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규의 전시에서 원과 구, 정다면체의 구조물들과 구조의 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빛은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처럼 만물이 비롯될 원형적 모델처럼 보인다. 육중한 돌과 금속들로 만들어진 것들은 움직이지는 않지만, 모든 시초들이 간직할 법한 거대한 에너지를 잠재한다. 고대의 기하학에서 비롯되었을 정다면체의 행렬은 근대의 합리주의와는 다르지만, 나름의 엄격한 질서를 갖춘 상징적 우주를 이루며, 연금술이나 수비학 같은 전래의 비밀스러운 지식 또한 내포한다. 정육면체 구조물을 선보였던 이전 전시를 이어, 이번에는 기하학에서 그와 같은 계열인 정4면체, 정8면체, 정12면체, 정20면체로 완결 지었다. 정다면체에 대한 발상은 플라톤으로 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그것이 단지 이데아라는 관념적 질서를 넘어 물질적으로 구현되었을 때의 양상은 특이하다. 거기에는 부동의 질서를 넘어서는 어떤 요소가 있다. 특히 작가는 다면체의 한 면을 좌대에 붙인 것이 아니라, 모서리로 중심을 잡아 불안한 균형감을 유지시켰다.
여러 다각형을 구조화하는 금속성 테두리 안에 배치된 돌들은 서로 다른 높이와 균열이 남아 있다. 연마되지 않은 울퉁불퉁한 돌의 표면은 거친 야생성을 간직한다. 복잡한 마블링을 가지는 대리석이나 불규칙적 구멍이 나있는 현무암 같은 재료는 추상적인 기하학의 세계에 색과 무게감을 부여하며, 코스모스 속에 내재한 카오스를 나타낸다. 작가는 여러 색과 재질의 돌 위에 물결무늬를 넣어서 유동성의 느낌과 더불어 촉각적 질감을 부여했다. 안구를 떠오르게 하는 구와 원형 구조물은, 기하학으로 채워진 이데아의 세계와 짝을 이룰 가장 지적인 감각인 시각을 대표한다. 벽에 부조 식으로 걸어놓은 원형 동공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초점이 맞추어짐으로 인해, 전시장 내부에 들어온 관객의 시선과 심리적인 상호작용을 하게 된다. 중력에 지배받는 돌이나 금속 재료와 달리, 빛은 사방팔방으로 뻗어나가면서 정지된 공간적 질서에 시간성을 부여한다. 그의 작품에서 돌과 금속이 몸체를 이룬다면, 빛은 호흡이나 맥박에 해당한다.
빛은 나중에 부가된 장식적 요소가 아니라, 정지된 구조물이 작동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안구를 표현한 원이나 구 내부에서 비치는 빛은 눈과 직접 연결되어 있을 뇌의 움직임에 상응한다. 수학적으로 오직 다섯 가지만 가능한 정다면체는 경험이나 개념에 앞서는 어떤 선행 질서를 예시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서양철학사의 시초와 중추를 이룬 플라톤을 개념의 대가로 평가하면서, 플라톤이 개념들을 창조하긴 하지만, 그 개념들을 그에 선행하는 창조되지 않은 어떤 것의 재현으로 설정할 필요가 있었다고 지적한다. 즉 플라톤의 구도 상에서의 진리란 전제된 것, 이미 거기에 있는 어떤 것으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데아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들을 관조해야 한다고 말하곤 했지만, 이보다 앞서 그는 우선 이데아의 개념을 창조해야만 했다. 저자들에 의하면 이데아에 대한 플라톤의 개념에서 첫 번째란 순수한 자질을 객관적으로 소유하는 것이다. 이데아와 달리, 사물은 언제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는 다른 어떤 것들로 이해된다.
