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권대훈 / 순간 속에 농축된 영원

이선영

색다른 경험을 부여하는 거대한 무대장치를 연출하곤 하는 권대훈은 이번 전시에서 작은 공간에 대자연을 끌어들인다. 여기에서 관객은 비 내리는 숲을 지나, 물고기가 헤엄치는 호수를 만나게 된다. 단지 재현된 것을 보게 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한다. 이미 완성된 무엇인가를 추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작품과 함께 감흥을 생성한다. 그는 자신의 작업 목표가 ‘시각에서의 이성적 관념의 한계를 넓히고, 또 다른 경험을 나와 다른 이들과 공유하는 것’이며, ‘거기에서 의심, 공포, 놀람과 경탄, 신비감과 다양한 기대하지 못했던 감정들이 생성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한다. 관객이 전시장에 방문하는 날의 날씨가 어떨지는 몰라도, 길과 바로 연결된 전시장 문을 열고 약간 휘어진 통로로 들어서면 비가 내린다. 양쪽으로 나뭇가지와 잎들이 희미하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도심 한가운데 시멘트로 만들어진 이 사각 공간은 경계 없는 자연으로 기획되었다.

 

난데없이 쏟아져 내리는 비 때문에, 짧지만 짧지 않게 느껴질 통과의 끝에서 어떤 문턱(threshold)을 넘으면 물속을 헤엄치는지 하늘을 나는지 모호한 <Flying Fish>를 만나게 된다. 그것은 호수의 표면처럼 울렁이는 표면에 물고기들이 저부조로 양각되어 있으며, 위에서 투사된 푸른 하늘 이미지와 합쳐져 서서히 돌아가는 둥근 형태이다. 물고기는 물살인지 구름인지 알 수 없는 바탕에서 들락 달락 하는 환영을 보여준다. 쏟아져 내리는 비나 하늘이 비치는 호수같이, 담을 수 없는 것들을 축약된 방식으로 담아내는 절묘한 장치들은 재현(representation) 아닌 제시(presentation)의 기술이다. 그가 고안한 물리적 장치는 하늘과 물을 절묘하게 만나게 하는 접면이다. 이 인터페이스는 친숙한 일상으로부터 또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대가 되어주며, 일상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통로이다. 이 작품은 비가 내리는 숲을 지나자, 갑자기 맑은 하늘 아래의 호수가 나타나고, 하늘이 반사된 호수의 표면을 치는 물고기들의 움직임을 보며 생각에 잠겼던 체험으로부터 왔다.

 






 

그것은 순간을 영원으로 고양시키고, 영원을 순간 속에 압축한다. <Flying Fish>는 이 차원과 저 차원을 넘나드는 사유의 흐름과도 중첩된다. 또 다른 전시공간에서 열리는 ‘Willowwacks’(무인삼림지대)는 사유의 공간이 등장한다. 바닥에 던져진 캔버스 위에서 벌떡 일어난 듯한 자소상은 창가에서 무엇인가 응시한다. 응시는 무언가 재현된 것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실재가 드러나는 장을 향해 있다. 전시장 전면이 거대한 창이기에 말 그대로 창가에 서 있지만, 작품 속의 창은 실재하지 않고, 참조대상의 색상과 명암을 따라 칠해진 자소상과 그것이 서있는 캔버스에 드리워진 그림자들을 통해 암시될 뿐이다. 입구도 출구도 없으니, ‘무인삼림지대’라는 부제처럼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나올 수도 없다. 그곳은 다만 사유를 통해서 출입이 가능한 사유의 공간이다. 언어 또는 상징적 우주 속에 존재하는 그는 창살 없는 감옥 속에 유폐되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상의 받침대 역할을 하는 캔버스는 통상적인 그림처럼 환영이 고정되는 장이 아니라, 그자체가 하나의 대상이 된다.

 

그것은 현실의 모사가 아니라, 현실에 도입된 새로운 대상을 향한 근대미술의 여정을 압축한다. 회화적 대상으로서의 평면 위에 선 이의 사유 모델은 자연이라기보다는 예술이다. 뒷부분에는 쌓여 있는 작은 캔버스들 위에 앉아있는 자소상이 있다. 자소상에 드리워진 창틀 그림자는 그려진 것이지만, 캔버스에는 그 위에 서있거나 앉아있는 상의 실제 그림자도 드리워진다. 조각과 회화가 결합된 방식으로 인해, 서로 다른 차원의 현재적 순간을 증거 하는 그림자가 공존한다. 그가 위치하는 현실은 실제의 물리적 공간 대신에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현재로 가득 채워진다, 그것은 밝고 깊게 빛나는 충만한 현재의 순간에 붙박혀 있다. 두 공간에서 열리는 권대훈의 전시는 매우 다른 듯하지만, 서로 다른 차원이 만나고 섞이고 변형되는 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제시의 드라마에서 움직이는 빛은 주요한 매개가 된다.

