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초반에 들어서 본격화된 근대화 정책은 여러 면에서 한국사회를 변모시켰다.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전통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난 가치관의 혼란과 혼합적 양상이다. 즉,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의 양극 사이에서 하나의 영속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는 새롭고도 복잡한” 존재인 근대화도상 국가의 특징을 드러낸 것이다.26) 이 두 패러다임 사이의 길항관계는 비단 경제나 정치적인 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나 심지어는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가령, 근대화의 상징인 미터법을 정착시키는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구어에서 쓰던 ‘한 마장’27)이나 ‘한 식경’28)과 같은, 농경사회의 산물인 용어들이 킬로미터나 시, 분, 초와 같은 근대적 계량의 단위로 대체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한 동안 두 용어를 사이에 두고 혼란이 일어났지만 근대화가 진척됨에 따라 후자는 전자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미술의 경우, 구한말의 화가 고희동의 도일(1909)은 소위 조선왕조로 대변되는 구체제와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일본, 청(淸) 등 소위 근대로 무장한 강대국들이 벌이는 신체제 사이에서 ‘전통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 등 양극을 경험한 첫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기록에 의하면 고희동의 도일은 순전히 자발적인 것이었다.29)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개자원화보(介子園畵譜)를 펴놓고 산수와 풍경, 화조를 그리던 그가 서양화를 그리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새로운 문법에 의한 새로운 언어를 배우게 된 것이다. 이 사건은 개인적으로도 충격이었겠지만, 좀 비약해서 말하자면 구체제와 신체제 간의 길항작용이 낳은 근대적 사건인 셈이다. 그것은 화선지 위에 모필로 화보를 본 따서 그렸던 전통적 방식에서 캔버스에 유성물감으로 그리는 방식으로 전환한 것 이상의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이를 가라타니 고진 식으로 표현하자면 고희동에게는 ‘풍경’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서양식 캔버스를 마주한 고희동에게 있어서 전통적인 기법이나 세계는 더 이상 풍경이 아니었던 셈이다. 풍경, 다시 말해서 근대적 자아는 어느 날 갑자기 형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볼 때 고희동이 훗날 다시 동양화로 돌아간 것은 이 풍경의 내면화, 즉 의식의 근대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문학을 다루는 문학사가들은 <근대적 자아>가 그냥 머릿속에서 성립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자기self가 자기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또 다른 조건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니체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의식>이라는 것이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화>에 의한 파생물로 보는 시각을 취하고 있다. 프로이트의 생각에 따르면, 내부도 외부 세계도 없고 외부 세계는 내부의 투영이었던 상태에서 상처trauma를 입고 리비도가 내향화했을 때, 내면이 내면으로서, 외부 세계가 외부 세계로서 존재하기 시작한다. 다만 프로이트는 이렇게 덧붙이고 있다. <추상적 사고 언어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 처음으로 언어 표상의 감각적 찌꺼기가 내적 사상과 연결되며, 그에 따라 내적 사상 그 자체가 차츰 지각된 것이다.>”<토템과 터부>30)
그렇다면 고희동의 이 쓰라린 경험으로부터 반세기 이상을 더 내려와서 1970년대 단색화 작가들의 내면적 풍경이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이 무렵은 제3공화국에 의해 추진된 제3차 경제개발계획이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근대화의 열풍이 심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모더니즘이 국내에 소개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31)
당시 단색화 작가들에게도 고회동과 마찬가지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트라우마가 존재했다. 그것은 전통적 표현술에 의한 표상적 찌꺼기가 채 가시지 않은 데 기인했다.32) 그렇기 때문에 단색에 의한 추상적 사고가 새로운 언어의 창출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내면을 외부화하는 것, 곧 새로운 표현술이 필요했다.33) 그 기반은 근대적 의식과 근대적 생활방식, 근대적 제도의 형성 등 총칭해서 ‘근대화’로 부를 수 있는 것이다.
