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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초기‘해프닝(Happening)’에 관한 연구-1

윤진섭

한국의 초기‘해프닝(Happening)’에 관한 연구


1. 들어가는 말
지난 200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한국의 행위미술1967-2007](8. 24-10. 28)은 그동안 미술계의 변방에서 이루어진 행위미술1)이 제도권에 진입하게 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는 1994년에 열린 [민중미술 15년전]과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의 기획전 중에서 매우 인상적인 전시였다. 그 이유는 역사적으로 볼 때 행위미술이야말로 민중미술과 함께 기존의 미술 제도에 대해 강한‘안티(anti)’적 태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민중미술이‘정치적 아방가르드’2)로서 제도권 미술에 대한 이의제기였다고 한다면, 행위미술은 기존 미술의 언어에 대해 형식파괴적인 성격이 짙다는 점에서 비록 그 내용이나 지향하는 목표는 다르지만 그 성격에 있어서는 유사한 측면이 있다. 이른바 아방가르드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급진성은 이 두 경향을 관류하는 공통적 성격으로 기존의 미학을 해체하고 공격하는데 그 주요한 목적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1967년 이후 한국의 행위미술에 나타난 급진적 경향을 전위적3)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아방가르드 이론의 정전으로 간주되는 <아방가르드 예술론>4)을 쓴 레나토 포지올리(Renato Poggioli(1907-1963))에 의하면, 이념은 개인보다는 집단에 관계된 개념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이념을 ‘집단의 영혼상태’로 묘사한 바 있다. 그는 이념을 일종의 사회적 현상으로 간주하고, 넓은 의미에서 ‘한 사회에 맞서는 자기 진술의 주제 혹은 자기 방어의 수단’5)으로 간주한다.

즉, 이방가르드가 표방하는 이념은 “자체가 지지하고 표현하는 문화적, 예술적 선언들의 비사회적인, 또는 반사회적인 특징에 의존하는 사회적 현상”6)이란 것이다. 포지올리의 이러한 견해를 참고할 때, 한국 행위미술의 태동기인 1960년대 후반 이후에 나타난 집단적 시위의 양상들이 급진적이며 반사회적인 성격을 띠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어떤 사안을 놓고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는 개인이 모여 집단을 이룰 때 거기에는 합당한 공격 목표가 존재하는데, 약 40여 년에 걸친 한국 행위미술의 역사는 다양한 공격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의 행위미술은 집단적 형태를 띠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개인적인 활동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념의 집단화와 아울러 개인적인 발언이 행위미술의 족적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
문이다. 따라서 나는 이 글을 통해 레나토 포지올리가 전위예술의 특징으로 들고 있는 ‘호전적 자세, 비타협주의, 과감성, 도전의식, 시간과 전통에 대한 승리의 확신’ 등등 다양한 양상을 보이는 행위미술가들의 작업을 살펴보고 이들의 급진적인 태도가 화단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관해 고찰하고자 한다.

