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미 전 (2009.12.18-2010.1.8, 인터알리아)
김미형 전 (2010.1.4-1.16, 갤러리 담)한계 지워진 자연, 즉 정원이라는 형식에 작가가 창안한 피조물로 가득채운 이연미의 전시와 벌레 먹은 낙엽들을 모아 날개 모양으로 꼴라주한 김미형의 전시는 자연에 투사된 환상과 희망을 그려낸다. 이 두 여성 작가의 전시는 예술작품의 마르지 않는 원천인 자연으로부터 길어 올린 상상이 펼쳐지는 장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자연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베풀어주기만 하는 풍요롭고 선한 무엇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위악적인 도상으로 가득한 이연미의 자연에는 낙원에서 쫒겨난 무리들이 꿈꾸는 복락원의 드라마가 펼쳐지며, 김미형의 작품은 대자연의 순환에 의해 지상에 우뚝 선 존재로부터 떨궈져 나온 후 미시생태계로부터 또한번의 대대적 수탈을 당한 낙엽들이 날개형상으로 다시 뭉치면서 비상을 꿈꾼다. 이들의 작품은 관객이 대략 알아볼 수 있는 도상들로부터 출발하지만, 도상들의 선택과 수집 및 변형 과정에서 작가들의 강렬한 욕망과 의지의 세례를 받았다. 그것은 단지 눈을 즐겁게 하는 형태를 발명하고 형식적인 완결성을 꾀하는 미학의 문제를 넘어서, 현실의 난관을 견디고 돌파하기 위한 일종의 종교적 열망에 가까워진다.
두 작가의 세대가 다른 만큼 각자 맞딱뜨린 현실은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청소년기에 일본만화에 빠져 살았다는 81년생의 젊은 세대 이연미의 경우 즉물적으로 다가오는 현실의 권태로움과 싸워야 했을 것이며, 한세대 정도 앞선 김미형의 경우 결혼과 육아 등 여성이자 작가로서 당면했던 구체적 현실이 문제시 되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인간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현실 원리, 그것에 내재된 권태와 가혹함을 이기기 위한 다양한 시도, 가령 성공적인 도피나 돌파의 방식을 궁리하는 와중에서 문화와 예술이란 것이 생산되고 창조되는 것은 아닐까. 이연미의 작품에서 보호막을 둘러친 정원이라는 공간은 인류의 상상계에서 가장 오래된 정원으로 알려진 에덴을 모형으로 하지만, 그곳은 모든 것들이 다 충족되고 조화로운 천당 같은 면모가 없다. ‘불타는 정원’이라는 부제가 알려주듯이, 그곳은 대 재난에 직면한 정원이다. 대립되는 힘들 간의 투쟁이 벌어지는 정원은 천당을 지배하는 무료함 보다는 상이한 욕망으로 들끓는 지옥 같은 역동성이 두드러진다. 김미형 역시 고통과 전락이 지배적인 삶 속에서 발견한 자연의 단편들에서 의미 있는 형태를 발견한다.