70년대 들어서 많은 작가들이 백이나 흑과 같은 단색에 경도된 것은 따라서 새로운 표현의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보다 조금 앞선 60년대 후반의 일본 화단에서는 서구의 근대를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이우환을 중심으로 세키네 노부오, 스가 기시오와 같은 모노하(物派) 작가들을 중심으로 일고 있었다. 일본의 모노하는 말하자면 일본의 풍경 찾기, 즉 새로운 표현술을 향한 항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이태리의 아르테 포베라를 비롯하여 미국의 미니멀리즘과 대지예술 등을 특유의 일본적 감성에 접맥시켜 오브제와 설치, 회화를 통해 구현해나가고 있었다. 거기에는 급속한 경제적 부흥으로 인해 고도의 산업사회에 진입할 수 있었던 일본의 사회적 배경이 깔려 있었다. 또한 이 시기는 일본에 있어서 최대의 문화적 전환기였으며, 동시에 혼란기이기도 했다. ‘동경대 전공투(戰共鬪)’와 천황제의 부활을 주장했던 미시마 유키오의 자살, 1969년의 미ㆍ일 안보조약으로 비롯된 학원투쟁이 급기야는 동경대학의 입시를 중단시키고 마는 사태를 불러일으켰다. 극좌로 치닫는 학생운동과 지식인들의 자기비판으로 인한 사상적 혼란도 극심했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대항문화의 물결이 급속도로 번져나가기 시작했으며, 예술의 각 분야에서 기성문화에 대항하는 아방가르드 운동이 전개되었다.34)
1970년대 한국의 단색화 역시 혼란스런 사회ㆍ정치적 배경에서 탄생했다. 군사정권의 강압통치 아래서 ‘침묵의 언어’가 탄생했다고 하는 사실은 하나의 역설이다. 잇따른 ‘긴급조치’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반정부 시위 열기는 식을 줄 몰랐다. 그런 와중에서 단색파 작가들은 백색 혹은 검정색으로 캔버스를 채워 나갔다.35)그런 필사적인 노력은 특유의 반적 행위를 통해 80년대와 90년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 때 단색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던 작가들 중 상당수가 80년대 정치적 격변의 시기에 작업의 방향을 바꾸거나 지리멸렬한 화풍을 이어나갔다. 이 전시에 초대된 전기 단색파 작가들은 한국 현대사의 풍상을 겪고 살아남은 이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들이다.
Ⅴ.
1980년대는 60년대부터 시작된 경제개발 정책의 가시적 효과가 나타나는 시기이다.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과 중동특수에 의한 오일 달러의 국내 유입은 80년대 중반에 들어서 ‘마이 카’ 붐과 외식산업의 번창을 가져왔다. 특히 1987년의 ‘민주화 선언’은 국민의 민주화에 대한 열망과 투쟁이 결실을 맺었다는 점에서 사회사적으로 볼 때 커다란 분기점이었다.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룬 서울은 어느새 국제적인 도시로 성장해 있었다.
한국의 단색화는 80년대 들어서 급증하기 시작한 아파트 건설의 붐을 타고 미술애호가들의 호응을 받기 시작했다.36) 단색화에 대한 이들의 관심은 특히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대도시에 고급 호텔과 고급 레스토랑, 카페 등이 늘어나면서 현대적 분위기에 맞는 단색화의 수요를 낳았다.
후기 단색파 작가들 대부분은 전후 세대이다. 연령적으로는 40-50대에 이른다. 전기 단색파 작가들과 후기 단색파 작가들 사이에서 보이는 미감적 단절은 변모된 사회 환경에 기인한다. 전자가 6. 25 전쟁을 몸소 겪은 세대인 반면, 후자는 근대화가 시작된 60년대에 태어났거나 성장기를 보낸 세대이다. 경제적 풍요의 시대를 청장년기에 경험한 바 있다.