Ⅱ. 1960년대-해프닝(Happening)의 등장과 제도 미술에의 도전

흔히 한국 행위미술의 효시는 [청년작가연립전]의 회기 중인 1967년 12월 14일 오후 4시에 중앙공보관 제2전시실에서 실연된 <비닐우산과 촛불이 있는 해프닝>7)으로 알려져 있다. 미술평론가 오광수가 각본을 쓰고 <무동인>과 <신전> 멤버들이 실연한 이 해프닝은 비교적 단순한 내용의 것이었다. 열명의 남녀 행위자가 출연하여 비닐우산을 든 여자 행위자의 주변을 돌며 ‘새야 새야 파랑새야’를 노래한 뒤 비닐우산에 꽂힌 촛불을 끄고 우산을 짓밟는 동작으로 작품을 마감한 것이다.8)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볼 때, 이 해프닝이 급진적인 성격을 띠었다고는 볼 수 없다. 이는 당시 이 해프닝의 각본을 쓴 오광수의 인터뷰와 김미경의 의견에서도 드러난다. 오광수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노래가 “전봉준의 사회개혁 정신과 연관하여 의도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즉흥적으로 정한 것”이라고 말했으며, 김미경 역시 “이 해프닝에 한국의 정치, 사회적 의미를 직접 개입시켰다고 보기는 어렵다' 9)는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해프닝을 정치 내지는 사회적으로 해석, 노래가 상징하는 사회개혁성, 촛불이 상징하는 ‘순수한 인간정신’, 비닐우산이 상징하는 ‘핵우산’ 등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데,10) 나로선 그보다는 오히려 이 작품이 지닌 ‘놀이성’에 더 주목하고 싶다. 이 해프닝의 각본을 쓴 오광수의 진술 가운데 이 노래의 선택과 전봉준의 사회개혁 정신과는 관계가 없다는 대목과 즉흥적인 곡의 선택이 지닌 우연성, 그리고 해프닝을 할 때 즐겁게 웃고 있는 행위자들의 표정과 해프닝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산을 짓밟는 흥겨운 장면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이 해프닝을 당시의 암울한 정치 내지는 사회현실에 대한 심각한 고발의 일환으로 대했다기보다는 일종의 놀이의 장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짐작해 볼 수 있다. 물론 풍자는 가능하겠으나, 무엇보다 심각한 쟁점을 다루면서 즐겁게 웃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해 볼 때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오히려 [청년작가연립전] 참가 작가들이 벌인 가두시위11)다. 1967년 12월 11일 밤 10시, 그들은 피켓을 들고 서울의 도심에서 시위를 벌였다. 피켓의 내용은 ‘행동하는 화가’를 비롯하여‘좌상파 국전’,‘추상이후의 작품’,‘현대미술관이 없는 한국’,‘국가발전은 적극적 예술의 진흥책에서’,‘4억의 도박 국립종합박물관’등 주로 미술과 관련된 것이었다. 비록 피켓의 내용이 문화정책에 국한된 것이긴 했지만, 새로운 문화행정을 요구했다는 측면에서 사회참여(앙가주망)의 의의를 높이 사지 않을 수 없다. 즉, 이들에 의해 한국 현대미술사상 최초의 ‘행동으로서의 미술’내지는 정치적 아방가르드 로서 행동예술의 최초의 선례를 남긴 것이다.12)

무, 신전, 오리진 동인들이 벌인 이 가두시위는 이듬해에 국전개혁안13)을 낳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들의 행동이 그러한 사태를 가져왔다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으나, 당시 이 시위가 언론에 보도된 사실로 미루어볼 때,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만한 파장을 불러 일으켰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Ⅲ.<매스미디어의 유물>과 사회적 퍼포먼스

연립전 이후, 해프닝은 정찬승, 강국진, 정강자 등에 의해 몇 차례 더 지속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이들의 활동을 소개하기에 앞서 김구림에 관해 잠시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그야말로 19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동안 장르를 초월하여 전위적이며 실험적인 작업에 매진했기 때문이다.14) 이 글의 주제와 관련하여 살펴볼 김구림의 작품은 <매스미디어의 유물>(1969)과 <제4집단>과 연관된 그의 활동이다. <매스미디어의 유물>은 김구림이 김차섭과 같이 행한 공동작업이었다. 이 작품은 메일아트(Mail Art) 계열의 작품이지만,‘사회적 퍼포먼스(social performance)’의 성격도 지니고 있어 흥미로운 작업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9년 김구림은 김차섭과 함께 10월 10일 오전 10시 경 우편으로 100명의 작가, 미술평론가, 기자 앞으로 세 번에 걸쳐 총 300통의 편지를 발송했다. 먼저 보낸 두 통의 편지에는 빨강과 검정색 등 두 사람의 서로 다른 두 개의 지문이 찍힌 종이가 들어있었다. 지문이 찍힌 부분을 반으로 찢은 이 종이는 김구림과 김차섭 양인이 각각 따로 부친 것이다. 그 다음 날 날아온 두 사람 명의의 세 번째 편지 안에는 명함 크기의 종이에 “귀하는 매스미디어의 유물을 1주일 전에 감상하셨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15) 이 행위가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가 알기 위해서 좀 길지만 김구림의 증언을 인용한다.

