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老境)의 아름다움
이경성(미술평론가, 전 국립현대미술관장)

나의 인생도 어느덧 팔십 고개를 훨씬 넘어서 노경의 끝자락에서 허덕거리는 지금, 인생에 대한 여러 가지 일들이 두서없이 생각난다. 노경에는 낭만적인 아름다움이 있을 줄로만 알았던 젊은 날의 생각과는 달리 늙은 인생에는 아름다움보다도 괴로움이 더 많다는 것을 요즈음 실감하고 있다.
며칠전 신문에는 평소 다정했던 동갑인 음악가 전봉초선생이 돌아 가셨는데 그보다 앞서 3월에 평생을 존경과 우정속에서 살아온 미학자 조요한 선생도 노환으로 떠났다. 그 전 같으면 무심코 넘겨들었을 '노환'이라는 말이 지금의 나로서는 예사롭게 넘겨지지가 않는다. 남이 보기에는 아직도 혈기 왕성한 노인이지만 실상은 하루하루를 버겁게 버티며 살고 있는 것이다. 저녁을 먹고 나니 별안간 소화가 안 되어서 소화제를 먹고 배를 따뜻하게 해서 억지로 달래는 일이라던가 별안간 혈압이 높아져서 혈압계를 꺼내어 재어보니 160까지 올라가서 부랴부랴 혈압 약을 먹어서 가라앉히는 등, 밤새 병고와 싸워서 억지로 그 밤을 지새는 것이다. 내 딴에는 밤새 죽을 힘을 다하여 투병하여 아침에 일어나 방밖으로 나오면 만나는 사람은 '좋은 아침'이라던가 '안녕히 주무셨느냐'고 인사를 한다. 야속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안녕하지 않았소'라고 죄없는 이에게 분풀이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닌가.
이렇듯 편안해 보이는 노인의 일상이 사실상 끝없는 괴로움이라는 것을 젊은 사람들은 결코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노환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화가 난다. 노환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들은 누구나 그가 늙어서 천명을 다해서 편안히 갔다고만 생각하므로 사실상 그 늙은이가 밤새 겪었던 신체적 정신적 고통은 누구에게 호소하면 좋으냔 말이다. 차라리 무슨 숙환에 걸려 죽었다고 사인을 밝히는 경우 그 지병과 투쟁한 몇 년간의 싸움의 흔적 때문에 오히려 동정을 받지만 남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노환이라는 병 때문에 밤마다 싸우고 있는 노인들의 고통은 무엇으로 설명하면 좋을지 모른다.

