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아르코 미술관 전문가 성장 프로그램
1. 안성석-공존하는 시간의 기호2009년부터 2010년에 진행된 안성석의 historic present시리즈에는 두 개의 시간대가 있다. 이 두 층위는 비연대기적이고 불연속적이지만 서로 공존한다. 두 시간대의 교차와 중첩은 사진이나 영상 등을 활용하여 만들어진다. 같은 장소나 대상의 과거와 현재를 공간적 아귀맞춤을 통해 절묘하게 중첩시키는 그의 작업은 첨성대나 남대문 등 오랜 시간의 흔적을 담고 있는 유적지는 물론, 광화문이나 시청 같이 대중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리모델링을 통해 조금씩 변화하는 것들을 대상으로 한다. 역사적으로나 일상적으로 유명한 건물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살인사건이 벌어졌던 고속 도로변 같은 불특정한 장소 또한 대상이 된다.
전쟁이나 화재 같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변모되는 극적 상황 또한 놓치지 않는다. 유한한 존재인 인간은 작가가 압축적으로 제시한 시간의 흐름 앞에서 소소한 기억의 환기에 의거한 아련한 향수부터 대화적 상상력을 야기하는 역사적 성찰에 이르게 된다. 그의 작업에는 지금 여기와 다른 그때 거기를 증명하는 기존의 사진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며, 현재의 장면은 시간의 격차가 두드러지게 표현될수록 성공적이다. 그의 작품은 두 개의 타임 라인을 포토샵 등으로 손쉽게 조합하는 것과는 달리, 실제 공간에 설치된 스크린에 투사된 장면을 조합하는 것이기 때문에 독특한 느낌을 준다.
시간의 흐름을 적절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한 장소를 여러 번 방문하고, 현장에서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며 바람이 한 점도 불어서는 안 되는 조건 등이 필요하다. 안성석의 작품은 (재)개발 공화국이라 불릴 정도로 모든 것을 빨리 무너뜨리고 다시 세우는 한국적 조급증을 배경으로 한다. 외국인에게 역동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이러한 특성은 이미 우리의 일상과 역사적 풍경을 상당히 변화시켰다. 같은 장소를 찍은 두 장의 사진이 겹쳐진 그의 작품은 불과 몇 십 년 전의 흑백의 장면들을 매우 고풍스럽게 보이게 한다. 그것은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의 주기를 표현한다.
시간성은 하나의 이야기(서사)를 내포하기 때문에 병치나 중첩은 일련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것은 역사 앞에 선 주체의 초상과 같은 정체성의 문제를 야기한다. 작가는 환영의 재생산을 통해 이전과 이후의 장면 모두를 수정한다. 사진이나 영상, 스크린을 통한 두 평면의 만남에는 그 사이에 접혀져 있는 무수한 시간의 계열이 잠재되어 있다. 물질과 기억의 상호침투를 고무시키는 과정은 시간이 가지는 생성과 소멸의 힘을 드러낸다. 한 장면은 주형이나 데드마스크같이 움직이지 않는 단면이 아니라, 변조를 향한다. 이를 통해 사진을 바탕으로 하는 그의 작품은 영화적 성격을 내포한다.
바쟁이 말했듯이 사진은 빛을 통한 인장 즉 주형을 얻을 수 있는 지점까지 나아가지만, 영화는 그 자체를 사물의 시간상에 주조하고 더 나아가 그 지속의 인장을 획득한다. 안성석의 작품은 실제 공간 속에서 행해지는 시간의 몽타주 작업으로, 단순히 대상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작업 속에 등장하는 보이는/보이지 않는 평면들은 데이비드 노만 로도윅이 [질 들뢰즈의 시간기계]에서 썼듯이, 내재성의 평면, 즉 끊임없이 변화하는 열린 전체의 시간적 관점(들뢰즈)을 보여준다.
2. 전채강-전자 매체 시대의 회화전채강의 작품은 시각 이미지를 온통 잠식하고 있는 전자매체 시대에 회화적 자의식이 있다. 작가는 회화를 통해 지금을 이야기해야 한다는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과한다. 그것은 19세기에 전형화 된 자연이나 신화, 역사를 대상으로 한 고전주의 미학을 넘어서 동시대성을 간취하고자 한 근대 이래로, 화가들이 가져왔던 문제의식이었다. 근대문화의 쌍생아로 회화와 역학관계를 이루어왔던, 사진을 비롯한 기계 복제 체제의 탄생이 질적인 면에서도 가일층 확대되고 있는 현대에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전채강이 당대성을 표현하는 방식은 인터넷 등에서 찾은 자료들을 모아 캔버스에 재구성하는 것이다.