“[국전] 심사가 열리던 10월, 긴 사각봉투를 200장, 누런 편지봉투를 100장 샀습니다. 또한 흰색 A4용지를 사서 내 엄지 지문을 찍고는 그것을 반이 되도록 쭉 찢었지요. 그렇게 찢은 종이를 사각봉투 안에 각각 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100장 단위로 하여 세 번에 걸쳐서 미술 관련 인사들에게 발송했습니다. 정확히 24시간 단위로 보내야 했기에 내가 직접 우체국에 가서 우편물을 몇 시에 배달하는지 일일이 확인했습니다. 물론 수취인만 기재했을 뿐 발신인은 없는 봉투들이었습니다. 그 다음부터 사건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무심코 사각봉투를 받은 사람들이 시뻘건 지문밖에 없는 종이를 보고 섬뜩한 기분이 들어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정확히 24시간 후 지문이 꼭 들어맞는 두 번째 편지를 받고는 공포감에 사로잡히는 겁니다. 사람들은 편지를 불빛에 비춰보기도 하고 물에 넣어보기도 하며 혹시 글씨가 나타날까 하고 별짓을 다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또 24시간 후 발신인 불명의편지봉투 안에 ”귀하는 <매스미디어의 유물(遺物)>을 1일 전에 감상하셨습니다. 김구림, 김차섭“이라고 인쇄된 명함을 보고 사람들은 이것이 일종의 작품이었음을 느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날보고 죽일 놈, 살릴 놈 하고 많이 혼냈더랬죠.”16)

우편시스템을 이용한 김구림과 김차섭 양인의 <매스미디어의 유물>은 비록 메일아트의 형식을 빈 것이지만, 그것이 불러일으킨 파장을 고려할 때 행위미술적 측면에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개념미술(Conceptual Art)의 성격을 띤 이 작품은 우편이란 정부의 공공시스템을 이용했다는 점에서 시간성과 공간성, 그리고 퍼포먼스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관객참여(audience participation)’가 두드러진 작업이다. 이 작업은 일정한 기간 내에 특정한 장소에 거주하는 제한된 관객들을 대상으로 참여를 유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행위미술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관객의 반응이다. 마치 요즈음 유행하고 있는 ‘보이스 피싱(Voice Phishing)’사기17)처럼, 겁에 질린 편지의 수신인들이 보인 다양한 반응들, 즉 섬뜩한 느낌이나 공포감 등은 공작정치가 횡행하던 당시의 암울한 사회상을 희화적(戱畵的)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아방가르드 예술의 심리학은 “집단의 심리학이기 때문에 문학적, 문화적, 예술적이기보다는 사회학적인 연구의 대상”18)이라는 레나토 포지올리의 발언을 상기시켜 주는 대목이다. 아방가르드가 어떻게 사회와 관계를 맺고 있는가 하는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우편예술과 같은 사회적 시스템을 이용한 행위미술이기 때문이다.

전위예술가의 급진적 사고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1970년에 결성된 ‘제4집단’이다. 이 단체가 결성된 70년대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포크송이 크게 유행을 하던 시절이었다. 신정부가 추진하는 근대화 정책 때문에 해외의 고급 두뇌들이 속속 귀국을 하는 가운데, 조국 근대화 운동이 범국가적으로 불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해외의 박사학위 취득 소식이 신문 지면을 장식한 것도 이 무렵의 풍속도 가운데 하나다. 4. 19와 5. 16이 야기한 사회적 혼란이 어느 정도 가라앉자 시중에는 ‘레저’니 ‘바캉스’와 같은 외래어들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매스컴은 은근히 대중의 소비심리를 부추기고 있었다.

1972년, 반포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조성되면서 본격적인 아파트 시대가 열렸지만, 그 이전에 이미 대학교수를 비롯한 아파트 입주자들을 중심으로 중산층 개념이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개인의 사생활 보장, 수세식 화장실로 대변되는 깨끗한 위생관념, 입식 주방 설비가 가져다 준 편리성 등 아파트 문화는 한 마디로 ‘모던 라이프’의 대명사였다. 도시문화, 그 중에서도 아파트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모던 라이프의 만끽은 대중에게 새로움이 곧 ‘모던 라이프’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나일론 양말로 대변되는 나일론 문화, 휘황한 네온사인의 무교동 ‘비어홀 문화’, 신신과 화신백화점으로 대표되는 소비문화는 충격적인 현대적 체험에 다름 아니었다. 19)

‘제4집단’이 결성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는 경제적인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던 반면, 정치적으로는 불안한 정국을 보이고 있었다. 군사 쿠테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7년 다시 대통령에 당선, 한 해 전에 공표한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야심차게 추진해 나갔다. 아울러 전주공업단지 기공을 필두로 구로동 수출공업단지 준공, 한국비료공장 준공과 같은 거대한 경제 프로젝트들이 속속 실행에 옮겨졌다. 외환보유고가 3억 달러를 넘어선 가운데 윤보선 신민당 대통령 후보를 110만 여 표 차이로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각의를 통해 대통령과 국무위원도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고친 관계법령을 공포, 물의를 빚었다.

