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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근 : 탄생 100주년 기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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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시 개요


전  시  명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 

장      소 가나인사아트센터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길 41-1, tel. 02-736-1020)

일      시 2014. 1. 17 (금) – 3. 16 (일)  (총 59일간)

관람  시간 10:00 – 19:00 (수요일은 오후 9시까지 전시 연장)           

출품  작품 유화 90여 점, 수채화 및 드로잉 30여 점 등 총 120여 점

                 박수근 관련 자료 아카이브 (전시 도록, 리플렛 등)

입  장  료 일반 10,000원, 초등학생 6,000원

 

특별  강연 2014. 1. 19 (일) 오후 2-4시 유홍준

2014. 1. 24 (금) 오후 2-4시 박성남

2014. 2. 22 (토) 오후 2-4시 윤범모 (강의별 선착순 50명)


담      당 책임 이장은 | 02-720-1020


전시 내용


● <국민화가>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전 

가나아트는 <국민화가>로 칭송받는 한국근대미술의 대표작가 박수근의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인사동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박수근 회고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박수근이 남긴 유화 작품 90여 점과, 수채화와 드로잉 30여 점 등 총 120 여 점을 선보이는 역대 최대 규모의 기획전이다. 박수근 탄생 100주년을 맞아 시대를 뛰어 넘는 그의 예술혼을 다시금 새기는 한편,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지역인 인사동에서 전시를 함으로써 한국인들에게는 자긍심을, 외국인들에게는 한국 예술의 우수성을 알리고 동시에 한국 미술의 위상을 정립하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 가장 독창적이고 가장 한국적인 화가 박수근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은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가장 한국적이고 서민적이며 독자적인 특성을 지닌 작가로 평가 받고 있다. 그가 주로 그렸던 것은 시장 사람들, 빨래터의 아낙네들, 절구질 하는 여인 등 평범한 서민의 일상이었다. 따라서 박수근의 작품은 한 시대의 기록으로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소박하면서도 특유의 짙은 감정이 묻어나는 작품들은 박수근이 가지고 있던 예술에 대한 생각 즉,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으로 작품을 그려야 한다'는 뜻을 그대로 전한다.


● 인간에 대한 긍정과 사랑에서 느껴지는, 시대를 뛰어넘은 감동적인 울림

박수근의 작품에는 우리 민족이 역사 속에서 쌓아온 정서가 함축되어 있어 오늘날에도 많은 이에게 감동을 준다. 힘들고 어려웠던 시절, 우리 이웃과 가족을 향한 박수근의 따뜻한 시선을 통해 그려진 인물들에게서는 시대를 뛰어 넘은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김달진 미술연구소에서 소장 중인 박수근 관련 아카이브 자료와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에서 제공하는 다큐멘터리 영상이 함께 전시될 예정이어서, 작가 활동 당시의 시대상에 대한 다각적인 이해를 도울 것이다. 이번 전시는 변화의 소용돌이와 가치관의 혼돈 속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위대한 예술을 통한 불변의 가치를 제시할 것이라 기대한다.


작가 연보

박수근 (1914-1965)

 

1914  

2월 21일(음력 1월 28일), 강원도 양구군 양구면(현재 양구읍) 정림리에서 박형지와 윤복주 슬하의 1남 3녀 중 삼대 독자로 출생. 위로 딸만 셋이 있어 간절했던 아들이었기에 건강하게 오래 살라는 뜻의 ‘목숨 壽’를 붙인 壽根으로 이름 지어짐.

   

1916/1918 (2세/4세)

동생 동근(東根), 원근(元根)이 태어남.


1921 (7세)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아버지의 광산 사업 실패와 홍수로 인한 전답의 손실로 가계가 급속히 곤궁해짐. 

양구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도화(미술)시간에 타고난 재능을 보이기 시작. 


1926 (12세)

그림 재주가 뛰어나 담임선생님과 교장선생님의 각별한 귀여움 받음. 이 무렵, 밀레의 <만종>을 원색 도판으로 처음 보고 깊은 감동을 받음. 그 후 그림에 더욱 열중했으며 “하느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라며 늘 기도했다고 함. 