전기 단색파 작가들이 전통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는 반면, 이 세대의 제자 벌에 해당하는 후기 단색파 작가들은 전통과의 단절이 심하다. 한문보다는 영어에 익숙하며 서구적 감각이 체화돼 있지만, 한편으로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사이에 낀 어정쩡한 세대이기도 하다. 이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각종 산업재의 사용은 재료에 대한 개방적 의식을 보여준다. 이들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잘 다루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와 같은 소셜 네트 워킹(SNS)에도 비교적 친숙한 편이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이들의 작품에서 소위 말하는 ‘중성화의 논리’니 중용의 미학, 한국적 미의식을 찾아보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일부 50대 이상의 작가들에게서는 전기 단색파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캔버스 표면에의 색의 침투나 동양적 사유에서 배태된 운필, 자연 친화적 태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후기 단색파 작가들 중 대부분은 대학시절에 서구 모더니즘 미술을 교육받은 사람들이다. 따라서 전통과 현대 사이에 갈등이 없지 않다. 후기 단색파 작가들은 국제화의 시대에 편승하여 넓은 세계에서 활동하기를 원하지만 미적 정체성의 문제에도 적잖이 고민하는 세대이기도하다.
전기 단색파 작가들과 후기 단색파 작가들 사이에는 일종의 미감적 단절이 존재한다. 물론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후기 단색파 작품에는 작가의 의식이나 취향, 감수성, 재료가 다른 데서 오는 분명한 차이가 느껴진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고산금이 사용하는 인조진주와 검정색 스테인레스판, 노상균의 반짝이(sequin), 문범의 우레탄 자동차 도료, 천광엽의 합성수지, 남춘모의 플렉시 글라스와 폴리에스터, 장승택의 레진(송진) 등등은 산업재라는 점에서 전기 단색화와 뚜렷이 구분된다.37) 이들의 깔끔하고 산뜻한 작품의 마무리는 전기 단색파 작가들의 미감과 뚜렷이 구분되는 점이기도 하면서, 성장 배경인 산업사회의 징후를 반영하고 있어 주목된다.
물론 후기 단색파 작가들 중에도 전기 단색파 작가들처럼 유채나 아크릴을 사용하는 작가들이 있다. 이 부류에는 이강소를 비롯하여 김춘수, 김태호, 김택상, 박기원, 안정숙, 이배, 이인현 등이 속한다.
Ⅵ.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의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What you see is what you see.).”라는 발언은 미니멀리즘38)의 요체을 드러내 보여준다. 1959년에 제작한 <높은 기(Die Fahne Hoch)>가 보여주는 것처럼, 검은 바탕 위에 흰 직선이 지나간 경로는 지지체의 십자형 구조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시각적 효과를 위해 자의적으로 구성을 조작한 과거의 회화적 관례에 대해 이의를 제기한 스텔라의 의도가 드러나 있다. 그의 이런 태도는 애드 라인하르트(Ad Reinhardt)의 검정색 작품들처럼 ‘합리적이고 경험주의적인 질서를 표방’한다.39) 프랭크 스텔라의 줄무늬 회화에서 보이는 반복적 특징은 도널드 저드(Donald Judd), 솔 르윗(Sol Lewitt), 칼 안드레(Carl Andre)와 같은 미니멀 작가들의 작품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으로 수학과 언어에 기반을 두고 있다. 반복되는 격자형 구조를 기반으로 한 이들의 작품은 20세기 초반의 전위 시인인 거트루드 쉬타인(Gertrude Stein)의 “a rose is a rose is a rose is a rose.....”와 같은 시구(詩句)처럼 하나의 동일한 단위가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고급예술과 디자인이나 광고와 같은 변종예술의 차이를 지킴으로써 미술의 순수성을 지키고자 했던 애드 라인하르트는 20세기 초에 완성된 그리드와 모노크롬에 주목했다. 그는 자신의 회화에 이 두 요소를 적용, 다른 어떤 것을 연상시킬 수 있는 여지를 없애버렸다.40)
라인하르트의 회화가 지닌 이러한 자기지시적인 특징은 결국 회화가 그 자체로 끝나는 자기완결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면포에의 침투와 흡수, 배압(背壓:하종현의 경우), 겹침 외에도 한국 단색화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인 반복41)은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에서 공통적으로 드러낸다. 이 작가들의 작업 스타일을 크게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의 단색화에서 보이는 행위의 반복적 특징은 그리드에 원리를 둔 서구 시각중심주의 의 끝물인 미니멀리즘이 지닌 엄격하고 차가운 형식적 특징과는 달리, 붓이나 연필 등 도구를 다루는 손의 소중함을 보여준다.43) 즉 개념주의에 저항하는 신체성의 회복인 것이다. 궁극(窮極)의 미를 지향하고자 한 한국의 전기 단색파 작가들은 오랜 문화적 전통에 의해 배태된 정신의 수련44)을 통해 중도(neutrality)의 세계에 대한 개시(開示), 자연에의 합일, 무한한 정신성의 창출, 물성에 대한 관심 등을 작품 속에 육화(肉化)시켰다. 한국의 단색파 작가들이 행하는 이러한 수공의 방식은 도널드 저드를 비롯한 서구의 미니멀 작가들이 플렉시 글라스 등 다양한 산업 재료를 사용하거나, 작가는 아이디어의 제시에 그치고 정작 작품제작은 공장에 맡겼던 것과는 현격한 차이를 보여준다.