같은 해 6월 8일에 실시한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당인 공화당은 총투표율 50.6%를 차지, 130석의 의석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이 선거는 전형적인 부정선거였다. 마침내 서울법대생들의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번진 부정선거 규탄 데모는 일 주일 뒤에는 31개 대학과 136개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어수선한 정국 하에서 중앙정보부는 공작정치의 산물인 동백림 사건을 발표, 사회를 충격에 빠트렸다. 윤이상, 이응노 등 국내외 교수, 학생, 예술인 등 315명이 관련된 대남공작단 사건이었다. 20)


1970년 8월, 장발과 미니스커트 단속이 주를 이루는 ‘퇴폐풍조 단속’이 시작된 이 무렵은 트윈 폴리오, 뚜아 에 무아, 라나 에 로스포와 같은 듀엣이나 트리오 형태의 ‘보컬 그룹’이 전성시대를 맞이한 한편, 이장희를 비롯하여 서유석, 김민기, 양희은과 같은 솔로 포크 싱어들이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21) ‘제4집단’은 서울 을지로에 위치한 소림다방에서 결성대회를 갖고 정식으로 출범했다. 1970년 6월 20일 정오의 일이었다. 창단식은 갑자기 울려 퍼지기 시작한 애국가에 맞춰 동인들이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려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면서 시작되었다.소울과 사이키 음악, 새소리, 파도소리 등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김구림이 선언서를 읽어나갔고, 목탁소리와 브람스의 교향곡으로 끝냈다. 22) 김구림, 정찬승, 방태수, 손일광 등이 참가한 ‘제4집단’은 8.15 광복절을 기해 사직공원에서 선언문을 발표하였는데, 그 중 핵심에 해당하는 ‘무체사상’과 관련된 부분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이것은 우주의 원체가 무체로서 일체를 이루고 있으며 무체의 유체화인 인간이 무체에서 출발하여 무체로 환원되는 새 인간 윤리의 표방이다.”23)

이 선언을 둘러싸고 전개된‘제4집단’의 활동 중에서 나의 관심을 끈 부분은 이들의 직제가 보여준 풍자성이다. 이들은 회장이란 평범한 직함대신 ‘통령’이란 명칭을 사용했는데, 김구림의 증언에 의하면 ‘통령’은 대통령에서 ‘대’자를 뺀 것으로 ‘대통령’이라고 할 경우 불경죄에 걸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아무튼 무체사상 아래 모인 이 단체는 통령인 김구림을 필두로 총령의 정찬승, 포령의 방태수(일명 방거지, 극단 ‘에저또’ 대표), 의령의 손일광(의상 디자이너) 등등 미술을 비롯하여 연극, 의상 등이 망라된 토탈아트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김구림은 ‘제4집단’ 중 ‘4’자의 사용과 관련하여 흥미있는 증언을 하고 있다. 그는 젊었을 당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혼자 작품에만 몰두했는데, 어느 날 작품을 혼자만 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의 성격에 따라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필요했던 그는 그런 연유로 1970년대 당시 모든 예술을 종합하는 공동작품을 위해 “각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 예술에 대한 토론을 하며 함께 하자고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집단의 이름을 만들어야 했는데, 한국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뭘까 생각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4’라는 숫자였습니다. 그래서 이런 미신부터 타파하고 싶은 생각에 ‘4’를 가져오고, ‘협회’라는 명칭 대신 ‘집단’이라는 말을 붙였습니다. 그리하여 ‘제4집단’이 탄생하여 내가 대표로 선출되고 ‘회장’이라는 명칭이 아닌 ‘통령’이라는 명칭으로 활동했습니다.' 24)

김구림이 회장에 해당하는 명칭을 ‘통령’으로 부른 뒤 그가 겪은 혹독한 시련은 체제에 대한 비판을 한 사람들을 쥐도 새도 모르게 ‘모처’로 끌고 가 고문을 일삼던 공안정국의 음습한 풍경을 대변해 준다. 다음은 그가 고초를 겪게 된 일화의 발단이다.