   

1927 (13세)  

양구공립보통학교 졸업. 

집안 형편상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화가의 꿈도 좌절하게 됨. 

그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교장선생님의 격려로 독학을 결심하면서, 집 주위 산천, 농가의 여인, 나물캐는 소녀를 연필스케치와 수채화로 그림. 

 

1932 (18세)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朝鮮美展)] 서양화부에 이른 봄의 농가를 그린 수채화 <봄이 오다>를 출품하여 첫 번째 입선 수상. 그러나 다음 해부터 1935년까지는 계속 낙선하여 다시 고독한 시련을 겪음.


1935 (21세)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세상을 뜨고, 아버지가 늘어난 빚 때문에 금강산으로 들어가면서 생활이 더욱 궁핍해지자, 춘천으로 거처를 옮겨 최악의 빈곤  속에서 그림에 정진함. 

   

1936 (22세)  

제15회 [조선미전]에 수채화 <일하는 여인>을   출품하여 두 번째 입선 수상 (출품지: 경기도). 


1937 (23세) 

제16회 [조선미전]에 나물 캐는 소녀들을 그린   수채화 <봄>을 출품하여 세 번째 입선 수상 (출품지: 서울). 이후 해마다 입선하여 고난의 독학도  꿈이 풀려나가며 비로소 유화구를 구입하여 유채화를 그리기 시작.

   

1938 (24세)  

제17회 [조선미전]에 유채화의 첫 작품인 <농가의 여인>를 출품하여 네 번째 입선 수상 (출품지:   서울). 

   

1939 (25세)  

제18회 [조선미전]에 11회 입상작 <봄이 오다>를 유채로 그린 <여일(麗日)>을 출품하여 입선 수상. 이는 그의 유화 독학과정을 엿보게 해줌. 


1940 (26세)  

2월 10일, 금성 감리교회에서 18세의 김복순과  결혼식을 올린 후 금성에서 가정을 꾸림. 

5월, 평안남도 도청 사회과 서기로 취직이 되어  평양으로 떠남. 이 해 최영림, 장리석, 황유엽 등과 서양화 동인 그룹 ‘주호회(珠壺會)’를 창립하고 1944년까지 해마다 동인전을 가짐. 

1941 (27세). 

동생 동근이 병으로 사망.

제20회 [조선미전]에 <맷돌질하는 여인>을 출품하여 입선 수상. 


1942 (28세)  

봄에 첫 아들 성소(成沼)를 낳음.

제21회 [조선미전]에 아내와 장남 성소(成沼)를  모델로 한 <모자(母子)>를 출품하여 입선 수상. 

   

1943 (29세)  

제22회 [조선미전]에 아내를 모델로 한 <실을   뽑는 여인>을 출품하여 입선 수상. 

   

1944 (30세)

첫 딸 인숙(仁淑)을 낳음. 전쟁에서 패색이 짙어진 일제의 민족탄압과 전시체제 강제가 최고조에   달하며 생활의 궁핍도 극심해짐. 미군의 폭격이  평양에도 미치게 되자 아내와 어린 남매를 함께 안전한 금성 본가로 보냄.


1945 (31세)  

11월, 평양에서 홀로 감격의 8.15 해방을 맞이한 후, 평안남도 도청 서기직을 사직하고 가족이 있는 금성으로 돌아와 금성중학교 미술교사로 부임. 


1947 (33세)

차남 성남(成男 뒤에 城男으로 씀)이 태어남.


1948 (34세)

장남 성소가 뇌염으로 죽음.


1949 (35세)

3남 성인(成仁)이 태어남. 


1950 (36세)

6.25 전쟁이 일어남. 부부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라 공산당의 소환과 문초를 당함. 신변에 위협을 느껴 금성에서 몇십 리 떨어진 시골로 가족이 함께   피하고 유엔군과 한국군의 북진으로 잠시 자유를 얻었다가 연말의 후퇴로 또다시 위협을 느끼자   가족과 헤어져 홀로 남하를 결행함. 3남 성인이   전쟁의 혼란 속에서 죽음.


