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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경 / 매여 있음의 고통과 쾌락

이선영





 

캔버스 위에 그려지거나 붙인 것이 아닌, 캔버스와 하나가 되어 예쁘게 묶인 이민경의 리본은 단순한 형태지만, 삶과 아름다움에 관한 중요한 진실을 담고 있다. 캔버스는 세상을 투영해주는 관례적인 장으로 간주되어왔지만, 동시에 현대미술은 캔버스로부터 벗어나려는 지향을 강하게 보여주기도 했다. 그것은 리본처럼 미를 창출하는 도구이면서 구속이다. 삶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에 묶여 있는 인간은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고자 하지만, 스스로 구속을 원하기도 한다. 탈주라는 말이 한참 유행하기도 했지만, 인간은 ‘자유로부터 도피’(에리히 프롬)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예술과 영원히 함께하고 싶지만, 희생과 헌신만을 요구하는 그것으로부터 탈피하고도 싶다. 이 이중성이 인간적 삶을 특징짓는다. 삶 자체가 역설의 무대이기에 이러한 이중성이 모순으로 다가오지도 않는다. 삶의 안정적 재생산을 위해서 현실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하지만, 어느 순간 질곡으로 다가오는 당면한 현실로부터 도약하기 위해서는 끈을 풀어버려야 한다.

 

또는 ‘끈 떨어진 삶’이란 부정적 어감의 말에서 암시되듯, 의도치 않게 현실과의 끈을 놓쳐버릴 수도 있다. 놓아버렸든지 놓쳐버렸든지 상실감은 남는다. 시간이라는 변수와 함께 살아가는 인간은 흐르는 강물처럼 제자리에 머물 수 없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한 캐릭터처럼, 단지 제자리에 머물기 위해서라도 그는 끝없이 움직여야 할 것이다.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는 사람도 인생의 매 단계마다 직면할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 얽힘과 풀림이 적절하게 배분되어야 현실에 뿌리를 내리는 진정한 변모가 가능하다. 이민경의 ‘풀지 않는 매듭’전의 주제는 달갑게만 다가오지는 않는 구속과 속박이 놓여있는 다양한 맥락을 캔버스를 재단하는 독특한 기법을 통해 표현한다. 이미지를 만드는 선은 그리기가 아닌 바느질을 통해 만들어진 가느다란 홈이며, 작품 속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잡혀있는 주름은 환영이 아닌 실제이다. 주름은 만져지며 조명에 따라 움직이는 그림자를 낳는다.

 

작가는 ‘재단하여 만든 형상을 캔버스 틀에 입히는 행위는 전통회화의 그려서 만들어낸 일루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려는, 아니면 반대로 평면 회화 안에 스스로를 계속 가두는 행위’라고 말한다. 캔버스와 이미지는 그 이원성을 해체하고 거칠거나 매끄러운 하나의 면으로 이루어진다. 이 복합적인 하나의 면이 추후에 틀 지워진다. 면을 팽팽하게 당겨주는 틀은 부가적인 것이 아니라 내재적이다. 캔버스 천 뿐 아니라, 린넨, 한복 천, 퀼트 천, 프린트 천, 디지털로 프린트하여 만든 천도 사용한다. 캔버스와 색상 비슷하고 섬유의 밀도만 차이가 있는 작품 <리본>은 단순하지만 이민경의 주제와 형식을 압축한다. 리본은 거칠게 시접과 실밥이 드러난 뒷면이 작품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재단된 작품은 그려진 것과 달리 뒤로 시공간의 두께를 쌓아간다. 깔끔한 겉면을 위해 숨겨져야 했던 것들은 빈티지 스타일의 패션처럼 그자체가 또 다른 무늬가 된다.

 

요즘에는 눈속임처럼 무늬를 살짝 그려 넣기도 한다. 재단된 것과 그린 것이 혼동되는 이러한 작품에서 실재와 환영의 관계는 더 복잡하게 펼쳐진다. 작품 <선물>에서 리본만 캔버스와 재단되고 내용물은 그려져 있으며, 잎사귀 무늬가 재단된 작품 <커버>에서 같은 무늬가 캔버스 위에 그려져 있다. 재단된 꽃무늬 리본이 있는 작품 <리본>에서 일부분은 그려졌는데, 그리다 남긴 부분이 드러난다. 잎사귀 무늬가 재단된 작품 <fake>에서 아래로 늘어 뜨려진 끈과 달리, 위의 끈은 유화 물감으로 그려져 있다. 하나의 끈은 중력의 힘에 지배되고 다른 하나의 끈은 그림의 규칙에 의해 배치된다. 캔버스와 꼭 맞춘 듯이 재단된 신발과 거기에서 나온 실제의 끈이 다시 리본 모양으로 재단된 작품 <토슈즈>처럼, 2차원과 3차원 공간을 넘나든다. 리본이나 토슈즈를 소재로 한 작품들에서, 캔버스와 함께 재단된 또 다른 천들은 끈의 형상을 취하면서 캔버스 바깥으로 늘어지며, 끈은 작품 <string>처럼 서로 다른 캔버스 안에 재단된 끈 뭉치 이미지들을 3차원 공간에서 연결해주기도 한다.