“우리는 광복절인 8월 15일에 사직공원에서 궐기대회25)를 갖고 한강 백사장에서 작품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사직공원에서 덕수궁까지 갔을 때 덕수궁 옆에 있는 파출소에서 형사들이 출동해 우리를 검거했습니다.” 26)

그렇게 해서 김구림은 밤새도록 심문을 받았다. 당시는 서슬 퍼런 박정희 정권의 치하였다. ‘4집단’이 결성된 이 해(1970년)에는 사상계 5월호에 ‘오적(五賊)’을 발표한 김지하가 박정희 정권의 부패상을 풍자한 것이 필화사건으로 번져 잡지사가 정간됨과 동시에 김지하를 비롯한 관계자들이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처럼 흉흉한 정국아래서 통령이란 직함은 사직당국의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그는 남대문경찰서에서 유치장 신세를 지며 밤새도록 심문을 받았다. 형사들은 제4집단’의 운영자금을 이북에서 지원받은 것이 아니냐, ‘집단’이란 명칭은 빨갱이에게 지령을 받아 정한 것이 아니냐.” 하며 닦달을 했다. 27)그는 모든 것이 다 예술 활동을 위한 것이라며 논리적으로 반박,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다. 다음 날, 남대문경찰서 서장이 그를 불렀다. 서장은 그에게 중국음식을 대접하며 극진하게 대했다.

그는 중국음식을 간신히 목구멍으로 넘기며 공포심에 젖었다. 사형을 시킬 때 극진하게 마지막 음식을 대접한다더니 자신이 바로 그 꼴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자 그는 창문조차 없는 죄수호송차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갔다. 그는 “꼼짝없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나보다.”하고 잔뜩 겁을 집어먹었다고 했다. 그가 간 곳은 재판정이었다. 거기서 간단한 재판을 받았는데 판사가 그를 석방했다. 이 사건으로 대구에 사는 그의 부친까지 ‘모처’의 요원들로부터 고초를 겪는 수난을 당했다. 경찰에서 풀려난 뒤에도 그에겐 늘 형사들이 따라붙었다. 그는 하는 수 없이 결성된 지 두 달도 채 못돼 기자간담회를 열어 ‘제4집단’ 해체선언을 해야만 했다. 28)

이 웃지 못 할 한편의 일화는 공안정국 치하에서 겪지 않으면 안 되었던 에술가들의 수난을 생생하게보여준다. 하지만 ‘오적’ 사건으로 인하여 사형언도까지 받은 김지하 시인의 경우에 비하면 화가인 김구림의 수난은 약과에 불과했다. 문학의 급진성이 생명을 담보할 정도로 처절했던 것임에 비해 미술계는 그런 사례가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전과 미협 중심의 화단은 정치참여를 스스로 금기시했으며, 오로지 60년대의 해프닝을 주도한 극소수의 작가들만이 문화비판적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적극적인 것은 아니어서 급진적인 ‘정치적 아방가르드’라고 부르기에는 현저히 미흡했다.30)

Ⅳ. <한강변의 타살>과 문화 테러리즘

1968년 10 17일 오후 4시,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 세 명의 작가는 제2한강교 아래에서 <한강변의 타살>이란 제목의 해프닝을 선보였다. 행위자들은 자신의 몸이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덩이를 판 다음, 색 비닐을 목을 제외한 몸에 감고 구덩이 속으로 들어갔다. 행위자가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자 밖에 있던 사람들 중 일부가 삽으로 흙을 구덩이 속에 밀어 넣어 색 비닐을 목에 두른 행위자의 목만 남기고 구덩이를 채웠다. 주변에서 이를 지켜보던 관객들이 이들의 머리 위로 양동이에 가득 든 물을 쏟아 부었다. 얼마 후, 행위자들은 구덩이에서 땅으로 나와 중앙에 머리가 들어가게끔 커다란 구멍이 뚫린 색 비닐을 썼다. 그것은 몸의 앞뒤로 길게 늘어져 그 안에 글을 쓸 수 있도록 고안된 것이었다.

