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
필자가 전시회를 주기적으로 보러 다니기 시작할 무렵인 90년대 초반만 해도 겨울철에는 전시회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11월, 12월경이 되면 전시회가 많아진다. 특히 그 즈음에 도착하는 엽서나 팜플렛, 전시 안내 메일이나 문자 메시지 등에는 각급 문예기금의 지원을 받는 전시가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문화예술위원회나 경기문화재단 지원사업의 모니터링에 종종 참여하면서, 연말 전시회 폭주의 압박으로부터 필자도 자유롭지 못하게 된지 수년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우리의 전시문화에서 문예기금 지원 사업의 비중이 커지고 있고 경쟁도 치열하며, 기금을 받는 전시의 질도 대체로 높아졌다.
작가 개인에게 문예기금은 경제적인 도움을 떠나서, 받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공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며 주목 대상이 되고, 외롭게 진행해 온 작업에 탄력을 부여해주는 동기가 된다. 현장 평론을 중시하는 필자에게도 모니터링은 평론활동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았으며, 모니터링 결과물도 서류상의 단계에 머무르지 않고 미술포탈 싸이트에 공개하고 있다. 기금지원을 받는 중요한 전시회가 연말에 몰리지 않고, 1년에 걸쳐 두루 분포되어 있다면, 전시를 하는 입장이나 평론을 하는 입장이나 더 여유 있게 임할 수 있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해당 연도 내에 사업을 수행해야 한다는 이유로 더 잘할 수 있는 전시를 엉성하게 마무한다든가, 마찬가지로 촉박한 마감 시간에 쫒기는 비평의 대상이 된다면 양자 간에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 작가나 평론가 등 미술관계자가 아니더라도, 일반 관객 역시 연말이라면 무척 바쁘지 않겠는가. 미술에 대한 대중의 무관심과 현대 사회의 일반적인 생산 및 소비 주기를 생각할 때, 연말에 전시를 잡는 것은 전시회가 본래 의도로 하는 직접 접촉의 우선순위에서 밀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연말 전시의 폭주는 기금의 신청기간과 사업이 완료되어야 하는 시기와 밀접하다고 생각된다. 연중에도 지원 사업 신청이 종종 있지만, 대개 연말에 각급 문예기금의 신청이 시작되고, 심의 결과에 따라 전시 일정이 잡히는 것이다. 공적 기금을 받는 것은 누구나 부러워할만한 혜택일 수 있지만, 어차피 작가가 원하는 만큼의 전시를 진행하는데 충분한 돈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지원하는 입장에서도 해당 사업을 꾸리는데 기금이 100% 커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기금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업에 대한 작가의 무조건적인 헌신은 필수적이다. 받은 만큼만 하겠다는 계산은 통하지 않는다.
단기적 성과 대신 역량이 충분히 준비된 전시가 필요
지원 결정이 되든 안 되든, 이미 전시개념이나 시기, 장소 등이 잡혀있어야 하고, 어느 정도는 작업이 진행된 상태에서 구체적인 전시기회의 모색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금 지원 결정이 나야, 비로소 전시회 준비에 나서는 1년 주기의 단기적 계획에 매몰되어 있는 현재의 전시문화는 바람직하지 않다. 모르긴 몰라도, 탈락하면 손 놓고 있다가 연도만 고쳐서 다시 서류를 내는 경우도 적지 않을 것이다. 또한 성격이 다른 지원기관에 비슷한 서류를 무차별적으로 넣고서, 되면 하고 안 되면 말자는 식도 작가라는 존재가 취해야 할 태도로서는 기회주의적으로 보인다. 물론 어떻게든 기회든 잡아서 자신의 작품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의지를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관객으로서는 어떤 작가가 1년에 한번 씩 꼭꼭 전시회를 열어주기를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러한 단기적 성과 대신에 그의 역량이 충분히 발휘된 준비된 전시와 새로운 작품이 보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시문화는 1년 단위로 사업이 진행되고 평가까지 마무리해야하는 관료주의적 편의성에 미술인들이 점차 순응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1년 단위의 주기는 조직이나 체계를 매개로 생산하는 삶에 전형적이다.
이러한 삶의 주기는 봉급생활자의 직업에서 일반적이며, 작가의 생산적 삶의 주기와 동일시 될 수 없다. 그러나 관료주의로 대변되는 사회적 권력의 집중은 모두에게 동일한 시간을 요구한다. ‘보여주기’용 전시는 『스펙터클의 사회』의 저자 기 드보르가 말하듯이, ‘세계 전체에 걸쳐 동일한 날로 나타나는 것’, 즉 ‘균등한 추상적 파편들로 잘게 잘려진 경제적 생산의 시간’에 지배된다. 등가적 간격이 무한히 축적되는 상품 생산의 시간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교환 체계를 특징짓는다. 시간처럼 무형의 것도 코드화시키려는 지배적 질서는 자본순환의 법칙들이 예술에서도 똑같이 관철되기를 바란다. 지배질서와의 동화작용을 뜻하는 관료화와 제도화가 예술계에도 깊이 스며들고 있다. 관료주의적 규칙과 절차들이 도구적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예술가 개인을 압도하며, 웬만큼 규모를 갖춘 미술단체들이 조직과 전략은 철저히 관련 기관과의 소통에만 초점이 맞추어진다. 예술품은 개인의 작업실에 생산되는 것이지만, 인간을 노동과 생산의 도구로 환원시키는 일반적인 교환체계로부터 벗어나 있다. 동질성을 벗어나는 이러한 이질성에 예술의 취약함과 위대함이 있다. 현대의 생산중심주의를 내면화하여 무조건 열심히 하기보다는, 예술의 위대함 쪽이 선택되기를 바란다.
- 이선영(1965- ) 석남 젊은미술이론가상(2006) 수상. 월간 미술세계 기자, 계간 미술평단 편집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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