 




 

바탕 면에 단단히 붙어있는 끈은 나머지 말단 부분을 현실 공간에 드리운다. 캔버스 천에 이미지를 재단한 후 박음질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과정은 오차 없이 진행되어야 하는 정밀한 과정이다. 여러 조각들을 연결해 이미지를 만드는 공정에서, 펼쳐 당기면 평면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2차원에 그려진 3차원적 환영으로서의 그림의 방식은 물리적 구성에 의해 해결되어야 한다. 이민경의 작품은 환영이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고도의 인공적인 장치에 의한 결과임을 알려준다. 사실, 자연스럽게 보이는 원근법적 장치 또한 그러하다. 그것은 특정한 역사적 시기에 발전된 하나의 유력시된 시각적 관습일 뿐이다. 관습이란 필요와 욕망의 발로이다. 이민경의 작업에는 오랜 시행착오 끝에 발견한 자기만의 방식과 경험, 그리고 기하학적 감각이 모두 필요하다. 재단사가 몸에 딱 맞는 옷을 짓듯이, 이미지를 만드는 조각들은 완전한 평면이 된다. 이미지를 담아서 관객에게 전달해주는 중성적인 바탕으로서의 캔버스를 넘어서, 이미지가 캔버스에 심어져 있는 것이다.

 

이미지와 바탕은 조각 잇기를 통해 하나의 계열에 속해있다. 이미지는 좀 더 조밀하고, 바탕은 좀 더 넓은 조각일 뿐이다. 형태와 바탕은 서로 밀고 당겨진다. 이미지를 둘러싼 공백은 단순히 배경이 아니라, 형태만큼이나 사건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이민경은 그림의 순수성을 확보하기 위해 텅 빈 캔버스에 가까운 평면으로 진화해온 모더니즘적 과정을 포함하면서도 환영을 다시금 도입한다. 이미지가 바탕에 심어져 있는 화면은 모더니즘적인 동어반복을 피하면서도 자기지시적이다. 작가에게 캔버스는 현실만큼이나 단단한 지반을 이루기에, 그리지 않으면서도 그림으로 남고 싶은 지향 또한 이중적이다. 작가의 온 역량을 투입해야만 실현될 수 있는 예술작품이야말로 구속과 해방의 이중성을 잘 보여준다. 예술은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재난이 아닌 자유로 고양시키는 긍정적인 예가 될 수 있다. 해방되어야 그릴 수 있고, 동시에 복속되어야 그릴 수 있는 것이다.

 

작품에 매듭과 구속에 대한 내용을 많이 담아온 이민경은 실타래나 끈처럼 묶을 수 있는 소재를 통해 벗어나고 싶으면서도 안주하고 싶은 마음을 표현한다. 아름다운 구속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이러한 이중성은 속옷이나 신발 같은 물신적 소재에의 집중에서 더욱 분명하다. 그것들은 이상적인 형태를 만들기 위해, 그대로 두면 이리저리 퍼져나가는 자연적 형태를 가리고 조이고 변형시키는 구속 장치들이다. 남녀 팬티, 치마, 가방 모양이 재단되어 있는 <속 밖> 시리즈에는 진열된 상품, 또는 포장된 선물처럼 깔끔하게 제시된다. <속 밖> 시리즈는 붙잡을 수 없고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구획된 형태 안에 담으려 한다. 욕망은 바느질로 만들어진 가느다란 홈과 주름에 고이고 그것을 타고 흘러간다. 작가는 정밀한 조정들을 통해 밑도 끝도 없는 욕망이 흐르는 방향과 순서를 정해준다. <wrapping> 시리즈는 특별한 선물이기 보다는 일상적 물건이라 할 만한 것들이 포장되어 있다. 칫솔, 일회용 컵, 핸드폰, 노트북 컴퓨터, 바나나, 신발 한 짝, 심지어는 사람 얼굴도 포장되어 있다.