1952 (38세)  

10월. 공산치하로 되돌아간 금성에 숨어 지내던 아내가 어린 남매 인숙, 성남을 데리고 남하에 성공함. 서울 창신동의 큰 처남 집에서 처자의 남하 여부를 매일 수소문하던 중 그곳으로 찾아온 가족과 극적으로 상봉함. 한국 전쟁이 지속되자, 생계를 위해 화가 이상우가 운영하던 혜화동 화방을 통해 헐값으로 그림을 판매. 

   

1953 (39세)  

막내아들 성민(成民)이 태어남.

이상우의 소개로 미군 CID(범죄수사대)에 그림   그리는 일자리를 얻어 다녔으며, 미8군 PX(지금의 신세계백화점 건물)에서 훨씬 수입이 좋은 초상화를 그리며 모은 35만 환으로 창신동에 판잣집을 마련하고, 작은 마루에서 창작에 열중함. 

이때부터 소박한 주제와 굵고 명확한 검은 윤곽선, 흰색, 회갈색, 황갈색 주조의 평면적 색채, 그리고 명암과 원근이 거의 배제된 독특한 표현이 나타나기 시작.

미술관련 신문기사 스크랩을 시작하여 1965년   타계할 때까지 계속함. 

전쟁으로 중단됐다가 속개된 제2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國展)] 서양화부에 <집>을 출품하여 특선을, <노상에서>는 입선을 수상.


1954 (40세)  

제3회 [국전]에 <풍경>, <절구>를 출품하여 입선 수상. 

6.25 발발 4주년 기념 [대한미협전]에 <산>, <길가에서> 출품. 

[재경(在京)미술가작품전]에 출품, 변영근, 이수억, 조병현 외 다수 참가. 

   

1955 (41세) 

제4회 [국전]에서 <오후>가 입선함. 

제7회 [대한미협전]에 <두 여인>(국회문공위원장상 수상), <노상>, <풍경> 출품. 

   

1956 (42세)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생긴 반도화랑을 통해 외국인 미술애호가들에게 소품들이 팔림. 이 해에 둘째 딸 인애(仁愛)가 태어났으나 1967년 병으로 죽음.

제5회 [국전]에 <나무>를 출품하여 입선 수상. 

제8회 [대한미협전]에 <노상>, <풍경> 출품. 


1957 (43세)  

빈곤한 생활 속에서도 제6회 [국전]을 위해 1백호의 대작 <세 여인>을 출품하였으나 낙선되자   충격과 비탄에 빠지고 이로 인한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음주가 심해짐. 

그러나 후에 이 무렵의 작품세계는 더욱 확실해진 표현적 특질과 주제의 일관성 및 독특한 조형성으로 성숙된 예술적 경지를 반영하고 있다는 평가를 얻음. 


1958 (44세)  

반도화랑의 창설과 운영에 중심 역할을 했던 미국 여성 실리아 짐머맨(Celia Zimmerman)의 컬렉션이었던 <노변의 행상>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유네스코 미국위원회 기획의 [동서미술전]에 출품. 

뉴욕 월드 하우스 갤러리에서 개최된 [한국현대회화전]에 <모자(母子)>, <노상>, <풍경>을 출품. 

지난해(1957년)의 낙선으로 [국전]의 출품을 포기. 


1959 (45세)  

제8회 [국전] 추천작가로 <한일(閑日)>과 <좌녀(坐女)> 출품. 

조선일보사 주최 제3회 현대작가 초대미전에     <봄>, <휴녀(休女)>, <노인과 유동(遊童)>을 출품. 

 

1960 (46세)  

제9회 [국전] 추천작가로 <노상의 소녀들> 출품. 

4.19 학생의거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섬.

1961 (47세)   

제10회 [국전] 추천작가로 <노인> 출품. 

일본 동경에서 개최된 [국제자유미술전]에 <나무> 출품. 

5.16 군사혁명이 일어남.

   

1962 (48세)  

제11회 [국전] 서양화부 심사위원으로 위촉되고,  <소와 유동(遊童)>(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출품. 

