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원의 전사들2월 중순부터 한 달 간 뉴욕 첼시의 두산 갤러리에서 열리는 이승애 전은 수년간 국내의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선보여 왔던 괴물 시리즈의 또 다른 버전이다. 종을 확정지을 수 없는 기이한 생명체가 계속 등장하지만, 동양의 산수화 같은 분위기의 배경이 간헐적으로 들어가 있고, 도자기가 등장하는 차이가 있다. 폭설이 쏟아지고 매우 추운 날 그녀의 작업실에 방문해서 인지, 자석에 의지해 벽에 붙어있는 괴물들은 설산고원에서 서식하는 야생적 별종 같은 느낌을 주었다. 추울수록 웅크러드는 속세인과 달리, 희박하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 더욱 생의 에너지를 충전하고 힘을 발산하는 듯한 모습이다.
이승애의 작품은 환상적인 존재를 실재하는 것처럼 구현하는 완벽한 소묘술이 압권이다. 연필만으로 그려진 그림들은 마치 분류학이나 해부학 시간에 과학적인 정확성을 가해 옮기던 생물 도감 같은 이미지가 있다. 또한 진동하는 괴물의 촉수들 하나하나를 구현한 방식은 털끝하나 빠트리지 않은 조선시대의 초상화 같은 느낌도 준다. 자연주의적 정확성과 환상성이 절묘하게 결합된 그녀의 그림은 허구라고도 실제라고도 할 수 없는 애매함이 있다. 이 전시의 부제이자 괴물의 라틴어 어원 ‘monstrum’에 내포되어 있듯, 미지의 존재들은 불현듯 나타나고 보여 진다.
이 사납고 위협적인 존재들은 장난스런 악취미를 넘어서 누군가에게는 자신을 지켜주는 든든한 후원군 및 응원부대가 되어준다. 종이 위에서 활개 치는 야생적 별종들은 허구 속에 존재하는 실재보다 더한 실재감이 있다. 작은 박스 안에 담겨진 미라 시리즈는 고고학적, 또는 생물학적 표본처럼 언젠가 살아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듯하다. 그것은 예술이나 대중문화 보다 더 다양하고 기이한 자연적 소재들을 관찰해온, 어릴 적부터의 체험과 습관에 기인한 것이다. 그림을 그리기 전부터 동식물 도감을 많이 보아온 작가는 그 이미지들이 머릿속에 각인되어 익숙하여 안보고도 자유롭게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작업이란 이렇게 무의식에 입력된 자연주의적 모티브를 작가가 설정한 역할에 어울리게 바꿔보는 것에 해당된다. 그러나 이승애의 작품 속 무의식은 단지 재발견되는 것은 아니며,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단지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맞딱뜨려지는 것이다. 작품 [건투를 빈다]는 맹수가 긴 뿔을 가진 초식 동물을 사냥하는 듯한 이미지이다. 어떤 개체에서 뻗어 나온 지 알 수 없는 어지러운 촉수 중의 하나에서 뻗어 나온 깃발은 처절한 투쟁의 분위기를 북돋운다. 뼈 또는 기관 세포의 이미지, 희생물에서 흘러내리는 체액은 격렬함을 더해준다. 거기에서는 냉혹한 힘의 집행이 진행된다.

눈 덮인 바위산 숲 언덕배기 같은 배경과 같은 방향으로 그어진 사선들은 드라마틱한 힘의 흐름들을 강조한다. 작품 [완벽한 용기]는 희생물의 피를 입가에 흘리는 호랑이 얼굴, 일본 무사의 문신이 새겨진 몸통, 촉수를 늘어뜨린 용 같은 것이 합체된 양상이다. 밤에도 밝게 보는 올빼미들까지 배치된 화면은 강한 것들이 모여 극강의 힘을 발휘하려 한다. 이 괴물이 올라앉은 소나무와 그 아래의 산수풍경 같은 배경은 괴물의 동양적인 기원들이 선명하다. 동서양의 신화에는 공히 괴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번 전시의 작품에서 동쪽 지향성이 두드러진다.