그래서 사물들은 기껏해야 두 번째의 자질들을 소유할 뿐이며, 그것도 오로지 이데아에 참여하는 정도에 따라서만 그러하다. 플라톤의 개념은 이데아와 선행 실존이 완강히 버티고 있는 것이다. 플라톤으로부터 비롯된 철학의 전통은 더 이상 타자와의 관계가 아닌, 하나의 본체, 객체성, 본질과의 관계를 강요하게 된다. 그러나 김병규의 작품에서 기하학적 질서의 틀 안에 불규칙한 균열과 심도를 가지는 돌은, 개념이 그 구성요소들의 조합에 의해 정의되는 불규칙한 윤곽을 갖고 있음을 알려준다. 요컨대 개념이란 분절, 절단, 재단의 문제임이 확인된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듯이, 개념은 자신의 구성요소들을 총합하므로 하나의 전체이긴 하지만, 조각난 전체이다. 초월적인 이데아의 세계와 같은 진선미의 완벽한 일치는 이상으로 남는다. 김병규는 플라톤으로부터 비롯한 엄격한 기하학적 구조를 다루고 있지만, 그의 작품은 이데아라는 동일자의 질서에 머물거나 그것을 확증하는 것을 넘어서, 철학이나 과학과도 다른 예술의 특징을 추출한다.

예술은 철학적 개념이나 과학적 전망이 아닌, 지각과 정서를 끌어낸다.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의하면 철학은 개념들을 통하여 사건을 발현시키며, 예술은 감각들과 더불어 기념비들을 세우고, 과학은 기능들에 의하여 사물의 상태를 구축한다. 무한한 상응들로 짜여 진 직조 망이 구도들 사이에 자리한다. 하나의 구도 상에 창조된 각각의 요소는 다른 이질적 요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며, 이 이질적 요소들은 다른 구도들 상에서 앞으로 창조되어야 할 것들로 남아있다. 즉 이형발생으로서의 사유이다. 김병규의 작품은 빛, 금속, 돌 같은 서로 다른 재료가 조합되어 있으며 그것들이 연속적이지는 않다. 거기에는 균열과 간극, 그리고 텅 빔이 내재해 있다. 조각난 전체로서의 개념은 퍼즐의 조각이라고 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개념들의 불규칙한 테두리들은 서로 맞아 떨어지는 것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완결된 하나의 판들을 형성하지만, 마른 돌들로 쌓여진 벽처럼, 전체가 지탱되는 것은 방향이 엇갈리는 여러 길들을 통해서이다. 거기에는 추론적인 전체를 한정하지 않는 분기점들과 우회로들, 유동적인 연결고리가 있다. 완결되어 보이는 전체는 지속적인 탈선과 이탈의 상태에 있다.
김병규의 작품은 엄격하게 구성, 또는 구축되어 있지만, 간극들 또한 분명하다. 특히 빛은 그 간극들을 극적으로 강조한다. 구성 또는 구축은 주어진 틀의 압제가 아니라, 틀 벗어나기를 감행한다. 직선으로, 또는 불규칙적인 구멍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은 닫힌 구조를 밖으로 트이게 한다. 유한한 구조물은 무한을 향해 열린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유한을 거쳐 무한을 되찾고 복원시키는 일, 이것이 예술의 고유함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들에 의하면 철학은 무한에 일관성을 부여함으로서 무한을 구원하고자 한다. 반대로 과학은 지시 관계를 얻기 위해 무한을 포기한다. 예술은 무한을 복원시키는 유한을 창조하고자 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김병규의 작품에 내재한 구성의 구도는 우리에게 무한을 되돌려준다. 플라톤으로부터 비롯한 강력한 동일자의 모델은 무한의 기호(∞)처럼 타자를 향해 열릴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사물과 이미지, 원본과 복사물, 모델과 시뮬라크르 등의 엄격한 구분에 근거하는 플라톤의 이원론적 철학은, 배제하고자 하는 대립 항들과 함께 작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립 항들은 순환적인 구조를 이룬다. 요컨대 확실성에는 불확실성이 내재해 있다. 이 역설적 문제는 김병규의 향후 작업을 가늠하게 될 것이다.