세 사람의 행위자는 비닐 위에 ‘문화 사기꾼’, ‘문화실명자’, ‘문화기피자’, ‘문화부정축재자’, ‘문화곡예사’ 등의 문구를 흰색의 페인트로 서로 써주었다. 서로 다른 문구를 쓴 행위자들은 그것을 읽은 다음 모아 태우는 화형식을 갖고 나서 땅에 파묻었다.31) 여기서 보이는 ‘문화사기꾼’은 사이비 작가를, ‘문화실명자’는 문명공포증 환자를, ‘문화기피자’는 관념론자인 19세기적 현대인을, ‘문화부정축재자’는 사이비 대가를, ‘문화곡예사’는 사실에서 추상으로, 추상에서 사실로 왔다 갔다 하는 시대미학의 편승자의 의미를 지닌다. 32)

당시 해프닝을 통해 이들이 보인 행태는 정국을 비판하는 정치적 내용이라기보다는 문화예 술에 초점을 둔 문화비판적인 측면이 강했다. 그것은 내용적으로 볼 때 [청년작가연립전] 멤버들이 거리에서 행한 가두시위에 가까운 것이었다. [청년작가연립전] 멤버들의 손에 들린 피켓의 내용이 미술을 둘러싼 문화행정에 대한 비판에 치중했던 것처럼 이들 역시 당대 문화의 허구성을 비판하는데 주력했다. 당시의 사회적 환경이 삼엄한 공안정국의 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구속을 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정권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때는 오히려 미술인들이 장발이나 미니스커트 등 소위 퇴폐풍조 등의 조성을 이유로 경범죄 처벌을 받을지언정 작품의 내용으로 구속되는 사례는 매우 드물었다.

당시 해프닝을 주도한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의 행위는 당시의 보편적인 기준으로 보면 급진적으로 보였지만, 문학의 래디컬리즘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이었다. 문학 분야에서는 70년대 초반에 이미 참여문학의 기류가 형성되고 있었지만, 33) 국전과 모더니즘으로 양분된 미술계는 체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프닝이 주류미술에 포함되기는 어려웠다. 따라서 행위미술은 제도권 밖에서 벌어진 일과성 해프닝 정도로 치부되는 가운데 극소수의 작가들에 의해 명맥을 이어갔다. 김구림을 비롯하여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등은 행위미술의 1세대로 척박했던 당시의 예술 환경에서 행위미술을 주도한 작가들이다.

<한강변의 타살>은 정치적 내지는 사회적 데먼스트레이션이라기보다는 타성에 젖어 그릇된 행태를 보이고 있던 기성 미술계를 겨냥한 문화비판적 성격이 짙은 시위였다. 아마도 그들에게 어울리는 합당한 수식어는 ‘문화 테러리스트’일 것이다. 그들의 행위는 그런 점에서 본다면 급진적이다. 비록 공격의 목표가 국전을 겨냥한 것이긴 했지만, ‘사기꾼’, ‘기피자’, ‘부정축재자’ 등등 그들이 사용한 단어의 이면에는 당시의 사회상이 짙게 깔려 있다. 그것은 이른바 군대 기피자를 비롯하여 경제 사기꾼, 정치적 부정축재자와 같은 사회의 기생충을 환유하는 사회적 비판의 형식을 띤다. 문화부정축제자의 정체는 국전심사를 통해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한 ‘사이비 대가’일 수 있는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정치적 힘을 빌려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를 한 부정축재자에 대한 풍자인 동시에 고발인 것이다.

그들은 사람을 매장하고 그 위에 물을 끼얹는 행위를 통해 사회에서 부정을 몰아내고자 하는 의식(儀式)을 집전한 것이다. 그들은 앞서 인용한 문장들이 적힌 비닐을 불태우는 행위를 통해 부정부패를 사회에서 몰아내고자 하는 자신들의 열망을 드러냈다. 그러나 해프닝은 그런 그들의 의도를 대중에게 보주기에는 지나치게 난해한 예술적 형식이었다. “바람 부는 한강다리 밑에서 비닐에 불을 지르곤 “죽이고 싶다. 모두!”라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실험미술가들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이해가 가지 않는 듯 눈만 껌벅거리고 있었다.”34)는 한 신문의 보도는 그 때나 지금이나 행위미술과 대중 사이에 여전히 괴리감이 존재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Ⅴ.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과 ‘제4집단’

1970년 8월 15일 오전, ‘기성문화를 장례 지내자’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일단의 젊은이들이 광복 25주년을 맞아 사직공원으로 발길을 향했다. 히피 스타일의 복장에 긴 머리의 정찬승과 손일광, ‘제4집단’의 대표(통령)인 김구림, 그리고 정강자 등이었다.

