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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은, 이보람 / 핑크 빛 사랑 또는 죽음의 무대

이선영


핑크 빛 사랑 또는 죽음의 무대
손정은 전, 2.10--3.13, 성곡미술관 | 이보람전, 3.4--3.23, 송은 아트큐브


손정은과 이보람의 전시는 멀찍이서 볼 때는 핑크빛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그들의 핑크빛에는 통상적으로 기대되는 바의 귀여움이나 따스함과 거리가 있다. 현실이나 상상, 그리고 상징의 세계에서 분홍과 여성의 관계는 각별하기에 이러한 거리는 더 멀게 느껴진다. 피비린내 가득한 그들의 핑크는 차갑고 냉혹하며, 그 느낌의 연장선 속에서만 환상적이다. 이들의 작품에는 명확한 적대세력이 생략된 채로 미시적이면서도 거시적인 전쟁이 벌어진다.

불균형한 힘들 사이의 관계가 자아내는 매혹적이면서도 잔혹한 풍경은 내밀한 에로티즘부터 총력전까지 이른다. 손정은 전에서 메인 전시 공간 한가운데 놓인 붉은 침대나 이보람 전에서 전시장 중앙 바닥에 죽 나열된 시체 그림들은, 단순한 조형적 대상이기 보다는, 무엇인가에 바쳐진 제단 같은 숭고한 느낌을 준다. 묶인 남성이 등장하는 손정은의 작품에서는 사도매저키즘적인 사랑이, 전쟁이나 재난의 희생자들이 등장하는 이보람의 작품에서는 희생양이라는 주제가 있다. 맹목적이고 가차 없다는 점에서 미와도 거리가 멀지 않은 잔혹한 힘들은 미소년과 무고한 아이들을 관통한다.

격렬하게 변형된 대상들, 즉 희생물들은 비천함과 숭고함 사이를 진동한다. 하나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죽음이지만, 이들에게 사랑과 죽음의 거리는 매우 가깝다. 그 거리를 단축시키는 것은 바로 광기이다. 이들의 핑크 빛 사랑 또는 죽음의 무대에는 역설이 가득하다. 극단으로까지 흐르는 여성 욕망의 대상으로 호출된 남성이 출몰하는 손정은의 작품이나, 직시하기 힘든 죽음의 기호들을 관객 앞에 적나라하게 들이대는 이보람의 작품은, 가부장적 권력부터 제국의 폭력에 이르는 어떤 힘과 그에 대한 여성으로서의 비판이 포함된다.

그래서 이들은 작품은 가상적이거나 실제적 폭력에 대한 치유의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판과 치유라는 관점으로 그들의 작품을 정리하는 것만으로 ‘명명할 수 없는 풍경’(손정은 전 부제) 너머의 검은 구멍이나 ‘cut-out’(이보람 전 부제)된 현실의 하얀 구멍을 채울 수 있을까. 부정과 비판의 의식만으로 그렇게 집요한 형상화가 가능할까. 거기에는 역겨움이 욕망의 이면이라는 것을 증거 하는 몸의 현존이 선명하다. 이들 작품에서 사랑으로부터 죽음에 이르는 감성의 스펙트럼, 그 기저에 흐르는 욕망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성곡 미술관의 넓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한 손정은 전은 ‘현장’, ‘무대’, ‘코러스’라는 3개의 장으로 구분된다. ‘현장’ 입구에는 ‘the easter boys; 너는 젊고 아름답다. 나는 너를 사랑 한다’는 말이 씌여 있다. 젊고 아름다운 이성과의 달콤한 사랑을 기대했던 관객이 이 방을 나가면서 다시 읽게 되는 이 문구는 간담 서늘한 의미로 변형된다. 거기에는 온통 이리저리 묶이고 피 흘리는 연인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포박된 몸은 쇠사슬이 아니라 상처를 치유하는 용도로도 쓰일 법한 붕대들로 싸여있으며, 그것을 물들이는 것은 핏물인지 꽃물인지 알 수 없는 애매함으로 연출된다. 흐드러지는 봄기운을 흉내내는 가짜 꽃나무와 새처럼, 가상적 상황으로 가득한 이 음침한 장소에서 사랑의 유희는 무한정 늘어나 있다.