 

포장에서 시작하여 포장으로 끝나는 과정들을 실재를 무화시킨다. 사용에 불편함을 줄 수도 있는 포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꾸미지 않았을 때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의 실상은 허상만큼이나 불안할 수 있다. 현실이 허상에 구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실재가 더욱 장황하고 번거롭게 느껴지는 시뮬레이션의 시대에 겉포장은 또 다른 실재로 다가온다. <속 밖>이라는 제목처럼 안과 밖이 구분불가능한 상황이 새로운 현실, 또는 속박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표면으로 기어오르는 현대사회에서 실제와 끈 떨어진 기표들로부터 자유를 느끼는 부류는 더욱 늘어간다. 가장 구체적인 실체로 다가오는 몸뚱이조차 기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오히려 몸은 최후로 남겨진 실체이기에 더욱 집요하게 기표들의 공략대상이 된다. 이민경의 작품 기표들은 성적인 물신과 밀접하다. 여기에서 기표는 다른 기표와 줄줄이 연결되어 있다. 프로이트가 인간 무의식이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져 있다고 밝혀낸 이래, 욕망의 환유적 대상, 사랑의 은유적 대상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신발이나 속옷, 그리고 그것과 연결된 끄나풀 같은 것들은 부분적인 대상이다. 그리고 결여와 욕망의 대상이다. 이 부분적 대상들은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사랑의 역사]에서 말하듯이, 주체의 소재이고 안감이지만 의식의 주체라고 간주되는 주체는 아니다. 이민경의 작품에서 알맹이 없는 포장들, 또는 아예 기표 자체와 하나가 된 기의는 에로스가 본질적으로 인간에게 결여된 욕망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전체가 아닌 부분들이 욕망되고, 전체와의 유기적 질서를 상실한 부분들의 연결은 끝없는 탐닉의 대상이 된다. 전체는 한정되어 있지만 물신의 항목은 끝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물신의 매력이고 동시에 질곡이다. 소유할 수 없는 전체로부터 떨어져 나온 부분적 대상들은 자극의 강도를 집중시킨다. 그것들은 도착적 쾌락을 위한 수단이다. 이민경의 작품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물신적 소재들은 하위문화에서 주된 아이템인 본데지(bondage)를 떠오르게 한다. 본데지에는 꼭 조이는 코르셋과 하이힐로 묶인 몸이 자주 등장한다.

 

몸을 과도하게 포장하고 묶는 구속 장치는 소수자의 도착적 쾌락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광기가 그러하듯이 도착은 인간 본성 어딘가에 이미 존재한다. 이민경의 작품에 등장하는 작은 리본, 토슈즈 같은 사랑스런 대상들이 어두운 하위문화의 쾌락의 기구들과 질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다. 가령, 토슈즈가 만들어낼 기형화된 발은 아름다움과 연결되는 잔혹함의 강도를 나타낸다. 여성이 아름다워지려면 작은 리본에 허리를 맞추어야 한다. 아름다움과 잔혹함은 동전의 양면이다. 미는 늘 상 규격과의 관계였다. 아름다움을 향한 정형의 기술은 살을 자르고 뼈를 깍아 내는 것을 넘어서, 곧 유전자 조작의 차원까지 소급될 것이지만, 소수만이 간취할 수 있는 이상형은 무슨 단편에 들러붙어서 저만큼 멀어질지 예측할 수 없다. 성이 상품화되듯 상품 역시 성화된다. 성과 돈은 물신이라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다. 미는 이윤처럼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에 의해 추동되기 때문이다.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은 틈과 주름이다. 이민경의 작품에서 틈과 주름으로 이루어진 여타의 다른 재단된 이미지들 역시 장식에 의해 변형된 부재하는 몸을 암시한다. 이 포장들은 살아있는 몸을 가리면서 동시에 가리킨다.

 

욕망의 흐름을 통제하는 구속 장치들은 불확실한 욕망에 경계를 정하고 그 경계를 끝없이 넘나들면서 쾌락을 극대화한다. 구속 장치는 육체 뿐 아니라 심리적 과정에도 작동한다. 가령 사랑은 예속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예속을,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대상에 종속된, 즉 사랑하는 사람의 조건 자체라고 말한다. 바르트에 의하면 사랑하는 이와의 완전한 결합에의 꿈, 그것은 분리되지 않는 휴식이자, 혹은 소유권의 충족이다. 우리는 서로를 절대적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어 즐길 수 있기를 꿈꾸는 것이다. 그러나 종국에는 하나로 묶여진 서로의 반쪽이라는 총체나 전체라는 상이 사라지고, 부분적 대상들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하나에의 꿈은 이전시대의 신화적 종교적 가설만큼이나 불가능해 보인다. 대표적인 비극적 사랑의 이야기에서 베르테르는 롯데의 리본과 함께 묻히기를 원했다. 우리의 마음과 몸에, 이민경의 용어로 ‘속 밖’에 유령처럼 떠도는 물신들은 사랑하는 이를 전유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관계의 어려움을 증거 한다. 이민경의 작품은 인생 또한 비끌어 맬 수 없는 것을 끝없이 묶고 푸는 과정임을 알려주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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