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와 만나는 몸1. Name강한 에너지를 내장한 단파장의 보라색은 시각적으로는 멀어 보이지만, 물리적으로는 관찰자에게 다가오는 색으로, 2008년 3회 개인전에 집중적으로 발표된 ‘네임’ 시리즈의 주조색이다. 네임 시리즈는 빠르고 강한 보라색 파장이 화면을 종횡으로 미끄러지듯이 가로지르면서 면을 구획한다. 검정에 가까운 보라와 그 주변에 섬세하게 음영 진 여러 계조의 보라색상이 일련의 강한 흐름을 만들며, 선의 교차방식에 따라 작품 제목으로 명명된 것(이름)에 걸 맞는 형상이 생성된다. 그것들은 ‘점 선 면’이라는 기초 조형 요소와 이름이라는 딱딱한 언어학적 문제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유려한 선의 흐름과 섬세한 색채의 계열이 특징적이다. 이주형은 칸딘스키의 주장과 달리, 점과 면을 구별하지 않으며 양자를 하나로 본다. 그에 의하면 선 역시 면이 일정한 방향성을 가지고 늘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올해 박영 갤러리에서 ‘name, another라는 부제로 전시된 작품 [super string](2008)이나 [원](2008)은 캔버스 틀에 의해 처음과 끝이 생략된 중간 과정을 전면화한다.
하얀 캔버스 표면을 가로지르는 다양한 두께의 선들은 ‘한 점에서 또 다른 점으로 가는 직선’, ‘직선이란 그 위에 있는 점들에 균등하게 가로놓인 선’ 등으로 규정된 유클리드의 점과 선에 대한 공리적 정의와 달리, 공간과 시간을 연장하는 연속체로 주체가 지각하는 현실을 표현한다. 고정된 점을 중심으로 수직 수평의 좌표계를 펼치는 유클리드적 공간은 원근법의 모델이 되면서 사실주의의 기조를 이루는 시각적 관습을 이루어왔고, 이러한 재현적 틀은 지시대상과 거리를 두는 추상미술에도 긴 그림자를 드리워왔다. 하나의 점으로부터 펼쳐지는 고전적 질서는 항구적인 안정성과 단일성, 그리고 인과율을 강요하는 합리적 체계이다. 그러나 미셀 세르가 [헤르메스]에서 주장하듯이, 점 밖에는 수많은 점이 있고, 평면 밖에는 다양체들의 열린 세계가 존재한다. 체계를 이루는 물체들은 결코 단 하나의 중심을 향해서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공간의 모든 분자에 의해 이끌리는 것이다. 고전적 기하학과 거리를 둔 이주형의 작품은 무엇인가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변환시킨다.
그는 잘 정리된 하얀 바탕을 변환이 이루어지는 매끈한 공간으로 삼는다. 형상들은 수직 수평이라는 잠재적인 좌표계를 따라 화면 깊숙한 곳으로 점차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표면 위에서 미끄러지며 복잡하게 얽힌다. 파동 치며 움직이는 선의 방향은 완전히 열려 있어 예측 불가능하다. 선들은 하나의 점에서 또 다른 점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름에서 주름으로 나아가며 변화무쌍한 궤적만을 남겨놓는다. 이 궤적들은 점들을 휩쓸고 지나가 버린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천개의 고원]에서 이러한 매끈한 공간의 원형을 바다에서 발견한다. 이주형의 작품은 이 매끈한 공간 속에서 여행한다. 탈주와 비슷한 이 여행은 불확실한 생성을 향한다. 그의 작품에서 깊이는 원근법적 깊이가 아니라. 점을 바탕으로 한 견고한 시각이 무너지는 순간과 관련된다. 계속 방향을 바꾸어가며 변이하는 선은 재현적 사고의 제한성을 벗어난다. 보라색 색채 다발은 매끄러운 판에서 끊임없이 연장되며, ‘주름’ 또는 ‘변곡의 무한한 계열’(들뢰즈)을 생성한다.