작가는 중국의 전래 역사서 [산해경] 같은 책으로부터 상상력을 키워왔으며, 선과 악을 나누는 이원론적 사고에서 악역을 맡곤 하였던 서양적 괴물 대신에 정의로움과 길함, 힘을 주는 존재, 상서로운 존재의 화신들에 공감한다. 작품 속 기이한 이미지는 만화나 애니매이션 같은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하지만, 작가는 대중문화나 하위문화의 코드와 쉽게 빠져들지도 않고 공감도 안 된다고 말한다. 손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이미지의 범람의 시대에 붓도 아닌 연필만으로 고군분투하는 이승애의 회화는 고풍스러운 분위기마저 스며 있다. 작업에는 쓰고 남은 몽당연필들 모음과 지우개가 가득하다.
학부 때부터 고집해왔던 연필이라는 매체는 십수년이 넘는 실험을 거쳐 연필만으로 가능한 자유자재의 톤과 질감이 탄생했다. 동양적인 분위기 탓에 멀리서 보면 마치 먹으로 그려진 그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필기의 습관 때문에 연필이나 펜은 붓보다는 더욱 직접적인 매체인 연필은 몸과 마음을 가감 없이 필사할 수 있다. 연필은 지우개나 면봉, 또는 직접적인 손가락 터치와 더불어 톤을 조절한다. 결정적으로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쉽게 고칠 수 있는 연필은 유동적인 이미지가 펼쳐지기에 적절하다. 또한 연필의 짝이 되는 종이는 계속 연결해서 더 확장시킬 수 있다. 그녀에게 종이와 연필은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변적이다.
종이 위에 씌여진 글자처럼 흑백이 분명한 연필의 필체는 먹 같은 다양한 계열의 톤과 가변적인 스케일로 변화한다. 긴 산고의 시간을 보낸 작가가 스스로의 모습을 낱낱이 보여야 하는 전시회라는 긴장된 행사에서 괴물들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다. 작가의 출생연도가 제목인 작품 [1979]에는 바위 위에 한자로 새겨진 본인의 이름도 보인다. 사람의 흔적이 없는 원초의 자연처럼 빽빽한 숲, 그 사이를 나는 새들, 사납게 눈을 번뜩이는 맹금류, 그리고 순록이 비교적 온전한 모습이다. 이 작품의 등장 괴물들은 마치 동료들처럼 갈등 없이 배치되어 있다.
뱀의 혀 같은 나뭇가지들의 끝자락에서 도마뱀의 꼬리가 이어지고, 화면 중앙에서는 화산재 같은 밀도 높은 연기가 꾸득꾸득 올라오며, 신화 속에 등장할 법한 환상적인 새가 바위 위에 새겨진 이름을 주시한다. 도자기 위에 배치된 괴물들이 등장하는 [환상통] 시리즈는 국보급 도자기들이 변형 없이 장하여 사실감을 준다. 도자기가 암시하는 것은 사람들 각자 가지는 자신의 틀이다. 사람들은 그 틀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노력은 그 사람의 정체성과 격을 갖추게도 하지만, 스스로를 구속하기도 한다. 틀은 하나의 명품이 탄생하기 위해 수없이 깨어진다.
도자기 표면에서 막 빠져 나와 도자기 입구 위에 똬리를 틀고 있는 괴물들은 틀을 지켜주는 수호신에 해당 된다. 어슴프레 깔리는 안개와 연기의 연출은 마치 괴물들이 도자기 입구로부터 솟아 오른 듯이 보이게 한다. 괴물들은 도자기 표면에 그려진 문양과 조응한다. 가령 작품 [환상통2]에서 용무늬 도자기 위에 괴물은 용처럼 같은 방향을 잡고 포효하며, 포도 문양이 있는 도자기가 있는 작품 [환상통3]에는 한 쌍 처럼 보이는 두 괴물의 자태가 화기애애하다.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환상적 창조물을 도자기처럼 단단한 실체를 가진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동시에 이 시리즈는 재현(도자기)과 생성(괴물)을 대조시키면서 자신의 방향성을 보다 명확하게 예시한다.