 

비 오는 숲을 지나 만나게 되는 <Flying Fish>의 둥근 원환은 활짝 갠 빛나는 하늘을 담고 있으며, 캔버스 위에 시계바늘처럼 서있는 자소상은 해시계처럼 특정 시공간대를 예시한다. 권대훈의 작품에는 빛과 그림자가 자주 등장하는데, 그는 동서고금에 존재하는 해시계를 통해 ‘일정한 시간은 그 시간에 유일한 그림자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동시에 ‘하나의 그림자의 모양은 하나의 순간(현재)을 대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떤 공간적 형태는 유일한 하나의 순간을 예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몇 년 동안 그의 작품의 실험 대상이었던 빛과 그림자는 <Mind the Bus 버스 조심>, <still in the forest>, <Lost in the forest> 등, 그의 여러 작품에서 돌연한 나타남과 사라짐이라는 사건을 이끌어왔다. 그의 작품에서 빛은 착시와 환상을 야기하면서,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어떤 깨달음을 주는 매개 고리이다. 깨달음으로의 여정은 미로 안에서의 방황일 수도 있고, 창가에서 사유에 잠긴 이처럼 제자리에서 떠나는 유목일 수도 있다.

 

지난해 아르코 미술관에서 열린 ‘몹쓸 낭만주의’ 전에 출품한 <Lost in the forest>는 빛과 관람자의 움직임에 의한 시공간상의 추이에 의해 변화하는 극적인 형태가 드러나는 대작으로, 영국의 작은 숲 공원에서 길을 잃어버린 체험을, 미로같이 한정된 부피 안에 무한을 접어 넣는 기술로 보여주었다. 빛과 그림자와 더불어 숲과 나무는 권대훈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소재이며, 그자체가 빛에 감응하는 지상의 대표적인 존재이다. 나무들은 우뚝 선 형태로 인간, 또는 신인동형론적(anthropomorphic) 형태로 채워진 상징적 우주를 이룬다. 오랫동안 친숙한 이 대상(사람-나무)에서 기괴함이 발생한다. 그의 작품에서 기괴함은 평이함의 이면이며, 그 반대도 성립된다. 그의 작업에 영향을 준 몇몇 강렬한 경험들에서, 기괴함으로의 빠져듬과 빠져나옴은 오랜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는다. <Flying Fish>나 <무인삼림지대>에도 숲이 있다. 하나는 깨달음을 주는 빛을 만나기 위한 여정 속에서, 다른 하나는 수직 또는 수평으로 종횡무진 뿌리와 가지를 뻗어 나가는 생각의 숲속에서.

 

숲에서 태어난 인간은 점차 숲을 정복해왔지만, 숲은 신화와 무의식 속에서 세상과 동떨어진 자연적 장소이다. 로베르 뒤마의 <나무의 철학>에 의하면 숲은 매혹적이면서도 불쾌한, 성스러우면서도 속된, 경탄할 만하면서도 야만적인 양면성을 가진다. ‘반은 종교적이며 반은 동물적인 공포 속으로 몰고 가는’ 숲은 ‘인간적인 의식을 물리치기 때문에 위험하다’(빅토르 위고)고 간주되었다. 그와 관련된 많은 작품을 낳았던 기괴한 체험이 이루어진 곳은 바로 숲이다. 권대훈은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 패닉 상태에 빠지게 되었는데, ‘패닉’이란 숲의 신 판(Pan)에서 온 것으로, 창조될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을 이 순수의 숲은 ‘숲에 대한 성스러운 공포감’(자크 브로스)을 준다. 자연의 사원으로서의 숲은 세상의 공간 속에서 다른 곳으로 향한 길을 열어놓는다. 빛과 바람 드는 숲에서, 인간처럼 보이는 나무라는 살아있는 기둥들과의 교감은 공포와 황홀을 낳는다. 늘 상 다시 시작 하는 나무의 생에는 시간의 차원이 새겨져 있다.