색과 형태가 밀접하게 연결된 유동체들은 차이 짓기를 통해 변화하며. 존재의 다양한 상태나 상황을 표현한다. 네임 시리즈는 [플라셰보]나 [플라나리아]같은 독특한 것부터 요일 이름으로 명명된 평범한 것까지 이르며, 이러한 작품제목은 관객으로 하여금 모호한 형상들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어준다. 그러나 시적 표현이 그러하듯, 이주형의 작품 이미지는 뭐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단어와 경험, 또는 대상과의 거리가 멀찍이 떨어져 있다. 그것은 감을 잡을만하면 계속 미끄러지는 관계를 유지한다. 고리타분한 철학은 차이와 연기로 이루어진 언어의 이 미끈거리는 성질을 참을 수 없어서, 언어가 언어를 지시할 뿐인 건조한 동어반복으로 귀결되곤 한다. 그러는 가운데 언어의 기원이자 몸통을 이루는 세계는 방치되곤 한다. 이주형의 작품이 자리 잡는 곳은 바로 이 원초적 세계이다.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이 공백 부분에 야생적 존재로서의 세계와 주체가 웅크리고 있다. 여기에서 존재는 감성의 능동성을 발휘하며, 세계를 포착하고 자신을 발산한다. 정점(定點)들을 뭉개고 나아가는 선은 다름 아닌 몸의 연장이며, 동시에 세계이다.
2. Spore올 3월에 성곡 미술관에서 열린 ‘undefined scene(공리적 풍경)’에서는 포자 시리즈가 집중적으로 전시되었다. ‘머리카락이 나의 신체를 뒤덮듯, 나의 정신을 뒤덮는 두려움’(이주형)을 표현한 포자 시리즈는 작가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작된 외곽선이 복잡한 털 뭉치들로, 거세 공포증을 연상시키는 어둡고 강렬한 형상들이다. 대부분 하얀 바탕 한 가운데, 부분으로 나뉘어지지 않는 단독의 형상이 자리한 그것들은, 유클리드적 정의에서 ‘부분이 없는 것’으로서의 점과 유사해 보인다. 점 유사해 보이는 커다란 얼룩에 ‘폭이 없는 길이’로서의 선들이 머리카락이라는 비유를 가진 채 빼곡이 자리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응집 또는 팽창하는 돌기와 촉수, 그리고 굴곡 면으로 가시화하는 포자 시리즈는 [미궁](2009)으로부터 [식민지](2010)에 이르는 다양한 은유적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포자 시리즈는 머리통이라는 기본형을 가지지만, 박스나 큐브 등 직선적 요소도 포함되어 있다. 털로 뒤덮인 외피는 형상의 외곽선이 직선적이든, 곡선적이든 그 내부를 미지의 영역으로 남겨둔다. 그러나 금이 간 표피들은 명확히 한정짓고 구획 지으려는 의지의 반복된 실패를 보여준다. 머리털 자체가 몸의 안과 밖 사이에 존재하며, 몸의 경계를 끊임없이 무너뜨리는 애매한 것이기 때문이다.
‘공리적 풍경’이란 몸뚱이에 얹혀 진 머리통처럼 자명하지만, 정작 존재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형식적 체계와 논리를 증명할 수 없다는 공리적 정의와 관련된다. 자기충족성과 자율성, 동일성의 논리는 불확실성에 빠져버린다. 밝은 바탕에 얹혀진 어두운 형상은 어떤 대상(형태)을 현미경이나 망원경에 고정시켜 놓은 듯 자못 명료한 형식을 갖추고 있으나, 생명이나 심리적 과정에 비견될 만한 이 살아있는 형태(게슈탈트)는, 형태는 물론 의미도 고정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보이는 것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변형시킨다. 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변형시킨다. 메를로-퐁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에서, 의식하는 것을 ‘바탕 위로 형상을 갖다’는 게슈탈트적 의미로 해석한다. 육체가 사물을 지각한다는 것은 여백과 대립되는 형상을 지각한다는 것이다. 지각적 의미는 이 편차이다. 게슈탈트를 통해 자신을 지각한다는 것은 자기로부터의 간격을 통한 자기와의 접촉을 말한다. 바탕 위의 형상이라는 이 단순한 것은 다형현상(polymorphisme)으로부터 출현한다. 게슈탈트란 부분의 합으로 환원되지 않는 하나의 전체이며, 몸은 하나의 개체라기보다는 게슈탈트이다. 여기에서는 주체/객체는 물론, 감각과 감각된 것을 구별할 수 없다.
