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
정대현은 우리들에게 이른바 구상작업과 비구상작업의 경계를 부단히 횡단해 온 작가로 인식되어 왔다. 다양한 실험기를 거쳐 오늘날 비로소 수련기의 이상이 구체화된 근원적 구조의 추상작업을 통해 독자적 영역을 구축해 온 것으로 평가받는 작가이다.
하지만 조각가 정대현의 작업세계를 초기부터 오늘날까지 두루 살펴볼 이 글에서는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던 지난 시절의 작업마저 오늘날의 독자적 차원으로 연계하여 미화시키려는 의도가 추호도 없음을 먼저 언급해야 하겠다. 오히려 이 글은 당시의 단절과 침체적 모색기에 대한 우리들의 객관화된 지표 마련에 대한 의무를 방기하지 않을 것이며 무엇보다 오늘날 한 작가의 독자적 세계가 어떤 전개를 거쳐 구체화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에 집중하고자 한다.
구조적 추상으로부터 유기적 구상으로
한 작가가 개인적 삶의 지평을 자신의 작품에 올곧이 담아내기에는 미술현장의 분위기가 그리 녹록하지만은 않다. 학습되지 않은 거칠고 자유로운 미술적 감수성을 억압하거나 이를 세련되게 다듬어내는 학습된 훈련이 매번 작가의 작품을 통제해낼 뿐만 아니라 미술현장이 그러한 태도를 부추겨 왔기 때문이다. 특히 7-80년대의 미술풍토로서는 한 개인의 작품에 대한 가치평가는 늘 이러한 보편적 미감을 촉구하는 형식미학과 이를 운용하는 스킬에의 무언의 종용이 있어왔고 이를 따르지 않거나 배반하는 작가들은 ‘작품성이 없는 작가’들로 매도되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사사’라는 이름으로 스승을 따르는 도제식 교육과 이를 추종해 온 미술계 내에서의 자리매김을 위한 모종의 모색들이 당시 작품의 경향들을 풍부하게 창출해내는데 있어 방해요소가 되어 온 셈이다. 물론 오늘날은 미술대학이라는 학습의 장에서 한 개인의 독특하고 자유로운 감수성을 동질화시켜내는 교육풍토는 지양되어 온지 오래지만 7-80년대 학습기의 작가들은 부지불식간 자신의 언어를 잃고 타인의 언어를 배워 미술현장에 덜렁 던져져야만 했다.
그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학습기를 거친 작가 정대현에게 있어 조각이란 매체를 통해 아방가르드적인 미술의 본성을 물씬 풍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을 게다. 구상이든 비구상이든 서구미술의 현장을 카피한 획일화된 양상을 텃밭으로 삼아 그를 변형한 이미지들이 난무하는 미술현장 한 가운데서 자신의 감수성을 자양분으로 한 채 독자적 어법을 찾아 작업을 진척시키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미술현장에 맞닥뜨리는 그의 초기 작업세계는 당시 미술현장의 세련된 조형성의 이미지들과 별리한 채 조각의 수련기부터 모색해 온 구조적이고 기하학적 추상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것은 미술시장에의 소통과는 처음부터 담을 쌓고 구축한 젊은 패기의 작가정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대학시절 8m가 넘는 삼각텐트 모양의 거대한 구조물이나 조각의 근원에 대한 수학적 접근을 통한 작품제작은 그로 하여금 신명나는 조각에의 세계에 눈뜨게 해 주었다. 또는 대학시절 추구했던 ‘비어있음’과 ‘채워져 있음’이라는 공간에 대한 이지적 차원의 접근은 세계 존재 방식에 대해 철학하기를 미술의 언어로 모색하는 한 방편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미술현장에 팽배한 익숙한 조형미감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고 구조적인 추상조각을 통해 실험적인 작업에 매진했던 수련기와 첫 입문기를 이야기하기에는 정대현이 당시 보내 온 세월의 진폭이 그리 길지 못하다.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분석할 여지가 많이 부족한 상황이라 할 것이다. 더욱이 실험적 태도가 ‘정대현 화(化)’되기 전에 끝난 구조적 추상작업(비로소 최근에 다시 이어지고 있지만) 이후는 ‘배운 것’을 통해 생계의 문제를 해결해야 될 상황에 직면했었던 젊은 시절에 갑작스럽게 변모하며 등장한 구상작업에 대해 우리가 세세하게 상황을 설명해야 할 난감함에 봉착한다.
형식미학과 미적 가치만을 두고 그의 작품을 논하려 한다면 이러한 변모의 시대에 드러난 장식적인 구상작업을 두고 독자적 작품세계를 논하기에는 그의 조각언어에 대한 우리의 분석과 평가 논의가 겉돌 수 있다. 미적 구성과 구조를 이야기하기 전에 ‘생계’나 ‘돈’과 연관된 예술가 위상학이나 예술사회학적 접근이 먼저 선결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구상작업은 순전히 어려운 생계 형편을 탈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출발되었다. 혹자는 그의 구상작업의 등장을 이전의 추상조각의 탐구에 대한 ‘채워지지 못하는 강한 욕구’ 탓이나 ‘한국성이라는 아이덴티티’ 모색으로 풀이하고 있기도 하지만,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작가가 생계의 목적을 위해 구상작업을 시작했다고 솔직히 시인하고 있듯이, 이러한 모색들은 후차적인 작업과정에서 유발된 것일 뿐이다.
