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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가론〕정재호 / 기호들이 운위하는 공간

김성호

상징-도상과 기호

 

정재호의 작품들을 분석하는 이 글에서 우리는 이미지의 상징(symbol)의 체계가 도상(icon)으로부터 기호(sign)의 양상으로 바뀐 미술사를 간략히 사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의 작품이 기호로 가득 찬 것이면서도 오늘날 시대에 분석의 대상에서 사라진 도상의 뿌리를 일정부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 간의 이해는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근대 이전의 미술은 상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거나 아니면 숨겨두는 방식들을 통해서 특정한 메시지를 표현해 왔다 할 것이다. 역사 이전이든, 이후든 근대 이전의 미술에서 상징이 매우 주요한 화두였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는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구석기 시대, 뷜렌도로프 비너스에서 발견되는 인체의 비대함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제의, 주술적 의미를 담아내는 상징이었고 고대이집트 피라미드의 삼각뿔은 현세적 죽음으로부터 내세적 영생으로 전이시키는 매개적 상징이었다. 초기 중세미술에서 나타나는 어린 양, 비둘기와 같은 도상은 예수의 직접적 묘사와 같은 성상 표현을 금지했던 기독교의 교리를 따르려는 카타콤 미술가들에게 있어 예수를 의미하는 상징이었고, 르네상스 시대 라파엘로가 그린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각기 다른 손가락 방향은 이데아 대(對) 현실이라는 그들의 상이한 철학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이렇듯, 시각예술의 특징상 미술에서의 상징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도상(圖像, icon)안에서 표출되어 왔다. 이미지의 유형형, 즉 ‘특정 의미가 부여되는 유형화된 특정 형상’들로 풀이되는 도상은 그 동안 미술에서 메시지를 함축하는 기능적 특권을 부여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특히 서구에서는 종교적 교화의 목적으로 도상을 정착화시킴으로써 종교적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데 사용되었다. 수태고지(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예수 잉태를 알리는 도상), 피에타(성모 마리아가 죽은 예수를 안은 도상), 그리스도의 부활(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하는 예수의 도상) 등은 당시 서구의 대부분 문맹자들인 대중들에게 상징적 도상을 통해서 기독교 일신주의를 강화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당시에 통용되던 ‘도상을 통한 상징 파악’의 전모가 희미해져 후세에 이르러 이를 파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도상학(圖像學:iconography)이 등장하거나 20세기에 이르러 보다 체계화된 도상해석학(圖像解釋學:iconology)이 등장해서 이러한 이미지를 통한 이데올로기 강화의 역사를 기술하거나 이미지의 유형학을 분석하는데 유효한 틀을 제공해 왔다.

 

정재호 작품을 분석하는 우리들 논의에서 주요한 점은, 이러한 상징 분석을 위한 도상의 장(場)에서 근대에 이르러 기호의 체계가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나 현대가 촉발된 시점에서는 도상은 오간데 없고 아예 상징이 기호로 치환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재인식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이러한 도상과 도상 의미의 소멸은 미술에서 인상파 시기에 태동한 근,현대성(modernity)과 맞물리는 지점이다. 구체적으로는 현대미술이 메시지의 전달을 목적으로 하지 않을 뿐더러 상징체계를 유형화하지도 않는다는 데서 이러한 도상의 소멸은 부각된다. 근.현대로부터 촉발된 도상의 소멸로부터 오늘날 동시대의 미술이 위로받을 수 있는 까닭은 더 강력한 기호의 체계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상징의 체계란 도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기호화될 뿐이라는 가설들은 이제 실험기를 거쳐 입증의 단계에 이르고 있다.