[박수근 특별초대전] 개최 (주한미공군사령부(USA FK) 도서관). 이때 상당수의 작품이 외국인 소장가들에게 소장되고 그 후 홍콩 인터내셔널 호텔의 인터하우스에서 열린 전시를 통해 “동양적인 유화”라는 호평을 받음.

마닐라 [한국현대미술전]에 초대. 이 무렵 그의  예술적 위치와 평가는 날로 높아지고 화강암질의 기법과 표현적 내면성도 절정에 달했으나, 생활은 그의 작품 속 인물들처럼 변함없이 빈곤했음. 


1963 (49세)  

제12회 [국전]에 추천작가로 <악(樂)> 출품. 

지속된 과음으로 신장과 간이 나빠지고, 그로 인해 발병한 왼쪽 눈의 백내장 수술은 비용이 없어

악화된 뒤에야 수술을 하게 됨. 수술 결과가 좋지 않아 더욱 고통 받다가 재수술 과정에서 시신경이 끊어져 한 눈을 아주 못 보게 됨. 이후 안경을   끼고 오른쪽 눈만으로 그림을 그림. 

밀러 부인이 다음해인 1964년 로스엔젤레스에서 개인전 개최를 제의하고 미국에 있는 소장가들과 연락을 취하였으나 열지 못함. 


1964 (50세)  

제13회 [국전]에 추천작가로 <할아버지와 손자>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출품 (생전의 마지막 참가). 

   

1965 (51세)  

간경화와 응혈증이 크게 악화되어 4월 초 청량리 위생병원에 입원하였으나 회복이 어려워 5월 5일 퇴원. 6일 새벽 1시,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멀어...'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집에서   운명.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동신교회 묘지에 안장. 

제14회 [국전]에 유작 <유동(遊童)> 전시.

소공동 중앙공보관에서 열린 유작전에 79점의   작품이 전시됨. 


1970  

유작 소품전 (현대화랑).


1974  

유작 판화전 (백록화랑). 

   

1975  

박수근 10주기 기념전 (문헌화랑).

   

1978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동신교회 묘지에 묘화비  (墓畵碑) 세움. 


1979  

미망인 김복순 여사 작고 (향년 57세). 

 

1980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 추서받음. 

   

1985  

박수근 20주기 기념전 (현대화랑), 화집 (열화당)   간행. 

 

1990  

강원도 양구군 양구읍 비봉공원에 동상을 세움  (이길종 교수 제작). 


1995  

박수근 30주기 기념전 (갤러리 현대). 

   

1995~1998   

기획전 <한국근대미술: 유화-근대를 보는 눈>에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1998~1999  

기획전 <다시 찾은 현대미술>에 출품 (국립현대미술관). 

   

1999  

기획전 <한국미술 50년: 1950-1999>에 출품 (갤러리 현대). 

<요절과 숙명의 작가전>에 출품 (가나아트센터). 

 

2001  

<요절과 숙명의 작가전>에 출품 (가나아트센터). 

   

2002  

문화관광부 '5월의 문화인물'로 선정. 

<한국의 화가 박수근>전 개최 (갤러리 현대). 

국립현대미술관, 한국근대미술사학회 공동주최   기념 학술행사 “박수근 회화에 나타난 사회성과   여성성” 개최.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개관, <박수근의 삶과 예술>전 개최. 

   

2003  

개관 1주년 기념전 <박수근의 이미지 - 박수근의 삽화와 스케치> 개최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2005  

박수근 40주기 기념전 <다시, 봄이 오다> 개최

(양구군립박수근미술관).


2010  

문화체육관광부 후원 박수근 45주기 기념전 <국민화가 박수근> 개최 (갤러리 현대). 


2014

<박수근 탄생 100주년 기념 박수근>전 개최

(가나인사아트센터).




 

5. 참고 자료 1 (전시 도록에서 발췌)


박수근 

그의 예술세계를 되돌아본다.

 유홍준 (명지대 미술사학과 석좌교수/전 문화재청장)



탄신 100주년, 서거 50주년

[...]