이승애에게 괴물은 에고나 수퍼 에고가 길들여야 할 무의식이나 꿈에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그녀의 분신이 되었고, 약한 자신을 대신하여 타자들과 만나기도 한다. 그것은 눈썰미와 손끝의 기예에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온 몸의 기운과 영혼을 쏟아 넣은 산물이기에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 마치 스스로 낳고 키운 것 같은--여기에서 여성과 괴물의 연합은 내재적이다--자신의 모든 것이 작품에 씌워지기 때문에 작품은 스스로에게 주술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작업 삼매경 중에는 내가 그것을 그리는지, 그것이 나를 그리는지 모를 정도로 하나가 된다고 말한다.
명확히 분류되지 않는 경계 위의 존재로서 괴물은 중간 이하이거나 중간 이상의 의미를 지녀왔다. 일탈과 이상(異常)적 존재로서 괴물은 비천함(abjection)과 경이(wonder)의 양극 사이에서 진동한다. 이번 전시에서 이승애의 괴물은 보다 긍정적인 존재이다. 유기체적 통일성이 상실된 괴물은 그것이 가지는 해체적 에너지를 긍정적인 에너지로 간주할 때 악역을 벗어날 수 있다. 괴물이 가지는 변신의 능력은 또 다른 적응과 도전을 위한 힘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계열이나 구조에 의존하는 분류학의 한계를 위반하는 괴물은 그 자체가 생성의 화신이다. 이승애의 괴물은 비정상과 애매모호함을 넘어서 다양함과 특이함을 보여준다.
제각각의 고원에 서식하는 존재들이 작가가 마련한 고른 판 위에 모여 있다. 그것들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개념화한 ‘특이자’처럼, 모델이나 유일한 전범, 구현된 전형적 완성, 어떤 계열의 탁월한 항, 또는 절대적으로 조화로운 대응의 받침대가 아니다. 특이자는 개체도 종도 아니며 그저 변용태들만을 운반할 뿐이다. 선적 특성이 강한 이승애의 괴물들은 가장자리와 문턱에서 변모를 꾀한다. 변화무쌍한 선의 흐름은 쉴 새 없이 차원을 변조하면서 생성한다. 풍부하게 나타나는 동물의 이미지는 인간을 가로지르면서도 인간을 포함하는 그리고 동물 뿐 아니라 인간도 변용시키는 아주 특수한 ‘동물-되기’가 존재한다.
[천개의 고원]에 개념화된 동물-되기에는 언제나 무리가, 패거리가, 개체군이, 서식이 관련된다. 동물-되기는 마법의 문제이며, 인간은 전염을 통해 이 안으로 이행하거나 생성한다. 유혹의 형태를 띠고 상상 속에서 괴물들의 형태를 띠는 이유는 동물-되기는 예정된 궤도를 벗어난다. 그것은 되기, 즉 극적인 생성의 예이다. 되기는 단지 유사성이나 모방, 동일화를 넘어선다. 생성한다는 것은 계열을 따라 진보하는 것도 아니고 퇴행하는 것도 아니다. 되기는 상상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동물-되기는 꿈도 환상도 아니다. 되기는 완전히 실재적이다. 이 되기는 자신 외에는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되기는 진화 적어도 혈통이나 계통에 의한 진화는 아니다. 되기는 항상 계통과는 다른 질서에 속해있다. 되기는 결연과 관련된다. 이승애의 그림에는 이질적인 개체군들 사이에 일어나는 소통과 사건이 있다. 한 개체군의 끝자락에서 시작되는 또 다른 개체군들의 뿌리줄기적인 생성은 형식적 관계들의 비율을 맞추려 노력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생성은 욕망의 과정이다. 개체군 주변으로 이어지는 어지러운 선이나 연기같이 방출된 입자들에는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 같은 역동적 관계들이 존재 한다. 생성은 다수가 아닌 소수자 되기를 향한다. [천개의 고원]에 의하면 다수성은 상대적으로 더 큰 양이 아니라 어떤 상태나 표준, 가령 남성-어른-백인-인간 등을 의미한다.