자료의 선택이 완전히 중성적일 수는 없지만, 작품 소재를 작가 외부에 있는 것으로 한정하는 이러한 방식은 다소간 임의적이고 기계적이다. 주로 선택되는 것은 스펙터클한 사건 사고의 이미지, 특히 모든 기능이 집약되어 있으며, 일정 질서를 바탕으로 유지되는 현대적 삶이 이지러지고 붕괴되는 상황이다. 작가는 질서도가 높아지면 무질서도 또한 높아짐에 주목한다. 코드화된 질서가 탈 코드화되는 순간을 회화로 포착하는 것이다. 인공적으로 구축된 것이 붕괴되는 상황은 동질성에 내재된 이질성들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리고 회화는 이 순간을 극대화한다. 회화도 마찬가지지만, 미디어는 현실을 사실대로 재현하지 않는다. 그것 역시 세계를 그대로 들여다보는 투명한 창이 아니다.
매체는 각 매체의 방식대로 현실을 반영한다. 매체가 가지는 불투명성(opacity)의 정도--그것이 극대화 되면 자기지시적이 된다--는 각기 다르다. 매체로서 회화는 사진이나 영상보다 더 불투명하다. 특히 전채강은 스펙터클한 장면에 잘 어울리는 비례를 벗어나 정사각형의 캔버스를 선택하며, 두세가지 이질적 공간을 한 화면에 공존시킨다. 이러한 조치들은 현실로부터 추출한 소재들의 비현실적 측면을 강조한다. 그녀는 대중에게 이슈화 된 사건사고에 주목하다가 얼마 전부터 밎밎한 일상으로 전환했다. 그것은 [오늘날의 이슈]같은 재난의 현장 보다는 특정 지역의 특징을 포착한다. 가령 여의도, 한강, 도심 재개발 같은 공사 현장이나 키치적 정물로 가득한 다소간 지루하면서도 평온해 보이는 일상이 그것이다.
그것은 뜨거움에서 차가움으로의 중심 이동이었지만, 질서 잡혀 있다고 생각되는 일상 역시 불안하고 무질서하기는 마찬가지라는 판단 때문이다. 대신에 작품의 규모를 키웠다. 실로 차가운 일상은 뜨거운 사건사고와 상보적인 관계를 이룬다. 평온한 휴일 저녁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재난 뉴스처럼 느긋한 소비를 부추키는 것도 없을 것이다. 차가운 일상이 기념비적 크기로 확대되면서, 그리기라는 행위가 강조되고 시선이 더 깊이 들어가며 보다 빠른 템포로 작업을 진행되었다. 이를 통해 대상이나 현상보다는 몸과 무의식이 차원이 부각되었다. 전채강의 그림에는 몸을 비롯해 모든 것을 코드화시키려는 기계화의 압력에 대한 긴장이 내재되어 있다.
3. 문재일-고고학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시간이라는 경계 사이에서]라는 제목을 가지는 문재일의 작품들은 문명과 자연을 대조한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형이상학적 초월을 낳는 대조법이 아닌, 차이를 발견하는 문제이다. 양자를 거칠게 비교하자면, 자연은 진화하는 것이고 문명은 진보하는 것이다. 진화에는 목적과 의도가 없고, 우연적인 것이 많이 개입되고 방향성도 없지만, 진보는 단선적인 발전과정이 있다. 자연에서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지만, 문명에서는 교육에 의해 전수된다. 자연은 단순한 약육강식에 의해 지배되지만 사회는 잉여가치의 축적에 의해 타자를 억압한다. 전수와 축적을 통해, 문명은 자연보다 타자에게 더 큰 폭력을 낳을 수 있다.
문명, 특히 언어로 이루어진 상징적 체계에 대한 작가의 거부감은 죽음의 이미지를 향하게 하며, 문명의 바깥을 응시하게 한다. 문명의 잔해들이 자연에 의해 뒤덮여 있는 모습은 진보적 전망이 아닌 진화적 시야를 열어준다. 문명이나 자연은 모두 시간의 흐름에 맡겨져 있지만 자연사는 역사에 비해 더 큰 시간의 주기를 가지고 있으며, 작가의 눈은 이 장기적인 시간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의 그림에서 자동차, 비행기, 기차 같이 인간 문명의 비약적인 진보를 가져왔던 발명품들은 그 당당한 위용을 잃고 잔해가 되어 자연에 파묻히는 중이다. 묻혀 사라지는 문명의 흔적은 깊은 침묵에 잠겨있다. 작가는 인간과 사회, 문명이 자연으로 사라지는 말없는 역사에 주목한다.