1914년, 그가 태어난 때는 우리 근대미술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다. 바로 전 해(1913년)에는 춘곡 고희동이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서양화에 대한 인식은 전무한 상태여서 그가 미술대학을 졸업했다는 사실을 신문은 대서특필하고 서양화라는 유화란 우리의 전통회화와는 재료와 기법이 모두 달라서 ‘기름기 있는 되다란 물감을 천에다 바르는’ 그림이라는 해설이 실릴 정도였다. 그런 시절에 태어난 박수근이 성장하여 결국 그가 이룩한 예술적 업적이 우리 근대미술의 마지막 성과로 수렴되었으니 그 상징하는 바가 자못 크다. 


서민의 화가라는 박수근의 작가상

[...]

역사적인 거리를 갖는 작가상이란 왕왕 그의 다양한 인간적 예술적 실체들이, 마치 박수근의 작품에 나오는 나목처럼 곁가지가 모두 쳐지고 오롯하게 하나의 이미지로 고착되곤 하는데 그것은 한 인간이 죽은 다음 역사적 인물로 영원히 남는 방식이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들에게 남겨진 박수근이라는 인간상은 ‘서민의 화가’이다. 박수근은 그의 인생뿐만 아니라 예술에서도 전형적인 서민상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작가상 역시 ‘서민의 화가’이다. 

[...]

고인에게 결례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창신동 집 마루에서 아내와 막내딸과 함께 찍은 사진이 가장 박수근의 인간상에 가까운 모습으로 생각하고 있다. 반소매 내의에 양말을 벗고 손가락 깍지를 끼어 양 무릎을 껴안은 채 이쪽을 바라보는 천연스런 자세와 어진 눈빛이 이 사진 뒷배경이 된 그의 작품들에 나오는 인물들과 흔연히 어울린다. 게다가 새로 산 흰 고무신이 마루 위에 잘 모셔져있어 이 가난한 화가의 맑은 마음씨를 보는 듯하다. 

[...]




그림의 소재와 내용에 대하여

박수근은 서민의 화가라 일컬어지듯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서민의 일상 모습이다. 골목길 풍경, 일하는 여인, 장터의 여인, 할아버지와 손자, 아기를 업은 소녀, 할머니, 행인, 공기놀이하는 소녀들…… 


[...]

박수근이 남자보다 여인과 소녀상을 더 많이 그렸다는 사실은 서민의 희망을 오히려 거기에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연약한 여인의 몸이지만 어진 마음으로 주어진 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러나 따스한 온정이 느껴지는 그분들이 박수근 그림의 주인공으로 된 것이다. 

박수근 그림에 나오는 벌거벗은 나무의 의미 또한 그의 인물과 비슷한 것이다. 박수근은 좀처럼 꽃을 그리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남긴 <모란꽃>과 <목련>을 보면 둘 다 화려함이 아니라 애잔한 흰 꽃들이다. 꽃뿐만 아니라 그는 나뭇가지에 돋아나는 잎새의 표현에도 아주 인색하여 <노목과 어린나무>에서나 겨우 새순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

그렇다. 박수근의 그림에서는 나무든 인물이든 현재의 모습은 고단한 삶을 숙명으로 받아들이면서 조용히 삶의 새 봄을 기다리는 그런 희망이 애잔하게 그려 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갔던 서민들의 참 모습이기도 하였다. 


유화의 마티엘에 대하여

박수근 예술의 가장 큰 형식적 특징은 바위 질감을 느끼게 하는 두터운 마티엘 효과에 있고, 그의 그림이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되는 것도 여기에 있다. 우리나라 화강암의 질감을 느끼게 하는 향토적이면서 거친 듯 소박한 느낌이 그가 취한 소재들과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면 박수근은 왜 이처럼 바위 질감을 느끼게 하는 두터운 마티엘을 추구했을까? 박수근은 정말로 가난한 화가였다. 당시는 그림물감이 비싸고 귀했다. [...] 그럼에도 그 귀한 물감을 두껍게 발라 이런 형식을 추구할 때는 분명한 이유, 즉 조형 목표가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형식 자체의 논리가 그렇게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지만,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이 이런 형식을 요구한 것일 수도 있다. 형식주의자가 아니었던 박수근의 경우는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박수근은 서민의 삶을 그렸지만 그것을 풍속도로 그린 것은 아니었다. 그가 그린 서민상은 법 없이도 살아갈 수 있는 진국이다. 그는 스스로 다음과 같이 말했고 실제로 작품세계 또한 그러했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이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 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