 

 

기호-이미지와 텍스트

 

정재호가 이전의 평면 작업들과 최근의 벽면 작업들에서 공히 추구하는 이미지의 형식은 혼성 전략에 의해 구축된다. 직선, 곡선, 파선(波線), 점선 그리고 곡면 도형과 직각 도형이 혼재하는, 폭약이 폭발하는 듯한 역동적인 이미지의 구성도 그렇지만 이와 함께 어우러진 복잡한 수학공식과 산술기호, 표지판과 같은 지시체의 텍스트, 그리고 경우에 따라 의미를 쉬이 알 수 없는 여러 텍스트들과 이미지들이 혼재되어 흩뿌려져 있는 양상은 작가 정재호의 혼성에의 의지를 극대화한다.

정재호의 작품에서, 이미지들의 상징이 더 이상 도상으로서가 아니라 기호로서 발현되는 현상은 어떤 점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우리가 쉽게 간파할 수 있는 사실은, ‘메시지의 전달을 위한 이미지의 유형화’를 꾀하는 특정 도상들이 그의 작품에 들어오면서 탈문맥화를 시도하고 본래의 메시지를 상실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번 전시에 보여준 벽면 드로잉으로 이루어진 작품 <Untitled>는 우리가 익히 일상에서 대면하고 있는 도로의 횡단보도와 안전지대의 이미지들이다. “보행자는 이리로 건너세요.”나 “주행 중 긴급 조치가 필요한 차량은 이곳에 정차하세요.”라는 메시지를 표상하는 ‘유형화된 이미지인 도상’은 그의 작품에 들어와 도상이 표방하는 언술(言述)의 애초 문맥을 상실하고 단지 3차원 벽면에 그리는 2차원 이미지의 실험이라는 차원으로 변질되고 만다. 작품으로 들어온 안전지대, 횡단보도 이미지들에서는 더 이상 본래의 언술적 의미는 찾을 수 없고 단지 그것이, 돌출기둥을 가진 벽면과 바닥이라는 3차원 공간에 어떻게 효율적으로 2차원 평면 드로잉으로 안착시키는가 하는데 초점이 모여 있을 따름이다. 

 

 

정재호의 작품에서 개별 도상들은 그 지위를 상실하고 기호로 대치된다. 도상이 의도하는 메시지를 의도적으로 지워낸 탓이다. 따라서 우리는 도상으로부터 대치된 그 기호를 움베르트 에코(Umberto Eco)나 퍼어스(Peirce)가 언급하는 방식으로 ‘도상기호’로 부를 수 있음에도, 정재호 작품과 관련하여 도상과의 차별성을 강조하기 위해 단지 ‘기호’ 혹은 ‘시각기호’로 부르고자 한다. 정재호의 시각기호들의 진정한 정체성은 그의 거대한 벽면 드로잉 작품, <Made>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소나무, 나뭇가지, 나뭇잎, 꽃, 나비와 같은 자연물들이나 역사를 기록한 다큐멘터리 사진으로부터 유래한 인물 그리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숫자나 기호, 텍스트들이 각자의 시공간을 벗고 저마다 하나의 시공간으로 잠입하면서 혼재, 조합된 인공의(made) 세상으로 재탄생하고 있다. 도상들의 고유 메시지를 훌훌 벗고 하나의 공간 안에 모여들면서 단지 시각기호의 체계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고유상징이나 역사적 인물의 고유상징은 이미 기호로 해체되어 별 특정성이나 유형성을 확보해내질 못한다.

이러한 복잡다단하고 혼재, 해체된 이미지들의 파편은 기호학에서 언급되듯이, 단일 ‘의미소’(sème)의 자격을 상실하고 다차원 의미소만을 가지게 됨으로써 의미의 분절을 지속하게 된다. 공통 함의의 의미망을 언어적 진술로 표방하기에 어려워지는 것이다. 우리가 그의 작업에서 주목하는 것은, 복잡한 이미지의 중첩 전략으로 인해 이미지가 애초에 내포하고 있는 의미소의 연결 기능이 와해되어 그 총체적 의미가 탈각되고 단지 그 겉껍질이라는 형식만이 요란스럽게 남는 지점이다. 그 어떤 의미의 범주로 환원될 수 없는 카오스적인 현대성의 기호들은 일상적인 어법으로 이야기하면 흔적(trace)에 다름 아니며, 기호학적 관점으로 이야기하면 지표(index)에 다름 아니다.