그것은 유한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의 존재조건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시작한다. 처음과 끝은 상정하는 직선적 사고방식은 짧은 성장기와 전성기를 제외한다면 비극적 결말에 도달할 수밖에 없지만, 자연으로부터 와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사고는 비극도 희극도 아니다. 그리고 인간이 주역이 된 문명에 악역을 맡긴다면 이러한 쇠퇴는 해피엔딩이기도 하다. 가령 인간 없는 생태계는 다시금 평화와 풍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과도하게 설정된 인간의 위상이 하락할 때 인간 자체도 다시금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고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진보로 잘못 해석된 진화에는 예정된 결과를 향해 진행되는 근본적인 경향 또는 추진력이 있으며, 그 힘이 생명의 역사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최고의 결과(인간)를 낳았다는 오류를 기반으로 한다고 본다. 그의 작품에 잔뜩 돋아난 잡초들은 죄의 댓가로 모든 것이 파멸하는 묵시록적인 이미지라기보다는 세상의 모든 허물을 덮는 하얀 눈 같이 포근한 느낌마저 준다. 현재로서는 좀 더 많은 것이 사라져 주었으면 하는 시점이기 때문이다. 작가에 의하면 시간과 시간 사이의 경계를 통해 드러나는 죽음(사라짐)은 ‘얽힌 망들을 끊어내는 것’이다. 동시에 ‘자연과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인간과 사회가 자연으로 사라지는 고고학적 가상공간은 어둠 속에 잠겨있지만, 이 어둠은 새로운 발견이나 출발을 위한 또 다른 차원이 된다. 그는 장지에 코팅을 하고 수묵 담채로 엷게 수 십 번 올려나간--유화와 달리 안으로 쌓이는--방식을 통해 주제에 걸 맞는 깊이와 신비함을 부여하였다.
4. 이이온-만물을 잇는 연결망이이온의 작품에는 작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원소들과 그것을 잇는 연결망들이 등장한다. 이 망들은 조화롭게 연결되어 전체를 이루기도 하지만, 때로 풀 수 없을 만큼 얽히고설킨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연결망들은 조화이자 재난이다. 가령 인간과 인간이 서로의 머리를 연결한 작품 [존재와 조작]에서, 아치형 교각처럼 무게 하중을 잘 견딜 수 있는 건축적 구조의 차용을 통해 문제와 해법의 공유를 예시하지만, 동시에 사람들의 정신을 조작하는 권력의 표현일 수 있다. 연결망은 보다 자연적인 이미지로 전환되기도 한다. 뇌들이 연결된 작품 [불멸]은 개체로서의 인간을 초월하여 무한대의 지평으로 확장시킨다.
그것은 작가의 말대로 시간과 공간, 삶과 죽음을 넘어서 인류는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를 이룬다. 반면 작품 [전쟁]에서 뇌들은 흘러내리는 피를 연상시키는 붉은 실이 연결된다. 작품 [문명의 꿈]에서 책이나 뇌같이 문명을 상징하는 것들은 검은 실로 이어져 있는데, 그것은 현대 문명이 서로의 상호작용을 통한 공동의 작품이라는 메시지를 던져준다. 동시에 검은 실들은 책들에서 새어 나온 검은 잉크라는 비유, 그리고 파라핀으로 밀봉된 책의 이미지는 상호적 소통의 투명성에 대한 회의를 보여주는 듯하다. 축축 늘어진 채 얽힌 조형요소의 이미지는 비극적 분위기를 가지고 있지만, 수직적(위계적) 나무구조가 아닌 수평적(평등적) 뿌리줄기라는 비유는 연결망에 대한 신뢰를 가능하게 한다. 뿌리줄기의 비유는 전체주의로 귀결될 수 있는 총체성이 아닌, 서로 다른 질서를 가진 현상들의 상호 연결성에 방점을 찍는다.