한국의 단색화에서 보이는 또 하나 두드러진 특징은 재료의 물성이 드러내는 ‘촉각성’이다. 권영우의 화선지를 이용한 구멍 뚫기와 겹침의 기법, 손의 감각을 통해 형성되는 정창섭의 두꺼운 닥의 질감, 스프레이를 이용해 두꺼운 물감 층을 형성하는 김기린의 검정색 그림들, 한국의 전통 기와지붕을 연상시키는 박서보의 두꺼운 수직적 골이랑, 캔버스의 뒷면에서 걸쭉하게 갠 유성 물감을 마대 사이로 밀어 넣은 하종현의 <접합> 연작들, 뜯어낸 물감 층의 사이에 새로운 물감을 집어넣어 두꺼운 살을 만드는 정상화의 작품들, 신문지 위에 볼펜과 연필을 반복적으로 그어 마치 허물 벗은 뱀의 껍질처럼 물질 자체를 전성(展性)시키는 최병소의 작업, 되게 갠 검정색 안료를 사물의 표면 위에 덕지덕지 바르는 김장섭의 오브제 작업, 물감을 두껍게 반복적으로 쌓아 올린 다음 대패로 밀어 단면을 드러내는 김태호 등의 작업이 여기에 속한다. 한국의 단색화가 지닌 이러한 특징은 평면적이고 깔끔한 시각적 특징을 보이는 서구의 미니멀 회화가 지닌 시각중심적인 입장과는 크게 차별되는 부분이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몸’ 중심적이며 ‘촉감’ 중심적인 세계이다.
서구의 근대를 지배해 온 데카르트의 ‘코기토(cogito)’는 자아중심적이며 시각중심적인 사고의 소산이다. 주체와 객체, 마음과 몸을 대립적이며 이원론적으로 파악한 그것은 ‘나’라고 하는 주관적 관점에서 세계를 ‘바라보고’ 재단하며 지배한다. 이러한 남성 우월적 시각중심주의는 크레이그 오웬스(Craig Owens)가 적절히 지적한 것처럼 ‘몸의 물질성’을 빼앗는다.45)
반면에 촉감은 전통적으로 시각에 비해 천한 감각으로 간주돼 왔다.46) ‘코기토’의 입장에서 볼 때 촉각은 시각에 비해 어딘가 모르게 불안정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모더니즘의 시대에는 늘 시각에 가려져 있었다. 그것이 부상하고 재평가되기에 이른 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에 와서이다. 촉감은 여성적이며 대지적인 감각이다. 한국인들은 예로부터 ‘고수레’47)라는 것을 했는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외경심을 갖고 대지를 대하는 우주적 사고의 소산이다. 이러한 우주적 세계관은 서구의 손길이 닿기 이전의 아메리카 인디언 사회에도 있었다. 유럽의 침략자가 땅을 팔라는 제안을 했을 때, 한 인디언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땅(大地)은 내게 어머니와 같다. 그대는 나더러 어머니를 팔라고 하는 것인가? 결코 그럴 수는 없다.”