박수근 그림에는 움직임이 거의 없다. 농악을 그린 작품조차도 정지감이 강하다. 그런데 박수근 그림의 화풍상 변화를 보면 마티엘은 거칠고 굵은 데에서 점점 부드럽고 자잘한 질감으로 옮겨간 것을 알 수 있다. 그림 속의 대상 표현도 처음에는 굵은 선에서 나중에는 가는 선으로, 곡선과 묘사적 성격의 선에서 직선과 간결한 요약의 선으로, 은은한 배경에서 완벽한 평면으로 전환된 것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은 같은 <아기 보는 소녀>라도 1953년 작품은 굵은 윤곽선과 거친 마티엘에 움직임이 감지되는 서정적 정경이 동반되지만, 1963년 작품에서는 완벽한 정면성의 원리와 가는 직선으로 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이 만년의 경향이야말로 박수근 예술의 본령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의 작품에서 감지되는 중세 이콘(icon, 성화)의 분위기는 이런 연유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의 작품이 어딘지 종교화적 거룩함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1961년 작,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를 그린 <모자>라는 작품을 보면 기독교의 <성모자상(聖母子像)>이라는 도상을 연상케 되며, 그는 우리 시대의 또 다른 <어머니와 아들>이라는 도상으로 번안한 듯한 인상까지 받고 있다. 이 점은 그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박수근 그림에 나온 인물들은 만년으로 갈수록 표현의 사실성에서 의미의 상징성으로 옮겨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결과 박수근의 만년작에 이르면 영원불멸의 정지성 내지는 고착성이 두드러진다. 과장되게 말하면 화강암에 새겨진 마애불과 같은 느낌이다.


바로 그것이 아닐까 싶다. 마애불과 같은 거룩하고 의연한 인간. 다만 바위가 아닌 캔버스이고, 부처가 아닌 서민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나는 박수근 예술을 이런 관점에서 이해하고 있다. 


프로타주 기법과 탁본

그러면 박수근이 이처럼 그 질감을 바위처럼 나타내고 마애불처럼 인물을 화면에 고착시킨다는 조형적 발상을 어디서 얻었을까? 박수근 작품 중에 돌멩이에 대고 연필로 문지른 프로타주로 기법으로 된 <소>라는 작품이 있고, 그의 삽화 중에는 산동네 화강암 절벽을 프로타주 기법으로 나타낸 것을 보면 이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박수근의 벗인 황유엽, 장이석 화백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들은 경주를 자주 방문했다고 한다. 경주 남산에서 마애불과 석탑들에 큰 감동을 받아 탁본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 박수근은 신라 토기나 석물조각들을 수집하여 작업실에 두고 만지고 살펴보면서 작품기법에 대해 연구했다. [...]


수채화에 대하여

박수근의 예술세계를 말할 때면 그의 독특하고도 매력적인 유화 때문에 크게 주목받지 못하고 있으나, 그의 수채화는 대단히 아름답고 조형적 밀도, 예술적 완성도가 높다. 


[...]

박수근 수채화 중 <고무신> <책가방> <과일쟁반> <복숭아> 등은 가히 명화라 할 아름답고 사랑스런 작품이다. 그 해맑고 따뜻한 색감에는 박수근과 그의 시대적 순정이 남김없이 어려 있다. 그것은 그가 유화로는 나타낼 수 없던 서정의 구가였다. 

소재의 선택도 그렇다. <고무신>은 분명 아내가 새로 사온 꽃신일 것이고 <책가방>은 여학교 다니는 딸의 가방일 것이다. 일종의 정물화인데 박수근이 다름 아닌 아내의 고무신과 딸아이의 책가방을 그렸다는 것은 유화에서 장터의 아내, 동생을 업고 있는 언니를 그린 것과 똑같은 마음인 것이다. 그런데 이런 것은 밝은 채색이 가능한 수채화로 그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박수근의 수채화는 그의 예술세계를 논할 때 유화와 동일한 지평에서 평가되는 것이 마땅하다. 


