진행되면서 인간의 테두리는 사라지고 오직 촉수만이 부각된다. 무엇인가를 향하여 촉수를 뻗는 움직임에는 욕망이 전제되어 있고, 이 욕망은 또 다른 적대적인 힘에 의해 절단되면서, 욕망의 충족이 좌절되거나 유예된다. 잘려도 잘려도 자라나기를 반복하는 촉수들은 욕망의 집요함, 또는 완전한 욕망 충족의 불가능성을 알려주는 듯하다. 분업화를 넘어서 극도의 파편화를 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하나의 유기체는 기관들 간의 총체적인 조화를 갖추기 힘들다. 작가 말대로, 사회는 머리만, 발만, 팔만 발달시키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부분들을 관장하는 힘은 개체 외부에 존재하는 듯하다. 자율적이지 못한 개체가 바로 전희경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촉수인간들이다. 이 욕망의 기표들은 굳이 인간으로 간주될 필요조차 없는 듯이 보인다. 자족기능을 상실한 파편화된 개체들은 다른 모든 것들과 연결되고자 또다시 촉수를 뻗는다. 여기에서는 모든 것들이 모든 것과 연결되어 내부와 외부를 굳이 구별할 수도 없는 복합적 이질체로 전이된다.
그림이든 오브제이든, 전희경의 모든 작품은 미소한 존재들이 바글바글하며 기원과 목적을 알 수 없는 욕망의 흐름에 따라 이합집산 한다. 여기에서 분열과 증식의 이미지는 절단의 이미지와 상보적이다. 돋아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절단 역시 욕망이 주관한다. 절단은 새로운 돋아남과 새로운 연결을 위한 기저 면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할 수 있는 것(개인의 욕망)과 해야만 하는 것(사회의 욕망) 사이에서 고민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해야만 하는 것의 비중이 높아지는 시기에 압박을 느끼고 있다. 또한 해야만 하는 것에만 매몰 되어 있는 현대인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은 목표지향적인 사회의 요구가 상징화된 구조물이다. 여기에는 촉수들이 절단되어 분출된 피들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개인의 욕망과 사회의 욕망이 명확히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절단과 생성이 반복되면서 허구적인 자아의 총체성을 파괴하고, 개체를 초월한 연결망을 형성하는 존재들이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욕망으로 충전된 개체들은 화려한 색채와 복잡다기한 형태가 주는 활기는 사회와 개인을 대립시키면서, 욕망을 부정과 억압으로만 간주하는 사고방식을 이미 넘어서고 있는 듯하다.

4. 류노아; 의미화로부터 탈주하는 기표
류노아의 작품은 화면을 가득 채운 채 쇄도하는 이미지가 특징적이다. 이미지와 이미지는 맞부딪히며, 모순되는 상황이 해결되지 않은 채 병렬된다. 그는 무의식의 저장고에서 아이콘을 하나씩 호출한다. 화면 속 이미들은 대기 원근법이나 선 원근법 같은 위계적인 관계로 정리되지 않아 혼란스럽다. 하나의 윈도 창을 띄워놓고, 또 다른 윈도 창들을 계속 불러들이는 방식에 의해, 가까이 있는 것이나 멀리 있는 것이나 동일한 선명도를 가진다. 그의 작품은 하나의 개념을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는 강력한 장면을 중심으로 다른 이미지들을 부가하는 식이다. 꼬리를 무는 이미지들의 연쇄 역시 명확한 의미의 그물망을 형성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미지의 범람에 대해, 작가는 과도하게 생각하지만 줄여지지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더 많이 그려 넣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의 호출이 완전히 무차별적인 것은 아니다. 작품에 주로 출몰하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 불편함과 부담되는 것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학교 폭력부터 핵무기 전쟁에 이르는 인간들 간의 억압적이고 파국적 권력관계, 그리고 인간의 개별적 삶을 거대한 체계의 유용한 부속품으로 환원하는 구조 등이 그것이다.