그런 관점에서 봤을 때 한국의 단색화에 촉각성이 두드러지는 것은 우연의 소치만은 아닐 것이다. 촉각은 신체적 접촉을 매개하는 감각이라는 점에서 ‘소유와 정복’을 촉발하는 시각과는 반대되는 감각이다. 본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을 장악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유럽의 아메리카 정복이 항해술과 원근법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컬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에 도달해서 맨 처음 착수한 것은 보이는 것들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었다. 그의 이러한 작명 행위는 그의 관심이 그곳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이 아니라 풍경에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48)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nominophiliac)’ 유럽인들의 취미는 소유와 동일한 의미이며 타자를 시각화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그것은 ‘발견하는 것’이다.
Ⅶ.
구한말에 이 땅을 방문한 서양인 기자가 본, 흰 옷 입은 사람들로 넘치는 거리는 타자의 눈에 비친 하나의 풍경이었다. 그로부터 1백 년이 지난 오늘날 이 땅을 밟은 서양인의 눈에 과연 한국은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이번에 그는 또 무슨 색깔로 한국을 묘사할까?
한국의 단색파 작가들이 하나의 풍경, 즉 자기의 표현술을 찾아간 도정은 끈질긴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그것은 서구의 미니멀리즘이 70년대에 종언을 고한 것과는 달리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세계사적인 지평에서 볼 때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운동인가, 아니면 하나의 개인적 양식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모더니즘의 대장정이 막을 내리고 뒤를 이어 찾아온 포스트모더니즘마저 물 건너간 지금 흘러간 과거를 반추하는 철지난 노래에 불과한가? [한국의 단색화]란 타이틀을 내건 이번 전시는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견해가 나올 수 있다. 환영한다. 나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불 꺼진 모더니즘의 잿더미를 뒤져 하나의 불씨라도 건지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가치 기준이 실종돼 지향점이 없는 이 자유방임의 시대에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이며, 또한 예술의 참 기능이 무엇인지를 묻고 싶다. 이 전시는 한국의 단색화 작가들이 40년에 걸쳐 이룩한 ‘마음의 풍경’이다. 그것은 발견된 것이 아니라, ‘발견한’ 것이다.
글쓴이 윤진섭은 1955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회화과와 동 대학원 미학과를 졸업하고 호주 웨스턴 시드니 대학에서 철학박사(ph. D) 학위를 받았다. 제1, 3회 광주비엔날레 특별전 큐레이터, 제3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전시총감독,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포천아시아미술제 조직위원장 겸 전시총감독, 한국미술평론가협회 회장을 역임했다. 현재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부회장과 호남대 교수, 시드니대 명예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몸의 언어>, <한국 모더니즘 미술연구>, <현대미술의 쟁점과 현장> 외 다수의 저서가 있다.
참고문헌
25) 근대화 정책의 핵심인 다섯 차례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시작되는 해는 1962년이었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4차까지만 진행되고 5차는 중단되었다. 연 평균 7%에 달하는 높은 경제성장률이었다. 경제개발5개년계획 동안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비롯하여 중공업 육성정책,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 새마을운동 등은 경제력 증진을 가져왔지만, 성장 제일주의가 가져온 후폭풍은 70년대를 통해 공안통치에 의한 인권 탄압과 함께 민주화의 후퇴라는 부작용을 낳았고, 반대급부로 반정부투쟁을 불러일으켰다. 70년대 후반 민중미술의 등장은 이미 이때 그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
윤진섭, <한국 모더니즘 미술 연구>, 재원, 2000. 67쪽.
26) 노정현, <한국근대화론-문제와 전망>, 박영사, 1980. 19쪽.
S.N.Eisenstadt, Varieties of Political Development: The Theoretical Challenge, in S.N. Eisenstadt and Stein Rokkan(eds,), Building States and Nations(Beverly Hills: Sage Publication, 1973), p. 45.
