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우니까, 사람 그리워 사람만 그려’
-석남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사진촬영 장소는 아무래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좋겠지요?”. 이렇게 묻자 석남(石南) 이경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83)은 “내 손으로 테이프를 끊고 거기서 6년이나 관장으로 있었으니까 그것도 좋겠지만, 덕수궁 석조전 국립현대미술관 시절이 요즘은 더 그리워. 몸도 불편하구 하니 그리로 가지” 하며 덕수궁을 내세웠다.

이전관장과 덕수궁 석조전에서 만난 날은 마침 그의 선배이자 오랜 친구였던 고 운보 김기창 화백(1913~2001)의 회고전 첫날이었다. “운보랑 젊었을 땐 자주 어울려 다녔는데, 그 사람이 청주에 내려가면서부터 거의 만나지를 못했어. 있다가 그 사람 얼굴 대신 그림이나 다시 한번 볼까”.

덕수궁 국립현대 미술관 시절 최초의 전문직 관장으로 1982년부터 2년간 근무할 당시 이관장의 사무실은 국립현대미술관 분관 옆에 ㄱ자로 꺾어진 궁중유물전시관 2층 맨 끝방이었다고 했다. 이관장은 그 당시 매일 아침 거닐며 덕수궁 뜰을 내려다보던 2층 회랑에 올라가보고 싶어했다. 구한말 고종황제가 기대어 섰을지도 모르는 2층 회랑에는 소용돌이 장식의 이오니아 열주가 줄지어 서 있었다.

“미술평론가가 개인전 한다는 것이 재미있나? 나 이래봬도 열두번째 개인전을 연 중견이야”

22일부터 서울 가나인사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석남이 그린 사람들’ 전시회에서는 단순한 반구상 형태의 서있는 사람들과 단발의 여인 얼굴이 관람객을 맞을 것이다. ‘아름다움을 찾아서’라는 수필집과 ‘내가 그린 점 하늘 끝까지 갔을까’란 수화 김환기 작품해설집도 때맞춰 나올 예정이다.

갑자기 다시 매서워진 겨울바람은 2층 회랑 베란다에 추억을 배경으로 선 노인을 실내로 서둘러 들어가게 몰았다. 한일합방이 되던 해 준공된 석조전 복도 철제난간은 화려한 아르누보 풍이었다. 노인의 지난 50여년 세월처럼.

한국의 미를 ‘무기교의 기교’라 평한 미술평론가 고유섭(1905~1944)의 격려편지로 미술사학과 연이 닿았고, 해방되던 해 스물여섯 나이에 인천시립박물관장을 시작으로 한국 근·현대 미술과 인연을 맺은 노인은 이화여대 및 홍익대 교수와 미술대학 부장, 국전 자문위원(1961), 한국미술평론가협회장(1967), 두차례의 국립현대미술관장(1982~1983, 1986~1991), 제1회 광주비엔날레 심사위원장(1995), 지난해 올림픽 미술관장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화단의 큰어른이다. 그의 이야기 속에서 비디오 아트의 대가 백남준의 뉴욕 집은 ‘TV 수상기들이 발에 차이는 커다란 쓰레기통’으로 묘사되고, 화가 이중섭은 지나가던 사람에게 꾸벅 인사하다 뺨까지 맞는 ‘뼛속까지 겸손한 사람’, 김환기는 좋은 백자가 있다면 꼭 사고야 마는 ‘백자의 애인’으로 친근하게 다가온다. 그와 몇시간을 이야기하면 한국미술사 책 몇권을 정독한 것보다 더 많은 내용이 차곡차곡 머리에 남을 것이다.

“낮에 늘 바쁘게 지내다 밤에 집에 가면 그렇게 적적할 수가 없어. 그래서 한 20년 전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아주 재미있어. 오로지 사람만 그리는 건 사람이 그립기 때문이지. 8년 전 아내가 먼저 떠나고 외동딸도 미국으로 이민간 뒤부터는 완전히 혼자니까 더 그래”

노인은 자신이 고독병 중증환자라고 했다. 몇년 전부터는 밤에 혈압이 오르면 혼자 택시를 타고 성모병원 응급실에 가서 진찰을 받고 의사가 “이상 없으니 돌아가시라”고 해도 꾸역꾸역 우겨 하룻밤을 그곳에서 지내고 온다. 아기 우는 소리, 왔다갔다 분주한 사람들 소리가 시끄럽기는커녕 자장가마냥 좋은 음악소리로 들려 숙면을 취한다고 했다. 집에서는 채 두시간도 못돼 깨는 선잠을 자는데도.

“그나마 지난해 세번 사고를 당하고서는 혼자서 택시 타고 병원 가는 것도 힘들어. 교통사고 당해서 입원했지, 전화받으러 가다가 미끄러져 갈비뼈 부러졌지, 전립선 막혀서 수술도 받았지. 내가 양띠인데, 양띠가 삼재라더군.” 노인은 남의 이야기하듯 가볍게 자신의 신상에 관해 이야기했다. 결코 심각해 하거나 슬퍼하지는 않았다.

