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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과 시각성(visuality)

이선영


미술과 시각성(visuality)


미술은 시각에 의존하는 예술 장르이다. 눈은 투명한 지각의 창으로 간주되며, 촉각, 후각, 청각 등에 비하여 가장 정신에 가까운 감각으로 평가되어 왔다. 관념론의 시조인 플라톤의 이데아적 사상체계가 시각적 감각의 우위에 바탕하고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시각(vision) 또는 시각성(visuality)은 생리적인 과정인 동시에 역사적인 과정으로, 자연과 문화의 합작품이다. 노동의 분화와 더불어 감각의 분할이 일어났고, 보는 눈 그자체도 자연의 제 감각으로부터 분리되는 역사적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것은 생산력의 승리를 낳았지만, 동시에 소외를 낳는다. 생산이라는 개념 자체가 명확하게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의미한다.

생산의 시대는 무엇보다 보는 감각에 호소하는, 윤택해진 시각의 시대였지만, 이러한 주류적 과정에서 제외된 것은 소외를 피할 길이 없었다. 생산력의 혁명을 위해 분야별 전문화가 가속화된 근대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구경거리의 사회, 즉 스펙터클의 시대였다. 미술 또한 모더니즘으로 정점을 이루며 시각성의 전성기를 맞았다. 대중들의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는 미술의 신화, 그 중심에 놓인 것도 근대 화가들의 작품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정점에 올라서자마자 곧 쇠퇴하기 시작했으며, 이후 끊임없이 회화의 위기 및 종말이 거론되어 왔다.

물론 위기 및 종말의 담론 속에서도 회화는 계속 그려져 왔지만, 현재의 회화들은 모더니즘과 같은 강물에 발을 담그고 있지 않다. 근대 이후의 시대에, 회화는 물론, 미술이라는 장르 자체가 예술 및 시각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달라졌다. 보이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미술은 아니며, 미술이 보는 것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미술이 당연하게 가정하곤 하는 시각 및 시각성에 대한 반성을 통해서, 회화나 미술의 위상을 제고해 볼 필요가 있다.

근대적 시각모델은 동일자(the same)로 간주된 주체에 명증하게 드러난 대상을 가정한다. 남김 없는 시각의 포획이라는 이상 아래, 차이가 작동할 여지는 줄어든다. 마틴 제이는 [모더니티의 시각체제들](출전; [모더니티와 시각의 헤게모니], 데이비드 마이클 레빈 엮음)에서 근대의 지배적인, 헤게모니적이기까지 한 시각모델을 르네상스적 원근법 개념과 주체의 합리성에 대한 데카르트의 사상과 동일시할 수 있다고 본다. 근대적인 인식론의 토대가 되었던 데카르트의 구성에 있어서, 형상은 정신 속에 존재하는 표상들(representation)이다.

그 기본적인 장치는 대칭적인 시각 피라미드들 혹은 원추들이라는 관념으로서, 이때 그것들의 꼭짓점 중의 하나는 그림에 있어 소실점이나 중심점이며, 다른 하나는 화가나 감상자의 눈이다. 데카르트적 원근법주의의 전통은, 화가의 응시를 현상들의 흐름을 정지시키고, 어떤 유리한 조망지점에서부터 시각 장을 관조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것은 전적으로 세계 밖에 존재하는 비역사적이고 무관심적인 탈(脫)신체화된 주체에 특권을 부여하며, 세계는 오로지 멀리서만 인식될 수 있다.

시각적 피라미드 끝에 위치한 외눈은 초월적이며 보편적인 눈을 가정하는데, 이 관점을 공유하는 것이 근대적 의미의 회화와 동시에 태어난 외눈박이 기계, 즉 카메라이다. 조나단 크래리는 [시각의 근대화]에서, 카메라 옵스큐라는 관찰하는 주체의 위치를 공간적으로 시각화하는 수단으로 본다. 그것은 외적 세계와 내적 표상 사이의 일치를 확고하게 보장하고, 무질서하거나 불규칙적인 것은 무엇이든 배제하려는 것이다. 텅 빈 내부 공간을 지닌 자아의 안전한 위치는 외적인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카메라의 구멍 혹은 창이란 그로부터 세계가 논리적으로 연역되고 재현될 수 있는 수학적으로 규정이 가능한 단일지점에 상응한다.

이는 동질적이고 통일된, 그리고 완전히 읽어낼 수 있는 공간의 형성을 보증한다. 기계와도 동일시될 수 있는 투명한 시각은 불투명한 몸을 배제했다. 그러나 보편주의적 인간중심주의(humanism)의 특징인, 초월적 주체성이라고 하는 가정은 이제 의심스러운 것이 되었다. 관념적인 눈이 아닌 실제의 눈, 즉 육안은 ‘단일 시점에 의한 기하학, 즉 멀리서 신의 시선으로 본 동질적인 3차원적 공간이라는 그것의 환영’(뷔시 글룩스만)을 거부한다. 세계는 육체로부터 초월한 관조자의 무관심한 응시의 대상이 되기에는 너무나 역동적인 것으로 변하고 있었다.

보는 주체는 말하는 주체와 마찬가지로 경험의 중심에 놓여 있지 않다. 시각 또는 언어는 자아와 무관하게 외부로부터 주어진 의미의 망이며, 이 역동적인 망은 끊임없이 주체를 중심으로부터 밀어낸다. 현대의 언어학이나 정신분석학은 동일자는 타자가 바다에 떠있는 조그만 섬에 불과하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욕망과 충동의 바다에서 말하고 창조하는 인간이 정박할 안정된 중심은 사라지고, 비가시적인 무의식의 과정 속에서 유동하는 ‘모체 형상(matrix figure)’(리오타르)이 근대적 시각 체계를 대치한다. 로잘린드 크라우스는 [보려는 충동]에서 모체형상은 형상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것을 구성하는 부분들은 비동일적이며 그 활동은 비가시적이라고 본다. 그것은 조정 불가능한 상황들의 동시성을 창조한다.