기하학의 원리에 따라 만들어진 다면체들은 이데아 - 그리스어의 ‘이데아’는 형태와 관계된다고 한다 - 의 세계를 넘어 자연의 구성성분이 된다. 김병규의 작품은 마치 확대된 원소들처럼 보이기도 한다. 점, 선, 면의 조합 방식에 따라 다양한 도형이 나오듯이, 4, 6, 8, 12, 20 등으로 확장하는 다면체는 지각되는 물체들을 구성하는 원소들의 형태와 배열, 그리고 위치의 차이를 드러낸다. 장 살렘은 ‘고대 원자론’에서 고대의 원자론자들은 물질적 미립자들이 모든 현실의 씨앗이라고 간주했다. 고대 원자론은 데모크리토스의 입자가설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관념들을 제공해왔다. 그것은 물질의 원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고대 원자론’에 의하면, 고대의 원자론자들은 영혼 전체가 아주 작은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정신과 영혼의 구성에 관해 설명한다. 루크레티우스에 의하면 그것들은 숨(바람), 열기, 공기, 그리고 ‘이름 없는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 열기, 바람, 또는 공기 중에 어느 것이 한 인간 개체에게 지배적인가에 따라, 각각 화, 두려움, 차분함이 그의 본질적인 기질이 된다. 김병규의 정다면체 역시 그에 상응하는 근본 물질과 기질을 함축한다.
고대 자연철학자들은 세계를 공기, 물, 흙, 불 등 4원소로 이루어졌다고 보았는데, 김병규의 다섯 가지 다면체 작품은 미지의 제5원소까지 포함한다. 앨리슨 쿠더트는 ‘연금술 이야기’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것은 정해져 있지 않은 유연한 플라스틱 같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뜨거움, 차가움, 축축함 그리고 건조함이라는 네 가지 성질이 마치 녹은 밀랍에 찍힌 도장처럼, 이 최초의 물질에 각인되었을 때, 네 개의 원소, 즉 흙, 공기, 불, 물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4원소로 이루어진 모든 물질들은 갖가지 비율로 결합하였다. 원소에 대한 이론은 수천 년 동안 여러 물체의 화학적, 물리적 성질을 설명하고 분류하는데 그럴 듯한 방법을 제공해왔다. 그것들은 나타나서 성장하고 부패하고 감소하다가 마침내 사라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물질 내의 원소들이 항상 유동하며, 이 원소에서 저 원소로 - 흙에서 물로, 물에서 공기로, 공기에서 불로 그리고 다시 거꾸로 - 변화하고 있기 때문으로 설명하였다.
오늘날 예술가들 역시 연금술사처럼 몇 가지 성분 원소의 비율을 바꿈으로서 한 물질을 다른 물질로, 한 성질을 다른 성질로 바꾸려 한다. 연금술사나 예술가는 자연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의도적으로 하고 있을 뿐이다. 이들의 방법은 수가 우주의 근본 요소라는 초기 피타고라스학파의 관념에서 나온 파생물이다. 원소의 구성은 해체 또한 예시한다. 물질의 생성은 이전의 구조나 그 잔해로부터 가능하다. 다면체는 원소처럼 여러 가지 결합방식에 의한 산물이다. 엄격한 수의 법칙을 내재했지만, 현대의 과학이나 철학적 진리치와는 거리가 있게 된 다면체들은 수비학(Numerologie) 같은 오래된 상징주의가 만들어내는 우주를 예시한다. 오토 베츠는 ‘숫자의 비밀’에서 숫자의 실용적인 측면보다 숫자가 가지고 있는 상징적 의미, 즉 숫자에 비밀스럽게 담겨있는 신비주의를 다룬다. 그에 의하면 지상의 세계는 숫자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이 모든 것들은 셀 수 있는 것으로서, 이들의 관계 또한 계산이 가능하다.
