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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 / 특이한 것 속의 공통적인 것

이선영

2005년에 열린 첫 개인전 ‘제도화된 풍경’에 나타나듯이, 김지은에게 도시는 단순히 주어진 환경이 아니라, 사회적 풍경이다. 여기에서 도시는 자연발생적인 것이기 보다는 각종 추상적 법령의 산물로 나타난다. 작품 옆에 병기된, 관료적 어투로 가득한 법들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도시라는 특수한 생태 환경은 주어진 공간에서 제로섬 게임을 벌이는 상황을 조성하며, 여기에서 작동되는 법은 누군가에게는 더 큰 자유를 누군가에겐 더 큰 압박을 야기한다. 이후 유학과 다수의 국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들에 참여하면서 제도화된 사회적 풍경은  ‘계획된 진부화’(2010)와  ‘소라게 살이’(2011) 전처럼, 대량 소비사회의 한 품목으로 전락한 건축적 환경과 도시 떠돌이 삶이 반영된 작품들로 채워진다. 밀집된 공간에서 짓고 부수기를 반복하는 (재)개발 공화국에서 청년기를 보낸 작가는 미술 내적인 문제보다는 자기가 속한 장소에 대한 사회적 연구를, 서른 살에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에서도 계속했다.

 

 

양국의 사회적 풍경의 면모는 스케일은 달랐지만 그 본질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었다. 포디즘 방식으로 대량 생산된 미국식 목조 주택이나 한국의 대단지 아파트에서 보여 지듯, 그것은 인간 몸의 연장이자 지상적 삶의 가장 안정적인 거처가 여타의 상품 생산과 소비의 주기처럼 빠르게 회전할 때, 무엇이 생산되는가하는 문제이다. 그녀의 작품은 그러한 생산과 소비 주기가 폐허와 뿌리 뽑힌 삶을 재생산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사회적 풍경에 대해, 단순히 국외자나 이방인의 시점에서 비판적인 시선을 던지는 것에 머물지 않는다. 김지은의 작품들은 심란한 도시 풍경에 대한 인상을 단순히 주관적으로 표현하거나,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표현이나 재현이기 보다는, 작가가 발견한 구조에 상응하는 구조를 생성한다. 그녀의 독특성은 생산의 차원으로 고양된 대량 파괴 속에서도 생성되는 것들을 포착한다는 점이다.

 

여러 곳에 머물며 지역 연구를 작품에 녹여냈던 경험은 파괴 중에 생성되는 것들의 공통성을 추려낸다. 작가가 잠시나마 속해있던 각 지역의 개별 연구를 통해, 가장 공통적인 것 속에서 가장 특이한 것을, ‘가장 특이한’ 것 속에서 ‘가장 공통적인’(네그리) 것을 발견한다. 김지은에게 공통성과 특이성은 상반되는 범주가 아니다. 공통성과 특이성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키는 것은 예술의 영원한 과제 중의 하나이다. 주어진 조건을 이용하여 최대한의 기능성을 살린 독특한 산물들은 원시적인 듯 하면서도 보편적이다. 김지은이 주목하며 작품 소재로 삼곤 하는 사물들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싼 재료로 특별한 기술이 없는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지역이 달라도 비슷한 상황과 조건에 직면하면 그 산물이 만들어지는 방식 또한 비슷하다. 필요에 의해 단순하게 만든 이름 없는 장인의 작품들은 감탄을 자아내며, 작가는 이런 저런 필요에 부응하는 사물에 주목한다.

 

미술 또한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는 임의적 장식이나 잉여가 아니라, 어떤 상황 속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졌던 특수한 물건들이 지녔던 공통 어법을 갖출 필요가 있다. 그러나 목적이든 수단이든 기계화된 대량생산의 체계로 편입되었을 때의 차원은 달라진다. 김지은의 설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각목이나 시트지 같은 것들은 표준화된 생산체계에 의해 만들어진 상품이자 건축 재료들로, 질서화 된 구조를 위해 결국은 사라져야할 것들을 전면화한다. 시한이 정해져 있는 내구성 없는 재료들로 얼기설기 엮여진 것들은 현대적 삶을 구조적으로 보여준다. 미국에서 맨 처음 생활한 디트로이트는 도시의 현재와 미래를 예시하는 곳으로, 김지은의 많은 작품들에서 유토피아가 디스토피아로 돌변하는 원초적 장면들로 각인되어 있다. 디트로이트는 도시 외곽이 점차 확장되고 도심은 공동(空洞)화 되는 특유의 현상(suburbia)을 보여주는 도시이다.

