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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재봉 / 공명으로 채워지는 빈 육체

이선영

변재봉은 조각예술이 시작되는 기본이 됨으로서, 이미 기성의 의미로 선점되어버린 인체를 비워 놓는다. 이 빈 공간 속에서 ‘공명’(전시부제)이 일어난다. 정면에서 보면 꽉 차 보이는 형태가 돌아가면서 보면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고 관객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내부에서는 바람이 휭 하니 분다. 그의 작품에서 공명은 물리적 꽉 참과 비어있음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작품 [Resonance2011-3]처럼, 인간과 인간, 특히 남자와 여자 사이에 심리적, 육체적 공명이 일어난다. 남자와 여자는 영혼과 육체의 관계 같은 대조 항으로 결합되어 있다. 서로 구별되는 것들은 강한 간섭파를 일으키면서 합쳐지고 하나의 파동이 되어 굽이칠 것이다. 공명은 잔잔한 진동부터 날카로운 파열음까지 다양한 강도를 가진다. 메탈 느낌의 표면은 내부가 비워진 인간상을 더욱 강조하는 듯하다. 금속 조각처럼 보이지만 테라코타에 메탈 채색을 한 것이다.




작품 [Resonance2011-4]는 손에 고인 물은 파문이 일렁임으로서 물질적 원소와 육체 간의 공명을 보여준다. 또한 그것은 파문이 이는 세계를 오롯이 담고 있는 부처님 손바닥 같은 인상도 준다. FRP에 메탈 채색을 한 부조 작품의 경우 바탕 면과의 인체의 역학관계 속에서 공명이 일어난다. 작품 [Resonance2011-1]는 가운데 칼로 베어낸 듯한 선이 인간의 두 가지 측면을 구분한다. 작품 반쪽을 차지하는, 천 또는 옷처럼 보이는 형태는 껍질 같은 인체이다. 이 반쪽은 바탕과 연속적이다. 주변과 구별될 수 없는 형태와 색채는 죽음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유기체 형상을 보존하고 있는 나머지 반쪽은 삶과 죽음 사이에 걸쳐 있는 인간을 보여준다. 작품 [Resonance2011-4]와 짝을 이루는 부조 [Resonance2011-13]은 일견 옷을 입은 남자의 모습이지만, 가운데의 텅 빈 절개 면이 중심을 이룬다. 몸은 녹아서(또는 기화해서) 바탕과 일체가 된 듯하다. 몸뚱이를 잃은 옷은 그림자나 허상 같은 느낌을 주면서 안과 밖이 연결되어 있다는 표시로 작동한다.




변재봉은 이전 작품에서 여자나 남자 토르소 안을 블루 계열로 채색하여 덩어리 보다는 껍데기에 가까운 인체 상을 보여주었다. 인간 내부가 비워질수록 표면은 더욱 활성화 된다. 내면이나 실체라는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표면으로 떠올라 아우성칠 때, 전쟁터 같은 세계는 문득 심미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남녀의 얼굴에 선글라스를 씌운 작품은 인체의 핵심인 얼굴, 그 중에서도 핵심인 눈을 가린다. 이들은 서양 사람이라는 것, 남자와 여자라는 것 외에는 어떠한 특수성도 없는 개체들이다. 메탈 채색은 그들의 차가운 인상을 더욱 강조하는 듯하다. 이 두상들에도 안과 밖을 연결시키는 구멍이 있다. 입체인 남자 두상은 머릿결 사이로, 반이 가려진 여자 부조는 입에 구멍이 뚫려있다. 구멍들은 부조작품처럼 텅 빈 껍데기로서의 인간을 강조한다. 작품 [Resonance2011-12]에서 보여 지듯, 두상이 점점 그 내부를 비워 내 아예 마스크처럼 변해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얼굴에 마스크를 쓴 것이 아니라, 얼굴이 마스크 자체가 된다. 변재봉의 작품에서 이원적 구조는 늘 무너지기 때문이다. 익명적 개인의 모습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의기소침한 소시민을 표현한 작은 작품들에서 더 구체화된다. 그들은 다른 작품에 뚫려 있는 숨구멍 조차 없어 더욱 소외된 모습이다. 폴리에스테르 수지에 메탈채색으로 완성된 작품들은 나무 위에 하나 또는 여럿이 세워져 있다. 그들은 단지 서있는 것 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브랑쿠시의 조각처럼 간결한 형태로 많은 것을 말한다. 홀로 긴 그림자를 남기는 남자, 어느 쪽이 그림자이고 어느 쪽이 본체인지 구분할 수 없는 짝패, 회색빛 빌딩 앞에서 줄지어 있는 직장인 같이 보이는 남자들은 군중들 속에서 흔히 찾아낼 수 있는 공통적 동작(자세)이다. 하나의 틀에서 나온 클론 같은 존재들은 익명적 대중이다. 현대사회는 자율적이고 자유로운 개인을 형식적인 의미로만 보존한다.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은 사실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로 존재할 뿐이다.