그를 불편하게 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동인은 개념화되는 현대미술이다. 작품 [미술게임]은 개념미술을 통해 현대미술의 시조가 된 뒤샹과의 대결을 그린 것인데, 모나리자 콧수염을 단 뒤샹은 장면을 지배하는 주인공으로, 연필을 들고 있는 초라한 작가에게 ‘네가 계속 게임을 할 거냐?’고 다그친다. 훌륭한 예술에 대한 상징적 기표로 파라마운트사의 로고를 불러들여 현대 예술의 규범화에 대해 풍자하기도 한다. 류노아의 작품은 정합적인 방식으로만 말을 해야 하는 주체의 고통이 드러난다. 그의 작품은 기표로 얽혀 있는 인간의 심리나 언어에 구멍이 나있음을 예시한다. 상징계를 지배하는 핵심적이고 기본적인 기표가 사라짐으로 인해, 주체와 기표의 관계가 혼돈에 빠진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정신분열적 증후를 보여준다. 그러나 현대 언어의 조건 자체가 분열적이다. 분열의 기원은, 인간이 태어나서 언어를 배울 때 의미가 아니라 비(非)의미, 즉 기표와 먼저 만나는 과정으로 소급된다. 기표는 애초부터 소외시키는 측면이 있다. 소외는 언어와 대상 간의 균열로 인해 야기된다. 라깡의 이론이 예시하듯이, 언어를 이루는 기의는 기표아래에서 미끌어짐으로서 고정되지 않는다. 기표와 기의 사이에 질러진 빗장이 풀리고, 기표는 대상이 아니라 다른 기표만을 지칭하게 된다. 진실은 이제 대상이나 의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기표와 기표 사이의 공간에 존재한다. 손이 가는대로 그리는 과정을 표현한 작품 [자동 손]처럼, 류노아는 사회의 억압적인 상징세계로부터 탈주하기 위해, 변화무쌍한 기표의 운동에 몸을 맡긴다.
5. 최유희; 무의식적인 쾌락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늬의 집합체처럼 보이는 최유희의 작품은 강도 있는 양의 전략으로 장식화의 위험을 피해가려 한다. 장식은 대개 소규모로 개인의 세계를 꾸며주는 역할을 하거나, 대규모인 경우에도 유기적인 질서 아래 복속된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은 장식처럼 아무 의미가 없는 단위들을 조합하면서도 전체를 일괄할 수 없는 규모로 확대되곤 하며, 구성요소들 간의 관계를 가늠할 수 없는 우연적인 연결망을 가동시킨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앙티 외디푸스]의 주제처럼, 이 연결망들은 즉석에서 만들어지며, 아무 것도 표상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기호화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다. 최유희의 작품은 저자들이 말한 ‘유목하는 욕망’처럼, 자기가 합류하는 온갖 성질의 진동들과 흐름들을 대상으로 하는 욕망을 보여준다. 항상 유목하며 이동하는 욕망이라는 현대 정신분석학의 주제는, 강제된 정지나 목적으로부터 탈주하려는 방식을 옹호한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오직 욕망만이 목표 없이 존재하면서 살아있다. 단편들이 무한대로 조합된 거대한 캔버스는 말 그대로 유목의 대지를 편련하는 욕망의 흐름을 보여준다. 가로 6미터에 가까운 크기의 캔버스에 매우 많은 추상적 형태와 색채를 구사한 작품의 경우, 그 규모 때문에 전체와 부분의 관계는 해체된다.
어떤 복잡한 외곽선과 무늬, 색채로 되어있든 간에 대부분 빽빽한 밀도로 평평하게 다가온다는 것은, 특정한 개념적 구성 원칙이 부족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무대 같이 공간감이 있는 작품도 있으나, 그 역시 다양한 패턴이 만들어낸 가상적 공간감이다. [위장된 중독] 시리즈는 hide(감추다)+holic(중독)이 연결된 것으로, 위장과 중독의 원초적 관계를 생각하게 한다. 자연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위장된 형태나 색채는 환경으로부터 개체를 쉽게 분리할 수 없음으로 인해, 보호막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주체와 객체가 분리불가능하게 얽혀 있는 상황에는 중독의 위험이 뒤따른다. 한편으로 그것은 달갑지 않은 현실과 대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도피하고픈 이들에게 현실 이탈의 쾌감을 자아낼 수 있다. 작가는 ‘세속적인 현실에서 억눌리고 괴로워하는 것들을 모두 벗어던지고, 이 공간 속으로 들어와 현기증 나는 이미지 속에서 알 수 없는 몽롱함의 상태로 인해 일시적인 착란 상태’로 이끌기를 원한다. 그것이 최유희가 생각하는 예술의 근본적인 즐거움이다. 그러나 무의식적 쾌락은 단순한 즐거움을 넘어, 고통과 죽음까지도 포함하는 열락(jouissance)을 향한다.
