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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안 랩소디, 역사와 기억의 몽타주

고충환

코리안 랩소디, 역사와 기억의 몽타주


고충환(미술평론가)


이번 전시(삼성 미술관 리움. 3.17-6.5)는 미술사의 시각에서 한국근현대사를 조망한다. 한국근현대사를 크게 구한말에서 해방 이전까지와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의 두 단락으로 구분했는데, 단순히 역사적인 사건을 연대기적으로 나열하는 대신 과거와 현재가 긴밀하게 만나지게 했다. 현재적 과거와 과거적 현재를 날실과 씨실 삼아 긴밀하게 직조해낸 것이다. 역사적인 기록과 그 기록이 불러일으킨 상상력, 그리고 실제서사와 그 서사가 불러온 기억의 서사를 유기적으로 연속시킨 일종의 몽타주 기법을 적용해 단순히 역사를 재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여실한 현재, 살아있는 현재로서 역사를 실감하게끔 의도한 것이다.

구한말에서 해방 이전까지

일제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박생광)과 동학농민운동(서용선)과 같은 외세의 국권 침탈과 이에 대한 저항과 더불어 조선은 개항을 맞는다. 당시 제작된 우끼요에는 조선을 먹잇감 삼아 각축을 벌이던 외세의 치열했던 정세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구술사의 형식을 빌려 이상현이 기록한 영상물 <조선의 낙조>는 조선황실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엿보게 하고, 휴버트 보스가 그린 <서울풍경>은 타자의 눈에 비친 낯설고 이국적인 풍경을 보는 것 같다.
그런가하면 모더니즘 시의 효시로 알려진 <오감도>의 시인 이상은 오리무중의 언어놀음으로 난세를 표상하고, 무용가 최승희는 춤으로 시대의 시름을 잊는다. 그리고 소위 향토적 서정주의로 나타난 목가적인 풍경화에 그려진 이상향이 당시 시대적 무력감을 해소하거나 회피하기 위한 일종의 도피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이인성, 김기창). 그런가하면 1920년대 조선일보에 연재된 안석주의 만평을 팝아트로 재현한 이동기의 <모던 걸 모던 보이>나 이응노가 그린 <거리풍경- 양색시>에서는 구세대와 신세대가 교차하고 충돌하는 생활사의 단면과 함께, 당시 보통사람들의 눈에 비친 신세대의 이질적이고 어색한 모습이 여실하다. 이런 과도기적인 이질감은 여자의 몸을 금기시하던 풍속 역시 예외일 수가 없는데, 아카데미즘의 미명 하에 그려진 나체화가 당시의 이런 성 풍속과 비교된다(나혜석, 오지호).
그리고 흔히 사진 특히 다큐멘터리나 르포 사진은 현실 그대로를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고, 진실을 담보한 것으로 믿어지고, 객관적 시선을 견지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일제는 사진에 대한 이런 믿음과 신뢰를 이용해 사진을 조선식민화 정책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한다. 사진 속에서 당시 조선을 무기력한 타자로 그려 이를 기정사실화하고 널리 퍼트림으로써 근대화를 이식하는 과정으로 침략을 미화한 것이다. 이경민이 기획한 일련의 사진 아카이브는 이처럼 사진을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재정의하게 해준다. 사진은 합성사진 이전부터 진즉에 거짓말을 해왔다는 사실을, 선전을 위한 도구로서 전용돼 왔다는 사실을 새삼 주지시킨다.