수에는 합리성 뿐 아니라 신비와 마법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이를 통해 인류문명을 지배한 상징적 기호가 되었다. 수비학적 전통에서 일찍이 수는 기하학적 형태와 관련되었다. 김병규의 다섯 종류의 다면체에 내재된 수에는 고유의 상징주의가 있다. 엔드레스와 쉼멜의 수비학에 의하면, 4면체를 이루는 4는 세상에서 최초로 인식된 질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6면체를 이루는 6은 하느님이 세상을 완성한 6일과 밀접하다. 8면체를 이루는 8은 사각형이 원으로 이행하면서 거치는 첫 번째 형태로, 건축학적으로 중요하다. 12면체를 이루는 12는 육체적인 수 4와 정신적인 수 3의 곱이기 때문에 보편성에 대한 상징이다. 12에 대한 관심은 무엇보다도 황도 12궁에 대한 관찰에서 비롯되었으며, 많은 고대 문명들이 12진법을 사용했다. 현재에도 여전히 ‘dozen’이라는 단위가 사용된다. 마지막으로 20면체를 이루는 20은 손가락과 발가락을 모두 합치면 되는 숫자이다. 그래서 20은 많은 문화권에서 셈을 하기 위한 기초가 되었다. 20은 영어 ‘score’라는 말에 여전히 남아 있다.

김병규의 작품에서 형태와 관련된 의미에 생동감과 움직임을 주는 것은 빛이다. 특히 빛은 시선과 관련된 매체이다. 시각은 가장 정신적인 감각으로, 플라톤은 정신을 구형과 비유한 바 있다. 원이나 구는 ‘세계를 모든 각도에서 보는 영혼의 총체를 상징’(프란츠)한다. 고대적인 상징주의는 현대의 심리학까지 깊은 흔적을 남긴다. 의식은 세계의 광경에 의해서 규정된다. 자끄 라캉에 의하면 세계의 광경은 마치 모든 것을 보는 존재인 것 같다. 이것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특성을 부여받은 절대 존재가 있다는 플라톤적 시각에서 발견될 수 있는 환상이다. 그러나 환상은 단지 환상에 머물지 않는다. 환상은 기계와 장치와 결합하여 현실적으로 발휘되는 권력으로 재현된다. 모든 것을 감시할 수 있다는 전능한 빛은, 근대의 원형감옥을 비롯하여, 그것의 계승자인 현대의 정보사회에 이르기까지 깊은 그림자를 남긴다. 빛이 없으면 시각은 불구가 된다.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진리의 은유로서의 빛’에서 빛이라는 개념은 원래 이원론적 세계관에 속했다고 말한다. 마치 불과 흙처럼, 빛과 어둠은 근본적이고 원형적인 진리이다. 하나의 매개체처럼 우주를 채우고 있는 밝음은 수축되고 집중되어 형이상학적인 단위로 대상화된다. 빛은 이성으로 고양되는 것이다. 빛-시각성-형이상학이라는 연쇄 고리는 정신의 역사에서 단절됨 없이 이어져왔다. 존 맥컴버는 형이상학은 그 첫 번째 단어들을 말하기 시작 할 때부터 시각과 인식을 연관 시킨다고 말한다. 데리다는 플라톤의 태양으로부터 데카르트의 명백성과 분명성(명석과 판명)을 거쳐, 훗설의 관조의 제국주의와 최종적으로는 하이데거의 드러남의 빛에 이르기까지 이 은유의 궤적을 추적한다. 빛은 철학을 형이상학으로 정초하는 은유로서, 철학사 전체는 하나의 광학으로까지 평가된다. 시각은 거리를 두고 작용하며 빛을 매개로 작용한다. 광학에 근거하는 시각적인 앎 또한 중시되었다. 근대의 시각적 인식론에서 빛은 핵심적이다. 김병규의 작품에서 다면체와 짝을 이루는 원과 구의 구조물은 시각과 빛의 형이상학을 연결시킨다. 그것들은 현대에도 여전히 영향력 있는 플라톤이라는 거인의 사유를 형상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