존재와 무(無)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어두운 형상과 밝은 바탕, 그리고 어둠 속에서 또한번 파여진 부분들은 나뉠 수 없는 전체적 존재를 사유하기 위해서 비존재라는 여백이 필요함을 알려준다. 사유를 존재와 무 사이의 중간이라고 규정하는 메를로 퐁티는, 넓은 의미의 존재는 완전한 그리고 있는 그대로의 존재가 되기 위해서 무를 부르는 존재라고 말한다. 무가 존재를 부르는 운동과 존재가 무를 부르는 운동, 이 두 운동은 하나가 되지 않고 서로 교차한다. 무와 존재는 언제나 절대적으로 타자들이다. 이주형의 작품에서 무(비존재)는 빈 구멍이 아니라, 파인 상태로 나타난다. 형상은 불투명함과 깊이, 그 암흑의 지점으로부터 출현하고 사라진다. 메를로 퐁티의 현상학적 사유는 몸과 세계가 중첩되는 지점을 강조한다. 몸은 세계이므로, 세계는 또한 몸이다. [first thinking after breath](2010)처럼, 머리통이 우주적 풍경으로 전화되는 작품은 몸과 세계 간의 경계가 사라진다. 그것은 [The Spore]들과 달리, 머리꼭지 부분이 없고 시작과 끝이 구별되지 않은 채 연결된 무한 회로로, 유한한 공간을 채우는 푸르스름한 색상과 더불어 무한의 느낌을 배가한다. 우주의 풍경은 유한하지만 경계가 없으며, 지표면이 그러하듯 장소에 따라 다르게 휘어져 있다.
이주형의 작품에서 머리카락 다발의 움직임은 몸과 세계의 풍경을 이루는 다양한 곡률을 만든다. 셀 수 없을 만큼의 머리카락이 만들어내는 공간의 주름은 끈과 얇은 판으로 이루어진 우주의 모형이다. 마거릿 버트하임은 [공간의 역사]에서 거대한 중력이 응축된 긴 길이의 줄과 판들이 은하계 사이의 공간구조를 강하게 휘게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 의하면 중력은 곡선모양으로 굽은 공간의 부산물이며, 우리는 지구에 의해 생긴 공간 조직(fabric)의 만곡(움푹 패인 공간)에 위치해 있다. [공간의 역사]는 우주의 모든 항성이 공간의 조직에 각각의 만곡을 만들며, 이렇게 무수한 기복과 곡면들로 이루어진 공간조직은 우주의 경관을 형성한다고 본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이주형이 만들어낸 공간은 ‘우주론적 지형이자 우주의 내장기관’(버트하임)인 셈이다. 네임 시리즈처럼 최초의 시작과 끝이 생략된 채, 끊임없이 변형하는 과정만을 보여주는 포자들은 지속적인 우주 창조에 대한 물리학적 이론을 연상시킨다. 또한 이렇게 끊임없는 과정 중의 존재들은 공포(죽음)의 이면인 욕망(삶)의 본질을 드러낸다.
3. Embryo배아 시리즈는 ‘공리적 풍경’ 전에서 포자 시리즈와 더불어 몇 점 선보인 바 있고, 그가 최근까지 몰두한 작품들이다. 이주형은 배아가 포자의 이전 단계에 해당된다고 말한다. 자신의 뒷모습으로부터 시작된 포자가 머리라는 은유를 통해 정신과 연결된다면, 그 이전 단계인 배아는 마음과 연결된다. 네임 시리즈도 그렇지만, 정신이든 마음이든 몸이라는 큰 테두리 내에서 형상들은 움직인다. 삐죽빼죽 튀어나온 포자 시리즈가 남성적이라면, 뭉실거리는 배아 시리즈는 여성적 형태에 가깝다. 물론 양자의 대조는 비유적인 차원에 머문다. 그것은 남성인 주체가 타자인 여성을 표현하는 것에 한정시킬 수 없다. 이주형의 작품에서 주체와 타자의 시선은 분리될 수 없이 얽혀 있기 때문이다. 메를로 퐁티에 의하면, 시각은 보이는 것에의 참여이고 결속이어서, 나의 몸은 보이는 몸과 함께 상호간의 삽입과 얽힘이 있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의 이 유착은 모든 시각에 내재된 근본적인 나르시시즘을 알려준다. 요컨대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서로 역전하여, 누가 보는지 누가 보여 지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타인을 본다는 것, 그것은 본질적으로 내 몸을 대상으로 보아서, 결국 타인의 신체 대상이 심적 측면을 가질 수 있게 한다. 내 몸의 경험과 타인의 경험은 동일 존재의 두 측면인 것이다.