그것은 관계들의 전체라고 할 수 있는 시간, 즉 지속의 본질적 면모(들뢰즈)로서, 작품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전체와 부분의 관계가 해체되는 측면으로 나타난다. 오브제나 조각들 사이를 연결하는 원칙이 수직적 위계 대신에 어디로도 흘러갈 수 있는 끝없는 연결망을 가진다. 고정된 범주와 경계를 넘어서려는 작가의 태도는 숭고한 경험을 유도하는 거대한 규모로의 확대, 그리고 오브제의 정확한 형태를 교란하는 변형에서 부연된다. 연결의 교차로, 즉 결절점에는 뇌나 책 등 관객이 알아볼 수 있는 상징적 도상이 자리하여 메시지 전달의 용이성을 확보한다. 그것은 심리적 자아나 상징적 주체 같은 이미지 보다는, 집단적 주체 또는 집단적 지성의 이미지이다.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없는 작품도 구성이라는 원리를 통해 요소들은 연결된다. 작품 [조형적 아톰]은 하나로 완결된 조각이 아니라, 레고처럼 다양한 건축적, 조형적 구조물을 만들 수 있다. 각각의 존재는 원자부터 개인에 이르는 비유를 지니면서 다양한 결합체를 형성한다. 그녀의 작품에서 다양한 구조적 차원은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생성에 열려 있다. 과거 천년과 앞으로의 천년을 기록하는 숫자들이 등장하는 작품 [시간 여행자]는 영겁의 시간대로 열려 있으며, 작품 [공간 여행자를 위한 터미널]은 다른 시간대로 진입할 수 있는 장소를 계단 이미지를 통해 표현했다.
생성의 이미지가 극대화 된 작품은 이슬을 빗물처럼 설치한 작품인데, 작가에 의하면 그것은 공간, 시간, 빛, 물질의 생성을 표현한다. 그녀가 작업을 시작한 이래 인간과 역사, 문명에 대한 관심과 이를 가능하게 했던 궁극적 요소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작품 소재와 규모가 달라지는 와중에도 지속된다.
5. 김새벽-역설로 점철된 세계김새벽은 제목과 작품 사이에 역설적 관계를 설정함으로서 그자체가 역설로 이루어진 삶에 대한 경쾌하게 때로는 냉소적으로 대답하려 한다. 역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근대적(그리고 유사 신학적) 예술가의 이미지가 아니라, 기존의 것을 비틀고 변형시키는 불온한 개입의 행위에 방점이 찍힌다. 그것은 만들어야 할 것보다 만들어져 있는 것이 너무 많은 현대 사회에 대한 작가 나름의 대답이다. 누군가에게 그것은 선택의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유토피아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대답을 요구하는 끝없는 질문이라는 압박으로 다가온다. 역설이 성립되려면 적절한 맥락이 있어야 한다. 작품의 의미는 고전주의처럼 그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 속에 존재하게 된다.
특히 작품에서 작품으로 이어지는 예술 내적 맥락이 아니라, 삶의 맥락에서 보다 정확히 읽혀진다. 그래서 작품 그자체로만 보면 매우 취약하고 수수께끼 같을 수도 있지만, 맥락과 더불어 의미는 증폭된다. 특히 김새벽은 역설적 의미를 겨눈다. 형식적으로는 자신의 작품이 가지는 장소특정성을 강조한다. 그는 모든 일에는 타이밍과 찬스가 있다고 보면서, 작업에 이것을 적용시키면 반드시 그곳에서만 가능한 작업이 있다로 해석한다. 그것은 그가 참여했던 몇 몇 공공미술-- 시흥동에서 진행한 작품 [소통을 위한 오해의 극복]--에서 명확히 보여졌지만, 오브제와 퍼포먼스를 비롯한 개별적 작품들에서도 관철된다. 1과 6만 있는 극단적인 주사위는 역설이 성립되기 위해 많이 벌어져야 할 낙차이다.
시지푸스 신화처럼 바닥부터 옥상까지 오르내리게 되어 있는 작품 [대립]은 실제 일어난 자살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인데, 여기에서 자살은 인생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극적 사건으로 다가온다. 일상의 무의미함에 대한 대응은 기계적인 반복으로 나타나는데, 작품 [비오는 날 X 동안]은 비오는 날 한번씩 울트라 마린을 칠한 것이고, 작품 [잃어버린 기억]은 아크릴 박스에 염산을 넣어 카메라를 녹임으로서 기억 상실의 과정을 표현했다. 작품 [파라다이스]는 쏟아진 설탕 포대 위에 꼬인 개미들이 일주일도 안 되어 몰살되는 모습인데, 그것은 파라다이스를 추구하는 문명, 그것에 내재된 극도의 동질성과 그것의 해악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죽은 나무틀로 감싸인 살아있는 나무를 통해 관료주의의 틀에 갇힌 현대의 모습을 표현하기도 했다. 작품 [받을 수 없는 전화]는 고장 난 전화기를 잔뜩 모아 놓고 그 안에 한 전화기에서 벨이 울리게 함으로서 소통의 강박관념 시대에 내재된 역설적 상황을 드러낸다. 김새벽의 작품에서 역설의 유희가 극대화 된 것은 갇혀 있음과 탈주의 이미지를 교차시킨 것들이다. 퍼포먼스 작품 [침묵의 교도소]는 거리에서 죄수복 입고 구획된 공간 안에 앉아서 타인들과 면회하며, 작품 [구속자]는 죄수복을 입고서 지하철이나 경찰서, 대법원 같은 공공장소를 돌아다닌다. 자유로움과 유폐의 이미지를 중첩시키는 이러한 작품은 여기나 저기나 감옥이며, 여기에 있으나 저기에 있으나 수인의 신세 같은 역설을 보여준다.