현대 철학의 입장에서 기존 인간의 해체를 논하는 비평가 캐서린 벨지는 [비평적 실천]에서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자유, 양심의 자유, 그리고 물론 다양한 형식들로 이루어지는 소비 선택의 자유의 가치를 강조하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 시대의 일이라고 지적한다. 자유주의 휴머니즘의 이데올로기는 비모순적인 개인들로 이루어진 세계, 즉 개인들의 자유로운 의식이 의미와 지식 그리고 행동의 원천이 되는 세계를 가정한다. 그러나 변재봉의 작품에서 전형화 된 현대인은 개인적 세계에 갇힌 익명적 원자에 불과하다. 껍데기만 남은 합리주의적 주체는 장기판의 말처럼 그 누구와도 대체될 수 있다. 구조의 힘에 의해 개인은 여기로 저기로 놓여지고, 게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자는 더욱 소수로 좁혀진다. 자연스러운 인체에서는 발견하기 힘든 날카로운 각이 강조된 그의 인체 상에는 인간 기계 같은 면모도 보인다. 그것은 차 같은 고부가가치의 상품 표면을 이루는 물신주의적 색상이나 질감과 구별하기 힘들다.

한국에서는 물론, 오랫동안 이태리의 카라라에서 돌조각을 했던 작가에게 인체는 질서와 의미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기본 문법에 충실하기 때문에 변형은 보다 근본적이다. 그가 몸을 절개하고 그 텅 빈 내부를 보여주기 전까지 몸은 무엇으로 채워져 있었을까. 인간은 그저 인간으로 재현되었던 것은 아니다. 여러모로 인체 조각의 문법이 완성된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은 일종의 신인(神人), 즉 신적 질서의 구현이었다. 미술사가 케네드 클락은 누드가 단지 예술적 소재가 아니라, 예술의 한 형식으로서 재현의 체계가 흔들리기 시작한 근대에 와서도 누드는 일종의 구조였고, 사실적(realistic)이란 말도 유기적이라는 의미를 지녔다고 지적한다. 근대의 인상주의의 표피적 지각을 거부하고 ‘본질’로의 회귀하고자 했던 후기 인상주의 미술가들의 생각에 제일 먼저 떠오른 ‘관념’ 역시 누드였다는 것이다. 인체는 일종의 이상적 체계로서 신적인 위대함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인체는 비례와 기하학의 구현으로서, 신적 완벽성의 상징이며, 그것은 르네상스가 전범으로 삼았던 고대에도 이상주의의 상징이었다. 이렇게 인간은 완전성의 척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의 누드의 역사는 점차로 신적 존재로서의 인간이 쇠퇴하는 과정을 담는다. 그것은 만물의 척도로서의 인간이라는 인간이자 신의 시각의 쇠퇴와 연관된다. 신과 더불어 인간이 위대해질 수 있었던 휴머니즘의 시대는 저물어갔다. 신이 사라진 세계에서 최초의 근대인 중의 하나인 파스칼이 느꼈던 공허--‘이 무한한 공간의 영원한 침묵이 나를 두렵게 한다’--를 공감할 수 있다. 그러나 현대는 다름 아닌 이 공허로부터 시작된다. 현대의 작가 변재봉에게 빈 육체는 공허라기보다는 또 다른 충만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것은 독단적인 동일자의 고립이 아니라, 타자와의 공명으로 채워지기 때문이다. 변재봉의 작품에서 인체는 여전히 상징의 중심이지만, 안팎의 경계가 와해되면서 의미가 각인되는 장소라는 측면이 더 강해진다. 그것은 하나의 자족적인 형태나 독립적인 대상이기 보다는 다양한 교환이 일어나는 영역이 된다.

그의 인체는 마치 안과 밖이 연결된 뫼비우스 띠처럼 하나의 표면으로 진동하면서 타자들과 조응한다. 바깥으로 인체를 열어놓는 것은 세계와의 만남과 조응을 중시하는 현상학적 체험과 관련된다. 그의 작품은 ‘세계는 전적으로 내 안이며 나는 전적으로 내 밖’이라고 언명한 메를로 퐁티의 철학을 연상시킨다. 모니카 M.랭어는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에서 경험주의가 손쉽게 가정하는 바와 같이, 단지 신체를 하나의 대상으로 환원하여 기계적으로 외부세계의 성질들을 수용, 전달, 재생하는 하나의 자동기계가 되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 대신에 보고, 듣고, 느낀다는 것이 진실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면 전(前)객관적인 영역으로 복귀해야 한다. 저자에 의하면 전통적인 공간은 경험대상들을 담고 있는 용기(container) 혹은 선험적 주체에 의해 구성되어 외부적 경험을 가능케 하는 형식(form)으로 생각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지각의 살아있는 핵심을 파악하지 못한다. 경험주의자는 의식이 들어설 여지를 주지 않고, 주지주의자는 모든 것을 보편적인 구성적 자아에 종속시킨다. 메를로 퐁티는 우리의 경험이 기계론적으로 결정되는 과정도, 우연적인 구성도 아니라고 본다. 감각작용은 수동적인 기록행위도 능동적인 의미부여도 아니다. 무엇을 감각한다는 것은 그것과 공존하는 혹은 교류하는 것이며, 다시 말해 그것을 향해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다. 변재봉이 강조하는 공명이란 세계에 대한 몸의 개방을 의미한다. 현상학적 사고는 기원적인, 자기폐쇄적인, 자립적인 주관성에 대한 확고한 개념을 거부하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신체적 존재는 순전히 사실적인(factual) 물질성(physicality)이 아니며, 주관성이 순전히 투명한 의식인 것도 아니다. 우리는 물질과 정신의 어색한 결합물이 아니라, 제 3의 존재인 것이다. 여기에서 신체성(corporeality)은 지향성들의 역동적 종합으로 간주된다. 인체라는 관념적 물질적 원형에서 출발한 변재봉의 조각은 신체와 지각을 공명으로 연결시키면서 불교나 선 같은 동양적 세계관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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