“나는 심전, 소림 양문하(兩門下)에를 출입하다가 무슨 심경이 변하였던지 서양화를 연구하여 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두 분 선생님 문하에 다닌지 3년 되던 해 처음으로 단신 동경을 향하여 떠난 몸이 되었다. 때는 2월 하순경이었다. 4월 초순에 다행히도 우에노(上野) 공원 안에 있는 토오쿄오(東京) 미술학교 서양화 예비과에 들어가 앉게 되었다.”
30) 가라타니 고진, 앞의 책, 54쪽.
31) 클레멘트 그린버그의 비평이론에 입각해서 비평을 한 대표적인 평론가로는 이일을 들 수 있다. 이일, ‘70년대의 작가들’, <한국미술, 그 오늘의 얼굴>, 공간사, 1982. 이 시기에 나타난 한국의 단색화에 대한 비평적 관점으로 대표적인 것을 꼽자면 이일의 ‘범자연주의’와 오광수의 ‘비물질화’를 들 수 있다.
32) 이 시기를 전통사회에 기반을 둔 ‘기예’에서 ‘이념’의 이행으로 본 비평가는 김복영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김복영, <현대미술연구>(정음사)를 참고할 것.
35) “최초의 단색화는 필연적이고 보편적이며 특이한 표현양상이다. 60년대 말부터 단색화 현상이 보이는데 이것은 시대상황과 맞물린다. 당시는 너무나 가난하고 꽁꽁 얼어붙은 추상적인 시대였다. 이것이 바로 모노크롬의 배경이고 바탕이다. 한쪽으로는 핍박한 최소한의 생활, 다른 한 쪽으로는 강압적인 군정 하에 모노크롬의 호소력은 안성맞춤이었다. 단색이나 반복의 방법이 저항감과 의지를 나타내는 데에 효율적인 집단양식으로 선택된 것이다. 어쩌면 이 현상이 쉽사리 확산되고 정착될 수 있었던 연유에는 시대의 유행을 넘어 깊은 곳에 맥맥이 흐르는 한국인 특유의 한(恨)이나 생명력의 표현론이 작동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우환, 필자와의 인터뷰 중에서
36) 한국의 아파트에 대해 외국인의 시각에서 쓴 논문으로는 발레리 줄레조, <아파트 공화국-프랑스 지리학자가 본 한국의 아파트>, ‘길혜연 옮김,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2007’가 있다.
37) 이에 반해 전기 단색파 작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재료로는 유채를 비롯하여 아크릴, 먹, 연필, 한지, 석채, 철분 등이다.
38) 초기에는 AB C 아트, 기본 구조(Primary Structure), 시리얼 아트, 시스템 아트, 구체 오브제((Concrete Objects), 리터럴리스트 아트, 특수한 예술(specific art)로 불렸으나 나중에 통용된 이름은 미니멀리즘과 미니멀 아트였다. 여기에 속하는 작가들로는 토니 스미스, 도널드 저드, 댄 플레빈, 칼 안드레, 솔 르윗, 엘즈워스 켈리, 로버트 모리스, 프랭크 스텔라, 케네스 놀랜드, 조 베어, 로버트 라이먼, 애그니스 마틴, 브라이스 마든, 로버트 맨골드, 알 헬드, 래리 벨, 존 매크라켄 등이다.
휘트니미술관 기획, 리사 필립스 외 지음, , 송미숙 역, 학고재. 206쪽, <아방가르드란 무엇인가?>, 진휘연 저, 민음사, 2008, 159쪽.
한국의 단색화 역시 1970년대 초반 이후 ‘한국적 미니멀리즘’을 비롯하여 모노톤 회화, 모노크롬 회화, 단색 평면회화 등 다양하게 불러왔다. 그러나 최근에는 단색화, 단색회화, 단색조 회화 등으로 점차 그 범위가 축소되는 경향이 있다. 이 글에서 나는 이 용어들과 구분하기 위해 ‘단색화(Dansaekhwa)’란 고유의 명칭을 사용하고자 한다.