“미술평론가의 철칙은 절대 유명 작가들의 작품을 소장하지 않는 거야. 그러면 그때부터 심미안이 흐려지고 장사꾼 심보가 되는 거지”. 그래서 노인의 집에는 자신의 작품과 화구만이 있을 뿐이다. 재산이라야 20평형 사글세 아파트가 전부다. 다른 이들은 그의 노후를 걱정했지만 오히려 이관장에게는 그런게 홀가분하고 자랑스러운 구석이었다. 그러나 미국 사는 딸이 “그만 미국으로 들어오시라”고 하는 요즘은 좀 고민스러운 것 같았다. 작년으로 월급쟁이 생활을 정리하고 나니, 딸 가족과 함께 살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물고기가 물을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지난해 8월 청주 공예비엔날레에 다녀오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소식을 듣고 당장 달려온 미술계 지인들만 20명이었다. 출석부 삼아 입원실 달력에 쓴 방문객 이름이 100명은 되었을 거라고 그는 ‘팬클럽’을 자랑했다.

“그래서 괜찮은 양로원에 들어갈까 해. 알아보니 꽤 비싸데. 이럴 줄 알았으면 돈 좀 모으는 건데”

그러면서 요즘은 시간이 많이 나서 그런지 추억이 가끔 떠오른다고 했다. 한창 바쁘고 명예로웠던 시절보다는 아주 어렸을 적 어머니가 설빔해주시던 일, 동경서 아버지 몰래 법률공부 대신 미술사를 공부하며 화집을 챙겨보던 일, 청년시절 인사동에서 화가들과 몰려다니며 예술을 이야기하던 일이 생각난다는 것이다. 인간은 기억의 심연으로부터 진정으로 가장 좋았던 순간을 ‘추억’이란 부표를 달아 떠올리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와 명예’는 추억의 영역에서는 한참 낮은 등급이 아닐까.

“그래도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은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야. 내 나이 여든셋이고 몸도 성치 않지만, 언제나 내일을 생각하지. ‘내일’은 언제나 한개씩 배달되는 선물꾸러미처럼 내 앞에 와 있고 난 그걸 어린아이처럼 기대에 차서 풀어봐. 물론 내게 남겨진 선물꾸러미가 많지는 않겠지. 하지만 마지막 날까지 그러고 싶어. 그림을 그릴 땐 정말 즐겁거든.” 그는 너무 오래 말을 해서 힘들긴 하지만 운보를 만나고 가겠다고 했다. 친구와 오랜만의 만남에 다소 들뜬 표정인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몇걸음 뒤떨어져 걸으면서 문득 조각가 자코메티의 말을 떠올렸다. ‘내 동료들은 늙은이들이지만 나는 젊어요. 그 친구들은 과거를 받아들인 거지요. 그래서 그들의 삶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하지만 내 삶은 미래를 향해 있어요. 바로 지금 난 나만의 작품을 시작할 가능성을 보고 있거든요. 사람에겐 정말로 시작하기만 한다면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시작만 제대로 된다면 끝은 그 안에 들어있는 법이니까요’.

-[취재수첩]‘일요가족’이 돼주는 김달진소장 가족-

이관장은 일요일 밤만큼은 외롭지 않다. 김달진 미술연구소 소장(47)이 부인과 아들 딸을 데리고 매주 일요일마다 그의 아파트를 찾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할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어깨를 주무르고, 김소장 부인은 이관장의 입맛에 맞는 저녁거리를 준비해서 맛있는 식탁을 차린다. 이때만큼은 미국에 있는 손녀와 딸을 잠깐 잊는다. 이관장은 “우리는 일요가족이야” 하며 김소장의 손을 잡고 웃었다.

“30년 전 내가 홍대 박물관장을 맡고 있던 시절에 내 사무실에 찾아와 ‘김달진입니다’ 하고 큰절을 하던 까까머리 고등학생과 이렇게 오래도록 소중한 인연을 맺을 줄은 몰랐지”. 김소장이 온갖 잡지에서 오려붙인 커다란 미술관련 스크랩북 몇권을 들이밀던 것을 이관장은 어제일처럼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 10년 후, 이관장이 국립현대미술관장 시절에 다시 찾아온 그를 특채했고, 김달진 소장은 지금 우리나라 최고의 미술자료 전문가로 우뚝 섰다. 이관장은 미술가나 작품에 관해 모르는 것을 물으면 100% 확실한 답이 오는 사람이 바로 김달진이라며 “내가 수양아들 하나는 잘뒀다”고 자랑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이것뿐이어서 안타깝죠, 뭐”. 김소장은 얼마 전 그가 독립해 발간하기 시작한 서울아트가이드에 이관장이 매주 글을 실어준다면서 오히려 고마워했다. 그러나 이관장은 “달진이가 자기 집도 없이 전세 살면서도 저번에 퇴직금 받았다면서 뭉텅이 돈을 내놓는데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면서 미안해 했다. “더 못해 드리니 제가 더 죄송하다”고 몸둘 바를 몰라 한 김소장은 이번 설에 이관장의 일본 출장만 아니었으면, 떡국도 해드리고 세배도 올렸을 거라며 아쉬워했다. ‘일요가족 부자’의 정겨운 말씨름은 제3자가 보기에는 비긴 것 같았다.

경향신문 2002년 2월 18일 / 이무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