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한국 작가들의 해외 비엔날레 활동》학술 심포지엄
과천의 산자락이 초겨울의 분위기를 맘껏 자아내던 12월 4일(목)에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 작가들의 해외 비엔날레활동 : 1960년대 이후 파리·상파울루비엔날레를 중심으로’라는 주제의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번 심포지엄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난 2013년 10월에 개소한 미술연구센터의 1년의 성과를 기념하는 뜻에서, 이 센터의 자료수집과 연구피드백활동 중 하나로 마련된 것이다. 미술연구센터는 각각 1,000개가 넘는 자료 컬렉션으로 정기용, 최열, 김복기, 박현기, 이타미 준, 권진규, 유강렬, 박이소, 김종성, 강국진 씨의 소장자료였던 10개의 주요 컬렉션을 구비하고 있다. 여기에 김달진미술연구소에서 기증한 자료가 더해져서 여러 연구자가 이 분야의 학문적 성과를 낼 수 있는 아카이브를 구축하게 되었다. 이러한 원본자료들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열람서비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미술연구센터 측에서 먼저 자료 수집을 고려한 시기는 근대였으나 이 시기의 자료들은 알다시피 산실된 경우가 많아 체계적인 컬렉션 구축이 어렵다는 판단이 되었다. 이에 우선으로 체계성을 갖출 수 있는 60, 70년대의 자료를 수집하고, 이 자료들을 토대로 전시, 교육, 연구 등의 성과를 먼저 알리고자 한다. 이번 심포지엄은 그 첫 시도로서 60년대 이후 파리비엔날레와 상파울루비엔날레에 참가했던 한국 작가들의 해외 비엔날레 활동을 조명해보고자 하였다.
심포지엄 현장
박지혜(국립현대미술관 아키비스트)씨는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비엔날레 자료 소개’에서 1951년 1회를 시작으로 1985년까지 지속하였던 파리비엔날레와 1951년에 시작하여 2014년 31회를 맞는 상파울루비엔날레의 기록 중에 한국 작가들이 참여했던 상황을 연도별로 살펴보았다. 이 발표는 당시 국제무대의 경험이 전무했던 우리나라 작가들에게 이 두 비엔날레가 세계 미술 체험의 장이 되었으며, 우리나라 작가들의 앵포르멜 위주의 참여 작품들과 더불어 세계 미술의 경황들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도록 정리하였다.
안휘경(Coutauld Institute of Art 박사과정)씨는 ‘파리비엔날레 아카이브와 칸딘스키도서관 자료를 통해 보는 파리비엔날레 한국전(1961-1975)’이라는 주제로 2차 세계대전 이후 글로벌 무대로 다시 정립되기 시작하는 파리라는 장소에서 한국의 작가들이 체험하게 되는 글로벌 맥락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체험을 통해 이후 한국 현대미술사의 중추가 된 비엔날레 참여 작가들의 작업 성향 즉, 추상미술이나 실험미술이 어떻게 재정립되는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정무정(덕성여대 교수)씨는 ‘파리비엔날레와 한국 현대미술’에서 당시 앵포르멜 일색이었던 우리나라 미술계에 파리비엔날레는 이미 1회인 59회부터 팝아트와 옵아트적 성향을 선보임으로서 이후 파리비엔날레에 참여했던 박서보, 김영주, 하종현, 서승원, 이승조 등의 작가들에게 새로운 작업의 실마리를 제공하였음을 밝혔다. 당시 박서보는 비엔날레 참여를 통해 신구상, 누보레알리즘같은 현대 미술의 경향을 인식하고 있었고, 참여 작가의 대다수는 기하학 추상의 경향을 감지하였다. 우리나라 현대 미술은 앵포르멜 이후 결과적으로 미니멀, 단색화 회화로 이어졌지만, 파리비엔날레는 하나의 스타일 이후 작업의 방향을 모색하는 시기에 만나게 된 다양한 경험의 총체가 되었다.
김병기(작가, 전 파리비엔날레,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씨는 ‘파리비엔날레, 상파울루비엔날레 참여기’를 통해 100세를 바라보는 김병기 작가(1916- )의 49년 전의 회고담을 들려주었다.작가는 1961년 제2회 파리비엔날레 대표작가 선정위원이었고,1965년 제8회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 및 국제전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상파울루의 경험으로 65년 록펠러재단의 그랜트(Grant:보조금)를 받고 뉴욕주 사라토가에 정착한 후 지금까지 미국에서 작업에 매진해 왔다. 김병기 작가는 63년 상파울루비엔날레 커미셔너였던 김환기와의 교류와 뉴욕시절의 김환기 작업실의 방문, 그리고 제8회 상파울루비엔날레에서 알베르토 부리와 빅토르 바자렐리가 공동 수상하게 된 심사 배경을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당시 비엔날레는 지금과 달라 스포츠와 같은 경쟁 구도가 아니며 각 나라의 의견을 교환하는 장이었지만, 그런 경험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갖고 우리식의 미술을 확립하는 것 을 평생 모토로 삼았음을 이야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