 

넓은 땅에서 세계의 주요 자원을 다 끌어다 쓰는 자동차 중심 도시 미국은 가장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내는 나라이며, 풍요와 파괴 사이의 거리가 매우 근접해진 우리에게도 이미 도래하고 있는 자본주의 미래상이다. 학업을 마치고, 미국 이곳저곳에서 단기 레지던시를 경험한 작가는 한 장소에 정착하면 그 장소를 철저히 연구하여 그에 관련된 작품을 내놓는 방식으로 일관된 맥락을 가지면서도 새로운 작품을 추가해왔다. 작가는 인간 삶의 흔적이 가장 강하게 드러나는 대상을 건축에서 발견한다. 그녀는 건축적 스타일은 곧 삶의 스타일이며, 한 도시의 커뮤니티가 어떤 꿈을 꾸는가가 그 도시를 만든다고 생각한다. 위로부터의 결정에 의해 이전 삶의 흔적을 다 밀어내버린 대규모 재개발 지역이든, 공동체의 합의에 의해 마을의 역사가 오롯이 보존된 그림 같은 곳이든, 이 꿈은 집단적인 욕망의 산물이다. 그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면 그 마을의 상태를 전형화 하는 건물을 찾아내 동네 도서관 등에서 사전 조사를 두루 거친 후 작품에 착수한다.

 

김지은의 작품은 관념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지만, 작업을 막연한 느낌으로 시작하지는 않는다. 작품들은 한 지역에서의 경험과 연구가 오롯이 담겨있다. 곧 떠나야 하기에, 있는 동안 최대한 그 장소만의 특성과 진지한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다. 짧은 시간 동안 핵심을 잡아낸 결과물들은 그 대화가 매우 집요하고도 진지했음을 알려준다. 한 장소를 완전히 자기화하는 작업 스타일은 유목을 단순한 배회나 도피가 아닌, 적극적 전진의 느낌으로 다가오게 한다. 작가 말로 ‘소라게 살이’ 같은 이러한 수년간의 미국 유목 생활 및 작업을 2011년 한국에서 발표하고, 이후에도 아시아의 여러 레지던시에 참여하면서 지역성을 계속 탐사하고 예술이라는 보편 어법으로 묶어낸다. 아시아에서 많이 발견되는 국적불명의 도시 역시 그렇게 된 필연적 이유에 대해 생각한다. 난지 창작 스튜디오에 입주하면서는 쓰레기장을 만물시장으로 삼아 살아왔던 사람들의 사라진 역사를 관련 소설을 통해 추적하고, 난지도에서 주은 쓰레기들로 재개발 지구에서 많이 벌어지는 사회적 갈등의 상징물로 만들었다.

 

최근 리움의 아트스펙트럼 전에서 보여준 거대한 대나무 비계나 망루는 원시적이고 전통적인 기술을 이용하여 만든 것으로, 주어진 환경을 이용한 산물이다. 그것은 단지 자연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재료로 최대한의 효과를 내는 원시적 기능주의의 산물이다. 그것들은 첨단기술의 시대에서도 결코 사라질 수 없는, 그러나 맡은 바 기능을 마치고서는 사라져 줘야 하는 과도기적인 사물들이기도 하다. 사용되지는 않고 남아있기만 하는 예술 - 예술이 단순히 어떤 쓰임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으로서의 사용, 가령 소통 같은 것을 의미 - 보다 이러한 단순한 사물은 얼마나 힘이 있는 것인가. 예술도 그것들처럼 현실 속에서 스스로 굳건히 서있을 수 있을까. 김지은은 자연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구조나 건물에 관심이 있다. 그러나 작품에 인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이 자연적, 사회적 환경에 대면하여 반응한 산물을 인공 구조물을 통해 보여줄 뿐이다.