 

<Flying Fish>와 <무인삼림지대>에는 단지 어두운 숲에서 밝은 곳으로 나아가는 선적인 여정이 아니라, 명암의 반복적인 교차가 있다. 물론 그것은 동일한 것의 반복은 아니다. 순환적 세계는 동양 사상에서 친숙하며, 이분법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서구 형이상학의 전복 자  니체의 ‘이미 무한히 그 자신을 반복하고 유희하는 순환적 운동으로서의 세계’관에서도 발견된다. 순환은 미로 속에서의 방황을 의미하기도 하고 무한한 반복 속의 회귀를 의미하기도 한다. <Flying Fish>의 빙글빙글 돌아가는 둥근 원환 속에 부침하는 물고기 형상과, <무인삼림지대>에서 해시계처럼 바탕 면에 독특한 그림자를 떨구는 존재의 모습에는 영원히 회귀하는 시간의 루프 속에서 생성되는 차이가 있다. 꼬리를 무는 시간의 루프 속에서 본질과 가상, 존재와 생성을 대립으로 보는 이분법은 사라진다. 그러나 빛과 그림자 속에 부침하는 권대훈의 작품에서 이원성(duality) 간의 역학관계는 존재한다.

 




 

그것은 하나, 또는 둘, 또는 여럿이 아니라 ‘하나가 둘이 되는 사건’(니체)이다. 가령, 캔버스 위에 서있는 인물은 환영과 실제라는 두 그림자를 드리운다. 알렌카 주판치치는 니체 연구서 <정오의 그림자>에서, 이원성 즉, 실재의 분절화를 강조한다. 여기에서 세계는 서로를 반영하면서 그 어떤 구체적 실재도 결여하는 가상(semblance)들의 끝없는 반영—무한히 이어이지는 표상들의 표상들—의 영역이 아니다. 그것은 단순한 가상이나 환영이 아니라, 현상이다. 알렌카 주판치치는 니체의 사건 이론 안에 내포된 순환성을 강조한다. 저자에 의하면  끝은 종결적인 것이 아니라, 개시적이다. 니체는 새로운 시대를 개시하는 대격변의 사건 뒤에만 올 것으로서의 시초 개념과, 정오에 ‘생의 한가운데’에서 시작되는 것으로서의 시초 개념 사이를 오간다. 둘 중에서 둘째 것이 우세하다. 우리는 니체가 한낮 또는 정오를 특징짓는데 사용한 ‘가장 짧은 그림자’의 형상을 권대훈의 작품에서 만날 수 있다. 그의 작품에서 순간과 영원이 만나는 곳(때)에서 어떤 깨달음을 주는 현현의 사건이 일어난다.

 

귄터 볼파르트는 <놀이하는 아이, 예술의 신 니체>에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마지막 부분인 ‘정오’에 나타난 미학적 순간을 자세히 설명한다. 그에 의하면 ‘목표 없는 시간’이라는 순간에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과제를 삶속에서 발견한다. 세계가 그 안에서 완전해 지는--에머슨의 말을 따라 니체가 표현했듯이--세계의 최절정의 순간, ‘찰나의 영원성’을 지닌 신적인 순간, 이것은 세계가 미학적 현상으로서 영원히 정당화되는 순간이다. 그것은 ‘한낮의 신비’, 한나절(대낮)에 일어나는 ‘신비스런 직관’에 대한 체험이다. 찰나적인 영원회귀의 순간에서 인간은 현시점에서 과거와 미래가 서로 끌어당기는 것과 일치하는 것을 경험한다. 그 순간은 영원이 시간이 되는 때이고 시간이 영원이 되는 때이다. 이 한낮의 순간에 시간은 처분되고 찰나이자 영원성이라는 ‘초-시간’ 속으로 포섭된다.

 

세계가 그 속에서 완전함을 성취하는 ‘갑작스러운 영원성’의 신성한 순간, 시간이 스스로를 완성하는 영원한 행복과 즐거움의 이 순간은 종교적 깨달음의, 계몽의 순간이다. 신성한 깨달음은 이 세계에 있는 빛과 자유의 순간적인 반짝임이다. 볼파르트에 의하면 ‘가장 강력한 사상’은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가장 밝은 빛으로 바뀐’, ‘가장 짧은 그림자의 순간’인 정오의 시간에 다시 발생한다. ‘정오’는 시간이 스스로를 완성하는 순간이며, 신성한 밝음으로 충만한 이때, ‘가장 작고, 가장 부드럽고, 가장 가벼운 모든 것들, 도마뱀의 바스락거림, 숨소리, 바람 살랑거리는 소리, 눈의 깜박거림, 이런 작은 것들이 최고의 행복을 만든다’(니체) 니체에 의하면 ‘갑작스런 영원’에서 ‘한 순간 빛을 즐기기도 하고 그림자를 즐기기도’ 한다. 모든 것은 놀이였다. ‘그 호수의 많은 물과, 모든 정오, 목표 없는 모든 시간’이 정적과 고요 속에 ‘갑작스런 깨달음의 드문 순간’을 준다.

