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오정선 / 시각에서 몸으로의 전환

이선영

오정선의 ‘설정을 흔들다’(전시부제) 전은, 프로그램을 통하여 설정된 기준이 의식은 물론 무의식과 몸까지 삼투해 들어가는 촘촘한 체계의 그물망을 흔들고자 한다. 체계를 이루는 기준은 결코 중성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의 장에서 작동되고 권력을 통해 구조화된다. 개인이 체계의 원칙에 불만을 품고 바꾸려할 때, 또는 새로운 게임의 원칙을 도입하려할 때 기존에 설정된 것은 더욱 거세게 저항한다. 오정선은 지금 여기에는 없었던, 그래서 그녀가 원하는 것을 배우러 국내외에서 여러 전공을 전전하면서, 자기만의 설정이란 것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매뉴얼을 보지 않고도 복잡한 장난감을 가지고 잘 노는 3살짜리 딸아이는 훌륭한 귀감이 되었다. 이번 개인전 작품에서 새로운 설정의 기준으로 부각되는 것이 몸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오정선의 작품에서 몸이야 말로 확연한 차이를 추동하는 원천이다. 물론 차이 또한 권력의 장 속에서 작동한다.

차이가 차별이나 억압, 그리고 폭력으로 쉽게 전이 되곤 하는 결코 투명하지 못한 사회에서, 작가는 소통의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사회 속 인간들이 좀 더 이성적으로 되면 소통은 투명해질까? 그러나 이성 자체가 편파적인 것이라면?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이성보다는 몸의 편에 선다. 형식적으로만 평등한 추상적 이성이 아니라, 각기 다를 수밖에 없는 각자의 몸이 무엇인가를 설정하는 기준이 되는 사회는 진정 민주적이리라. 이성의 투명성은 오감 중에서 가장 추상적이고 개념적인 시각성에 바탕 해 왔고, 몸은 임상의학의 시선이 닿기 이전까지는 시각으로는 정복되지 않는 미지의 어두운 대륙을 차지하고 있었다. 의학을 비롯한 권력의 기술에서 몸의 코드를 해독하여 프로그램화하려는 줄기찬 시도들이 있어왔지만, 몸은 여전히 인간이 초월할 수 없는 강력한 현실로 남아있다. 한국에서 조소과를 나왔지만, 오정선에게 몸은 조각 예술의 기본이 되는 인체 상 만들기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인체의 모사상은 이미 거울이라는 상상적 구축물에 의해 통합되어 있다. 작가에게 유리나 비디오 같은 매체는 통합된 거울상 너머, 또는 그 이전의 원초적 단계에 대한 탐구를 가능하게 하는 매체로 다가왔다. 재현의 질서를 대변하고 있는 거울은 반사나 재 반사, 반짝거리는 다양한 소재들을 이용한 설치물을 통해 해체, 또는 재구축된다. 작업에 종종 등장하는 수증기나 안개, 연기 같은 소재도 거울이 요구하는 설정을 교란시키는 요소이다. 서로 다른 수많은 도수의 안경알들을 투명 낚시 줄로 엮어서 공간에 설치한 작품 [another way of seeing]은 설정을 흔들려는 작가의 의지가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난다. 이 작품은 각각이 가지는 시각의 차이를 극적으로 드러낸다. 그것은 동일자(the same)로 전유되는 한 가지 시각(vision)이 아니라, 다양한 시각성(visuality)을 보여준다. 마틴 제이는 [모더니티의 시각체제들]에서 르네상스 및 과학혁명과 더불어 시작된 모더니티는 철저히 시각 중심적이라고 여겨져 왔다고 평가한다.