 




 

통시적인 역사를 칼로 베어낸 듯한 공시적 구조의 단면에는 인간이 등장하지 않아도 인간 삶과 욕망이 드러나 있다. 인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역시 예견되어 있다. 사회적 풍경으로서의 근대 도시라는 거시적 구조에 주목했던 작업 초창기와 달리, 요즘 작품은 그러한 미시구조로 옮아온 듯하다. 세계 여러 곳의 집짓기 방식 등에 나타나는 원시적이면서도 현대적인 기술은 사회적 역사적 구조를 함축하는 의미 있는 단편이다. 작업 방식이 그리기에서 만들기로 방점이 옮아간 것은 필연적이다. 김지은은 능숙한 손재주꾼(bricoleur) 처럼 이것저것 손에 닿는 것을 수집하여 상징적으로 쓸모 있는 사물을 만든다. 완벽히 갖추어진 추상적 체계와 거리가 있는 김지은의 작품에서 브리콜라주(bricolage)는 중요한 방법론이다. 자신이 속해 있고 발 딛고 서 있는 현지에서 이것저것 임시방편으로 동원하지만, 마치 원래부터 꼭 맞춰져 있는 듯한 것을 만들어낸다.

 

이 원칙은 화이트 큐브를 거의 토목공사 급으로 가득 채우는 차원에서부터 월담용 계단처럼 생활에 필요한 소소한 발명품까지 관철된다. 작가는 사회와 인간을 재현하지는 않지만 자신이 만들어내는 사물을 통해 자신이 속한 환경의 구조를 표현한다. 김지은이 만들어낸 독특한 사물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브리꼴뢰르나 브리꼴라주라는 개념은 인류학자 레비 스트로스가 [야생의 사고]에서 개진한 개념이다. 레비 스트로스에 의하면, 손재주꾼은 현대의 과학자나 기술자와 달리, 그 일의 목적에 맞게 고안되고 마련된 연장이나 재료가 있고없고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다. 손재주꾼은 과학처럼 주어진 것들의 내용은 현재의 계획이나 또 어떤 특정한 계획과 관련되어 구성된 것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여 자기 손으로 무엇인가 만드는 자이다. 어떠한 범주 내의 작업에서도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요소들을 활용하는 손재주꾼의 사고방식은 과학적이기 보다는 신화적이다.

 

[야생의 사고]에 의하면 신화의 세계란 한 번 이루어진 후에 다시 해체되고, 해체된 단편들이 다시 모여 새로운 세계를 이룬다. 신화적 사고의 특성은 작업 면에서는 손재주와 같이 구조의 집합을 만들 때 여러 사건들의 잔재들을 활용한다는데 있다. 신화적 사고는 손재주꾼처럼 사건이나 사건의 잔재를 갖고 구조를 만든다. 이와 비교해서 과학은 가설과 이론인 구조의 도움으로 그 수단과 성과를 사건들의 형태로 창조한다. 현대의 기술자는 어떤 명확한 계획에 따라 사전에 결정된 재료를 사용하지만, 손재주꾼은 구체적인 동시에 잠재적인 관계의 총체 속에 있는 요소들을 활용한다. 결정적으로 과학자는 구조를 이용해서 사건을 만드는데 비해(세계를 변하게 하는데), 손재주꾼은 일어난 사건을 이용해서 구조를 만든다. 과학 기술자들이 발견하고 사업가들이 사회생활로 확장시킨 추상적 구조들은 오늘날 많은 사건을 만들어낸다. 사건들은 거의 재앙에 가까운 것들도 있다.

 

김지은의 작품에서 과학과 기술의 주요 어법인 추상적 관념이나 개념 등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야기 시키는 주범이다. 가령 개발에 대한 피로감을 누적시키는 수많은 법령들의 결과물로서의 도시, 그리고 표준 모델에 의해 대량 생산된 주거지가 폭탄을 맞은 것 같은 쓰레기 더미로 쇄도하는 도시에서, 구조가 사건이 되는 현장을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그 사건들의 파편을 통해서 또 다른 구조를 만들어낸다. 이 구조는 과학의 추상적 구조와 달리 구체적이다. 그것은 일관된 체계를 이루는 코드가 아니라, 구체적 사물들로 이루어진 구조이다. 애초에 사용되었던 재료들은 다르게 전용된다. 목적이 수단이 되고, 수단이 목적이 되는 일은 흔히 벌어진다. 김지은은 수직 수평적으로 자연을 정복해가는 도시의 확산이 만들어낸 폐허더미 속에서 넝마주이처럼 또는 고고학자처럼 발견한 우연적인 것들로 구조를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구조적 배열은 수단이면서 목적이 된다. 김지은의 작품은 문명의 폐허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길들여지지 않은 사고, 곧 야생의 사고임을 알려준다.

 

출전; 난지 스튜디오 워크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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