사실 작가가 언급하는 ‘생계의 목적’이란 든든한 작가의 재정적 후원자였던 부친의 사망으로부터 기인하게 된다. 1983년 당시의 작가노트를 보자.
“군에 다녀오고 졸업 후의 막막함이란(중략)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수직적이고 구조적인 작업에서 갑자기 내 작업은 온통 향수에 젖기 시작했다. 어려서 자라던 시골길의 나지막한 흙담 부터 시작해서 언제나 기다려줄 것 같은 고향동네의 여자들, 대충은 펑퍼짐하고 흙담을 닮은 여자들, 귤껍질 같은 시골농부의 손까지도 그리워졌다. / 낙향을 할까, 취직을 할까, 오만 잡생각이 머리를 스치고(중략)/하지만 새로 시작하는 것은 항상 고통이 우선이었다. 결국은 적당히 타협하고 내 자신에게 섭섭해 하면서 반쯤 어두워진 얼굴로 작업을 시작한다.(중략),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도 없었고 그저 껍데기를 만들고자 애쓰지 않았나 하는 자책감이 머리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실제적인 ‘돈’이나 ‘생계’란 단어는 눈에 띄지 않지만 우리는 위의 글에서 변모한 구상작업이 생계를 위한 ‘필요에의 선택’이었음을 반증하는 여러 대목을 만날 수 있다. 비구상보다 비교적 대중과의 이미지의 소통이 수월한 구상작업을 시작하게 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한 조형적 관심은 여러 가지 실험을 거쳐 새로운 의미망을 엮기 시작하는데 이에 대한 가시적인 평가를 받은 것은 1984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 수상이었다. 세 여인의 도약적 자세를 취한 <여명(黎明)>은 그가 생계의 목적으로부터 출발한 구상작업이 미학적 차원의 조형언어로 승화한 단계에 이른 작품이라 할 것이다.
그가 실제로 “별로 자랑할 만한 것이 못된다.”라고 진술한 구상작업들의 많은 부분이 대중 취향적이거나 장식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구상적 형상 속에서 그는 나름의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마련하기 위해 고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가 겸허하게 자신의 구상작업 전반에 대한 저(低)평가의 자가진단을 행하고 있지만 일부 작품들은 조형적 완결미를 고의적으로 탈피하고 진중한 작가정신을 담아내기 위한 노력한 흔적들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발견해 낼 수가 있다.
필자로서는 작가가 언급하는 ‘토담’으로부터 기인하는 흙의 정취나 다수의 평자가 언급하는 흙 붙이는 과정에서 생긴 틈을 매끈하게 다듬지 않으려는 토담벽에서 발견하는 미감 같은 차원을 그의 독자적 조형언어로 파악하기에는 무리인 것으로 판단한다. 이른바 한국적 정체성을 발현시키는 토담이나 전통가옥의 형태나 질감 등 소재주의적 차원의 언급을 통해 그의 작품을 바라보는 시각이 팽배하지만 실제로 그와 같은 작가의 조형언어는 매우 구태의 것일 따름이다. 당시의 미술현장에서의 한국적 유형 찾기의 움직임은 마치 시대의 유행처럼 번지던 터라 이를 좇는 듯한 그의 조형방식은 독창적이거나 특이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당시의 상투적인 조형방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듯한 인상과 비판적 견해를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의 구상조각 대부분은 마치 헨리 무어식의 환원적인 인체 구성방식을 흉내 내는 듯한 당시의 조각현장의 이미지와 별반 차별성이 없어 보인다.
한편, 필자는 그의 구상조각이 독창적 의미를 담보할 수 있는 지점을 ‘최소한의 표현’으로 개체의 특성을 드러내는 인체 두상 시리즈로부터 발현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마치 원시 돌조각 이미지를 보는 것과 같은 고의적으로 서투른 작법의 얼굴상들은 때론 매우 단순 간결한 조형 이미지로 변모되어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가 초기에 추구한 구조적 추상이 접목되는 지점이다. 변형(déformation)과 단순성(simplicité)이 동시에 드러나는 이른바 ‘반추상’이라 우리가 불러온 양상이 그의 기념비적 형세의 조각들에서 유독 눈에 많이 띄는 것은 구상의 서정적 이미지와 추상의 관념적이고 구조적인 이미지가 이루는 적극적 하모니를 통해서 관자의 시지각에 보편적 인식을 성취하려는 까닭일 게다. 시각적 형태가 판별 가능할 뿐만 아니라 예술적 조형의식도 향수하려는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려는 작가의 태도가 읽히는 대목이다. 순수한 작가정신으로만 풀이하기에는 어정쩡한 구석도 가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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