그렇게 구성된 지각의 장은 시각적이고 양적이다. 마틴 제이에 의하면 근대의 지배적인, 헤게모니적이기까지 한 시각모델은 주체의 합리성에 대한 데카르트의 사상과 동일시할 수 있다. 그는 리차드 로티의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인용하면서, ‘근대적인 인식론의 토대가 되었던 데카르트의 구성에 있어서 형상은 정신 속에 존재하는 표상들(representation)’이라고 말한다. 르네상스의 새로운 공간 개념은 기하학적으로 등방(isotropic)이며, 직선적이고 추상적이며 균일한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고정된 단일한 눈은 응시(gaze)의 논리를 따랐다. 그것은 영속적인 하나의 시점에로 환원된 그리고 탈(脫) 신체화 된 시각을 낳았다. 그것이 근대에 형성되어 아직까지도 영향력이 있는 강력한 시각적 설정이었다. 모든 것을 대상화하여 조작하려는 지배적인 주체의 시선은 과학기술 혁명으로 무한 확산된다. 카메라 옵스큐라의 시점이 전형적이다.

조나단 크래리는 [시각의 근대화]에서 카메라 옵스큐라를 권력기술의 하나로 평가한다. 카메라 옵스큐라는 관찰자에게 무엇이 지각의 진리를 구성해주는지를 규정해주는 수단이었고, 또 일련의 고정된 관계들의 윤곽을 그려줌으로서 관찰자가 그러한 관계들에 대한 주체로서 설정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카메라 옵스큐라는 세계에 대한 객관적 진리에의 접근을 보장해주는 장치였다. 오정선은 2004년 작품 [seeing opposite side of wall]에서 카메라 옵스큐라의 관점으로 누가 보고 보여 지는가에 대한 문제를 다룬바 있다. 그 작품은 방 중앙에 벽을 설치하고 벽 양면에 구멍을 뚫은 후 그 위에 유리 볼들을 배치하여, 타이머와 연결된 조명이 한쪽 공간을 밝히면 반대편 어두운 공간에 있는 관객들은 밝은 공간에 있는 관객들의 거꾸로 된 모습을 유리 볼을 통해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인체 형태의 실루엣 안에 수없이 뚫린 구멍들은, 관찰하는 주체의 위치를 공간적으로 시각화하는 수단을 유일한 하나가 아닌, 다시점으로 흩어지게 한다.

그것은 ‘외적 세계와 내적 표상 사이의 일치를 확고하게 보장하고, 무질서하거나 불규칙적인 것은 무엇이든 배제하려는 시점’(조나단 크래리)을 흔든다. 또한 여기에서 ‘외적인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텅 빈 내부 공간을 지닌 자아의 안전한 위치’(조나단 크래리)는 사라져 버린다. 근대에 보편화 된 시각을 거부했던 니이체는 ‘만약 모든 사람이 제각기 다른 구멍이 있는 자신만의 카메라 옵스큐라를 갖고 있다면 그 어떤 초월적 세계관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론내린 바 있다. 하나의 장치를 수많은 장치로 상대화시키는 방법은 유리를 전공한 작가의 이력에 의해 날개를 달은 듯하다. 오정선의 작품에서 반짝거리는 유리는 거울이나 카메라를 비롯하여, 기계적 광학체계의 투명성을 대변하며, 그 투명성을 상대화시키는 역설적인 매체로 등장한다. 설정된 하나의 시점에 의해 고정될 수 없는 신체는 작품의 주요한 요소로 등장하게 된다.






대상을 물화시키는 응시는 보다 확장된 장에서의 실험이 되었다. 세계를 보기 이전에, 그리고 말하기 이전에 이미 드리워져 있는 상징의 그물망 속에서, 어떻게 설정을 흔들 것이며 차이를 생성해 낼 것인가? 오정선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거울은 결코 메꾸어질 수 없는 차이의 장을 확인한다. 2003년에 발표한 [through the looking glass]는 실내외를 연결하는 여러 개의 거울을 이용하여 거울 앞의 관객이 자신의 뒤통수를 보게 한 작품이며, 2004년에 발표한 [two-way mirror conversation]은 마주보고 있는 두 관객 사이에 설치된 이중거울을 통해, 어두운 곳에선 밝은 곳이 투과되어 보이고, 밝은 쪽에선 오로지 반영만 보여 지게 한 것으로, 조명과 연결된 음성센서는 두 사람이 대화가 시작되면 양쪽에 설치된 조명을 작동시켜 서로의 모습이 아닌 거울에 비친 본인의 모습만을 볼 수 있게 했다.