6. 범정; 취약한 상상적 경계를 범람하는 현실의 힘
범정은 [사진을 몸에 입기] 시리즈에서 말 그대로 사진을 몸에 입는다. 등신대의 2차원 상의 이미지가 실제에 걸쳐지기 위해서는 볼륨화 되어야 하는데, 이때 사진이라는 이상적 상은 실제에 의해 가차 없이 자신의 균열을 드러낸다. 작가는 사진적이면서도 조각적인 이러한 작품을 통해 이미지와 실재 사이의 간극을 극대화시킨다. 사진이 입체화되면서 생겨난 찢겨진 경계면들은 차원의 변조에 가해진 힘들을 느끼게 한다. 차원이 자연스럽게 전이되기 위해서는 균열과 간극이 메워져야 하는데, 작가는 그것을 그대로 노출함으로서, 거울상이라고 할 만한 사진적 반영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절단된 신체라는 진실을 부각시킨다. 라깡의 거울단계 이론이 말하듯이, 거울은 거짓된 자아의 통합 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사진을 입어 결국은 그것을 분열시키는 행위는 이상적 자아를 상상하게 하는 거울을 깨는 행위와 마찬가지이다. 자기 몸을 찍고 출력해서 그것을 입은 모습은 매우 기괴해 보이는데, 그것은 나르시시즘의 이상적인 면모의 이면이다. 작품 [자기만의 방]은 자신의 몸을 찍고, 그 사진 입은 후 다시 사진을 찍고 이를 파노라마로 회전시키는 좀 더 복잡한 단계를 거친다.
실제와의 균열을 드러낸 채 진행되는 연속적인 반사의 과정은 마치 거울의 방에서와 같은 혼란을 자아낸다. 오리처럼 땅을 파고 숨는 장면이 드러나 있는 작품은 상상적 자아에 갇힌 여성의 비극적 최후를 보여준다. 온 몸이 찢겨 땅 속으로 푹 꺼지는 것 같은 이러한 끔찍한 장면은 오로지 자기를 바라보는 시선에 얽힌 상상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다. 작가는 이 상상의 메카니즘을 더 드라마틱하게 극대화시키는 장치를 추가했을 뿐이다. 한편으로 거울상이 야기하는, 거짓된 통합 상의 기만성을 염두에 둔다면, 현실계(Real)에서 발원한, 질료화 된 충동적 육체의 범람은 카타르시스를 일으킨다. 그것은 상상(Imaginary)과 상징(Symbolic)에 아로새겨진 ‘경계와 차별과 차이의 질서’(크리스테바)를 와해시키기 때문이다. 범정의 또 하나의 작품군은 시선의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작가는 유명인들을 몰래 촬영한 파파라치 사진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내려 받아 사용하는데, 대부분 남성이 찍은 이러한 파파라치 사진에는 숨어있는 관찰자의 시선이 내재되어 있다. 스타들 역시 자신이 보여 지는 것을 의식하며, 남성 관찰자인 파파라치의 훔쳐보기에 가세하는 대중의 시선들이 교차된다. 이러한 시선의 그물망은 실제 몸에 걸친 사진처럼 균열이 가득하다. 결코 실재와 합치될 수 없는 그 균열들에는 채워지지 않아 갈증 나는 욕망들이 고여 있다. 고인 욕망이 자유롭게 흐르도록 모세 관 같은 수로를 내는 일이 예술가에게 남겨져 있다.
출전; 아르코 미술관 신진 작가 비평 워크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