‘제4집단’의 대표(통령)인 김구림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는 미국의 팝송을 비롯한 외래문화가 범람하여 우리의 문화적 정체성이 심각하게 위협을 받던 때라 이에 대한 민족적 각성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었다. 누군가가 나서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문화적 자존심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제4집단’이 나서기로 결의를 한 것이다.35) <기성문화예술의 장례식>이라 이름 붙여진 이것은 이보다 약 두 달 앞선 6월 20일, 당시 을지로에 있는 소림다방에서 결성대회를 가진 <제4집단>이 첫 번째로 마련한 행사였다. 이들은 비록 외세에 의한 타율적 해방이긴 했지만 ‘8. 15 해방’이 지닌 의의를 높이 사 이 날 사직공원에서 행사를 갖기로 결정을 보았다. 이들은 태극기, ‘무체사상’을 의미하는 백기와 함께 관 1개와 생화를 준비하였다. 이율곡동상이 있는 행사장 주변에는 ‘제4집단’의 회원들은 물론 마침 광복절을 맞이하여 공원에 놀러 나온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준비를 마치자 이들은 먼저 국기에 대한 경례와 순국선열에 대한 묵념을 하고 ‘제4집단’의 강령을 복창한 다음 ‘문화예술의 장례를 위한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이윽고 행사를 마친 이들은 관에 선언문을 넣고 모래를 채운 뒤 그 위에 꽃과 태극기를 덮은 다음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태극기와 흰 깃발을 든 정강자가 앞장을 섰고 그 뒤를 김구림이 흰 깃발을 들고 따랐다. 관을 든 손일광과 정찬승이 바로 김구림의 뒤를 이었으며, 그 뒤를 ‘제4집단’의 회원들과 호기심을 느낀 시민들 일부가 따라갔다. 그러나 행렬은 그다지 멀리 가지 못했다. 행렬이 광화문을 지나 덕수궁 근처에 있는 국회의사당 앞에 이르렀을 때, 이를 의아하게 생각한 경찰관이 이들을 불러 세웠다. 이들은 애초에 한강에 가서 관을 땅에 묻기로 계획을 세웠지만,36) 중도에 그만 둘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렇게 해서 태평로파출소로 연행된 그들은 얼마 후 다시 남대문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영등포구치소로 넘겨졌다. 이들은 거기서 즉결재판을 받았는데, 죄목은 ‘통행방해’와 ‘도로교통법 위반’이었다. 37)

김구림에 의하면 원래 이 행사의 계획은 사직공원에서 출발하여 광화문을 거쳐 남대문과 용산을 지나 제1한강교 밑 백사장으로 가는 것이었다고 한다. 거기서 관을 땅에 묻으면 오랜 세월이 지나 지형이 변하게 되는데 그리되면 오염된 문화를 자연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그 당시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 문화적 데먼스트레이션은 중도에 행위자들이 연행돼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여기서 살펴볼 것은 이러한 일련의 행위가 지닌 문화적 함의이다. 관을 든 행렬이 광화문 근처를 지나갈 때, 행인들의 비난과 야유를 들었다는 정강자의 증언은 당시의 해프닝이 대중에게 예술로 받아들여지기 보다는 일종의 ‘미친 짓거리’ 쯤으로 인식됐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는 대중과 아방가르드 예술과의 괴리를 단적으로 말해주는 것으로 오르테가 이 가세트(Ortega y Gaseet)가 밝힌 것처럼, 전위예술에 대한 대중의 뿌리깊은 불신과 혐오에 기인한다. 오르테가에 의하면 전위예술39)의 특징은 비통속성인 바, 이는 그저 우연히 그런 것이 아니라 ‘본질적 숙명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전위예술이 표방하는 새로운 형식과 기법은 대중이 보기에 매우 낯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일반화되기까지에는 일정한 검증기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 사이에 예술가와 대중 간에는 이해가 맞지 않는 데서 오는 마찰과 오해가 끊임없이 발생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어떤 작품에 대해 ‘평판이 좋지 않다는 것과 비통속적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개념’이라고 못을 박는다. 40)

아방가르드의 낯선 예술 형식은 대중을 당혹케 한다. 저게 도대체 뭐란 말인가. 행위미술을 예로 들어 말하자면 길거리에서 괴상한 짓거리를 하는 저 사람들의 특이한 복장과 행위는 대체 뭐란 말인가.