현대 문화사에서 갖는 위치

이제 마무리를 짓겠다. 해방 50년, 60년을 보내면서 여러 분야 전공자들이 어울러 각 분야의 성과를 교체 검토하는 학제간의 교류가 활발하였다. 그런 학술행사가 많아지면서 20세기 후반 한국문화를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 1950년대를 보내면서 그 시대 인간, 특히 서민 또는 민중이 갖고 있는 삶 의 정서를 박수근 화백만큼 절절한 감정으로 표현한 학자가 있습니까, 정치가가 있습니까, 사상가가 있습니까, 소설가가 있습니까? 

박수근은 그 시대 서민의 실상을 체득하면서 그 아픔에 동참했고 사랑으로 삭히면서 예술작품으로 승화시켰습니다. 혹자는 박수근의 작품 속에 나오는 서민은 정치의식의 결여로 각성되지 못한 민중 이라면서 그의 리얼리즘의 한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박수근의 한계가 아니라 그 시대의 한계 였습니다. 그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외면한 것을 화가로서 포착해낸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보건대 박수근은 그림을 통해 위대한 사상가 못지않은 인간정신의 고귀성을 표현했다. 뛰어난 지성이나 예리한 감성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갖고 면밀히 관찰하여 부동(不動)의 형태로 고정시킴으로써 성공했던 것이다. 그래서 당신이 아들에게 가르쳤다는 “더욱더 작아지게 하소서”라는 겸손의 미덕이 새삼 아름답게 다가온다.

이것이 내가 갖고 있는 박수근이라는 화가의 상이다. 











6. 참고 자료 2 (전시 도록에서 발췌)


우람한 손을 가진 나의 아버지

박성남 (서양화가)



아버지는 노래를 못하신다. 노래할 일이 생기면 아버지의 표정은 굳어진다. 어머니는 이런 표정을 재미있어 한다. 성화에 못 이겨 하모니카로 노래를 대신한다. 뻐꾹 왈츠서부터 신나게 서너 곡 불어 젖힌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음악 소녀가 된다. 정말 아버지의 뻐꾹 왈츠는 신나는 곡이었다. 그러다 보니 우리집은 엄마 닮으면 어여쁜 앵무새가 되고 아버지를 닮으면 총대 없는 뻐꾸기 병정이 되곤 한다.


놀이에 미친 나의 유년시절은 언제나 아버지의 걱정거리를 하나 더해 주었다. 그림에 열중하시는 아버지에겐 커다란 방해꾼이었고, 더더욱 어머니 심부름엔 철저한 방관자였다. 풀떡, 보리밥, 강냉이죽 주는 대로 뚝딱 해치우고 밖으로 줄행랑친다.

배추밭에 물을 주어야 했고, 자동차길 따라 작은 집에 가야했던 심부름도 놀이에 까맣게 저당잡힌 채 달이 뜰 때까지도 잊고 있었다. 그런 날이면 나의 종아리는 아버지의 큰 손에 쥐어진 붓대로 불이 나는 것이다. 


'창신동 집'은 아버지가 월남하신 후 미군 PX 초상화부에서 근무하신 소산으로 마련된 우리의 보금자리였다. 미닫이 문이 없는 마루를 중심으로 마주 보노라면 오른편에는 안방과 부엌, 왼편에는 내가 종아리를 맞을 때면 나의 역성을 들어 주시던 형권이 아주머니가 살던 건넌방이 있다. 그리고 화장실이 나란히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정남향의 ㄷ자 형의 한옥이었다. 