여기의 사랑에 내재된 폭력성은, 그것이 상호성이 아니라 일방적인 강제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 있다. 이 압박감은 사랑을 상호간의 투명한 소통이 아니라, 불투명한 기호의 해석으로 남겨둔다. 현장을 채우는 이미지의 대다수가 연극적으로 연출된 스냅 사진이라는 점은 서스펜스와 추리를 강화한다. 상상 가능한 가학 행위를 잔뜩 수집해 놓은 사진들은 불가능한 소유와 집착의 흔적들이다. 장면들은 부조리한 수집품들처럼 연속적이지도 단절적이지도 않고 계열을 이루며 무한정 추가될 뿐이다. 가상의 유희를 주관하는 전능한 주체는 타자와 하나가 된다는, 사랑에 내걸린 명분을 거부 또는 회피한다. 타자와 대결하고 그를 대상화시키는 주체는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 있다. 그러나 이 감옥이 주체를 불행하게 하는 것만은 아니다.

위층 전시실에 펼쳐진 ‘무대’는 외설적인 사랑을 재료로 무엇인가를 생산하는 실험실 또는 연금술의 장이다. 여기에서 사랑은 상상적 연출을 넘어 유사 과학적인 방식을 통해 분석되고 기술된다. 이 무대에서도 고독한 사랑은 계속되지만, 가혹함의 정도는 더욱 커진다. 사랑의 대상은 더욱 잘게 잘려지며, 그나마의 온기도 잃고 색 바랜 파편들로 물화된다. 가령 작품 [그 남자의 초상]은 1층 전시장에서처럼 눈을 가린 정도가 아니라, 비닐로 머리를 칭칭 감은 남자를 보여준다. 사랑의 포로는 번호판을 단 죄수 같은 포즈를 취한다.

그는 극형에 처해진다. 여기에서 남녀 간의 전쟁 같은 사랑은 죽음을 통해서만 화해할 듯하다. 손정은의 작품은 에로티즘과 죽음의 가까움을 강조했던 조르주 바타이유의 주제를 떠오르게 한다. 작품 [외설적인 사랑]은 박제한 꽃과 생물, 엿, 꽃물 드로잉 등을 뒤섞어 불길한 수집품 목록을 늘려 나간다. 1층 전시장의 사진들이 진실을 깨닫기 직전에 멈춰버린 환상들이라면, 2층의 설치물은 이 얼어붙은 이미지의 입체 버전이다.

그러나 평면이든 입체든 그것들 모두 거세된 현실을 위장하는 물신이라는 점은 마찬가지이다. 철제기구들과 센서로 작동하는 선풍기 등은 영문 모르는 방문객을 공범자로 만든다. 오래 묵은 술처럼 보존액 속에 담긴 생체 조각과 식물은 사랑의 표본으로 보인다. 상징적인 쌍을 이루는 물질들은 어떤 절정의 상황에서 멈춘 채 영구 보존되어 있다. 분출된 정액으로 미끌거리는 잘린 남근상들과 양손으로 감싸인 여성의 성기는 보존액 속에 담겨진 고색창연한 표본들이 상징하는 바를 암시한다.




마지막 장인 ‘코러스’는 작품 [혀가 잘린 여인들의 노래]로 시작한다. 입을 쥐어뜯긴 여성들이 텅 빈 눈으로 상징계로 진입하지 못해 ‘명명할 수 없는 풍경’이 되어 떠도는 것들을 우울하게 응시한다. 피를 꽃으로 변형시키는 모성적 마술을 통해 남녀 간의 전쟁은 화해를 시도한다. 작품 [베일을 쓴 아버지의 초상]에서 금지와 금기를 통해서 사랑을 왜곡시키는 가부장적 기념비는 꽃물 들인 천으로 감싸인다. 이 천들은 모성적이다. 장미꽃과 명주로 된 천들을 빨래처럼 널어놓은 작품 [어머니의 이불]이 의미하는 바가 그것이다.