이연미의 ‘불타는 정원’에 등장하는 기이한 도상과 사건들은 파스텔 톤으로 연하게 흐려져 있지만, 맞부딛히는 생경함의 강도는 줄어들지 않는다. 뒤에 햇살이 비치는 폐쇄된 공간은 순수의 결정체들이 감추어져 있는 미지의 대륙으로 보인다. 사나와 보이는 통통한 새가 그 앞을 지키고 있는데, 이 새들은 자신들만의 천국인 서식지가 인간들에 의해 오염되어 멸종되었다는 전설상의 새이다. 여기에서 인간들은 그 자체가 순수를 침해하는 불순한 것으로 다가온다. 공조와 상생보다는 경쟁과 침해가 압도적인 인간의 삶은 온통 원죄로 물들어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나무에 갇혀 있고 도도새는 불을 뿜는다. 날카로운 부리에서 뿜어진 불은 불꽃이 되어 정원에 흩날린다. 불꽃이 낙엽처럼 흩날리는 정원에 냉랭한 한기를 쏟아내는 것은 거대한 푸른 뱀이다. 악의 화신인 뱀은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판을 들쑤시고 다니며, 갈대밭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식물의 단면에는 피가 흘러나오고, 나무에 매달린 인간들은 처참한 광경을 무심하게 바라볼 뿐이다. 피 흘리는 식물 단면들 위에 떠 있는 돌 판을 그린 작품 [the burning stone]은 대 살육이 휩쓸고 지나간 대지처럼 피가 흥건하다. 연꽃이 떠 있는 소택지에서 순환되는 액체는 물이라기보다는 체액 같은 색과 밀도를 가진다. 이연미의 작품 속 식물들은 아픔과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동물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 인간을 비롯한 동물들은 나무 열매나 꽃같이 정박되어 있는 식물성을 띈다. 그것들은 하나의 씨앗에서 나온 식물처럼 모두 닮은꼴이며, 그저 물이나 양분이 통과하는 도관처럼 보인다. 나무에 붙잡힌 인간들이 흘러내리는 물로 정원의 불길을 잡는 것은 어림도 없기에 그들은 더욱 무력하다. 이 클론들은 속수무책 난감한 표정이다. 반면 동물성 식물들은 다리를 뻗어 여기저기로 이동한다. 여러 작품에 분산되어 나타나는 도상들이 모두 집결해 상호작용하는 대작 [the garden inferno]는 고통의 장소를 알레고리로 표현한다. 단테의 지옥 편을 떠오르게 하는 이 장면은 불과 물이라는 대조되는 상징이 뒤엉켜 있다. 이연미의 정원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반(反)자연적인 것들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평범한 자연을 따르지 않는다. 그녀의 정원에서 일어나는 것은 자연으로부터의 도약이거나 전락이다. 중성적이고 수동적인 자연과 현실을 극적인 것으로 변형시키는 것은 공상과 상상이다. 자연의 법칙과 삶의 규칙으로부터 일탈하는 향연은 매끄럽고 능숙한 표현방식을 빌어서 이 닫힌 정원을 히스테릭하고 매너리즘적인 인공낙원으로 변모시킨다.
자연, 특히 정원은 여성으로 간주되었다. 원초적 자연은 문명에 의해 상처받은 삶을 회귀시키는 천국으로 간주되지만, 그것은 동시에 죽음의 냄새를 풍긴다.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자연은 여성에게 부과된 양면성과 중첩된다. 자연과 여성에 대해 양면성을 투사했던 최초의 근대적 예술가로 보들레르가 꼽힌다. 보들레르 역시 인공낙원에 심취했던 예술가이다. 원죄로 온통 물들어 있는 자연과 여성은 매혹의 대상이자, 인간을 파멸로 이끌 수 있는 이중적인 본성을 가진다. 전락과 도약을 오고가는 이연미의 자연 역시 평범한 시민적, 또는 대중적 삶에 권태를 느끼며, 자신의 상상력을 매개로 심연과 무한에 심취하게 하는 신비한 수단이다. 근대는 이성에 의해 도구화된 자연을 무기력한 물질 덩어리이면서도 원초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는 미지의 대륙으로 변화시켰다. 저주받은 물질과 순수의 결정체라는 두 개념의 자연이 모더니즘에 스며든다. 이연미의 작품은 정보혁명을 통해 양적, 질적으로 확산되는 매체 계를 통해 모더니즘이 대중화 되면서 하위문화를 형성하였고, 이 하위문화의 세례를 받은 젊은 상상력들이 다시 예술과 조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90년대 말 탁구공 같은 균일한 인공물에 숨구멍을 뚫는 작업을 했던 김미형은 자신이 ‘뚫는 구멍보다 간절하고 더 극렬한 구멍을 목격했기 때문에’ 구멍 뚫는 작업을 포기했다고 밝힌다. 2000년 늦가을 무렵 그녀가 발견한 것은 벌레가 심하게 갉아먹은 낙엽이었다. 이렇게 자연이 만들어 놓은 천연 레이스가 김미형의 작품에 들어왔다. 이후 사루비아 다방이나 인사미술 공간 등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나뭇잎이나 곤충의 날개처럼, 자연의 섬세한 결이 살아있는 소재가 대부분이었다. 종이나 캔버스 등 밝은 바탕에 대면 엽맥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쇠락한 입새들은 이합 집산하여 형태를 이룬다. 그것들은 자신들이 추락한 것과 반대 방향의 비상을 향하여 또 다른 변태를 시도한다. 만지기도 조심스러운 나뭇잎들은 사람들로 붐비는 공원으로 조성되기 위해 베어지기까지, 작가에게 매해 자기 몸의 일부를 아낌없이 나주어 주었다. 처절하게 형해만 남은 나뭇잎에서 김미형은 ‘부처를 보았고 예수를 보았다’고 고백한다. 대부분 그 무렵 채집된 상수리 나뭇잎과 콩잎으로 재구성된 이번 작품들은 여러 모양의 날개들이다.