배아는 이후에 펼쳐질 과정을 추동하는 힘을 내포하는 듯, 에너지가 강한 푸르스름한 털로 뒤덮여 있다. 외곽선은 부드럽고 율동적이며, 이후의 단계를 전진시키기 위해 형상 내부에서는 균열이 발생한다. 포자 시리즈에서 뒤통수에 패인 구멍들이 부정적(존재가 아닌 무에 속한다는 점에서)인 징후를 보인다면, 배아에 난 균열(또는 파열)은 새로운 탄생과 변모를 위한 긍정적인 사건이다. 이주형의 작품은 시리즈 별로 비슷한 형식을 취함으로서 잠재적인 운동감을 보여 왔는데, 배아 시리즈에서는 배아가 펼쳐지고 있는 단계를 직접 보여주기도 한다. 응집된 배아는 펼쳐져서 부드러운 턱 선을 가진 얼굴 같은 모습으로 변모하기도 하고, 배아 자체가 털의 결과 균열의 배치에 의해 울고 웃는 듯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배아는 생명의 씨앗이라는 비유를 통해서, [ecology-2](2010)처럼 식물로 자라나기도 하고, [ecology])(2010)처럼 나비로 변태(metamorphosis) 하기도 한다. 생명의 씨앗에 새겨져 있는 유전자의 체계는 환경에 반응하면서 융통성 있는 변형규칙을 펼쳐 나간다. 식물이든 곤충이든 머리털이라는 공통적인 요소를 가짐으로서, 고정된 종의 개념보다는 어떤 질의 연장과 운동을 강조한다. 자연은 예술과 같이 끝없는 과정으로 나타난다.
이주형의 작품에서 포자나 배아는 라이프니츠가 정의한 단자(monad)처럼, 끝없이 펼쳐지고 접혀지는 과정이어서, 이 변형사슬은 무한하다. 포자에 비해 외곽선이 부드럽기 때문에 털보다는 미세한 주름으로 가득한 느낌을 주는 배아들은 펼쳐지고 접혀지는 생명의 과정에 대한 적절한 비유이다. 들뢰즈는 라이프니츠를 연구한 책 [주름]에서 유기체를 원초적인 주름, 접힌 것, 접기로 간주한다. 오늘날 구형 단백질이 근본적으로 주름 잡혀 있다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생물학은 생명체를 그렇게 규정한다. 차이를 발생시키는 접힘과 펼침의 운동이 존재의 분화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물질 안에서 부분들의 분할은 언제나 곡선 운동 또는 굴절의 분해를 수반한다. 우리는 이것을 알(卵)에서 본다. 어떤 유기체가 자신의 고유한 부분들을 펼치도록 호출될 때, 자신의 동물적인 또는 감각적인 영혼은 무대 전체를 향해 열린다. 그리고 하나의 유기체가 죽었을 때 이 유기체는 없어진 것이 아니라 말아 넣어진다. 생명체는 진화와 함께 유기체의 전개와 더불어, 변형되어가면서 무엇인가를 형성하는 내부의 주름이 있다. 라이프니츠는 이것을 조형력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 힘은 덩어리를 유기체로 조직한다. 들뢰즈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라이프니츠의 단자적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 이주형의 포자와 배아가 자리하는 곳은, 재현이 아닌 생성, 동일성이 아닌 차이, 주체가 아닌 사건이다.
출전 | 2010 스튜디오 박영 레지던스 프로그램(작가 워크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