여기에서 형식과 일탈, 구조와 해체, 금기와 위반은 구별불가능 한 것이 된다. 눈으로 환원된 주체/객체가 아니라, 살로서의 인간-세계가 펼쳐진다. 현대적 예술은 세계와 온몸으로 공명할 것을 요구한다. 시각상의 어떤 국면에 과거의 잔재가 남아있듯, 일상 또한 그러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일상의 어느 부분은 여전히 원근법적 시각의 기초를 이룬 획일적이고 동질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다. 근대에 열린 시각상의 시대는 미술보다 더 근본적인 어떤 토대의 변혁에 의해서 가능했다. 미술은 그러한 변화의 원인이 아니라,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미디어 이론가 마샬 맥루한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근대 원근법적 시야를 연 것은 중세 말에 발명된 활자체계라고 말한다.

인쇄된 문자의 세계는 이전의 청각적 구술성의 시대를 마감 짓고 명증한 시각의 시대를 열었다. 회화가 문자와 가져왔던 깊숙한 상호관련성은 우연적이 아니라, 필연적인 국면이 있다. 그것은 회화가 단지 쟁이적 기술이 아니라, 인문학에 속함으로서 자신의 자율성을 간취하려 한 근대 아카데미의 역사에서도 발견된다. 그래서 문자에 기초를 둔 근대문명이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회화의 위기가 거론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개념주의나 그 아류적인 방식에서 시각적 사고에 내재된 문자성(literacy)의 흔적이 발견되곤 한다. 르네상스와 계몽의 세계는 기하학적 세가치 축 위에 정지되어 있으며, 정적이고 분절가능한 상태의 것처럼 보인다.

한글도 그렇지만 서양의 표음문자인 알파벳은 인쇄의 체계와 보다 밀접하다. 그림은 표음문자에 비하면 표의문자에 더 가까우며, 시각 뿐 아니라 모든 감각이 동시에 개입되는 복잡한 장이다. 한편 아무런 의미 없는 소리에 의미 없는 기호를 연결한 알파벳이란 기호는 그물같이 얽혀있는 오감의 복합체로부터 시 감각 양식을 분리시킨다. 알파벳은 시각과 음성은 물론, 문자의 소리로부터 모든 의미를 분절하거나 추상화한다. 맥루한에 의하면 감각이 분열되고 시각이 다른 감각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 것은 엄밀하게 획일적이고 반복 가능한 활자에 의해 서적이 대량으로 생산되면서 생겨난 일이다.

알파벳화 한다는 것은 복잡한 말의 단어를 널리 확산하고 전달 될 수 있는 시각적 코드로 번역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오직 안정되고 시각적으로 지각 가능한 상징으로 구축된 명료한 언어이다. 표음문자는 우리의 모든 감각을 시각적이고 회화적 혹은 폐쇄된 공간으로 번역하거나 환원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언어의 재현적 속성을 극대화시키며, 그 절정에 과학의 언어가 자리한다. 폐쇄적인 단일 공간 속에 자리한 이 동질적 언어를 통해 근대의 막강한 생산력이 창출되었다. 회화가 이러한 시각과 보조를 맞추며 균질성, 획일성, 반복성을 되풀이하는 한 과학의 아류를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재현적 언어는 무엇인가를 담아내거나 실어 나르는 것에 만족한다.

회화가 이러한 역할에 머무는 한, 그것은 기껏해야 동질적 언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자의적이고 임의적인 장식의 기능을 맡을 뿐이다. 거대화 된 시각적 생산의 흐름 속에서 미술은 현상유지적인 제도의 한 켠에 머물러 있거나 타자 화 되어 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스펙터클이라는 상품으로 늘어선 현대는 결코 회화의 시대와 일치 되지 않는다. 오늘날 미술의 역할은 근대적 시각상이 재생산하는 문화에 부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유지하고 있는 권력적 속성을 폭로해야 한다. [구텐베르크 은하계]는 인쇄술 이후에 생겨난 중앙 집권적인 국가와 같은 집단화를 지적한다.

문자에 의한 이와 유사한 획일화 과정 없이는 시장이나 가격체계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과 관습을 동질화하는 현상과 분리될 수 없는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선형적 동질성의 확장이 오늘날 대량 생산소비 문화의 원형이 되었다. 대량판매의 시대는 상품의 질서만큼이나 미의 질서에 있어서도 세계적인 기준을 창출한다. 통일을 전진(진보)을 위한 조건이 된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탑재한 전위의 신화에서 모더니즘과 모더니티는 융화된다.

경험을 동질적인 것으로 가공 처리하는 기술 없이는 사회는 인간의 노력을 조직화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자연의 힘을 통제할 수도 없다. 구텐베르크 문화의 통합된 회화적 공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들고(상품화하고), 노동을 확장하고 저장하는 하나의 방식으로서의 화폐와 밀접하다. 재현주의에 호소하는 미술은 모든 것을 동질화시킴으로서 소비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권력에 대한 합의가 내재되어 있다. 맥루한은 이러한 과정이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단지 시각적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또한 재현적 체계의 한축을 형성하는 근대적 주체는 저주받은 예술가와 고독한 천재로 신비화되어 왔지만, 그 또한 소외된 현대의 대중들처럼 중심 집중적 권력체계의 말단에 존재하는 하나의 점에 불과하다. 현대 예술가는 시각의 한 지점으로 자신을 축소시키는 지배적 문화의 압력을 벗어나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출전 | 성산아트 2010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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