‘제4집단’의 행렬을 막은 경찰관이 보인 반응은 이의 한 예다. 이를 상상하여 재구성하면 대략 다음과 같은 장면이 될 것이다.

경 찰:“(행렬 가운데 대표인 가장 괴상해 보이는 정찬승을 보며) 여보쇼. 이게 대체 뭐하는 거요?'

정찬승:“왜 그러십니까? 이건 해프닝인데요.”

경 찰:“해프닝? 해프닝이 대체 뭐 하는 거요?”

정찬승:“해프닝이란 말이죠. 그러니깐 뭐랄까, 일상공간에서 어떤 계획된 사건을 통해 사물 의 존재감을 새롭게 드러내자는 건데.......”

경 찰:“(좀 듣다가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듯 관을 발로 툭 차며) 여보, 제발 웃기지 마쇼.“ 41)

경찰이 보낸 이 야유는 오르테가도 지적한 것처럼 전위예술에 대한 깊은 불신과 혐오에 기인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전위예술가라고 자처하는 이들에게서 모종의 모멸감을 느꼈을 지도 모른다. 그런 모멸감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우리는 여기서 “아방가르드 예술의 심리학은 집단의 심리학이기 때문에 문학적, 문화적, 예술적이기보다는 차라리 사회학적 연구의 대상”이라고 한 포지올리의 말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전위예술과 대중, 곧 사회와의 관계는 오르테가가 일찍이 통찰한 것처럼 전위예술이 ‘대중이라는 적’을 갖게 되기 때문에 이들 간의 마찰은 필연적이지 않을 수 없다. 42)

Ⅵ. 아방가르드와 ‘선택된 소수’의 역할

전위주의자들은 첨단적인 것을 좋아한다. 전위예술가들의 본성인 새로움에 대한 추구는 그러한 예술가들로 하여금 예술의 경계의 끝에 서서 예술과 예술 아닌 것에 대해 ‘실험’을 하고 그럼으로써 이제까지 가보지 못한 미지의 새로운 지역을 탐사하게 만든다. 이들을 가리켜 ‘선택된 소수(selected minority)’라고 부를 수 있다면, 사회적 전망과 관련하여 그들에겐 중요한 사명이 부여된다. 창조력을 통해 사회를 개조하고 대중에게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 그것이다. 그러한 이유에서 전위주의자들은 때로 ‘초인’ 또는 ‘프로메테우스적인 모험가’등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에 대해 도널드 커스핏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부르주아 사회의 억압적이며 부패한 모든 것들에 대해 영웅적인 저항을 실천하는 아방가르디스트들은 겁많은 목자들로 둘러싸인 세계에 대해 맹목을 불살라 버릴 수 있는 새로운 불과 통찰력을 제공하는 개인들이자 위험을 기꺼이 떠맡은 자들이다. 예술가들은 창조력을 통하여 늘 그렇고 그런 일상에 젖어있는 평범한 대중에게 삶의 고귀한 감정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지각의 약속된 땅으로 인도하는 일종의 모세이며 또한 횃불과 같은 존재로 비쳐진다.” 43)

전위예술가의 급진적 행동 양식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행동주의야말로 아방가르드 운동의 알파요 오메가다. 행동이 결여된 아방가르드는 바퀴없는 수레와 같다. 강령은 전위주의자들을 직접 행동하게 하는 지침이자 교시와 같은 것이다. 전위예술가는 반항을 전문으로 하며 타성에 빠졌거나 부패한 개인이나 집단을 공격한다. 이 적대주의(antagonism)는 행동주의와 짝을 이루며 늘 공격 목표의 탐색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 공격의 대상은 보수적인 아카데미일 수도 있고 때로는 전통일 수도 있다. 또한 경우에 따라서 전위주의자가 적대감을 품는 대상은 권위가 실추된 대가나 흔히 공중이라고 부르는 집단적 개인이 되는 수도 있다. 그런 적대감의 정신이 어떻게 나타나든 그 정신은 아방가르드 운동의 항구적인 특징적 경향을 나타낸다. 44)

이런 관점에서 봤을 때, 1970년대 초반 한국의 전위예술가들은 행동양식에 있어선 ‘래디컬’한 측면도 있었지만, 대체로 심약했다..45) 이들을 가리켜 ‘선택된 소수’로 선뜻 규정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 점에 기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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