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열
한강물 흘러 흘러 그치지 않고 洌水流不息
삼각산 높고 높아 끝이 없건만 三角高無極
강과 산은 그래도 바뀌기라도 하는데 河山有遷變
무리지어 못된 짓은 끝날 날이 없구나 朋淫破無日
- 정약용, <옛 뜻[古意]>,『 다산시문선(茶山詩文選)』
금호완춘(琴湖翫春), 종이, 36.6×53.7㎝, 개인소장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 -1856)가 1832년 5월 중순 ‘조태(曺台)라는 사람의 집 금호(琴湖)로 이사하여 눈코 뜰 새 없는 형편이다’라고 했다. 이 이야기는 김정희가 쓴 <눌인 조광진께 올립니다[與訥人曺匡振] 일곱 번째[其七]>라는 편지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그리고 1840년 7월에도 김정희는 ‘직첩(職帖)을 회수당할 지경에 이르러서 금호(黔湖)로 물러 나왔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김정희의 제자 허련(許鍊, 1809-92)의 『소치실록(小癡實錄)』에 나오는 내용이다. 여기서 말하는 ‘黔湖’와 ‘琴’는 같은 곳이다. 왜냐하면, 黔湖나 琴湖가 모두 우리말로 ‘검은 못’인데 黔湖는 검다는 소리를, 琴湖는 거문고라는 말의 소리를 새겨서 한자로 옮긴 낱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곳 금호(琴湖) 다시 말해 ‘검은 못’이 어딘가 하는 것이다. 당연히 지금 성동구 금호동 일대를 떠 올리고 있지만, 정작 이곳 성동구 ‘금호동(金湖洞)’은 검은 못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름이다. 여기는 『한국지명총람』에 ‘무수막’이라 부르던 곳으로 한자로는 ‘수철리(水鐵里)’라 불렀던 땅이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금호동(金湖洞)’이란 이름은 1936년 조선총독부가 엉뚱하게도 금호정(金湖町)이란 이름을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1946년에 왜식이름 변경 때, 금호동이라고 슬쩍 바꾼 것이다. 조선시대 내내 사용해 오던 ‘무수막’ 또는 ‘수철리’라는 이름을 생각하고 또 그곳에 연못이 있을 턱이 없는 지형이라는 사실을 생각했다면 ‘금호’라는 말은 생각할 까닭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 김정희의 금호는 지금 지하철 금호역이 있는 금호인 것처럼 당연하다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초원(蕉園) 김석신(金碩臣,1758-1816 이후)이 그린 <금호완춘(琴湖翫春)>이다. 금호에서 봄을 즐기는 선비들의 아회(雅會)를 그린 것으로 특히 이 그림에는 개석정(介石亭), 수각(水閣), 추수루(秋水樓)라는 누각의 이름까지 써 두었다. 그러므로 금호라는 곳이 어딘지 실마리라도 있지 않을까 싶다. 개석정이며 추수루라는 이름이 어딘가에 남아있지 않을까 해서 옛 문헌들을 뒤적거려 보았어도 끝내 못 찾고 말았다.
도봉첩(道峯帖)의 <도봉도>로 유명한 화가 김석신은 일련의 실경을 그렸는데 압구정(狎鷗亭)을 그린 <압구청상(狎鷗淸賞)>이며 지금은 사라진 저자도(楮子島)를 그린 <가고중류(笳鼓中流)> 그리고 용산에 있던 담담정(澹澹亭)을 그린 <담담장락(澹澹張樂)>처럼 일련의 실경을 보면 한강 일대의 명승지를 즐겨 그리고 있었으므로 이 <금호완춘>도 한강변 어느 곳인가를 그린게 아닌가 싶은데 모를 일이다.
김정희의 아버지 김노경이 탄핵을 당해 1830년 10월 전라도의 고금도까지 유배를 떠남에 아들인 김정희 또한 월성위궁을 나와 용산이며 금호를 전전해야 했다. 금호에서 는 1832년 5월부터 1835년 6월 무렵까지 3년이나 살았는데 그러므로 김정희에게 용산과 더불어 이곳 금호는 슬픔이 배어있는 땅이고 그러므로 김정희를 알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저 금호가 어디인가 하는 것은 당연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하지만 답답하다고 해서 그저 지금의 금호동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
물론, 내가 모르는 어떤 증거가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어서 이같은 실증작업을 할 때마다 아득한 마음이 들곤 하는데 어느 한쪽으로는 나만 모르는 일이길 바라는 마음이 들기도 한다.
저 김노경보다 꼬박 30년 전인 1801년 아득한 남도 전남 강진땅으로 유배를 떠났던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선생께서는 그 시절을 쥐락펴락하는 권력자를 가리켜 그의 시편<옛 뜻[古意]>에서 “한 사람이 간악한 물여우가 되면, 이 주둥이 저 주둥이 전하여지고, 교활한 자 이미 다 득세해버리니, 정직한자 발붙일 곳 그 어디일까”라고 탄식했다. 한강을 건너던 정약용의 눈에 “간악한 물여우[射工]”가 보였던 모양이다.
그가 살던 시대만이 그런 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16년에도 저 간악한 물여우가 판을 치고 있으니 어딘지 조차 모르는 금호 땅을 상상하며 그곳에서 고통의 시절을 견뎠을 김정희의 마음을 정약용의 노래에 부쳐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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