바로 앞에 있는 상대 사이에 소통의 장애물을 여러 겹 설치한 이 작품에서, 거울은 대화보다는 독백을 고무한다는 것, 그리고 타자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독백을 멈춰야 한다는 것을 알려준다. 2008년에 발표한 [editing a monument]는 140개의 정육면체 큐브로 이루어진 작품으로, 조각난 거울상의 유희를 스펙터클하게 보여준 작품이었다. 투명한 면과 거울 면의 혼합으로 이루어진 큐브는 관객이 돌릴 수 있어서, 그 위에 투사된 영상을 잘게 조각내어 공간으로 확산시킨다. 사회적 요구가 관철되는 하나의 반영상은 큐브가 만들어내는 무한대의 경우의 수로 미분된다. 2003년 작품 [invisible boundary]는 카메라와 작가 사이에 투명 유리판을 세우고 작가와 유리판 사이에 수증기를 피워 올려, 수증기가 덮이면 얼굴이 흐려지는 등, 얼굴의 출몰을 반복하게 하는 작품이다. 그것은 비디오나 유리 판 같은 반영 장치의 불투명성을 극대화시킨다.

그것은 거울이 야기하는 주체의 통합 상이 가상적이고 임의적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거울상이 야기하는 확고한 자아의 상은 연기처럼 흐려진다. 그것은 라깡의 거울단계 이론이 예시하듯이, 애초부터 상상이었기 때문이다. 이 상상에 개입되는 수많은 이데올로기는 또 하나의 설정이나 표준이 되어 개인에게 요구된다. 반영된 얼굴로 집약되는 정체성은 수많은 이해관계가 얽힌 투기장, 또는 시장판이 된지 오래이다. 반영된 얼굴은 이미 너무 많은 것들로 선점되어 있다. 수많은 단위로 되어있고 관객의 참여에 의해 더욱 확산되는 시각의 장이 연출되는 오정선의 작품에서, 조각난 신체를 가상으로 통합하는 거울은 깨지기 이전에 이미 균열이 나 있다. 수많은 단위로 이루어진 (반)투명 재료들은 틈을 강조한다. 그녀에게 유리와 비디오는 환영의 유리 감옥을 깨는 매체가 된다. 상상의 통합 상에 내재된 균열과 간극은 존재와 사고, 기표와 기의 사이의 거리를 극대화함으로서, 설정자체의 불가능성까지도 암시하는 듯하다. 오정선의 작품은 대상과 기호, 기의와 기표 사이에 설정된 극도의 불안정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때때로 화려한 스펙터클로 확장되는 작품에서 진실은 ‘기표와 기표 사이의 공간, 그 사슬의 구멍’(라깡)에 존재함을 강조한다. 의미와 거리가 있는 기표는 오르골 작업에서 두드러진다. 그것은 출산 직후 아이를 안고 처음 찍은 사진 이미지에 구멍 뚫어서 턴테이블처럼 돌아가며 음이 되는 작품이다. 옛 악기 소리의 아련한 분위기가 있지만, 구멍 뚫린 이미지에서 생성된 음 자체는 무의미하다. 선율로 나타나야할 선적 인과 고리는 공간화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이가 사회의 상징적인 질서인 언어를 처음 배울 때 들려오는 어머니(타자)의 말처럼 모호하다. 인간은 처음부터 기표의 비(非)의미와 만나는 것이다. 라깡의 이론에 의하면, 모든 주체가 그의 생애에서 처음으로 만나는 것이 기표이다. 인간은 타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으로 세계를 파악하기 시작한다. 언어에 있어서 명명하는 기능은 이후의 일이다. 언어는 무엇보다 타자의 현존을 먼저 불러온다. 기표의 우위는 비의미가 의미보다 더 먼저라는 것을 알려준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일생에 걸쳐 배우는 과정을 통해 비의미였던 것을 의미로 만든다. 기표를 중시하는 라깡의 이론은 사물과 언어 사이의 균열을 강조하며, 잃어버린 전체와 합일하려는 욕망의 주체를 영원히 따돌린다는 다소간 비관적인 메시지로 다가온다. 그것은 이 빈 공간을 그 어떤 대상도 충족시킬 수 없다는 실재의 허무를 예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완전히 바닥을 치는 허무는 새로운 출발을 위한 바탕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허무는 지배적 언어를 이루는 견고한 구조 또한 상대적이라는 것을 밝히기 때문이다. 기표들 간의 다양한 결합을 통해 차이들의 구조를 보여주는 오정선의 작품에서, 존재와 사고, 또는 의미 사이의 괴리는 반영이나 언어 같은 간접적인 매개 이전의 원초적인 단계의 것, 즉 신체를 호출하게 한다. 작품 [my ruler]에서 작가의 한 뼘(19.1cm)이나 키(158.8cm)로 제작된 줄자는 지배적인 상징 언어의 기준을 자신의 몸으로 전환시킨다. 영상작품 [play with a space]는 작가가 거쳐 갔던 고양 스튜디오와 난지 스튜디오의 빈 공간을 자신을 몸을 이용하여 계측 한다.