39) 리사 필립스, 앞의 책, 206쪽
40) 할 포스터(Hall Foster), 로잘린 크라우스(Rosalind Krauss), 이브-알랭 브아(Yve-Alain Bois), 벤자민 H. D. 부클로(Benjamin H. D. Buchloh), , Thames & Hudson, 2004, 배수희, 신정훈 외 옮김, 김영나 감수, <20세기의 현대미술>, 사이언스북스, 2007, 398쪽.
애드 라인하르트, ‘The one thing to say about art is that it is one thing. Art is art-as-art and everything else is everything else. Art-as-art is nothing but art. Art is not what is not art......A museum of fine art should exclude everything but fine art, and be separate from museums of ethnology, geology, archeology, history, decorative arts, industrial arts, military arts, and museums of other things.’, , edited by Charles Harrison & Paul Wood, Blackwell Publishers, 1995, pp. 806-807.
41) 한국 단색화 작가들의 작품에 나타난 반복적 특징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할 것.
윤난지, ‘형태반복의 방법과 의미’, <에꼴 드 서울 20년, 모노크롬 20년>, 관훈디자인연구소, 1995.
42) 이 작가들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반복적 양태에 대해서는 본 도록에 실린 도판을 참고할 것.
43) 김기린, 하종현, 박서보, 최병소, 정상화, 김장섭, 윤명로, 이우환, 최명영, 허황, 정창섭, 김태호, 김춘수, 문범, 남춘모, 이배 등 물감이나 닥(楮)이 지닌 물질감(물성)을 직접적으로 현시함으로써 몸의 ‘신체성’을 강조한 작업은 최근 주목되는 ‘몸’의 철학, 혹은 생태철학과 연관시켜 볼 때 주목되는 부분이다. 이와 관련하여 메를로 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의 입장에서 단색화 작품을 논한 것으로는 필자의 다음의 글을 보라. 윤진섭, ‘김기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정상화, 침묵의 언어’, <한국 현대미술가 100인>, 한국미술평론가협회 엮음, 사문난적, 2009. 한편, 몸을 생태의 문제와 연관시켜 논한 책으로는 정화열의 <몸의 정치와 예술, 그리고 생태학>을 보라. 특히 동양의 도(道)와 풍수의 현대적 의미를 생태학의 입장에서 바라본 ‘환경존중의 길’은 단색화의 의미와 관련시켜 볼 때 매우 암시적이다.
Jung Hwa Yol, , 이동수, 김주환, 박현모, 이병택 옮김, 아카넷, 2005.
44) 가령, 동양에서 서예나 문인화 등은 인격의 수양을 중시한 유교적 선비문화의 소산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정신이다.
45) “남성들은 여성들에 비해 유난히 보는 것을 중시한다. 눈은 다른 어떤 감각기관보다 사물을 객관화하고 지배한다. 그것은 거리를 설정하고, 유지하려 한다. 우리의 문화에서 냄새맡고, 맛보고, 만져보고,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을 우위에 둔 것은 결과적으로 신체적 관계를 빈곤하게 만들었다......시각이 지배하는 순간 몸은 그 물질성을 잃어버린다.” Graig Owens, “The Discourse of Others:Feminist and Postmodernism, in The Anti-Aesthetics:Essays on Postmodern Culture, ed, Hall Foster(Port Townsend:Bay Press, 1983, p. 70. 정화열, 앞의 책 190쪽에서 재인용.
46) 정화열, 앞의 책, 190쪽.
47) 무당이 굿을 하거나 시골의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 음식을 조금씩 떼어 땅에 던지는 행위를 가리킴. 한국의 평범한 농부들이 행한 이 의식(儀式)에는 우주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순환과정으로 파악한 주역의 사상이 스며 있다. 이는 “양자 분자를 형성하는 모든 것들이 진동하는 끈으로 연결된 가장 미세한 상태로 되어 있다”는 현대물리학의 초끈 이론을 연상시킨다. 한편, 제인 파버(Jane Faber)는 이 이론에서 영감을 얻어 최근 인천여성미술비엔날레의 본전시인 [미지의 대지(Terra Incognitas)]를 기획한 바 있다.
48) Craig Owens, University of Califonia Press, 1992. p. 2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