 

그 순간은 세계와 자연이 완전해지는 신성한 순간이며, 세계가 미학적 현상으로서 영원히 정당화되는 지점이다. 한 낮에 경험되는 신비, 이 충만한 시간이 영원으로서의 순간에 미적 투명성과 종교적 초월성, 세계로의 복귀와 저 너머 세계로의 초월이 일어난다. 이때 세계 자체는 예술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알렌카 주판치치는 <정오의 그림자>에서 니체가 사건의 표징과 시간으로 그가 가장 정적한 시간으로 묘사하는 한낮의 형상에서 정오는 숫자적 의미의 어떤 시간 보다는, ‘가운데의, 한창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 ‘위대한 한낮’의 은유에서, 사건의 시간은 태어남의 시간도 죽음의 시간도 아닌, 말하자면, 가운데의 시간이다. 니체가 ‘가장 짧은 그림자’라는 용어로 정식화한 ‘한낮’은 ‘가장 짧은 그림자의 순간, 가장 긴 오류의 끝, 인류의 천정’이다. 한낮은 해가 모든 것을 싸안으며 모든 그림자를 사라지게 하고, 세계와 온전한 단일체를 구성하는 순간이 아니다.

 

그것은 가장 짧은 그림자의 순간이다. 그리고 한 사물의 가장 짧은 그림자란, 이 사물자체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영원한 것은 시간의 원과 단순히 동일시되지 않는다. 주판치치에 의하면 니체의 영원은 시간의 끝없는 회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두 가지 시간태의 조우, 즉 사건을 사건으로서 변별시켜주는 조우의 드문 순간들을 가리킨다. 사건은 언제나 미래와 과거의 조우이며, 미래 뿐 아니라 과거에도 영향을 미치는 어떤 것이다. 그런 연유로 니체는 사건을 ‘시간 안의 구멍’(‘영원의 우물’)으로 제시하기를 즐긴다. ‘시간이 없는 순간’을 보여주는 권대훈의 둥근 호수가 바로 ‘시간안의 구멍’이며 ‘영원의 우물’이다. 하나는 과거로 이어지고 다른 하나는 미래로 이어지는 두 길이 영원회귀의 순간에서 충돌하듯이 만난다. <무인삼림지대>에서 사건은 주체에게 일어난다. 주체는 사건을 위한 장소와 시간을 만드는 어떤 것의 이름이며, 또한 사건에 의해 개시된 어떤 것의 이름이다. 그것은 주체가 자신과 조우하면서 분열되는 순간이다.

 

사건은 이 두 주체들의 몽타주 안에서 존재한다. 사건은 두 주체를 분리하면서 연결하는 어떤 것이다. 한낮으로서의 시초이며, ‘하나가 둘로 변하는’ 순간, ‘둘이 됨’, 또는 분열의 순간이다. 니체에게 예술가의 면모를 띄는 창조적 인물 초인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라고 불리는 계기에서 일치하는 이 ‘영원의 우물’에 빛을 비추는 눈을 가진 자이다. 초인은 영원 회귀하는 ‘한낮의 심연’으로 일순간에 빛을 던진다. 귄터 볼파르트에 의하면 찰나의 영원성을 지닌 정오의 순간과도 같은 예술은 다른 것으로서의 이 세계를 제시한다. 그것은 이 세계에서 이 세계를 넘어가는 것을 연다. 만약 종교의 가장 내적인 핵심이 신비주의라면, 감각적 종교로서의 예술의 가장 내적인 핵심은 가시적인 신비이다. 예술은 여전히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종교이다. 아니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빛과 그림자가 교차하는 권대훈의 작품에는 일광(daylight)의 신비주의가 있다. 깨달음을 주는 이 신비는 창조와 발견이라는 사뭇 반대되어 보이는 두 방식을 모순 없이 결합시킨다.


출전; 브레인팩토리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