해방 이후부터 현재까지

이쾌대의 <해방고지>는 해방에 대한 염원을 스펙터클한 화면에 담아내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장을 열었다. 이처럼 해방을 맞았지만 정국은 어수선하기만 하다. 김동유의 이중 초상화는 이승만과 김구의 초상을 오버랩시켜 당시 첨예하게 충돌했던 정치적 이해관계를 엿보게 한다. 그 이해관계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무고한 민간인이 빨갱이로 몰려 희생된 제주 4.3사건을 불러오기도 했다(강요배의 한라산 자락의 사람들).그리고 6.25가 발발하고, 전쟁은 아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실린 노모의 기억으로 재생되고(구본창의 어머니 전상서), 코믹하고 잔혹한 한편의 현대판 코미디로 되살아난다(조습의 그 날이 오면).
그리고 백기영은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책적인(경제적인?) 이유로 독일에 이주한 이주민 1세대의 삶의 질곡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록해 보여준다. 주로 여자는 간호사로 그리고 남자는 광부로서 파독된 이주민들은 현지에 한국식 정원(꽃밭)을 꾸미면서 망향의 한을 달랜다. 박정희 정부는 무궁화(박영근의 박정희의 무궁화)로 상징되고, 유신체제(안창홍의 봄날은 간다)로 상징된다. 초상화 위의 스크래치(박영근)가, 그리고 노란 필터를 통해 본 것 같은 모노톤의 화면(안창홍)이 과거를 현재로 되불러오는 시간의 환영을 보는 것 같다. 그리고 화면 위에 나풀거리는 노랑나비 떼가 환영적인 풍경에 비현실성을 더한다.
그동안 한국현대미술은 60-70년대의 개념미술과 퍼포먼스(당시 용어로는 이벤트)로 나타난 행위예술(한국근현대미술사 연구소 기획), 70년대의 단색조 회화(박서보, 윤형근 등), 그리고 80년대의 참여미술(당시 용어로는 민중미술)로 연이어진다. 특히 참여미술과 관련해서 김용태의 는 소위 동두천 그림을 예시해준다. 동두천에 주둔하는 미군병사들과 양공주로 속칭되는 한국여성들이 등장하는 생활사와 성 풍속을 소재로 한 그림이며 사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박찬경의 <비행>은 2000년 6월 분단 50년 만에 성사된 남북정상회담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기록해 보여준다.

서도호는 한국근현대사를 통사로서나 개인사적으로 이데올로기의 역사로서 규정한다. <유니폼들, 자화상들, 나의 39년 인생>에서 작가는 유치원 유니폼에서부터 중고교 시절의 교복, 대학교에서마저 입었던 교련복과 군복무 시절의 군복, 그리고 제대 후에는 예비군복과 민방위복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39년 동안 살아오면서 입었던 유니폼들을 모아 전시한다. 이 일련의 제복들은 말하자면 제도적 주체를, 제도가 개별주체를 호명하는 이데올로기의 실체를 엿보게 한다. 이데올로기를 매개로 한 제도와 개별주체와의 관계를 대변해주고 있는 것이다.
서도호가 한국근현대사를 제복으로 상징되는 이데올로기의 역사로 본다면, 김수자는 보따리로 상징되는 이주와 유목의 역사로 본다. <떠도는 도시들>에서 작가는 보따리를 가득 실은 트럭을 타고 11일간 한반도 전역을 여행한다. 여기서 보따리는 질곡의 역사 탓에 정처 없이 옮겨 다녀야 했던 보통사람들의 이주의 역사를, 생활사를 상징한다. 더불어 전국을 옮겨 다니는 트럭은 일종의 바느질이 되고, 작가는 바느질 여인이 된다. 그렇게 분열되고 터진 국토의 상처며 삶의 상처를 봉합하고 위로하고 치유하는 주술적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현실은 삶의 질로 보나 생활풍속의 면에서 많이 달라졌다. 경제개발논리로 사시사철 도시 여기저기가 배를 드러내고 있고(안세권의 서울, 침묵의 풍경), 알록달록하게 장식된 관광버스와 매직 랜드 그리고 출처불명의 다국적 양식의 백화점이랄 만한 모텔이 우리가 지금 현실에서 살고 있는지 아니면 동화 속 세계에서 살고 있는지 헷갈리게 만든다(구성수의 마술적 리얼리티). 그리고 최정화는 진짜와 가짜를 대비시키면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혹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꽤나 진지한 농담을 걸어온다. 그런가하면 외국 남자와 결혼한 한국여성들의 생활사를 소재로 한 김옥선의 일련의 사진들(해피투게더)은 점차 다민족화하고 다국적화하는 한국의 현실을 보여주는데, 주체로서보다는 타자의 응시가 느껴지고, 왠지 불안하고 불편한 느낌이 감지된다. 그리고 삶의 풍경을 바꿔놓은 것으로 치자면 소위 정크푸드로까지 부르는 패스트푸드 역시 빠질 수가 없다. 김기라의 <캔디가 있는 현대 정물화>가 바니타스 정물화의 현대판 버전처럼 보이고, 코카콜라는 아예 코가킬러로 변질돼 식욕을 자극하고 찌르고 작살낸다.
랩소디. 광시곡이란 음악용어에서 온 이 말은 다르게는 민족적 서사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번 전시가 주제로 내건 코리안 랩소디는 외세의 침략에 의해 왜곡된 근대화의 과정을 지나쳐온, 그리고 이후에는 정치논리와 경제논리에 의해 급조된 현대화의 과정을 경유해온, 크고 작은 통과의례의 트라우마로 점철된 한국근현대사에 바치는 한편의 대서사시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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