작품 [오도 씨의 방] 인간에게 모든 경계의 기준이 되는 신체를 부각시킨다. 휴게실처럼 꾸며 놓은 공간에 5도 정도 기울여 놓은 의자와 탁자는 그 위에 앉은 관객에게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준다. 작품 [breath]는 공간 안에다가 비닐봉지에 한 번의 숨을 수집하여, 이 봉지로 공간을 채운다. 파티션 안에 축적된 수 천 개의 호흡은 공간을 시간--보통 1분 동안 15회의 숨을 쉰다--으로 채운다. 관객이 숨을 불어 넣는 만큼 공간의 불이 밝혀지는 작품 [breathing room]은 공간 전체를 숨 쉬는 방으로 연출한다. 모든 것이 상대화되는 세계에서 다시 호출된 몸은 신성한 기하학이 지배했던 시대의 ‘Vitruvian Man’같은 신인동성동형론적인 기준이 아니다. 오정선의 작품에서 몸은 결코 자기 충족적인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다. 고전적인 누드에 내재된 이상적인 비례 체계는 원근법이나 카메라 옵스큐라의 시각을 상대화시켰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탈 보편화된다. 그녀가 호출한 신체는 보편적인 기준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가령, 2004년 작품 [play your music with me]는 몸의 본체가 아닌, 부산물, 즉 본인의 몸에서 탈각된 긴 머리칼로 만든 현악기인데, 그것은 관객의 터치로 울림을 낳는다. 자신의 신체 일부와 타자의 신체의 일부가 만나서 이루어지는 소리(연주)는, 세계가 어떠한 지배적 감각을 기준으로 식민화되는 객관적인 재현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더불어서 지각하는 공(共)감각적인 것임을 알려준다. 여기에서 몸은 존재로 고정되지 않으며, 원소처럼 끊임없는 진동상태에 있으면서 재배열되고 재가동 될 뿐이다. 메를로 퐁티가 말하듯이, 몸은 ‘자연과 우리를 이어주는 살아있는 끈’이며, 주체성은 ‘움직이지 않는 자기 동일성이 아니라, 주체성이기 위해 타자에게로 열리는 것’이 본질적이다. 신체를 나타내는 메를로 퐁티의 용어인 ‘살’, 그것의 두께는 보는 자와 사물 사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아니라, 보는 자와 사물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된다. 시각 및 시각성에 천착해왔던 오정선의 최근 작품은, 타자와의 차이를 인식하며 타자들과 공존할 수 있는 연결망을 구축하는 제 1의 매개로 몸을 부상시킨다.

출전; 포스코 미술관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