나는 평상시 곱게 늙어서 편안히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그것이 어찌 내 뜻대로 되겠는가. 주변의 많은 친한 사람들이 암과 싸우다 고통스럽게 죽어간 것을 보아온 나는 죽을 때에 이르면 오랜 고통의 시간을 견뎌야 하는 암 보다는 차라리 심장마비 같은 즉결적인 방법을 주십사 하고 하느님께 기도한다. 그 기도 때문인지 나는 고혈압과 부정맥 때문에 한 달에 몇 번씩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야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또 하나 노환보다도 요즘 나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고독이라는 병이다. 이 고독이라는 병은 비단 늙은이들에게만 오는 병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찾아드는 일종의 정신적인 병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응에 따라서 그것은 위대한 예술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생명을 짓누르는 충격이 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고독은 대응하는 사람의 태도에 따라서 그것은 이롭기도 하고 해롭기도 한 것이다. 요즈음 나를 찾아오는 고독은 가족이 멀리 떠났다는 데에도 원인이 있지만 주변에 늘 같이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데서 오는 공허감이라 할 수 있다. 예전에 읽은 이 광수의 '돌베게'라는 수필집에 '옥단 할머니'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노인네들이 모여 사는 양로원에서 그들이 서로 싸우고 좋아하는 광경을 대상으로 쓴 글인데, 노경의 고독에 앓고 있는 노인들이 함께 어우러져 서로를 미워하며 살아가는 방법으로 생명을 이어간다는 것이 매우 공감이 간다. 혼자서 짓눌리는 침묵의 고독을 견디기보다는 차라리 옆에 있는 사람과 악을 쓰고 욕을 하고 싸우며 미워하는 것이 정신건강에는 더 이롭다는 이야기이다. 아폴로라는 서양미술사를 쓴 라이낙은 그의 책! 첫머리에 예술은 고독의 소산이라고 했는데 나도 외로울 때는 그림을 그리지만 고독의 정도가 워낙 짙을 때는 그림 그리는 것도 위로가 되지를 못한다. 그럴 때는 공허한 감정을 기도로 달래보고자 묵주알을 수없이 굴리지만 그것도 또한 별 효력이 없을 때가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있었던 이야기이다. 인천 창영동에 이모라는 친구가 살고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의 직업은 거관, 지금의 부동산 중개업자였다. 워낙 성격이 괄괄하고 활달하였던 그의 아버지는 인천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집 매매를 알선하여 꽤 잘 사는 생활을 유지하였다. 아직도 만날 때마다 잘 있었느냐고 큰 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네던 그의 모습이 기억난다. 이러한 사람이 늙어서 돌이킬 수 없는 무거운 병에 걸려서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다. 의사도 손을 놓고 그의 일가친척이 다 모여서 임종만을 기다리는 신세였다. 그러한 긴장된 나날이 며칠 흐른 어느 날 밤, 침대에 누워있던 그가 자기 주변에 모인 아들들과 많은 일가친척들 앞에서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더니 '이 놈들아! 나 하나 못 살려?' 하더니만 그대로 쓰러져서 세상을 떴다는 것이다. 당시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이 일을 그의 생전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는 재미난 일화로만 생각하였었다. 그러나 이제 나이가 들어 나 자신이 노환에 시달리는 처지가 되고 보니 아무도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자신의 고통을 몰라주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니 오죽 답답하고 억울하였을까 싶어 그 ! 영감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다.

최근에 가까운 친구들이 노경의 나에게 용기를 주기위해서 평소에 사람들을 주제로 그린 그림들을 모아서 "석남이 그린 사람들" 이란 전시회를 지난 2월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개인전을 열어준 바 있다. 모란미술관 이연수관장이 주동이 되고 미학자 조요한, 시인 김남조, 신부 조광호, 조각가 이춘만 씨가 행사를 주관하고 가나화랑에서 전시장소를 제공해주었다. 개인전과 더불어 화집까지 내고 출판기념회를 겸했었다. 이 일이 신문기자들의 도움으로 필요 이상으로 홍보가 되어서 그동안 못 만났던 친구, 제자들까지도 전시회장에 찾아와 주었다. 또 소문이 이상하게 나서 가족들이 미국으로 이민가서 혼자있기 때문에 평소 청빈을 자랑으로 삼던 내가 경제적으로 어렵다는 말도 섞여서 그림도 꽤 많이 사주었다. 그래서 잊었던 친구도 만나고 없었던 돈도 생기게 되었다. 내친 걸음에 친구들의 도움으로 한국병원 노인병센터 원장에게 방을 얻어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입주시켜 주었다. 그동안 살아온 여의도 아파트를 정리하였다. 이 병원 생활이 신문에 보도되어 김성진이라는 30년전 인천서 헤어진 친구가 찾아오고 많은 사람들이 내방해 왔다. 이! 런 일로 나의 고독은 영광으로 전환되었다. 그림 그리는 일을 소일로 삼는 나에게 원장은 옆에 병실까지 내주었다. 그러고 보니 나의 노경은 행복으로 직결되었다. 이 행복이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지만 나를 높은데서 배려해준 하나님과 주변에서 도와준 모든 사람에게 감사함을 전한다.

내 병실 복도에 걸려있는 나의 작품과 더불어 검여 유희강의 수제자인 원중식이 써준 서예 "老境" 이란 글씨가 나를 맞이 해주고 있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노경의 아름다움과 슬픔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월간 에세이 2002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