그녀의 작품에서 관객을 생성으로 몰아가는 것은 예기치 않은 형태와 스케일로 변주되는 세부들이다. 선들은 재현의 업무에서 벗어나 돌연변이를 추동한다. 생성은 기원적 모델의 모방을 모델 없는 최초의 미메시스 그자체로 대신한다. 이승애의 괴물은 모델과 모방 사이에 설정된 이원적 구조가 해체되면서 현실과 허구 사이에 설정된 경계도 사라져 버린다. 작품 제목 중의 하나인 [환상통]이 증후 자체가 그렇다. 이 돌연변이 같은 존재들은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여 진화한 것도 아니고, 퇴행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역행이다. [천개의 고원]은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 나타나는 진화 형태를 역행이라고 정의한다. 되기는 역행적이며 이 역행은 창조적이다.
퇴행한다는 것은 덜 분화된 것으로 향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역행한다는 것은 자신의 고유한 선을 따라 주어진 여러 항들 사이에서 관계를 맺으면서 전개되는 하나의 블록을 형성한다. 퇴행이 아닌 창조적 역행은 신체 안에서 직접적으로 체험된 비인간성 그 자체를 증언하고 프로그램 된 신체 바깥에서 이루어지는 반자연적 결혼이다. 동물들과 함께 신체를 만드는 것, 즉 강렬함의 지대들에 의해 규정되는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드는 것이 문제이다. 이승애의 작품 속 괴물들은 무리들처럼 서로 모여 있기도 하는데, 무리는 동물의 실재인 동시에 인간의 동물-되기의 실재이다.
전염은 동물의 서식인 동시에 인간의 동물적 서식의 전파이다. 이승애의 작품에서 인간의 동물적 서식은 궁극적으로 전사의 이미지로 귀결된다. 전사는 가족과 국가의 외부에 존재하고 계통과 분류를 전복시킨다. 전사는 다양체, 신속함, 편재, 변신과 배반, 변용 역량을 내포하는 온갖 생성을 지닌 야수-인간들이 전쟁터를 활기 있게 만드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의하면 동양은 주체성이나 실체성에 근거한 개체화보다는 ‘이것임’에 의해 개체화를 더 많이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임이라는 것은 개체화된 배치 물 전체이다. 어느 시각, 어느 계절, 어느 분위기, 어느 공기, 어느 삶과 분리되지 않는 배치 물들 속에서 주체이기를 그치고 사건이 되는 것은 바로 동물 자신 또는 사람이다.
이것임은 시작도 끝도 기원도 목적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중간에 있다. 그것은 점들이 아니라 선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리좀이다. 리좀과 같은 번성하는 선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은 시작도 끝도 없는 표면을 유목하며, 깊은 뿌리가 내포하는 형식과 주체들로부터 탈주한다. 괴물의 일부가 되어 있는 다양한 패턴들의 이합집산은 이러한 탈주의 흐름을 예시한다. 수직 수평의 좌표계에 의존하는 점의 체계로부터 이탈하는 다선적 체계는 전쟁터 같은 판을 질주한다. 예측 불가능한 속도와 방향을 가지는 선들은 기원적인 점과 구별된다. 생성의 선은 시작도 끝도, 기원도 목적지도 없다. 생성의 선은 중간만을 갖는다. 중간은 평균치가 아니다. 그것은 가속운동이며 운동의 절대속도 이다. 생성은 언제나 중간에 있다. 이승애의 괴물 역시 중간에서만 생성되는 존재이다. 중간에서 파생되며 가속도를 내는 선은 중간적 존재들이 됨으로서 내용과 형식의 통일이 꾀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