아버지의 화실인 마루는 동네 아주머니와 기름장사 아주머니 그리고 각종 행상인들이 잠시 걸터앉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거나 부채 할아버지의 장사길을 재촉하는 쉼터이기도 했고, 때때로 몇 사람의 외국인들이 서성이며 그림을 감상했던 화랑이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틈틈이 나의 개구장이 친구가 온통 소란을 피우거나 북적거리기도 하고, 한겨울 따뜻한 햇살 한구석에 땀과 먼지에 버무려 놓은 옷가지를 조용히 빨래하시는 어머니의 빨래터이기도 한 생활터였다.


이렇게 사노라면 으레 궁색한 우리집에 찾아주는 손님이 있었다. 아버지 그림에도 등용된 연미형의 꼬리를 가진 제비이다. 이들의 성화는 어찌나 극성인지 배설물을 안방이며 마루며 두루 다니며 그림에까지 발라 놓는 것이다. 얼핏 보아도 아버지 그림의 주조색과 너무 흡사하다. 제비들의 배설물을 닦아내는 곤욕이 우리 가족들의 심심찮은 소일거리가 되곤 했다. 

'얘야, 제비가 알을 많이 품으면 풍년이 된단다.' 


이렇게 말씀하신 아버지는 고향 금성(金城)에 두고 온 처마 밑의 제비둥지를 연상하시곤 한다. 그럴 때면 사선을 넘어 온 이야기들이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 줄줄이 엮어져 나온다. 주마등처럼 스치는 정경어린 신혼 시절의 그림, 불에 타 버린 그 숱한 스케치들을 생각하시면서 아버지는 다시 붓을 잡으신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의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나 할머니 그리고 어린아이들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이 말은 아버지의 담백하고 솔직한 예술관이다. 아버지는 당신의 그림으로 이 예술관을 실천해 보였다. 다시 우물물을 긷고 맷돌에 밀을 갈아 수제비를 끓여야 하는 소박한 생활과 더불어. 


철부지 시절, 놀이에 정신을 팔아 버린 나에겐 아버지의 그림이 마음에 들 리 없었다. 나뭇잎 하나 없는 나무도 그렇고, 때때로 눈, 코, 입이 생략되어 버린 인물화도 그렇다. 어쩌다 학교 선생님의 지시로 부탁해서 그려 주신, 노란 바탕의 간략한 선으로 그려진 삼일운동 포스터도 그랬었다. 어린 나에게 비친 아버지의 모습은 그림도 못 그리며 무위도식하는 사람으로 비쳤다. 일가친척 외에 대다수의 동네사람들도 인정하는, 무능력한 성남이 아버지였다. 어머님이나 아버지를 이해하는 주위의 소수를 제외하곤 아버지의 일이나 아버지의 정신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굶주림에 지친 어머니께서 콩자반 몇 알에 냉수만 들이키시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었다. 그러시던 어머니는 만삭이 되어서 막내 여동생 인애가 태어나는 순간에 이르셨다. 학교에서 막 돌아온 나는 방안을 응시하고 있었다. 얼마쯤 지나 봇물 터지듯 하는 애기울음 소리를 뒤로 하고 분주하게 시중 드시던 아버지가 비지땀에 젖은 흰 런닝셔츠 차림으로 성큼 나오신다. 생명을 받아내신 기쁨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굵은 땀방울 속에 맺혀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나를 의식한 아버지는 엉거주춤, 우람한 손을 부자연스럽게 쥐시곤 어쩔 줄 몰라 하셨다. 


날이 지남에 따라 우람하고 부자연스럽던 손이, 제방공장만큼이나 위력있게 보이던 손이 고단함을 껴안은 외로운 손으로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일생 개인전다운 전시 한 번 못 가져본 아버지, 외국에서 순회전시를 하려던 꿈도 물거품이 된 아버지의 작품전은 화우들의 뜨거운 정으로 유작전으로 마련되었다. 어려울 때면 주거니 받거니 했던 낱개의 화이트 컬러며, 소중한 책을 팔아 전차표며 쌀을 사 주던 우정이 어우러져 침묵의 고뇌와 손때가 묻은 그림에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모순이 모순이 되기까지 아내와 자식을 사랑한 평범한 인간이자 동시에 따뜻한 가슴을 시대에 열어보인 다수웁고 우람한 손길을 가진 나의 아버지, 소명대로 인내한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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