김미형의 작품에서 날개를 이루는 구성분자는 지상에 밀착한 존재이다. 그러나 무기력하게 가라앉아 있지만은 않는다. 그것들은 더 높이 날기 위해 얇게 붙은 살마저도 다 발라낸다. 지상의 존재들에게 모든 것을 나누어주고 자신은 더 없이 가볍다. 자신이 비롯된 저 곳으로의 비상을 위한 본질만 남겨둔 그것들은 서로 얽히고설켜 복잡한 그물망을 이룬다. 구멍 난 콩잎으로 만든 여성상과 초상은 당장이라도 부스러질 듯 취약하지만, 놀라운 섬세함으로 질긴 생명력을 유지한다. [찰나]라 붙여진 모든 작품 제목들은 순간을 영원으로 고정시킨다는 회화적 지향보다는, 덧없는 시간성에 방점을 찍는다. 시간은 모든 굳건한 존재들을 스러지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낙엽을 주워 작품을 창조하는 작가 자신이나 이를 관람하는 관객들 역시 낙엽과 같은 존재가 될 것임을 예감케 한다. 날개는 몸의 일부인 기관이 아니라, 몸 자체에 대한 비유가 된다. 그것은 저 멀리에 있는 자연적 대상이 아니라, 나의 몸속에 있는 비슷한 존재들, 가령 가늘게 뻗은 혈관계와 신경계의 존재를 일깨운다. 그것들은 최소의 중량에 최대의 표면적을 가능케 하는 기능적, 형태적 유사관계를 가진다. 그러나 낙엽처럼 모든 것을 비워낸 채 떠나가는 모든 존재들은 숙명적 비극으로만 다가오지 않는다.
김미형의 ‘찰나’전은 타자로 간주된 것들을 불러 모으는 장이다. 찰나의 순간에 부재와 죽음으로 간주된 타자와의 합일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에서 영원성보다는 순간성과 사라짐이, 초월보다는 구체성과 내재성이, 존재보다는 부재와 흔적이 두드러진다. 죽음과 소멸이 없으면 생명과 생성도 없다. 동일자와 타자라는 양 극단은 서로 꼬리를 물며 순환한다. 나무 잎새들 사이의 빈 공간은 헐벗음이나 모자람이라기보다는, 존재의 무게를 덜어내고 존재에 신선한 공기와 바람을 재충전하게 하는 무한히 수용기로 변화된다. 이러한 반전에 의해 밑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추락이 깊어질수록, 비상을 향한 염원도 더욱 절실하고 강렬해진다. 삶이 준 상처들은 서로 엉겨서 ‘찬란한 무늬’가 되고, 삶이 야기한 고통과 공포는 명징한 깨달음의 쾌락을 야기하며, 아래로의 묵직한 중력은 다시 튕겨나기 위한 에너지로 반전 된다. 이때 예술은 종교와 구별되지 않는다. 이연미와 김미형의 작품은 아름다움을 통한 구원이라는 모더니즘적 이상이 여성적 상상을 통해 또 다른 내용과 형식을 마련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자연에 투사된 근대적 이상은 여성 작가들에 의해 부정과 퇴폐(decadence)가 아닌, 긍정과 연민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출전: 아트 인 컬처 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