열려 있는 듯 하지만 굳게 닫혀 있는 [유리 집], 철거 및 강제 이주의 상황을 [nomadic house]로 명명한 가건물의 설치는 자연과 전통으로부터의 자유가 동시에 새로운 소외를 낳은 근대적 계몽의 역설적 운명이다.
6. 백승혜-개인적 실존에서 사회적 지평으로1990년대에 작은 구나 상자들에 들어있는 수많은 인형들을 연극적으로 연출하여 단자로 존재하는 개체들의 상황을 표현했던 백승혜는 2000년 이후의 작품에서는 자연과 세계, 그리고 사회 속의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전환한다. 개인의 실존적 상황에서 좀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간 것이다. 그 계기가 안양천이나 철산동 등지에서 벌어졌던 공공미술에의 참여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 더욱 뜻이 깊다. 2천년대 중반 이후 아트 인 시티 등, 한국에서 벌어진 대안적 공공미술 현장에 참여했던 작가들이 그 체험을 개인 작업까지 연결시키면서 미술의 외연을 넓혔다는 간접적 증거가 된다.
먼저 자연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작품 [창문 너머]는 박스 안에 들어있는 하늘의 이미지를 창문을 열듯이 향유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은 갇혀있음에서 벗어나 타자의 소리들이 들려오는 세계로 열린 창에 마주한다. 작품 [산]은 위로 올라가는 담쟁이의 성질을 이용하여 작가와 자연이 함께 상형 문자 같은 형상을 그리는 작업이다. 작가는 꽉 막힌 갤러리 안에 식물들을 끌어 들여 [낙원]을 만들기도 하고, [안양천 프로젝트]에서는 돌을 치워서 식물이 자라날 여지를 주며, 말라있는 식물에 링거액처럼 수분을 공급하기도 한다. 작품 [붉은 명단]은 투명 보호 덮개 안에 붉은 글씨로 멸종되어가는 생명체 이름을 4개국 언어(한국어, 독어, 영어, 라틴어)로 적어 놓았다. 자연에 대한 감수성은 세계를 정화하고 싶다는 생각과도 연결된다.
세계 지도 모양으로 만든 참숯은 참숯이 가지는 특징인 공기정화 능력을 살려서 전 세계가 맑은 공기를 가지라는 마음을 담았고, 아크릴판 위에 그려진 세계지도는 사람이 다가가면 펌프에서 물이 나오고 와이퍼가 작동하여 지도가 그려진 판을 닦아내면서 세계가 깨끗해졌으면 하는 생각을 담았다. 세계에 대한 이미지가 혼돈으로 변화하는 것은 경계가 없는 자연에 그어진 금들이 부각될 때이다. 작품 [바벨]은 상호적 소통을 불가능하게 하는 바벨탑의 이미지로, 여러 언어들의 혼선을 표현한다. 작품 [판도라의 상자]는 잔뜩 쌓여있는 여러 나라 신문들이 쏟아져 나온다.
자연을 다룬 작품에서 생태적 메시지를 전한다면 세계의 이미지가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다양성이 아닌 복잡성, 평화가 아닌 긴장, 차이가 아닌 동일성으로 기울어지는 세계화의 어두운 측면을 표현한다. 백승혜의 작품은 미술이 자연과 세계에 대해 발언하는 방식의 하나라는 것을 잘 보여주지만, 그것이 자칫 공허할 수도 있는 큰 목소리로 귀결되는 것만은 아니다. 90년대의 작은 인형들을 통해서처럼 작가는 인간의 큰 이야기가 아닌 작은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작품 [이야기 여섯 곳에서]는 공공미술인 철산동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실행된 것으로, 현대 사회가 자신의 체제에서 강하게 밀어내고 있는 소외된 부류의 하나인 노인들의 이야기를 인터뷰 형식으로 담았다.
작품 [가족이란?]에서는 사람들에게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작가는 원근법적 중심에서 세계를 바라보거나 고함치듯 발언하는 대신에, 자연, 세계, 인간 사회 등 여러 곳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들을 듣는 자가 되는 것이다.
출전 | 2010 아르코 미술관 전문가 성장 프로그램-신진 작가 비평 워크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