그의 또 다른 작품 <Made in Korea>에서 혹자는 이미지 속에 숨어있는 텍스트를 발견하고 단일 의미소 혹은 의미의 지시성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어지러운 이미지의 흔적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특수 시점을 통해 텍스트가 드러나는 아나몰포시스(anamorphosis) 전략을 숨겨두는 이 작업 역시 텍스트는 별 의미망 없는 기호로 전락한다. 의미를 표방하는 ‘지시로서의 인덱스’가 아니라 의미를 지우는 ‘지표로서의 인덱스’로 드러날 뿐인 것이다.

이와 같은 작가의 태도는 이전 전시들에서 보여준 작품들을 통해서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다. 각종 수학기호, 화학공식, 일련의 숫자와 기호체계들은 카오스적이고 해체적인 이미지들 사이에서 파편처럼 쏟아져 나오는 흔적과 지표로서의 무의미의 텍스트일 따름이다. 따라서 정재호에게 있어 이미지에 대한 텍스트란 다의적 의미를 고정, 중계, 지시하는 ‘지시로서의 인덱스’가 아니라 무의미의 지표로서의 인덱스일 뿐이다.

 

 

놀이의 가상공간

 

혼돈과 해체적인 기호의 나열과 같은 주제의식이란, 정재호에게 있어서는 낯선 공간에서의 유학시절의 경험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는 만큼 피부체감적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주제의 진실성과 형식의 분방함은 출발부터 밀접한 상관성 아래 직조된다.

그럼에도 형식적 흔적, 혹은 지표만이 덜렁 남는 그의 작업은 일견, 그 결과물을 남기는 작가의 예술적 제스처만이 가치 있어 보인다. 즉 작가가 화면을 대면하는 창작과정에서 유발되는 놀이의 방식만이 미적 가치로서 유효해 보이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실의 번뇌, 고충, 혼돈 등 정신분열증적이고 부정적인 주제의식이 작품 안에서 이미지 생산의 약동적 충동과 더불어 시각적 유희와 참여적 놀이라는 밝고 긍정적인 제작형식으로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월 드로잉(wall drawing)은 우리가 어린 시절 담벼락에 분필을 들어 글 쓰고 그림 그리던 낙서의 충동과 같은 유희적 차원을 생생하게 재연해냄으로써 아동기 경험을 자연스레 상기하는 관객으로 하여금 그의 생명력 가득한 화면에 쉽게 빠져들게 한다. 치밀한 구도 없이 그저 잠정적인 초기 계획안대로 시트지와 색테이프를 이리저리 벽면에 붙이고 칼로 잘라 내면서 이미지의 구축을 구도 및 상황에 따라 변형시켜나가는 방법론은 순차적 시간성이 애초부터 와해된 ‘혼돈과 해체’라는 주제의식을 보다 극명하게 표현해낼 수 있게 한다. 주제를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단지 즉흥적 창작 방식을 통해 자동 생성되는 혼란에 몸을 실어 리듬을 탈 뿐이다. 대중에게 선보이는 공적 공간을 개인적 공간으로 점유하고 자신만의 가상현실 공간을 놀이의 방식으로 창출하는 정재호의 작품은 가히 ‘기호들이 운위하는 놀이공간’이라 할 만하다. 한편, 형식상 기의(signifié)는 사라지고 기표(signifiant)만 화면에 남지만 결국 혼돈, 해체라는 현대성이라는 시니피에를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탈의미적 기호들이 직조하는 지도그리기 놀이’라 불러봄직도 하다. ●

 

 

 

출전 /

김성호, '기호들이 운위하는 공간', (정재호 작가론), 『경기북부 젊은 예술활동 비평 모읍집』, 경기문화재단, 2006. 12. pp.3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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