이보람의 작품에서 불균형한 관계에서 비롯된 암묵적 전쟁은 거시적 차원으로 나타난다. 대량살상이나 대재난의 결과로부터 비롯된 장면들을 오려내서 작품 소재로 삼는 것은 작가에게 다소간의 죄책감을 안겨 준다. 참극의 압도적인 묘사는 이러한 참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식의 계몽주의적 고발정신과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시체로 변해가는 신체들에 점점이 박힌 붉은 점들과 흘러내리는 분홍색 선들은 석고상같이 탈색된 피부 위에 아로새겨진 아름다운 무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작품 제목에 병기된 것처럼 ‘천에 쌓인 죽은 아이’는 ‘분홍과 빨강’ 간의 조화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이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 비탄에 빠진 사람들을 남겨 놓은 채 오려진 하얀 실루엣은 방금 전까지 숨 쉬던 몸뚱이를 창백한 유령처럼 만들며, 작품의 소재가 되기 위해 정리될 바탕처럼 균질적인 표면으로 표백 또는 중성화된다. 피 흘리는 희생물에서 야기되는 집단적 죄책감과 이를 통해 형성되는 존재 간 연속의 체험은 종교적인 아우라 까지 풍긴다. 희생물은 신성시되어 제단에 올려 진다. 쓰러진 희생물을 신화화하는 힘은, 시체를 일으켜 세우는 지지대처럼 보이는 붓들에도 충만하다. 그 옆에 있는 수많은 절단된 손가락들은 작가에게 무조건적인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는 예술을 은유한다. 희생은 또 다른 전쟁터인 작업실에서도 이루어진다.

희생이라는 주제에 내포된 성스러움과 핏빛 탐미주의와의 거리가 먼 것은 아니다. 역사 자체가 전쟁의 역사임을 염두에 둘 때, 이보람의 작품은 인간 사회의 질서가 유지되기 위해서 죄 없고 힘없는 자들이 죽어가야 했던 희생양의 주제와 밀접하다. 거기에는 이 고대적 주제의 기독교 판인 피에타, 애도, 십자가에서 내려짐과 같은 성화의 형식이 있다. 희생의 가혹함의 이면에는 신성함이 있는데, 양가감정 사이에서 요동치는 희열은 성과 종교와 예술을 이어주는 고리이다. 자신을 채찍으로 치는 수도승의 신비적 비전, 서로 학대하는 성적 파트너들의 환몽, 받을 것이라는 기대 없이 예술 또는 혁명에 무한히 헌신하는 이들이 언뜻 조우하는 ‘절대적이고도 내밀한 체험’(바타이유) 사이를 명확히 구별할 기준은 없다.

경계를 거부하는 이러한 체험들은 무엇보다도 삶과 죽음을 근접시킨다. 보도 사진으로부터 출발한 이보람의 작품은 실제 사건의 맥락을 삭제하고 괄호 침으로서, 죽음이 가지는 보다 추상적인 의미, 즉 무한한 소모를 강조한다. 조르주 바타이유는 [에로티즘의 역사]에서 우주의 차원에서 보면 가처분 에너지는 무한하며 그것은 얼마든지 소모가능하다고 본다. 그에 의하면 잉여 에너지를 낭비하는(파괴하는) 것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에로티즘, 사치품들 그리고 축제의 한 부분으로 오락들이며, 마지막으로는 전쟁이다. 손정은과 이보람의 작품은 축적된 에너지가 대가없이 상실되고 소모되는 또 다른 경제를 성으로부터 전쟁에 이르는 차원으로 보여준다.

출전 | 아트 인 컬쳐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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